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민족을 먹는 하마' 중화의 그늘
여러분,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다음의 그림에서 나타난 숫자는 무엇일까요 ?
아래의 그림은 올해 봄에 ‘히스토리 채널’에 방영된 것을 제가 다시 깨끗하게 그린 그림입니다[『빼앗긴 영토 사라진 역사, 영원의 땅 티베트』(히스토리채널 2005. 3. 6)] 그런데 그림에 나타난 숫자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과 친한 나라의 순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멀리 싱가포르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무슨 해상 교역로와 관련된 그림 같기도 합니다. 중국 주변의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경제협력지구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경제 수준으로 우리와 경제협력 지구를 만든다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얼까요? 놀라지 마세요. 정답은 1950년대 중국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지도로 중국이 앞으로 회복해야 할 영토라고 합니다. 숫자는 복속시키는 순서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중국은 한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영토 전부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데도 한국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상하게 일본(日本)은 빠져있군요. 중국은 아마 일본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일본도 중국에 열심히 조공(朝貢)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에 포함됩니까?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군요. 과거 역사의 관성이 붙어서일까요? 1974년은 공산당의 중국이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날이었습니다. 1974년 유엔 특별회의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중국이 어느 날 빛을 바꾸어서 초강대국으로 변화하고 세계의 패권국가로 자처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 인민들은 마땅히 중국에 사회제국주의(社會帝國主義)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하여야 한다.” 그 후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과 수교했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중국 지도자였습니다. 이 같은 중국의 건강성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단순히 오늘의 중국 지도자들이 대장정(大長征)의 어려움을 겪지 못했고 경망스러워서일까요? (1) 검은색과 흰색 제가 쥬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니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돼. 옛날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무엇이 달라? 다 몽골로이드(황인종)이지.”라고 합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게 치자면 유태인이나 아랍인은 또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좀 이상합니다. 세기의 과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나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천재 영화감독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펄쩍 뛸 소리죠. 스필버그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김 선생, 당신 말조심해. 그 악질적인 테러리스트 아랍인들과 우리 유태인이 같다니 그게 말이나 돼? 우리는 신(神)이 선택한 민족이야. 이거 왜 이래.” 아이고 제가 말을 잘못했나 봅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고 뒤죽박죽입니다. 그렇지요. 다르지요 유태인들과 아랍인은 분명히 다릅니다. 유태인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격은 유태의 율법(律法)을 지키는 사람이라야만 하는데 이 율법이란 게 너무 유태의 고유 풍습에서 나온 율법들이라 저 같은 사람은 지키기가 좀 곤란합니다. 바로 이웃에 사는 아랍인들도 지키기 어려우니 저는 오죽 하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저는 유태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는 틀렸습니다. 그나저나 중국에 대한 이야기나 다시 합시다. 먼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중국인들, 즉 한족들이 언제부터 자기들은 한족(漢族)이라는 의식을 가졌을까요? 이 의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면 구체적인 의미에서 민족 개념이 있을 리가 없죠. 또 낙양(洛陽) 사람과 북경(北京) 사람들이 뭐 그리 다르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세상이 온통 백지(白紙)라면 무슨 구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검은 점을 찍으면서 세상은 검은 색과 흰색으로 나눠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검은 점이 점점 뚜렷해지고 커질수록 흑백의 구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2) 화하(華夏)의 시작 중국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중국 민족을 스스로 ‘화(華)’, ‘하(夏)’ 또는 ‘제하(諸夏)’라고 합니다. 쥬신족들이 스스로를 부를 때 ‘제신(諸申)’이라고 한 것과 대조됩니다[‘제하(諸夏)’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제신(諸申)’이라는 말을 아는 한국인은 드뭅니다. 각성합시다]. 그러나 이 ‘화(華)’, 또는 ‘하(夏)’라는 종족은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인지를 지금까지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화(華)’는 화산(華山)의 이름에서 나왔고 ‘하(夏)’는 하수(夏水)에서 나왔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화(華)’라는 말은 ‘과(夸)’라는 음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산동(山東) 지방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인 ‘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도 합니다(章太炎 『태염문록(太炎文錄)』). 그런데 이 ‘과(夸)’라는 말은 ‘자랑하다(take pride in)’는 의미가 있으므로‘자랑스런 사람(respectable man)’, 또는 ‘자랑할 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과(夸)’의 현대 발음은 [ku]로 납니다. 이 발음을 한번 계속해 보시면 ‘화(華 : [hu])’에 가까운 발음도 납니다. 만약 중국인이 산동인(山東人)을 지칭한다면, 그것은 중국인들이 인디아 - 동남아 등을 거쳐 산동반도에까지 이른 남몽골인임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중국의 중심지는 산동이 아니라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 현재의 시안)을 포함한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후베이성(湖北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를 지켜봐야할 것 같군요. 그런데 중국인들이 오늘날과 같은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일까요? 일단 그 말로 보더라도 한(漢) 나라인 듯한데요. 그렇습니다. 한(漢)나라 때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지니까요. 아니 한나라 때 통일을 하다니 그러면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는 어떻게 되죠. 그러면 이 점을 좀 더 분석해봅시다.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실체가 형성되는 기점은 일단 진(秦)나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춘추전국 시대를 통해 전국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었고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어 중국민족의 1차 통합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중국인이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진(秦)나라 때 이후 축조하기 시작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인과 주변 민족들 간의 경계가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통합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진나라는 중국인들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했으며 태생적으로 북방의 유목민에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한족들은 진나라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로 보지 않는 겁니다. 중국 민족의 2차 통합은 한(漢)나라 때 이루어집니다. 한나라에 의한 천하 통일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보면 중국민족의 진정한 통합은 이 한나라 때부터라고 보면 됩니다. 진나라는 엄격한 법 집행으로 사람들의 원성(怨聲)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소요가 있었고 결국 유방(劉邦)에 의해서 진 왕조는 끝이 나게 됩니다. 당시 진(秦)나라의 수도를 점령한 유방이 “여러분들은 가혹한 진나라의 법률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하였습니다. 이제 진나라의 법은 없습니다. 법은 단 3조 정도면 족합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것만 벌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법삼장(法三章)입니다.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후일 명나라의 태조인 주원장(朱元璋),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자인 모택동(毛澤東)과 더불어 한족 부흥(漢族復興)의 대표적인 영웅이 됩니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한족에 의해 통일되고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로서 무려 4백여년 동안 통일과 안정을 이룩하고 찬란한 중국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한나라는 그 이전까지 지역별로 다양하게 발전해온 문화를 융합하여 중국 고전문화(古典文化)를 완성한 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인들은 한나라가 ‘중화(中華)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중국인들을 ‘한족(漢族)’, 또는 ‘한인(漢人)’이라고 하거나 중국어를 ‘한어(漢語)’, 중국문자를 ‘한문(漢文)’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나라가 이후 전체 중국사에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한나라도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전한(前漢) - 후한(後漢)이 서로 다른 창업자에 의해 건국되었기 때문에 다른 왕조로 볼 수도 있지만 후한이 전한을 계승했다는 강한 국시(國是)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한과 전한을 합쳐서 그저 한나라라고 보면 됩니다(김운회 『삼국지 바로읽기』). (3) 위대한 한족(漢族)의 탄생 한(漢) 제국이 건설되고 중국인들이 한족(漢族)이라는 의식을 가진 것이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전의 하족(夏族) 또는 제하(諸夏)라고 불리던 민족이 좀 더 큰 차원에서 한(漢)나라의 깃발 아래 모임으로써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까? 그렇지요. 이전에는 주로 낙양 - 장안 등에 이르는 지역을 중원(中原) 즉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고 양자강 남쪽이나 황하 이북 지역을 중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았지요. 예를 들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하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춘추 전국시대에서는 중국의 서북방에 위치했던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그림 ③] 춘추전국 지도 즉 한나라 이전에는 황하 이남이나 장안의 동쪽, 장강의 북쪽 등 작은 지역을 중원(中原)이라고 하여 중국의 본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엉뚱하게 오랑캐로 생각되던 진나라의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자 양상이 좀 바뀌었죠. 『한서(漢書)』에서는 “진시황은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장성(長城)을 쌓아서 중국의 경계로 삼았다(「西域傳」).”고 합니다. 물론 이 장성은 엄밀히 보면, 오늘날의 만리장성을 그대로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기는 하지만 일단 중국이라는 역사적 무대를 지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진시황의 업적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한족(漢族)에게는 (그가 오랑캐라고 해도) 지대합니다. 하나는 춘추전국이라는 복잡한 정치국면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영역을 물리적으로 지정하기 시작함으로써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실체가 서서히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나저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오랑캐가 한족들을 통일하여 한족의 실체가 서서히 태동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진시황은 지금까지 ‘폭군(暴君)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중국 역사에서도 하나의 운명처럼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오랑캐의 대명사인 청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나 청태종(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이 현대 중국의 영역을 만들어 주었지요. 어쨌든 진나라와 한나라의 등장으로 한족(漢族)의 실체와 영역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족(漢族)의 탄생과 더불어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화사상은 ‘한족에 의한 천하의 지배질서’를 이론적으로 구체화 한 것입니다. 한(漢)나라 때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단편적 수준에 있던 중화사상이 보다 구체화되고 정교해지기 시작합니다. 한나라 이전의 이론가가 주로 공자(孔子)나 맹자(孟子)였다면 한나라 때는 동중서(董仲舒 : 179~104 B.C.)나 가의(賈誼 : 200~168 B.C.)가 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론을 그대로 한무제(漢武帝)가 강력한 국력(國力)을 바탕으로 현실화합니다. 이로써 초기 중화사상의 골격은 완성된 것이지요. 그 후 중국의 영역은 확대일로를 걷게 됩니다. 즉 삼국시대에 이르러 중국은 황하 중ㆍ상류 지역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일어난 국가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이후 중국의 개념은 지속적으로 확대 팽창되어왔습니다. (4) 쥬신 오랑캐 되다
그런데 이 한족의 탄생이 주변 민족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한족(漢族)의 탄생 및 구체화와 더불어 주변민족은 확실히 오랑캐로 다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이전에는 자신이 오랑캐인지도 몰랐는데 한(漢)나라가 등장하여 한족(漢族)의 실체가 명확히 되면서 확실히 오랑캐가 되게 된 것이죠. 이것은 마치 가만히 있다가 이교도(異敎徒)가 된 아랍인들과 비슷합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죠. 즉 이전에는 낙양과 장안, 그리고 산동의 일부 등 중원(中原)이라고 불리던 좁은 지역에 살던 극소수의 화하족(華夏族)들이 남들을 오랑캐라 하더니 이젠 중국의 영역을 일정하게 표시하고는 그 이외의 민족을 몽땅 오랑캐로 취급한 거죠. 그러면 이들이 오랑캐가 된 과정을 한번 볼까요? 『논어(論語)』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랑캐들에게 임금이 있는 것은 제하(諸夏) 여러 나라에 임금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세계의 성인(聖人)이라는 분이 하신 말씀치고는 좀 심합니다. 그의 제자는 한술 더 뜹니다. “나는 중국사람[夏]이 오랑캐들[夷]을 변화시켰다는 말을 들었어도 오랑캐가 중국인들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맹자(孟子)』「滕文公篇」)” 그리고 『예기(禮記)』에서는 오랑캐는 불변하는 고유한 성격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독특한 거처와 음식·의복 등이 있으며 이들은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며 기호도 다르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동쪽에 사는 오랑캐를 이(夷)라고 하는데 이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被髮] 몸에다가는 문신(文身)을 새기고 음식물을 날로 먹었다고 합니다(「왕제편」).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董仲舒)의 말처럼, 오랑캐는 중국을 예(禮)로서 대할 수가 없고 중국도 오랑캐들에게는 예절로 대할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춘추좌전』에는 “서쪽 오랑캐[융(戎)]나 북족 오랑캐[적(狄)]는 승냥이 이리떼와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닌 것이죠. 이렇게 되다가 이젠 확실히 오랑캐의 모습들이 구체화됩니다. 즉 중국인들은 북방 유목민들을 서융(흉노, 강), 북적(흉노, 선비), 동이(갈, 예맥) 등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흉노·선비·갈·예맥이니 하는 명칭들은 이들 부족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이 분류하기 편리한 대로 임의로 부여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이하를 지칭하는 욕들입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란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승냥이 같은) 짐승’라는 뜻인데 간단히 얘기하면 ‘똥고양이’이죠. 세상의 어느 부족이 자기 부족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선비(鮮卑)란 동물무늬가 있는 허리띠[세르베]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고증), 흉노(匈奴)란 ‘입심 좋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물길(勿吉)은 ‘기분 나쁜 놈(재수 더러운 놈)’입니다.
중국인들은 사방의 오랑캐들을 이렇게 나누지만 실제로는 북적(北狄)이나 동이(東夷)는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이 점은 앞으로 계속하여 상세히 분석해 드립니다). 이와 같이 한족이라는 실체가 역사상에 나타나자 동아시아는 여러 가지의 변화가 생깁니다. 이것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① 중국의 영역이 일정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합니다[중국인들은 한나라 때 중국 동부 해안 지대의 쥬신 문화와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초(楚)나라의 문화를 하나의 용광로 속에 밀어 넣습니다. 이어 위진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소위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던 남방지역을 한족화(漢族化)하는 작업을 강행합니다]. ② 한족(漢族)의 실체(national identity)가 명확해질수록 주변민족들은 중국 역사의 무대에 확실히 오랑캐로 등장합니다. 즉 이전까지는 역사적 자료로서 민족적 실체가 불분명했던 민족들이 한족(漢族) 사가(史家)들에 의해서 정교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민족들은 확실하게 한족(漢族)의 오랑캐가 된 것이죠. ③ 한족의 등장은 다시 주변민족(오랑캐)들의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자극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이 같은 책동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몽골쥬신입니다. 그래서 몽골쥬신은 아직까지도 견고히 민족적인 실체를 유지하고 있지요. ④ 동아시아의 민족과 그 민족이 건설한 국가가 역사의 주요 행위자로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즉 동아시아의 각 민족적 정체성은 한나라 이후부터 견고하게 구축되기 시작합니다. 즉 산동 - 낙양 - 장안 등에 살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기들은 한족(漢族)이라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그 주변 민족을 더욱 비하하게 되고 주변 민족들에 대한 차별화 작업을 강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족들의 입맛에 맞도록 주변민족들에 대한 분류 작업도 가속화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문자가 없어서 생긴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런 한편으로는 주변민족들의 민족적 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중국의 오랑캐 즉 주변민족 들은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 중국과 동등하게 행동하여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거나(고구려, 몽골) ⓑ 중국의 질서 속에 편입하여 적당한 독립 상태를 유지하거나(조선) ⓒ 중국에 완전히 동화되어 실체가 사라집니다(남만). 그 동안의 역사를 보면 주로 ⓐ → ⓑ → ⓒ 의 방향으로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중국은 가히 ‘민족을 먹는 하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민족을 먹는 위대한 하마, 중화주의 도대체 중국인만큼 수천 년에 걸쳐 민족적 실체(national identity)를 견고히 유지하는 민족이 세상에 있었을까요? 그런데 희한한 일은 한족(漢族)들이 항상 중화백성과 오랑캐로 세상을 보더니 최근 10여년간 갑자기 중국은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며 모든 오랑캐도 중화인(中華人)이라고 선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중국은 그들의 스승인 공자나 맹자의 말을 무시하고 오랑캐들을 모두 한족이라고 선언하고 있지요. 중화주의의 실제 창시자인 동중서(董仲舒)가 들었다면 기절할 일이지요. 그뿐입니까? 중화의 영웅인 악비(岳飛, 1103~1141)나 문천상(文天祥, 1236~1282) 등이 들었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황하 유역의 화하족의 문명의 중심지를 ‘중국’이라 부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중국인이라고 하는 전통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지속적이고 견고하게 유지되어왔습니다. 물론 중국이라는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하는 말로 보통명사이지만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中華民國)’, 즉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사상은 바로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중화주의 즉 중화사상은 쉽게 말해서 중국민족이 천명(天命)을 받아서 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중국 고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 체계는 이미 주(周) 나라 때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가 차지한 영역이 협소하고 그것이 오늘날 중화사상을 대변할 정도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이 같은 천명사상은 맹자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고 이론화 됩니다. 그리하여 후일 한(漢)나라가 중화사상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석학(碩學)인 동중서(董仲舒)는『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하늘[天]은 우주의 주관자이며 한나라가 무도한 진(秦) 나라를 벌한 것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한나라의 황제는 이 같은 하늘의 뜻(천명)을 대리 수행하는 존재 즉 천자(天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한나라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며 하늘의 뜻을 하늘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대리자라는 것이지요. 이후 이러한 생각은 그대로 계승되게 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좀 지나칩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놈이 번다.’고 하듯이 아무리 오랑캐지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해 준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이 천명(天命)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나라의 멸망은 다른 각도에서 봐야합니다. 당시의 중국이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상태였는데 진나라가 이것을 보다 빨리 하나로 통합하려다 생긴 일이지요. 한나라 고조 유방은 말로만 통일을 했지 실질적인 통일은 60여년 뒤의 한무제(재위 : 141~87 B. C.)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진시황은 오랑캐지만 중화 영웅에 들어가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동중서의 말은 진시황이 천명을 받기는커녕 천벌(天罰)을 받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석학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지나칩니다. 어쨌거나 한나라 때 중화사상, 또는 중화주의는 중국민족의 정체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실천화합니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 민족 형성의 분기점을 한(漢)나라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중국인 말고 다른 민족은 천명(天命)을 받을 수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원래의 이론대로라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한족(漢族)이 따로 있고 오랑캐가 따로 있을 리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덕(德)이 있는 자가 천명을 받는 것인데 이 덕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의 고유 신앙이나 관습을 토대로 한 덕입니다[이춘식 『중화사상의 이해』(신서원 : 2002) 132쪽]. 따라서 중국인들이 말하는 그 덕(德)을 가지려면 아예 중국인이 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안된 일이지만 중국을 통일하여 한족을 만들어 준 진시황과 세계의 주인이었던 원나라 태조(칭기즈칸)나 중국영역을 최대로 확장해준 청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도 천명을 받을 수는 없지요. 어디 오랑캐가 덕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나사렛 같은 촌구석에 어디 인물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저러나 중화주의는 중국인에 의한 세계 통치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통치의 일원성(一元性)을 천명하는 통치이념이 됩니다. 여기에 다시 송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이 가미되면서 중화주의는 인식론적인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성리학이 가미된 중화사상은 한족(漢族)들을 골수 중화민족주의자로 만들 수 있었으며 수천 년 동안 온갖 시련에도 민족적 실체를 유지하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중국도 국사나 민족을 해체하자고 권고를 해요? 중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거나 참으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중화사상에 따르면, 천명(天命)을 받은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중심에 중화(中華)가 형성되고, 그 주변국은 이 중화와의 의리에 기반한 문화적 군신관계(君臣關係)를 형성함으로써 천하의 질서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에 따르면, 천명(天命)을 받은 중국의 황제[천자(天子)]는 세상의 중심인 중국 민족과 천제(天帝)를 연결해주는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성실히 수행하고 주변의 제후국을 문화(文化)로 감화시키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역별 국가 자치제의 완성을 추구해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후국들은 중국의 황제를 신뢰하고 본받아서 의사(擬似) 중화국(中華國)의 건설에 매진하여 천하의 평화를 달성해 가야 합니다. 그러니 주변 나라들은 중국에 조공(朝貢)을 하나 안하나 모두 중국의 신하입니다. 설령 오랑캐들이 중국을 지배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저 무도(無道)한 놈들일 뿐이지 중화가 사라진 것도 아니죠. 결국은 중화가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이승기필패론(理勝氣必敗論)이 그것이죠. 제가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말씀드린 것처럼,『삼국연의』에 나타난 유비(劉備)의 불패사상(不敗思想)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주변민족은 이미 2천년 전에 한족(漢族)에 복종하고 살아가야할 의무만 남은 민족들만 있는 것이죠(이제 세상은 중국에 복종하고 있거나 앞으로 복종할 신하들밖에는 없는 것이죠). 참으로 아큐(루쉰『阿Q正傳』주인공)식의 자아도취적 논리입니다. 그러나저러나 이 같은 중화사상을 한족(漢族)이 아닌 민족으로서 가장 성실하게 수행하여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나라”를 만든 나라가 바로 한반도의 조선(朝鮮) 왕조입니다. 그래서 항상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합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시끄러운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아무 말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확실한 머슴 하나를 옆에 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소중화, “새끼 중국”을 자처한다고 해도 중국인들이 그것을 제대로 봐 줄지가 의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오랑캐들을 사람같이 생각한 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6) 오랑캐 길들이기 : 기미부절(覊縻不絶)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은 여러 각도에서 동아시아의 역사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점을 정리해 봅시다. ① 중국의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북방 유목민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게 됩니다. 민족적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지요. ② ‘중국’이나 ‘한족(漢族)’의 개념이 ‘사이(四夷 : 중국의 주변에 존재하는 네 방향의 오랑캐)’의 상대개념(相對槪念)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③ 중화주의로 인하여 중국의 주변민족은 사사건건 내정문제(內政問題)에 간섭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가 하늘을 숭배하는 유목민들이 마음껏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왕제편(王制篇)」에 “천자는 하늘에 제사하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를 하며 천자는 어느 곳이든지 명산대천을 골라서 제사를 지내지만 제후는 자신이 다스리는 곳의 명산대천에서만 제사를 할 수 있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天子祭天下名山大川 諸侯祭名山大川在其地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중원의 주인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말이지요.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이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쌓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 중화사상에 동화될 수밖에 없겠지요. 어쨌거나 세력이 약한 중국 주변 민족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하거나 아니면 쉬쉬해가면서 적당히 제천의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겠지요. 힘은 강자(强者)의 정의(正義) 아닙니까? 한족의 이러한 주변민족들에 대한 비하(卑下)는 한편으로는 역사 서술의 비대칭성(非對稱性)이 공고화되고 (즉 주변민족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도 없이 불평등하게 함부로 비하한다는 말이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민족들이 한족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을 가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민족이 몽골입니다. 오죽하면 몽골인들은 같은 민족인 요(遼)나라인들이 중국인들의 흉내를 내니 이들을 “중국인 트기” 쯤으로 여기면서 비하하여 지금도 중국을 요나라라고 하겠습니까?(이 부분은 다시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이 중국에 적개심을 가진 것은 아니죠. 특이하게도 조선 후기의 지배층들은 자발적으로 중국을 ‘부모(父母)의 나라’로 섬깁니다. 중국의 국력을 감안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부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중국은 참 행복한 나라입니다. 한족(漢族)은 스스로를 주변 민족들과 철저히 구별함으로써 주변 이민족을 변방의 야만족으로 대합니다. 주변 민족(오랑캐)의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포괄하기에는 이질성이 너무 많다는 것이 한족의 기본적인 역사인식입니다. 중국인들의 주변 민족에 대한 일관된 정서는 기미론(覊縻論)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에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관계란 기미부절(覊縻不絶)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漢書』「陳湯傳」).”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오랑캐와는 기본적으로 상종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때로 중국에 위협이 되므로 그대로 둘 수는 없고 말이나 소처럼 고삐를 끼워두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지요. 이 기미론이 가지고 있는 뜻은 중국인을 제외한 백성들은 모두 동물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예(禮) 또는 회초리로 이들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죠. 이 주변민족들은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이므로 적당히 고삐를 메어두었다가 중국을 위해 필요할 때 적절히 사용한다는 것이죠. (7) 지나친 생각들 지금까지 본 대로 한(漢)나라는 중국 역사의 호수입니다. 마치 로마가 유럽사의 호수였듯이 말이죠. 그런 점에서 쥬신의 역사에도 호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高句麗)지요. 쥬신의 역사에서 고구려가 중요한 이유는 고구려사가 쥬신족 역사의 일부였기 때문이 아니죠. 고구려는 쥬신족들의 구성과 민족적 일체성을 곧추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몽골을 파생시키고(다시 충분히 설명해드립니다), 그대로 대조영의 고려(발해)나 왕건의 고려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고려는 조선으로 이어졌고 대조영의 고려(발해)는 금(金)으로 계승이 된 것이죠. 또 그 금은 후금(청)으로 계승됩니다. 이제 쥬신의 역사기행에 앞서 중화사상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료에 의해 어느 정도의 검정이 가능한 민족이나 역사적 공동체를 논할 때는 한(漢)나라 이후를 두고서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자(孔子)는 동이족(東夷族)’이니 ‘강태공은 한국인’이니 또는 유명한 ‘충신 백이와 숙제가 동이족’이니 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즉 한(漢)나라 이전에 나타나는 쥬신의 역사나 중국의 역사는 큰 의미를 둘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한(漢)나라 시대 이후 역사에 대한 정리가 대단히 체계화되고 객관화되어서 역사적인 사료 등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는 것이죠. 우리가 상상으로 역사를 볼 수는 없는 일이지요. 좋건 싫건 간에 사료가 없거나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두고서 학술 논쟁을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바탕에서 이루어진 어떤 이론들도 수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둘째, 한(漢)나라 이후 중화사상이 견고해지면서 중화인(中華人)과 오랑캐 즉 화이관념(華夷觀念)이 견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한나라 이전에는 중국이라는 개념이 모호하고 그 영역 또한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이라는 민족 개념이 모호한 상태이므로 한족과 비한족(非漢族)의 구분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지요. 앞서 보셨다시피 양자강 남부나 현재의 북경지방도 중국과는 무관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보면, 한(漢)나라 이후 쓰여 진 역사서들의 내용들은 1백%는 아니라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검증은 가능하다는 얘기지요. 이른 바 중국의 25사(二十五史)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서로 중국 역사의 정사(正史)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이십오사는 물론 중국인의 기준에서 서술되어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 이 이십오사에는 같은 사실이라도 ① 같은 책에서도 다른 각도로 여러 군데서 분석해 놓기도 하고[‘기전체(紀傳體)’의 특성], ② 다른 사서(史書)들에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③ 시대에 다른 변화추이를 보기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사서가 시기별로 편찬되므로) ④ 나름대로는 투철한 직업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진 엄정한 사관(史官)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기도 용이하고 신뢰할 만합니다. 그래서 한나라 이후에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은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한 일이죠. 그 동안 쥬신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과거로 올라가서 역사를 기술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한단고기(정신세계사 : 1999)』에 한국시대는 3301년이고 “신시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확한 수치를 기술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느 사료를 근거로 또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한(漢)나라 이전 사료(史料)들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문제지만 한나라 특히 동중서(董仲舒 : 179~104 B.C.) 이전에는 ⓐ 중화사상도 불완전하고 ⓑ 중국인(한족)들의 실체가 불분명한데 ⓒ 중국인들보다도 실체가 더 불분명한 쥬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한나라 이전에 제대로 된 민족개념이 있다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과학적인 분석을 기반으로 해야 할 학문이 목소리만 크다고 될 일은 아니지요. (8) 현대 중화패권주의의 미래 그러면 지금까지 견고하게 유지된 중화주의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떨까요? 「들어가는 글」에서 보신 대로 전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가 중국 오성홍기(五星紅旗)의 깃발 아래 신하(臣下)의 예를 갖추어 무릎을 꿇을까요? 중국은 외형적으로 보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과 개방에 크게 성공한 이후 국방력이나 경제성장도 빠르고 국력도 매우 강대해보입니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중국은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점을 간단하게 요약해 봅시다. ① 현대 중국의 경제 성장은 외국자본의 유입에 의한 부분이 많고 자체적인 성장 동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현재 중국의 임금(wage)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향후 10년 이내에 외국자본이 더욱 값싼 지역으로 자본 이동을 강행할 경우 심각한 실업문제가 발생할 위험성이 큽니다. ② 중국의 동남해안(상하이, 산둥, 광둥, 푸첸, 텐진)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개발이 미진합니다. 특히 내륙과 서북부의 미개발 상태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③ 중국의 3% 정도의 최상층 그룹이 형성되면서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13억 인구 가운데 4천만이 최상층이고 6~7천만 정도가 중산층이며 나머지 10억 이상이 매우 빈곤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잦은 소요사태(騷擾事態)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④ 심각한 관료주의(官僚主義)의 병폐에 시달리고 있으며 갈수록 격렬하게 진행되는 자본주의화는 불가피하게 언론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게 되어 장기적으로 공산당 1당 독재체제로서는 버티기 힘든 상황이 올 것으로 보입니다. ⑤ 소수민족(少數民族)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무리한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써 천년(千年)의 혈맹(血盟)인 한국과 같은 주변민족들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중국의 오판(誤判)으로 보여 집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노회(老獪)한 중국인답지 않게 일을 추진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동북공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구려의 역사를 집어 삼키려는 무모함이라기보다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약간의 경제개발에 도취되어 그 스스로가 과거 한무제(漢武帝)의 힘을 가졌다고 오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중국 통치자들의 강인하고 신중했던 장정세대(長征世代)가 끝이 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Soviet Russia)의 경우도 미국과의 경제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몰락한 것을 중국의 지도부가 직시해야 합니다. 미국의 지속적인 저유가(低油價) 정책으로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소련 경제가 심각한 재정적자에 봉착한 데다 미국의 SDI(Strategic Defence Initiative)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소련의 숨통을 눌려버린 것이 소련붕괴의 원인이었다는 지적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요. 군사적인 측면이나 전략적으로 중국은 일본과 미국, 타이완(臺灣), 한국에 의해 봉쇄되어 있습니다. 중국이 일본이나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태평양이나 동남아시아로 나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아마 중국은 동남아의 화교(華僑) 세력을 이용하여 이 같은 문제들을 극복하려 하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일본을 자극하면 일본의 재무장(再武裝)을 초래하여 중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대만(臺灣)도 단기간에 중국의 주요 시설과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초토화(焦土化)시킬 수 있는 공군력(空軍力)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현재 경제성장률도 매우 높은 나라로 외부적으로 큰 발전을 하고 있긴 하지만 석유를 포함한 많은 자원을 수요로 하기 때문에 세계 석유시장과 그 수송로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미국은 언제든지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2005년 현재 중국은 제2의 석유 수입 국가이기 때문에 극심한 재정 적자 상태의 중국으로서는 고유가(高油價)를 견디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국은 하루 6백만 배럴의 석유를 소비하고 있으며 90년대에는 세계 석유 총생산량의 5%를 소비했지만 지금은 거의 10%를 상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까지는 중화패권주의가 팍스아메리카나(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지향하는 미국의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과 충돌하기에는 요원한 상태입니다. 이 점을 중국의 지도부가 인식해야 합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미국과 심한 군사적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을 가상적국(假想敵國)으로 인식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요인으로 인하여 현대 중국의 중화주의 즉 중화패권주의(中華覇權主義)는 단기간에는 실현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답답한 일은 바로 한국입니다. 청나라 말기 중국이 열강에 의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한족(漢族) 관료 리훙장(李鴻章)을 중심으로 오직 한반도에만 확실한 종주권을 행사하려 했던 것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한국은 중국의 동네북이군요. ‘똥고양이’와 단군신화
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유명한 카페를 들어서니 프론트(front) 위에 크고 멋있는 판넬(액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위에는 금박으로 쓴 영어 글씨가 있었죠. 이 판넬이 뭐냐고 물으니 주인이 그 카페에 단골로 오는 미국인 병사가 주고 간 것이라서 걸어두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글들이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니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미국의 욕설들로 가득했습니다.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그저 미국의 욕이 ‘God damn(천벌 받을 놈)’ 정도만 알던 시절이니 그 말뜻을 잘 알 리도 없었겠지요. 무슨 말이 적혀 있었는지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불러서 그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내용은 몰랐다고 하면서 당장 떼어내겠다고 합디다. 그리고 난 후 6개월 뒤에 다시 그 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판넬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려고 말을 꺼내니 주인이 제게 짜증을 냅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꾸 잔소리하는 듯도 하여 저도 그냥 그 집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모난 돌이 정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하나의 코미디로 넘겨버리기엔 너무 자주 발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맥(濊貊)이 그런 경우죠. 한족(漢族)들은 과거 쥬신족들을 불러 ‘예맥’이라고 했지요. 예맥은 쥬신이 스스로 부르는 것을 한자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가관이죠. 중국인들이 쓴 말 즉 예맥(濊貊)의 한자 뜻 그대로는 ‘똥오줌이 붙은 표범이나 삵괭이 같은 짐승’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가장 가까운 식으로 표현하면 ‘똥고양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랑캐라도 좀 좋은 말로 표현해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미국(USA)은 미국(美國)이라 하여 ‘아름다운 나라’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만약 예맥이라는 말이 이 민족 스스로가 불렀던 이름이면 예맥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이 민족의 가장 고귀한 어떤 내용을 담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 즉 쥬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똥고양이’라고 부르며 비하했다니 기가 찹니다. 만약 이 ‘똥고양이’라는 말 안에 쥬신의 단군신화(檀君神話)가 숨어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똥고양이’라는 말을 쓴 행위 하나만으로도 이 말을 쓰고 통용을 시킨 한족(漢族, 또는 화하족)의 통치자나 사가(史家)는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부화뇌동한 소중화주의자(小中華主義者)들도 용서할 수 없죠. 비유하자면 우리의 고귀한 어머니를 ‘행실이 좋지 않은 길거리의 암캐’에 비유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1) 단군신화 쥬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신화(神話)의 세계를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쥬신의 이야기를 한다면서 왜 이리 사설이 길어? 단군(檀君)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온통 민족의 체질이니 중화사상(中華思想)이니 하더니 이제는 또 신화야? 한(漢)나라 이전에는 민족이고 뭐고 분별하기가 어렵다면서? 그러면 예맥은 언제 시작하는 거야 ?” 진정하시고 제 말을 일단 들어보세요. 신화(神話)는 언어가 모호하니 분석해 보았자 얻을 것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화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신화란 기나긴 역사적 사실을 간단하고 가벼운 설화로 윤색한 것일 수도 있고 그 민족의 집단 무의식을 표현한 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단군신화를 잘 아시죠? 그래서 저도 새삼스럽게 단군신화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똥고양이’ 이야기를 하려니 단군신화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일단 『삼국유사(권1)』의 내용을 간략히 봅시다. “옛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하느님[환인(桓因)]의 여러 아들[서자(庶者)] 가운데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가장 큰 산들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그 가운데 태백산(太伯山)을 택하여 천부인[天符印 : 하늘의 위력과 영험(靈驗)을 상징하는 부적과 도장]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의 산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이를 신시(神市)라 일렀다. 이 분이 환웅천황이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면서,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맡아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상의 내용은 『고기(古記)』에 나온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에는 『삼한고기(三韓古記)』나 『단군고기(檀君古記)』와 같은 책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일단은 위의 내용 가운데 몇 가지만 간단히 봅시다. 단군신화의 첫 머리에 나오는 내용의 요점은 천손족(天孫族)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천손족이라고 믿을 때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고귀한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특정 지역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동하는 민족 즉 유목민(遊牧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실증적으로 많은 동북아시아 유목민들이 이 같은 신화를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단군신화에서 특이한 것은 흔히 농경문화(農耕文化)를 상징한다는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라는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 등은 치우(蚩尤)의 신하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한 말일 수 있습니다. 치우는 중국에서도 자신의 조상의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구려(句麗)의 왕’이라고 하여 쥬신과 관계가 깊은 분으로 봅니다(물론 고유명사는 아니겠지요?). 중국의 쉬슈성(徐旭生) 교수는 1940년대에 이미 『중국고대사의 전통시대(中國古代史的傳統時代)』에서 “치우는 동이족”이라고 철저히 고증하였습니다.『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중 황제(黃帝) 조에는 황제가 신농씨(神農氏)와 싸워 이기고 천하를 제패할 당시에 치우는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보내어 황제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후일 황제는 치우와 탁록(涿鹿)의 들에서 결전하여 승리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치우는 맥족(貊族)의 수장(首長)으로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치우(蚩尤[chīyóu])라는 말도 욕설이니 앞으로 다른 명칭을 찾아봐야 합니다. 치우라는 말만 봐도 치우는 한족(漢族)의 조상이 아니죠.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입을 열면 예의니 도덕이니 하는 중화백성이 자기 조상을‘버러지 같은 놈(치우)’이라고 했겠습니까? 둘째, 단군신화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접점 지역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제 2장에서 보았듯이 베이징(北京) - 요동(遼東) - 중부 만주 - 한반도 - 일본에 이르는 지역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융합현상이 나타나지요 ? 따라서 단군신화는 주로 베이징(北京)과 요동지역이나 중부 만주 지역에서 발생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부여(夫餘)는 반농반목(半農半牧) 국가이지요.
셋째, 설령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가 농경과 관계 있다 하더라도 유목민들은 동아시아에서 철기를 가장 먼저 사용한 민족들이기 때문에 이 말들은 철기와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농경(農耕)은 유목민들이 전달해 준 철제가 농기구로 만들어져서 보급된 이후라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야말로 대규모 농경이 시작된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이 글 후반부에 나오겠지만 불의 신 염제(炎帝)는 황제(黃帝)에 패배하여 중국의 변방으로 밀려나 ‘농업(農業)의 신(神)’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주지역은 철기가 아니면 사실상 농경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부여(夫餘)는 농경을 발달시켰죠? 그 기반이 바로 발달된 철기문화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도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 제가 본 연구자들은 모두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농경문화의 상징처럼 이야기하는데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가 반드시 농경문화(農耕文化)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서 보더라도 환웅의 경우 농경을 지도하거나 가르쳤다거나 하는 말들이 전혀 없지요? 그리고 중국의 신화를 보면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가 농경보다는 주로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치우는 “황제가 우리를 물로써 공격하려 하니 풍백과 우사는 비와 바람을 일으켜 적을 공격하라.”고 합니다[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85쪽]. 이것은 치우 또는 치우족들이 변화무쌍한 기후를 잘 알고 이용했다는 말이겠지요. 치우의 라이벌이었던 황제(黃帝), 또는 황제족은 주로 물[水]로 공격하였다고 하니 그들은 치수(治水)에 능했다는 말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그 동안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 = 농경’이라는 등식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유목민만큼이나 기후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바람을 풍백(風伯)으로 가장 높이 칭한 것도 유목사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목생활은 바람에 영향을 심하게 받습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축들이 얼어 죽고 겔(천막)도 날아갑니다. 그러나 농경민족일 경우에는 겨울에는 농사가 끝나서 가족끼리 모여서 여가(餘暇)를 즐깁니다. 오늘날에도 내몽골이나 몽골지역에서는 바람이 심하면 물가나 다른 안전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번개도 유목민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주변에 큰 건물이 없으니 초원이나 겔(천막)에 바로 내리꽂히기 때문이죠. 이와 같이 농경인들처럼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할 수 없는 유목민들은 천재지변(天災地變)에 매우 취약합니다.『삼국지』(「위서」오환전)에서 조조(曹操)가 답돈(蹋頓)을 죽이고 요동의 정벌을 쉽게 한 것도 이 천재지변과 관련이 있습니다(김운회 『삼국지 바로읽기』참고). 그렇기 때문에 유목민들의 시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좋고, ‘바람에서 묻어오는 비의 냄새’도 맡을 정도로 기상현상에 민감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환웅은 농경문화 그 자체를 가지고 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웅은 씨앗[種]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죠? 다만 의술(醫術)과 금속문화(후반에서 설명함)를 가지고 간 것입니다.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면서” 라는 말은 고도의 문명(文明)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요. 그리고 이들이 무력만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죠. 이 문명은 황제(黃帝) 시대 이후 고도의 농경문화가 중원에서 꽃필 때까지 중국을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은(殷)은 동이(東夷)의 국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죠.『사기(史記)』에 말하기를 “은(殷) 나라는 오랑캐[이(夷 : 쥬신족)]가 세운 국가이고 주(周)나라는 우리 화하족(華夏族 : 중국인의 조상)이 세운 국가[殷曰夷周曰華]”라고 기록되어 있죠? 다시 다음 내용을 봅시다. “때 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사람이 되기를 빌자 신(神)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달래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 곰이 삼칠일(三七日) 동안 몸을 삼가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 웅녀(熊女)는 자기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檀樹) 밑에서 아이 배기를 빌었다. 환웅은 이에 잠시 몸을 바꿔 결혼해 주었더니,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다. … 단군 왕검은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또 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여기서도 몇 가지의 중요한 상징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① 쑥(wormwood)과 달래(wild garlic), ② 곰(bear), ③ 조선·아사달 등이 나타나는데 이것 또한 단군신화의 주인공들의 속성이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즉 초기 쥬신의 역사를 밝히는 단서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쑥과 달래는 의약품이므로 보다 발달된 의료기술을 의미합니다. 쑥은 현대에서도 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복통 · 토사(吐瀉) · 지혈제로 쓰이고, 냉(冷)으로 인한 생리불순이나 자궁출혈 등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여름에 모기를 쫓는 재료로 사용하여 들판에서 잠을 쉽게 잘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쑥찜, 또는 쑥뜸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해본 사람이면 다른 의약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달래는 역시 약재로 여름철 토사나 복통을 치료하고, 지혈제는 물론 종기와 벌레에 물렸을 때 쓰이며, 협심통에도 좋다고 합니다. 쑥과 마늘의 현대적 의미는 바로 의료 기술이죠. 그리고 샤먼(단군)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병에 대한 치료입니다. 사실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문화적 감응은 없습니다. 만약 곰 토템 부족들이 천손족에 반했다면 의료기술 때문일 겁니다. 여기서 치우천왕이 염제(炎帝)의 후계자였다는 점 생각해야 합니다. 염제는 신농(神農)으로도 부르는데 그는 직접 모든 풀들을 먹어보면서까지 그 약성(藥性)과 독성(毒性)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나 오늘날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바이오(Bio) 공학과 의료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저 된 것이 아니지요. 둘째, 곰[熊]이 등장한 문제입니다. 이 곰은 당연히 곰 토템의 부족을 말하겠지요. 만주에는 곰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이 부분은 다시 검토합시다). 그런데 위의 내용으로 보면 유목민들이 보다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와서 토착민들과 융합했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무식한 유목민들이 문화를 알기나 하겠어? 김 선생, 당신은 유목민을 대단하게만 생각해. 유목민이 제대로 된 책을 가지고 있어? 그들이 무슨 정보를 얻는다고 그래?” 허어, 제가 유목민을 대단하게 생각한다든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말합시다. 세상에 유목민 보다 정보(information)를 중시하는 민족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정보는 바로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인사도 ‘니하오(你好 : 잘 지내셨어요?)’식이 아니죠. “(당신이 온 곳에서) 뭐 새로운 소식 있습니까?[Сонин сайхан юу байна?(소닝 새항 요 밴?)]”라는 형태로 주로 다른 곳의 정보를 물어보는 식입니다. 지평선 너머 적(enemy)이 있는지를 빨리 파악해야지요. 아니면 새로운 목초지(牧草地)가 있는지도 봐야죠. 그리고 이들은 상업(商業)을 중시합니다. ‘중농주의(重農主義)’와 ‘쇄국(鎖國)’의 원칙을 고수한 한족(漢族)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원(몽골) 제국은 교역 루트를 철저히 보호한 대표적인 왕조였지요. 세계적인 무역대국과 정보통신(IT, 또는 ICT) 강국 가운데 동양에서는 한국과 일본 밖에 없지요? 이것도 그저 나온 것이 아니죠. 다 역사적 전통이 있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도 상업을 중시할 때만이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맙시다. 셋째, 아사달·조선·평양 등에 관한 것입니다. 아사달과 조선은 앞으로 지겹도록 나올 것이니 평양만을 간단히 보고 넘어가죠.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평양이란 현재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평양은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하는데 이 지명은 양주동 선생이나 박시인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베이징(北京) 지방의 옛 이름이라고 합니다(박시인『알타이 신화』132쪽). 놀랐죠? 더욱 놀라운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평양성을 맥국(貊國)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명은 국내성(만주 즙안현) - 평양(현재의 평양)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평양이라는 지명이 베이징 → 만주 즙안 → 평양(평안도)에서 계속 나타난다는 얘기죠. 이것은 유목민들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어떤 곳에 살다가 불가피하게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의 경우에는 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자신의 뿌리나 토템과 관련된 신성(神聖)한 지명(地名)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죠. 즉 민족의 세계를 들고 다니는 것이죠. 언제 다시 돌아올 수도 없잖아요. 땅에 대한 집착도 없지요. 앞으로 이런 경우는 자주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과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쥬신, 참 많이도 변했군요. 그런데 이것도 알아둡시다. 이렇게 유목민 같이 이리저리 움직여 다닐수록 동족(同族)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리 날라리 한국인이라도 인종전시장인 미국에 가서‘한국인’임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전자 분석법의 견지에서도 A 지역에서 하나의 민족이 B·C·D 등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경우, A 지역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유전적인 변이가 훨씬 크다고 합니다. 자, 다시 돌아갑시다. 단군조선이 처음으로 도읍한 곳이 베이징(北京) 인근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현재의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首都)이지만 아주 오랜 옛날 베이징은 탁록(涿鹿), 탁군(涿郡)으로 모든 동부 알타이권의 문화나 민족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쥬신의 뿌리들은 알타이를 거쳐 허뻬이(河北)로 들어가서 황하의 중류에 터전을 잡는가 하더니 화하족(華夏族 : 漢族의 뿌리)에게 밀려서 베이징(北京) → 요동(遼東) → 만주 → 한반도ㆍ일본 등으로 지속적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떤가요? 태평양 바다 밖에 없어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데요.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한반도 북부(북한)도 이제는 위태롭지요? 정말이지 쥬신의 위기가 이처럼 심각한 적도 없네요. 고구려가 왜 고토(故土)를 회복하자는 국시(國是)를 가졌는지 짐작이 가지요? 『삼국사기』에 고추모(高雛牟)가 북부여에서 일어나 해모수를 제사하여 일부 새로 편입된 영토를 ‘다물도(多勿都)’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다물’은 고구려어로는 옛 땅을 되찾는다는 의미입니다(麗語謂復古舊土). 여기서 말하는‘구토(舊土)’, 즉 이들의 옛 땅은 과연 어디인가를 이제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겠죠? 단군신화에 대한 것은 일단 이 정도로 하고 다시 우리 갈 길을 가봅시다. 누군가 이렇게 불평할 겁니다. “에이, 너무 뻔하잖아? 다 아는 내용이고. 당신 빨리 예맥(濊貊)이나 이야기하자고.” 글쎄요. 정말 여러분은 단군신화를 다 아실까요? 어쩌면 너무 뻔한 말들 속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지 않을까요? (2) 예맥과 치우천왕(蚩尤天王) 한족(漢族)들은 과거 쥬신족들을 불러 ‘예맥’이라고 했지요. 예맥은 쥬신이 스스로 부르는 것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단지 한자음(漢字音)을 빌어 표현한 말이죠. 그런데 그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오물을 의미하는 예(濊)와 이상한 짐승(貊)으로만 이해했다는 것이지요. 우스운 말이지만 의서(醫書)로 유명한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설문(說文)』, 『남중지(南中志)』 등에 이 맥(貊)이라는 짐승에 대해서 상세히 나와 있어 우리 민족이 이 맥이라는 짐승(상상의 동물)과 무슨 큰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지요. 이제부터 이 예맥이라는 말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예맥이라는 말을 접근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예맥의 원래 발음을 추적해 가는 것이 급하겠죠? 그래서 일단은 한어(漢語 : 중국어) 발음을 알아봅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현대 중국어의 발음으로 과거의 발음이 추정되는가?’라고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일단은 이런 분석, 저런 분석을 다 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현대 중국의 표준어(만다린어)는 요동지역의 한어(漢語)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청(淸)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면서 요동의 한족들을 파트너로 삼았던 것입니다. 요동지역의 중국어는 만주어와 교류도 많았고 만주 쥬신(청)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언어가 비교적 이해가 쉬워서 청나라의 상용어가 된 것이죠.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만다린어를 만주어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중국 표준어에는 만주어들의 발음들이 잘 보존되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한자음은 중국의 옛날 발음에 상당히 가깝지요? 그래서 이 둘을 적당히 비교해보면 말의 근원들은 어느 정도 알 수도 있습니다. 먼저 맥(貊)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맥(貊)은 중국어로 하오[h ![]() ![]() ‘ ![]() ① 금속, 즉 구리·쇠[鐵 : iron] 등의 여러 가지 금속 ② 하늘을 나는 새(鳥 : bird) ③ 해 뜨는 곳 동(東 : east) 예를 들면 새파람. ④ ‘ ![]() 맥(貊)의 발음 가운데 하오[h ![]() 제가 이렇게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맥(貊)을 불러서 『관자(管子)』에서는 ‘하오(毫 : [h ![]() ![]() ![]() ![]() 그래도 맥(貊)이라는 말에서 맥[mæk], 또는 모[mò]라고 하는 발음도 신경이 쓰입니다. 북방민족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돌궐의 쿨테긴(Kül Tegin) 비문(碑文)에 나오는 복엘리(B ![]() 일본의 모리마사오(護雅夫)는 비문(碑文)에 남아있는 돌궐 카한 시조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신 가운데 ‘해 뜨는 곳’으로부터 파견된 복클리(B ![]() ![]() ![]() 여기서 복엘리(B ![]() ![]() ![]() ![]() ![]() ![]() ![]() 전설적으로 보더라도 맥(貊)이라는 동물은 철(鐵)이나 구리(銅)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따라서 맥이란 똥고양이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철기를 사용하는 힘이 센 민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족들은 이들을 이처럼 비하했을까요? 그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이 철기로 무장한 유목민들에게 큰 고통을 당했거나 오랫동안 지배받았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맥(貊)은 치우천왕(蚩尤天王)과도 깊은 관련이 있겠지요. 치우천왕은 ‘태양(불)의 신’인 염제(炎帝)의 후계자로 현재 중국의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의 임금인데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와 쇠 가루를 먹고 산다고 하지요? 그리고 과거의 화하족(한족의 전신)을 크게 괴롭힌 사람으로 알려져 있죠.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쇠와 구리입니다. 쇠는 예맥의 예나 맥과 발음이 비슷하고 구리는 고구려(高句麗), 또는 구려(句麗)와 비슷하죠? (이 부분은 고구려 편에서 다시 상세히 다룹시다.)
『서경』에 “구려족의 임금을 치우라고 한다.” (「孔傳」)라고 하고 있으며 『사기(史記)』에서는 “구려(九黎) 임금의 호가 치우(蚩尤)이다.”고 합니다. 『사기(史記)』에는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고 따랐기 때문에 치우는 지극히 횡포하였지만 천하에 이를 벌할 자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죠. 이것은 철기를 바탕으로 한 신무기체계를 기존의 제후들이 이길 수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맥족들은 쇠를 숭배할 수밖에요. 물론 이 내용은 전설적인 내용입니다. 다만 이 전설 안에 녹아있는 의미를 맥(貊)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죠. 치우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치우가 당시 중국의 변방에 살던 대장장이 집단이고 치우는 그 우두머리 샤먼(무당 : 박시무당)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무당이 대장장이를 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을 다루어 금속을 정련하는 기술은 무당의 특별한 능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79쪽] 현재에도 칭기즈칸의 종족으로 알려진 부리야트족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은 샤먼이고 그 다음이 대장장이랍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알아봅시다. 정재승(봉우사상연구소장) 선생의 『바이칼 여행기』에는 특이한 내용이 있죠. “겨울 바이칼 곳곳에서 보이는 자작나무숲과 부리야트 원주민의 전통적인 말 숭배관념, 그리고 신라고분에서 발견된 자작나무 위에 그려진 하늘로 솟구치는 말 그림 등 … 부리야트인들의 전통풍속을 보면 어릴 때 이름을 개똥이·소똥이 등으로 비천하게 부른다는데, 이는 오래 살라고 하는 기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옛적에는 똑같았다. 좀 특이한 얘기는 전통 부리야트 마을의 제일 웃어른은 샤만(무당, 영적 지도자)이었고, 그 다음은 대장장이였다 한다. 바로 얼마 전 타계한 전통 샤만은 정말로 도력이 뛰어났는데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술이 매우 높았고, 한번 사람을 보면 무슨 병이 있는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단숨에 알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실 특이한 내용은 아닙니다. 철기 제련기술은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신기술입니다. 그 비밀을 종족의 우두머리가 관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요즘도 세계 최고의 음료회사인 코카콜라의 제조법도 그 상속자들에게만 전수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보면 공학(工學)을 천시하는 오늘날 한국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모든 문제를 정치적인 역학관계로만 해결하려는 풍조(조선 왕조가 대표적인 경우죠)는 주로 한족(漢族)에서 배워온 것인데 이것은 쥬신의 장래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런 점들에서 보면 단군신화란 치우가 황제에게 패배한 이후 민족적 이동이 일어난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화하족[한족(漢族)]의 시조로 간주되는 젊은 황제(黃帝)는 불[火]의 신 염제(炎帝)에 대항하여 판천(阪泉 : 베이징 근방)에서 큰 전쟁을 일으켜 염제를 격파합니다. 이에 염제의 후계자인 치우(蚩尤)는 염제의 복수를 위해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황제와 탁록(涿鹿)에서 결전을 벌입니다. 황제는 아홉 번이나 졌지만 마지막에 가서 지남차(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들어 치우천왕을 격파했다고 합니다. 황제는 치우를 즉각 처형하고 그 주검조차도 따로 떼어 묻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던 것이죠. 이 판천ㆍ탁록 대전의 패배로 이들 동방의 신들의 후손들은 남방으로, 또는 중국의 동북방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죠[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86쪽]. 그런데 중국의 신화는 자비로운 신농(神農)을 격하시키고 치우를 악신과 괴물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하족(華夏族)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죠. 쉽게 말해서 한족(漢族)의 조상인 황제가 야만족인 치우를 물리침으로써 위대한 중화문명이 탄생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현상은 한(漢)나라 이후부터 특히 심해집니다. 제가 지난 강좌에서 한(漢)나라 이후부터 중화사상이 체계화되고 한족이 형성되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마천의 『사기』나 중화사상(中華思想)의 대표적 이론가의 한 사람인 가의(賈誼)의 『신서(新書)』등에서는 염제가 제후들을 침략하고 나쁜 짓들을 저질러 황제가 징벌한 것이라고 합니다. 치우천왕이나 그의 형제들도 대부분 흉악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이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에 모래로 식사를 했다는 것이죠. 경우에 따라서 사람의 몸에 소의 발굽, 네 개의 손에 여섯 개의 손, 이마 양쪽에 쏟아난 뿔 등을 가진 형태로 묘사됩니다. 치우가 황제에게 패배한 탁록(涿鹿)은 현재의 베이징(北京) 서쪽 산 지역, 또는 텐진(天津) 지역이라고 합니다. 물론 전설상으로는 탁록대전이 B. C. 2000~3000년대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를 믿기는 어렵겠죠. 이옥의 연구에 따르면, 맥족(貊族)이 중국 사서(史書)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B. C. 7세기경인데 이 때 이들의 거주지는 섬서(陝西)·하북(河北)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들은 B. C. 5세기경에 산서(山西), B. C. 3세기경에는 송화강 유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남하했다고 합니다(이옥, 『고구려민족형성과 사회』1984). 그러면 B. C. 7세기~B. C. 5세기경에 맥족은 탁록을 통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화하족(華夏族 : 중국인의 조상)과의 결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중국 본토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600~500년경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이 탁록 대전과도 관계가 있겠지요([그림 ⑤] 참조).
맥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접근해봅시다. 북방 민족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박원길 교수는 맥의 원래 명칭이 코리(Khori), 또는 꾸리(구리) 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고구려지요. 고구려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지만 크게 보면 ‘(해가 비치는) 고을(나라)’ 또는 ‘구리(銅)’와 같은 금속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알타이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 : 서울대 교수)은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골(蒙兀)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박시인『알타이 신화』232쪽).” 보세요. 고대의 역사에서 쥬신과 관련된 민족들은 하나같이 아침 해[태양]나 쇠[鐵] 또는 금속과 관련이 있지요? 이와 같은 것은 일종의 토템(Totem)입니다(무생물과 자연 현상 토템은 토템문화 후기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토템은 뛰르껭의 말처럼 ‘씨족의 상징과 표식(標式)이자 신(神)’으로 다른 씨족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상징이죠. 오늘날 태극기 등 국기(國旗)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이 토템도 부족이 분화될 때 다양한 형태로 분화됩니다만 가장 중요한 원형(原型)은 가지고 갑니다. 예를 들면 유서(劉恕)의 『통감외기(通鑒外紀)』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중국의 일부 부족의 재생(再生) 토템 가운데 청룡(靑龍)·적룡(赤龍)·백룡(白龍)·흑룡(黑龍)·황룡(黃龍) 등이 나오는데 이것도 일종의 토템의 분화로 원형인 용(龍)이 색으로 나눠진 경우지요. 또 인디언 모히칸 가운데 칠면조족은 칠면조·병아리·학(鶴)등으로 나눠지기도 하죠. 쥬신의 경우, 해[太陽]·구리[銅]·쇠[鐵]·은(銀)·금(金)·불[火] 등으로 나눠지는 것도 같은 이치지요. 토템은 구성원들을 단단히 결합시키는 기능을 하여 부족의 역량이 흩어지거나 감소되는 것을 방지하게 됩니다. 만약 같은 토템이면 서로 친척, 또는 형제로 간주하는 것이죠. 사회가 아무리 발전하고 문명화되어도 토템 표식은 어딘가 남아있다는 거죠. 한국의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양이 봉황(鳳凰)이죠? 중국 황제는 용(龍)이죠? 결국 해[ ![]() ![]() 다음으로 예(濊)라는 말을 분석해 봅시다. 예(濊)라는 말은 한자의 뜻 그대로 똥물의 뜻인가요? 천만에요. 세상 어떤 바보가 스스로를 똥물에 비유하겠습니까? 하기는 이상하기는 합니다. 수천 년에 걸쳐서 예맥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바꾸려고 하지도 않고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제가 유난히 별나서 일까요? 알 수가 없군요. 예(濊)의 발음은 훠[huò]·휘[huì], 또는 웨이[wèi] 등으로 나타나 맥(貊)보다는 오히려 더 ‘ ![]() 첫째, 예(濊)라는 말은 ‘ ![]() 둘째, 예(濊)라는 말은 ‘ ![]() ![]() ![]() 셋째, 언어적으로 보면 이 ‘예(濊)’로부터 카라(kala)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이 말이 나라[國]를 의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구려, 또는 고려나 가라(加羅)· 가야(伽倻)·한(韓 : 일본의 훈음 ガラ), 그리고 열하·요령성 일대에 널려 있는 카라(喀喇)·카사(喀佐)등의 지명도 모두 이 카라(kala : 濊)가 변형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카라(kala)는 ‘부족의 중심지’로 이 말에서 나라[Nkla : 國]가 나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죠[곽창권 『한국고대사 탐색』(일선출판사 : 1987)].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행 되는대로 다시 소개하도록 하지요. 여기서 첫째 항목과 둘째 항목을 한반도에 국한시켜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地理志」江陵條)에 “강릉(江陵)은 본래 예(濊)의 옛 나라로 철국(鐵國)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죠. 예(濊)를 철국이라고 한 것은 철(鐵)의 훈(訓)이 ‘쇠’ 또는 ‘서’이기 때문이죠. 같은 책(鐵原條)에 “철원(鐵原)은 원래 고구려의 철원군(鐵原郡)인데 고려 태조가 동주(東州)라 하였다”는 것이죠. 즉 철원(쇠의 벌판)이 동주(해 뜨는 곳)로 둔갑한 것은 이제는 쉽게 이해가 되죠.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철(鐵)의 훈이 ‘ ![]() 뒷날 반도 쥬신의 국가 이름이 된 조선(朝鮮)은 만주족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쥬선(Jusen)’, 또는 ‘쥬신(Jüsin)’이나 아사달·아사다라·서라벌· ![]() 결국 이 예(濊)라는 말은 ‘태양이 비치는 나라’, 또는 ‘태양의 아들[天孫族]들이 사는 곳’, 또는 ‘쇠를 잘 다루고 태양을 숭상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도 맥과 마찬가지로 철기(鐵器)와 해[太陽]가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맥이라는 민족은 철기로 무장하여 전투력이 강성하고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天孫族]이라고 믿는 민족이라고 일단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두어야할 것은 해(또는 불)와 아침, 쇠[鐵]가 함께 따라다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말들은 전설적인 제왕이자 쥬신(동이족)의 영웅이었던 치우천왕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분석만 가지고는 좀 부족한 듯합니다. 철기와 천손(天孫)이라는 말로 정리하기에는 다소 단순한 감이 있죠. (3) 단군신화의 본질 지금까지 저는 예맥을 분석함에 있어서 ‘예’와 ‘맥’을 따로따로 분석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나 ‘맥’이나 ‘철기로 무장한 강력한 천손족(天孫族)’이라는 의미가 되었지요. 그 말로 봐서 이들은 태양을 숭배하고 새[鳥]를 중시하는 민족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예’나 ‘맥’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도 알 수가 있죠. 이제는 이 예맥을 동시에 두고 분석해 볼까요? 고증학자인 이병도는 ‘예’와 ‘맥’을 따로 보아서는 안 되고 예맥을 합쳐서 중국말로 ‘휘마[Houei-mai]’의 고대음 ‘ㅋ휘마[Khouei-mai]’를 따서 곰 토템, 신성을 의미하는 ‘고마’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도 일부 타당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베리아 지역이나 한국어·일본어에 이 어휘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즉 시베리아의 에벤키족은 곰을 ‘호모뜨이’라고 하고 한국어에서는 ‘곰’, 일본어에서는 쿠마(くま)는 곰[熊]을 의미하고 코마(こま)는 말[馬 또는 망아지(駒)]를 의미합니다. 말이나 곰은 모두 예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이죠. 일반적으로 위[上] · 크다[大] · 신(神) · 신성(神聖)을 뜻하는 고어인 ![]() 결국 이 ‘쿠마’는 ‘크고 신성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만주 일대는 곰 토템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흑룡강 주변에 살아가는 종족으로 울치족(ульчи)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잡아다가 고이 기르고 나중에 자라면 곰을 강변까지 끌고 가서 죽여서 그 고기로 잔치를 벌입니다. 이 곰을 죽일 때는 궁수(弓手)는 단 한발에 아무런 고통 없이 죽여야 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울치족의 여인들은 한없이 슬피 웁니다. 그리고 난 뒤 곰의 머리뼈는 땅에 묻고 나머지 고기들은 전 부족들이 나눠먹고 잔치를 벌이지요. 울치족들은 이 과정을 마치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들에게는 곰은 가장 가까운 동물로서 단지 짐승 가죽을 쓰고 있을 뿐 과거에는 인간이었다는 것이죠(곽진석 「시베리아 오로치족의 신화와 신앙에 대한 연구」참고). 그런데 이들 울치족의 유적과 한반도 남동 해안 지대에서 발견되는 일부 유적들(암각화)이 거의 같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곰 토템은 주로 만주지역과 연해주 태평양 연안 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분석해 보면 예맥이란 대체로 ① ‘곰을 신성시하는 민족으로 철기나 구리를 사용하여 강한 전투력을 지닌 민족’ 또는 ② ‘해 뜨는 동쪽의 밝은 나라(또는 그 나라 사람)’ 또는 ‘태양 또는 하늘의 자손[천손족(天孫族)]’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예맥이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한정 되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융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기에는 예와 맥이 따로 쓰이다가 어느 시기에는 다시 합쳐지다가 또 따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예를 들면 예맥은 『한서(漢書)』ㆍ『삼국지(三國志)』ㆍ『후한서(後漢書)』에 이르면 예(濊)와 맥(貊)으로 따로 불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예맥으로 불리어졌다 말이죠]. 그래서 따로 사용될 때는 앞의 항목에서 분석한 것으로 봐야 하고 같이 사용될 때는 이병도식으로 합쳐서 분석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 단군신화(檀君神話)입니다. 따라서 단군신화란 철기(iron)를 잘 다루는 민족[예(濊) 나 맥(貊)]이 시베리아에 흩어져 사는 광범위한 곰 토템 부족과의 융합과정[예맥(濊貊)의 등장]을 신화로 표현한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찾아가는 고대 쥬신의 실체이죠. 환웅(桓雄)이라는 말도 그런 말이 아닐까요? 환웅을 한번 다시 써볼까요 ? ‘환(桓 : 하늘족 - 천손족) + 웅[熊 : 곰토템 부족]’ 이 되지 않습니까? 이것만은 알아둡시다. 아침·쇠(금속제련 : 금·은·철·구리 등)·해(태양)라는 말이 쥬신에게는 항상 따라다니는 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속의 제련과 세공은 농경에 비교하여 상당한 손재주(섬세한 기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인·일본인들이 세계 최고의 손재주(섬세한 기술)를 가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급 반도체 기술이나 IT기술을 가진 것이겠지요. 그래서 아직도 치우와 황제(黃帝)의 싸움은 끝나지 않은 것이죠.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중국인들이 쥬신의 뿌리를 ‘똥고양이’이라고 부른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그 수많은 비밀들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이 예맥이라는 민족과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다른 민족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봅시다. 예맥 = 동호 = 숙신 : 범쥬신
이런 동요 들어 보셨죠?
“예솔아! ”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너 말구 네 아범.” “예솔아.” 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아니고 네 엄마.” (김원석의 동요 : 내 이름 중에서) 그러면서 이 동요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내 이름 어디에 엄마와 아빠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어머니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들은 적이 없거든요. 아버지의 이름은 알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요. 조금이라도 총명한 구석이 있었으면 초등학교 가기 전에 좀 알아두거나 학교에 가지고 가는 서류라도 유심히 보면 알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었던가 봅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당시에 저는 하루 종일 앉아서 그림만 그리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도 “엄마의 이름은 뭘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봤습니다. “엄마 이름은 뭐야?” 그랬더니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엄마 이름 ? 엄마 이름이 ‘엄마’지.” 그런데 늘 이런 식으로 어머니는 넘어가기 일쑤여서 어머니가 제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마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안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기 보다는 주로 ‘갑돌이 엄마’, ‘평양댁’, ‘갑수 형수’, ‘영철이 마누라’ 등으로 인생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들의 지위가 낮아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지난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해왔지만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항상 뒤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에 가려서 세상을 살아오신 것이지요. (1) 중국 장님, 예맥 코끼리 만지기 우리의 뿌리와 깊이 관련이 있는 민족은 예맥ㆍ숙신(肅愼)ㆍ동호(東胡)입니다. 이 세 민족은 아직도 안개 속에 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예맥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연구자에 따라서 예(濊)는 샤오싱안링[소흥안령(小興安嶺)] 산맥 동부지역에 맥(貊)은 샤오싱안링 산맥 서부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서 예와 맥은 따로 있기도 했지만 합류하여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맥족이 예족을 지배하였다고 합니다만 기록에 나타난 형태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 또는 맥(貊)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예와 맥은 분리시켜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이 점 앞 강좌에서 충분히 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청동기시대 이래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동질적 문화를 향유한 집단을 예맥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예맥은 주변의 여러 가지 변화하는 생태적 정치적 조건에 따라 여러 종족으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되풀이 합니다. 예맥족은 중원(中原)의 문화와 다른 독자적 문화를 형성했는데 비파형 청동검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성립되기도 했으며 중국의 세련되고 발달된 문화를 만나면서도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합니다. 예맥의 중심은 고조선과 부여(夫餘)지요. 부여는 고구려와 상당기간 공존하면서 예맥문화권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참고로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부여왕이 사용한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 : 예왕의 도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맥에 대하여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저 ‘고조선 = 예맥’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마치 예맥 전체가 고조선을 구성한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예맥의 상당수가 특별한 국가의 구성없이 그대로 자유롭고 독자적인 유목 또는 수렵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샤오싱안링 산맥 동부 지역에서는 국가의 발달이 미약하고 샤오싱안링 산맥 서부지역에서 국가의 발달이 활발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맥의 일부가 고조선을 구성한 것이죠. 우리는 그 동안 기원 전후, 또는 중국의 한(漢)나라 전후 동북아시아에는 동호ㆍ예맥ㆍ숙신 세 민족이 서로 대립하면서 살아간 듯이 배우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아무런 반발도 없이 수용했습니다. 우선 그 동안 어떻게 배워오고 가르쳤는지를 한번 봅시다.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북방의 예맥족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주의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동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ㆍ고구려ㆍ옥저ㆍ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① 만주 서부[요서(遼西) 초원지대]는 동호(東胡)의 근거지로 오환ㆍ선비계(鮮卑系)이며 몽골계이고 ②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소흥안령-장백산맥]는 숙신ㆍ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ㆍ여진의 거주지이며, ③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 압록강 -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ㆍ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의 근원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어느 책을 봐도 대동소이합니다. 이것을 지리적인 위치에 맞춰 개략적으로 나타내면, [그림 ①]과 같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림 ①]을 보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동호·숙신·예맥을 무슨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단순히 중국의 사서(史書)에 나오기 때문인가요?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어떤 관념에 갇혀 사물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림 ①]을 보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동호는 결국은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하는 지역인데 왜 별도로 나눕니까? 또 이 지역은 후일 고구려가 모두 통합한 지역입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지가 궁금합니다. 갑자기 새로운 민족이 이주해온 흔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고조선의 영역은 [그림 ①]로 보면 동호 + 예맥이 아닙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고조선의 영역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비파형(요령식) 동검의 출토지라고 합니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은 한족(漢族)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고 합니다. 이 분야에 전문가인 미국 덴버 대학의 여성 인류학자 사라 넬슨 교수는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Sarah M. Nelson 『The Archaeology of Korea』1993 133쪽). [그림 ②]는 비파형동검 출토지와 고조선의 중심지와 세력범위(영역)등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그림 ②]를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금방 알아차릴 겁니다. [그림 ①]에서 말하는 동호와 예맥의 영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고조선은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요서(遼西) 및 요동(遼東)에서 발생한 나라인데 그것을 왜 동호와 예맥으로 다시 나눕니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동호지역과 고조선의 중심지역 부분에서 같은 종류의 비파형 동검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유적으로만 말하면 고조선은 차라리 동호(요서)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앞 장에서 말씀 드린 대로 쥬신의 중심지가 하북 → 베이징 → 요동 → 만주 → 한반도 → 한반도 남부ㆍ일본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은 항상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고조선이나 부여는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요동 만주 지역에서도 한족(漢族)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왕이 출현한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류의 책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지역의 인구와 지리적 특성을 거의 모르고 지적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유목이나 수렵은 무계획적이고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받으므로 국민총생산(GNP)이 매년 일정하지도 않고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죠. 더구나 인구 증가도 한계가 있어 사회가 상당한 부분 정체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유목국가에서는 혈통적으로 가까운 씨족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고, 부족이 모여 국가를 이룹니다. 유목사회가 국가를 형성할 때는 그들 부족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부족장이 군주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즉 유목국가의 특징은 부족 연합국가(部族聯合國家)라는 것이죠. 이 점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지향하는 중국의 정치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더구나 만주 일대는 매우 광대한 지역이지만 인구가 극히 희소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지역적으로 인구를 나누기 시작하면 수십~수백 종의 부족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통치하기도 불가능하지요. 왜 그럴까요?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나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체제를 구성하여 오는 경제적 편익(benefit)보다는 비용(cost) 발생이 너무 크다는 말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부터 거의 2천 년 전에 현재의 남한(한반도 남단)보다 10배 이상 큰 곳에 수만~수십만 정도가 여기저기 흩어져 산다면 그런 곳을 어떻게 통치하겠습니까?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어느 곳에 행정 중심지를 세우고 어떻게 군대를 주둔시킵니까? 그리고 무기가 겨우 칼이나 창 정도인 시대에 흩어져 살면서 전투력도 왕성한 유목민들을 어떻게 제대로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한(漢)나라 때 기원전후로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만주의 총인구는 1백만 명 수준이며 인구밀도도 1.31명/km2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시대지요. 그 후 만주의 총인구는 1201년에는 3,643,975 명, 14세기 후반기에 3백만 명, 1491년에는 총인구 435만 명, 인구밀도 5.42명/ km2 이었다고 합니다[趙文林ㆍ謝淑君 『中國人口史』(北京 : 人民出版社, 1988)]. 그리고 17세기 청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가 중국(명나라)의 대규모 침공(30만 명 규모)을 격파하기 위해 최대로 동원한 군대가 겨우 2~3만도 채 안됩니다(만주 부분에서 다시 봅시다). 그리고 인구 1백만, 또는 3백만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일정 지역에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인구밀도 자체도 허수(虛數)일 가능성이 높지요. 그래서 흔히 만주를 ‘바람이 스쳐가는 땅’이라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붙박이 농경민과는 다르지요. 이들은 이동성(移動性)이 강하고 그 행동반경은 대단히 넓습니다. 농경민의 입장에서 보는 유목민족과 실제의 유목민족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둡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유목민은 농경민이 사용하는 토지의 열 배에서 스무 배 정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족(漢族) 사가(史家)의 눈에는 이들이 요서 지역에서 출몰하면 동호(東胡)가 되고 요동 지역에서 출몰하면 예맥이 되어 버리겠죠? 그러다가 한참 밀려가서 두만강 유역에 나타나면 읍루가 됩니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요서 지역에서 두만강까지 가는 길은 사흘도 걸리지 않는데 말이죠. 따라서 한족(漢族) 사가(史家)의 눈에는 분명히 다른 종족으로 보고 기술하더라도 실제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알타이 산맥에서 압록강까지 가는데 말을 타면 2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농경민이 이 길을 걸어서 간다면 아마 살아서는 다 가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유목민의 특성을 전제하지 않고 유목민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림 ①]에서 나타나는 숙신(肅愼)ㆍ읍루(挹婁)도 실제와는 좀 다릅니다. 숙신이 반드시 만주 동부와 연해주에만 출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숙신은 현재의 산시성(山西省)과 베이징(北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막 출현합니다. 그리고 읍루는 그 민족적 계열이 가장 혼란하여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를 혼란에 빠뜨린 민족입니다. 분명한 것은 읍루를 해명해야만 쥬신의 비밀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읍루는 숙신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의미합니다. 즉 숙신과 일정한 교류를 가진 정도의 아이누족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는 『진서(晋書)』에 나타나는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는 식의 표현은 읍루에 대한 혼란을 크게 가중시킨 서술이죠. 이 때문에 숙신은 오히려 안개 속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숙신 대신에 사용한 읍루가 아닌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는 읍루는 예맥계열이 아니라 아이누족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아이누족이 살고 있는 연해주(두만강 동북부)에서 태평양 북부 연안에 이르는 지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인구가 극히 적어서 사실상 민족으로 분류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인구 규모라고 봐야합니다. 이 부분은 숙신편에서 다시 깊이 다루고 이 정도로 일단 넘어갑시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하고나면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김 선생, 당신 말이 이상해. 도대체 당신 결론은 뭐야? 그러면 예맥·동호·숙신이 같다는 거야 뭐야?” 맞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다만 예맥·동호·숙신 등이 ‘같다’는 말보다는 ‘구별이 안 된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분포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데다 인구는 극히 희박하면서도 이동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저기서 출몰할 수 있죠) 여러 가지 변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또 말씀하실 겁니다. “에이, 너무 지나쳐. 그럼 증거를 대 봐.” 그럽시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증거를 대 보겠습니다. 일단 몇 가지만 먼저 얘기해야겠네요. 동북아시아의 인종분포를 살펴봅시다. 예맥은 기존의 학계에서 사용하는 말인데 저는 이것을 범쥬신으로 표현해보았습니다.
[그림 ③]는 현재 고교 역사지도(2004년 천재교육 : 교육인적자원부 검정)에 있는 그림인데 대체로 그 동안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누족들은 예맥과는 분명히 다르게 묘사되어있군요. 그렇죠? 그러면 다시 [그림 ③]과 우리 민족의 체질상 공통성을 담은 [그림 ④] 을 비교해 보시죠. 거의 똑같지요? 하나의 그림은 역사적 사료에 의한 그림이고 하나는 생물학적인 체질을 분석한 그림인데 그 분포 유형이 거의 일치하니 말입니다. 물론 현재의 베이징이나 요동반도 부근에는 한족(漢族)의 이주와 동화(同化)가 심하게 일어난 지역이라 과거의 흔적은 많이 사라졌음을 [그림 ④]는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누 분포지역은 제외되어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의 읍루(아이누)가 거주한 지역이 제외되어있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거문화나 장례습속은 민족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잘 바뀌지 않는 대표적인 문화입니다. 장례습속은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고 주거문화를 한번 봅시다[참고로 김한규에 따르면 고조선 문화와 중국 문화가 확실히 다른 부분은 묘장문화(墓葬文化)라고 합니다(김한규『요동사』141쪽)]. 쥬신의 대표적 주거문화는 구들, 즉 온돌(溫乭)입니다. 학자들은 구들이 고조선ㆍ부여나 고구려(손진태 선생, 최남선 선생의 견해)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이미 구들이 개발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구들(온돌)은 물론 그리스나 로마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만 쥬신의 주거문화와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있어 이를 제외하면, 온돌의 기원에 관한 대부분의 견해들은 ① 중국 서북부 산시성(山西省), 또는 ② 동호(東胡), ③ 만주 등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대표적인 쥬신의 주거 문화라는 말이죠. 잘 아시겠지만 온돌은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난방시설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온돌 시설만 알았어도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했던 초기 미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얼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구들(온돌)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중국 북부와 여진족이 살았던 심양 일대에도 분포되어 있습니다. 심양 지역은 바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중심 영역이죠. 온돌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 곳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랴오닝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인데 이것이 고조선 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곳은 바로 요하(遼河) 중류지역으로 고조선의 중심지이죠. 바로 동호 지역인 셈입니다. 구들(온돌)에 관한 최초의 중국 기록은 5~6세기경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수경주(水經注)』라는 문헌으로 토은현 진궁산의 절 건물에 온돌을 사용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토은은 지금 북경 동남 방향에 인접한 땅으로서, 전문가들은 중국에 있어 온돌의 남방 한계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10세기경에 저술된 『구당서(舊唐書)』에는 일반적으로 가난한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은 반드시 산곡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사는데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고 겨울에는 긴 구덩이[長坑]을 만들어 그 구덩이 아래에 불을 때어 방을 덥힌다(「高麗」 : 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 라고 하고 있습니다. 송나라 때 서몽화의 『삼조북맹회편』을 보면, 숙신의 후예로 알려진 여진 사람(만주 쥬신)들의 주거를 기술한 것으로 “기와가 없고 집둘레에는 목상이 둘려 있으며 그 아래서 불을 때는데 구덩이[坑]을 통해 방을 덥힌다. 그리고 그 덥힌 방에서 잠도 자고 식사도 하고 생활도 한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숙신ㆍ여진이 세운 금나라의 기록인 『대금국지(大金國志)』에도 “흙으로 방바닥을 만드는데 그 아래서 불을 때어 덥히고 그 위에서 침식기거(寢食起居)를 한다.”고 하고 청나라 초기 저작물인 고염무의 『일지록』을 보면 중국의 동북부 만주 일대는 온돌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온돌 문화권의 범위를 북쪽으로는 만주 흑룡강 상류로부터 서쪽은 중국 북부 지역 즉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두만강ㆍ연해주까지 남쪽은 한반도 끝까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몽골에서도 게르 바닥에 난방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몽고를 중심으로도 온돌에 관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은 양반 다리(가부좌)하고 앉아서 휴식을 하는데 이런 자세는 쥬신족들이 아니면 하기 힘든 자세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 사람은 양반다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유럽인이나 미국인도 마찬가집니다. 이 자세는 온돌 문화에서 크게 발달한 휴식자세라고 할 수 있죠. 다른 인종이나 민족에게서는 보기 힘든 자세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단 체질과 같은 생물학적 특성과 시간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는 주거문화에 있어서 예맥ㆍ동호ㆍ숙신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시겠죠? 그럼 이제부터 다시 하나씩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2) 예맥 = 동호 = 숙신 예맥이 쥬신 역사의 본류라는 것은 여러 사서에서도 나타납니다. 일단 그것을 한번 정리해두고 넘어갑시다. 선진시대에는 발(發)을 맥(貊)과 대신하여 사용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조선(朝鮮 : 고조선)을 맥(貊)과 동일시합니다. 그런데 고조선은 맥의 일부에 불과하지요? 후한대(後漢代)에서는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맥(貊)과 동일시하기도 하고(『후한서』4 「和帝紀」) “부여(夫餘)는 본래 예(濊)의 땅”이라고 하기도 하고(『후한서』85 「東夷傳」), 동예(東濊)를 가리켜서 예맥으로 칭하기도 합니다(『삼국지』「동이전」)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예(濊)·옥저(沃沮)·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합니다(『後漢書』「東夷列傳」: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예맥은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는 마치 맥과 예가 요동을 동과 서로 나누어 차지하는 것처럼 서술이 되다가 한나라 이후에는 예맥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에는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漢書』24 「식화지」). 앞서 본대로 예와 맥은 하나의 범주로 봐야합니다. 예맥이라는 종족은 『관자(管子)』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허뻬이(河北)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선비나 동호 등도 모두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소제기(紹帝紀)」)에 따르면, 예맥은 오환(烏桓)ㆍ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중원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환ㆍ선비는 동호의 대표적인 민족이 아닙니까? 결국 동호나 예맥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죠. 맥(貊)은 중국의 고대 전적에서 야만족의 대표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예를 들면 『시경(詩經)』에 “(저 멀리) 추족과 맥족이 사는 곳까지 북쪽 나라 모두 다스리기 위해 왕께서 소공을 제후로 봉하셨네(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라든가 “회수의 오랑캐와 맥족과 같은 야만족, 그리고 남쪽의 야만인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르고 복종하지 않는 자 없으니(淮夷蠻貊 及彼南夷 莫不率從)” 라든가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맥은 중국인들이 보았을 때 그저 중국의 북방 또는 동방에 사는 오랑캐로 보이네요. 쉽게 중국식으로 말하면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을 합쳐서 부른 말로 보입니다. 그리고 『논어(論語)』에는 공자가 특이한 말을 하고 있어서 주목이 됩니다. 즉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살기를 원하자[子欲去九夷]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곳은 얼마나 지저분한 곳인데 사시기를 바랍니까?(「子罕篇」)”라고 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군자가 그 곳에 산다면 그 더러움이 문제인가?[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상당수의 한국 학자들은 이 말에 감읍(感泣)하여 이를 토대로 여러 가지 억설(공자가 ‘구이’를 그리워한다는 둥 ‘구이’가 그만큼 살만하다는 둥 아니면 공자도 한국인이라든가)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큰 의미는 둘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역설적인 표현법에 불과한 듯합니다. 제가 이 글을 인용한 이유는 공자가 구이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이(九夷)는 일반적으로 보면 예맥족의 총칭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한번은 주목할 필요도 있다는 말이죠. 참고로 『한서(漢書)』에는 “사맥(四貉)이 모두 복속하였다.(『漢書』22 「예악지」)”는 말이 있고 다른 문헌에서도 “제맥(諸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동안 많은 연구로 몽골 - 만주 - 한반도에 거주했던 여러 종족들이 동일한 민족, 또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연구와 증거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유 엠 부찐은 “맥족의 분포 지역은 오늘날의 랴오시(遼西 : 요하 서쪽) 지역(그 이전 시대에는 산둥반도의 일부 지역 포함), 요하(遼河) 중상류의 계곡, 랴오뚱(遼東) 반도 한국의 서북부 해안 지대를 포함한다. 그리고 예족은 지린(吉林)의 남부 및 동북만주 지역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소나무 : 1990)]. 북한학자 리준영은 맥족은 고대 중국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리국(槀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북한의 탁월한 사가인 리지린 선생은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맥족이 지역적인 분포나 문화적인 특성이 동호와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동호 = 맥(예맥)’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리지린 선생은 『고구려역사』에서 B. C. 3세기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침입함으로써 맥족이 멸망”했으며 당시의 잔존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동부지방 즉 송화강(흑룡강의 최대 지류) 유역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그들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며 그 시기는 대략 B. C. 232년경(B. C. 3세기)이라고 합니다. 리지린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황해 연안과 발해만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인 조이족(鳥夷族)과 예맥족이 융합하여 기원전 2천년 경에 숙신(肅愼)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리지린『고조선연구』1963). 여기서 리지린 선생이 지적하는 시기는 의문스럽지만 예맥족과 숙신족도 구분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뻬이(河北) 지역과 남만주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한(漢)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겹치고 있으며, 조선(朝鮮)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이 부분은 ‘숙신편’에서 다시 논의합시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동호(東胡)나 숙신(肅愼)을 예맥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또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왔습니다. 마치 동호나 숙신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면 죽을병이라도 생길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동호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으로 말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몽골(蒙兀)은 민족적으로 다르지 않고 거란 또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과 다르지 않죠. 이 점은 앞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밝혀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만주 서부는 동호(東胡),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는 숙신, 중부 만주평원에서 대동강은 예맥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죠. 왜냐하면 이 민족들이 소재한 위치가 뒤죽박죽인데다 서로 섞여있어서 도대체 분간이 되지 않고 여기저기서 이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기록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을 다른 종족이나 민족으로 나눌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죠. 같은 주거문화, 유사한 장례문화, 같은 토템, 같은 무속(巫俗)에 언어도 같은 계열이고 생물학적 체질과 체격조건도 같은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환경 변화에 따른 생활양식이 다른 것뿐인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버드나무를 신목(新木)으로 숭배하는 사상은 흉노·몽골·거란·선비·여진·고구려 등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江上波夫 「匈奴の祭祀」『ユウラシア古代北方文化』東京 1948 227-231쪽). 참고로 선비·오환 등도 동쪽과 푸른색을 숭상합니다. 실제로 『삼국지』(「위서」), 『요사(遼史)』 등에 나타나는 오환ㆍ선비(동호)의 습속은 현대 한국인과도 매우 유사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맥이 단순히 만주 중부에서 대동강 지역에 이르는 곳에서만 살아온 것이 아니죠. 이전의 강좌에서 본 예맥의 신화(단군신화)로 파악해 보더라도 중국의 베이징 부근으로 밀려난 예ㆍ맥족들이 요동 - 만주 - 연해주 지역의 곰토템 민족들과 융합하면서 쥬신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곰토템 지역으로만 보더라도 ① 유라시아 아메리카 형(시베리아 산림지대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남 : 야생의 곰을 종족의 수호령, 또는 수렵신으로 간주)과 ② 아이누형(연해주에서 북해도에 걸쳐 나타남 : 곰을 사육하여 의례적으로 죽여서 나눠 먹지만 곰을 조상으로 간주) 등이니 이 지역들은 사실상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북해도에 이르는 태평양 주변의 전 지역을 의미하고 있지요.
제가 이 같이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맥(貊)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사서(史書)로 보면 서주(西周) 시대 이후 나타났다가(『시경(詩經)』「大雅 韓奕篇」)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에는 소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예맥은 없어졌을까요? 그것은 아니지요. 이들의 명칭이 역사 자료에서 사라진 이후 말갈이나 물길(勿吉 : 기분 나쁜 놈), 읍루(挹婁 : 아이누 같은 놈들) 등이 대신하고 있으니까요(그 이유가 궁금하죠? 다음 장부터 상세히 해설해 드립니다). 그리고 이 명칭들이 요동의 서부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해(東海 : 동예지역)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우리가 동호(東胡)나 숙신(肅愼)을 예맥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처럼 본 것은 2천년 역사연구의 가장 큰 잘못이며 이것이 우리가 쥬신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실패하게 만든 근본 요인입니다. 예맥과 동호ㆍ숙신(肅愼)은 초기에는 허뻬이(河北) 및 중국 동북 지역에 후기에 갈수록 요동 -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찾아가려는 쥬신의 실체지요. 한족식(漢族式)으로 말하면 북적(北狄)과 동이(東夷)를 두루 포괄한 민족입니다. 이들은 농경민처럼 특정 지역에 붙박이로만 살아간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3) ‘똥고양이’ 입양(入養)하기 이제 예맥이 한국과 중국 양국의 역사 전쟁에서 왜 중요한 문젯거리가 되는지를 한번 알아봅시다. 한국의 학계에서는 맥과 예를 한민족(韓民族 : 한국인) 구성의 뿌리로 이해하고 이들이 남방의 한(韓)과 더불어 한민족을 형성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현대 중국의 학계에서는 예와 맥을 한족(漢族)의 구성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요. 왜 중국인들이 그 동안 ‘똥고양이[濊貊]’로 부르면서 가까이 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생길 듯이 더럽게 생각하다가 이제 와서는 이 ‘똥고양이’를 입양하여 자기네 민족이라고 부산을 떨고 있는 지 말입니다. 사람도 아닌 ‘똥고양이’를 하나의 가족(家族)으로 생각해준다니 중국인들은 참으로 인도적(人道的)입니다. 어쨌든 예맥은 현재의 한국과 중국이 모두 공통된 민족 구성원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역사전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 학계의 시각은 지금까지 본대로 역사적인 근거가 희박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중국은 예맥을 ‘똥고양이’ 오랑캐라고 간주해오다가 최근에 들어서 굳이 이들을 한족의 영역으로 억지로 구겨 넣으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진작에 다만 3~4백 년 전이라도 한족(漢族)에 넣어주었으면 소중화주의자(小中華主義者)들도 감읍(感泣)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맥이 분명히 한족(漢族)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밝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와 맥이라는 민족이 기원 전후로 여기저기서 나오다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숙신·읍루·물길·말갈·질위·여진 등등의 명칭들이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요동(遼東)과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예맥족의 역사는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 이후에는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 선생들이 우리 민족을 자꾸 예맥이라고만 하면 우리는 길 잃은 ‘역사의 고아’가 되어버리죠. 예를 들어봅시다. 부산출신 김복순씨는 신의주 출신의 최영철씨와 결혼하여 최예솔이라는 아이를 두고 있다고 합시다. 옆집에 사는 아줌마는 김복순씨를 ‘예솔 엄마’라고 하고 슈퍼마켓 할머니는 ‘부산댁’, 최영철씨는 ‘솔아’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김복순씨의 동창인 정연희씨는 ‘복순아’라고 부릅니다. 자 이제 봅시다. 사람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예솔 엄마’, ‘부산댁’, ‘솔아’, ‘복순아’라고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산댁’과 ‘솔이 엄마’가 다른 사람입니까? 이렇게 명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은 김복순씨의 사정이 아니라 이 김복순씨를 부르는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 개인적인 사정이나 지위 또는 친분관계 등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지요. 예맥(濊貊 : 똥고양이)은 중국인들이 함부로 기록하고 내뱉은 말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지속성’이지요. 예맥의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사라지고 또 다른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면 그것을 추적하는 것이 옳지요. 단순히 예맥이라는 민족의 일부가 고조선을 구성하였다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다만 그들의 일부가 북만주로 도망가 부여를 구성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한반도 남단에 흘러들어왔다고만 이해하여 그들의 영역이 현재 한국의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 등이니 그 곳만이 이들의 역사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그들은 전라ㆍ경상ㆍ충청뿐만 아니라 요동과 만주에도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말이죠. 생각해 봅시다. 요동ㆍ요서ㆍ만주 일대에 있던 모든 예맥족이 고조선이 망하자 일부는 부여로 가고 나머지는 몽땅 한반도로 올 수 있습니까? 기차가 있습니까? 고속버스가 있습니까? 황해 바다를 건너올 페리호가 있습니까? 설령 그것이 있다한들 이들을 어떻게 다 데려온단 말입니까? 더구나 예맥이 사라진 텅 빈 요동과 만주에 동호·숙신·읍루·물길 등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같이 많은 인구가 타임머신이나 공간이동도 없이 갑자기 어디서 왔겠습니까? 따라서 예맥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숙신·읍루·물길 등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4) 이런 젠장, 거란과 선비와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니 이쯤 했으면 ‘예맥 = 숙신 = 동호’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숙신과 관련해서는 ‘숙신편’에서 궁금증을 해소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숙신ㆍ동호ㆍ예맥 등을 일컫는 범칭으로 ‘범(凡) 쥬신’ 또는 ‘원(原) 쥬신’이라는 용어를 써야한다고 보지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또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이런 젠장, 거란과 선비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니. 김 선생, 거란은 분명히 우리와는 다르잖아? 또 그렇게 배웠어. 사실 거란 같은 오랑캐족속을 우리와 같은 계열의 민족으로 본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아. 기분 나빠.” 허어, 그렇습니까? 흥분하지 마시고 좀 따져봅시다. 제가 앞서 거란의 원류인 동호의 영역이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한다는 점은 말씀드렸죠? 그리고 체질이나 체격도 일치하고(‘아침안개 속의 쥬신’), 주거문화나 토템도 일치(‘똥고양이와 단군신화’)한다고 말씀 드렸죠? 그렇다면 그 동호(東胡)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은 아실 테니 일단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遼史)』를 봅시다. 『요사(遼史)』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遼史』「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금법(八條禁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遼史』卷四十九 :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고 하고 있지요. 앞으로 제 9장(알타이 신화)에서 보시겠지만 이 요나라야 말로 정치적인 군장과 종교적인 수장을 겸하는 단군왕검(檀君王儉)식 통치를 보여준 대표적 경우입니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요나라의 태조는 “천명을 받은 군주는 마땅히 하늘을 섬기고 신을 경배한다(受命之君 當事天敬神 :「耶律倍傳」)”라고 하여 샤머니즘을 아예 국교(國敎)로 숭상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島田正郞 『遼朝官制の硏究』(1979) 321쪽] 이런 점들을 보면 차라리 우리는 동호의 후예라고 해야 하겠죠? 이젠 납득이 가십니까? 그래도 또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말하시는 분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에이, 그래도 대부분 사학자들이 예맥과 동호계열의 선비(鮮卑)는 다르다고 하던데. 김 선생, 당신 쥬신의 범위를 너무 넓게 보는 거 아니야? 당신, 간단히 말해봐 선비와 고구려가 무어 닮은 점이라도 있는지.” 그렇군요. 좀 더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요. 이 점을 다시 봅시다. 앞서 본 대로 리지린 선생의 연구는 예맥족과 숙신·선비는 구분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선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간략하나마 알아봅시다. 실제에 있어서 고구려나 몽골은 기원적으로 타브가치(Tabgachi : 拓跋鮮卑), 즉 선비족(鮮卑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이 때 사용된 ‘치(chi)’는 몽골계 언어의 인칭대명사입니다. 예를 들면 장사치·벼슬아치 등의 치와 같은 것이죠]. 이 점은 몽골이나 북방 유목민들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선비(鮮卑)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교수는 사비(Sabi)라는 만주어가 “상서(祥瑞)롭다”는 의미이므로 기린과 같은 성스러운 동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유라시아 고대북방문화』에서 가죽 허리띠에 붙어있는 동물모양의 버클의 음역에 불과하다고 고증하였습니다. 타브가치는 흔히 탁발선비(拓跋鮮卑)라고 기록된 민족으로 북위(北魏)를 건설한 민족인데 고구려ㆍ몽골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의 원주지가 맥족이나 몽골과 겹치고(같거나 인근지역)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속이 거의 같다고 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94~95쪽].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사신이 와서 북위의 세조(世祖)에게 민족 발상지를 설명해주자 세조가 그 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축문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魏書』「烏洛侯傳」). 그런데 내몽골 자치구 후룬뷔일멍(呼倫貝爾盟) 어룬춘(鄂倫春) 자치기(自治旗) 아리하(阿里河) 진 서북 10km 지점에 있는 천연동굴에서 이 축문 비석이 1980년 7월 30일에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97쪽]. 이 비석은 아리하, 즉 아리수(阿利水) 인근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이 강 이름이 고구려의 시조가 건너간 강과 같은 이름이죠. 이 부분은 다음 강좌에서 상세히 다루지요. 북위(北魏 : 386-535)는 북중국을 통일(439)하여 고구려와 이웃하고 남방으로는 한족(漢族)의 송나라(420-479)와 대치합니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 따르면, 장수왕의 부음(494)을 듣고 북위의 효문제는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가 직접 문상(問喪)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에서나마 애도(哀悼)를 표하고자 하니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도록 하라.”라고 합니다(『魏書』高祖 紀第七下 : 帝爲高麗王璉 擧哀於城東行宮).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사기』와 일치합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長壽王 七十九年 : 王薨 …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그러나 북위는 중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한족(漢族)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지도층 내부에 큰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후일 요(遼)나라도 북위의 전철을 그대로 밟습니다. 이것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충돌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저러나 예맥의 대명사인 고구려가 선비족들과 같은 계열의 민족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골자는 동호ㆍ선비니, 예맥이니, 앞으로 나올 숙신ㆍ물길ㆍ말갈이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명칭들이 현란한 욕으로 만들어져 여러 종족으로 탈바꿈한 것은 전적으로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에 의한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농경민의 시각을 반영한 말들이라는 것이지요. (5) 요약 합시다 그 동안 우리는 한국인은 북방의 예맥족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융합되었다고 알아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족(韓族)이라는 개념도 삼한(三韓)식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리고 동호·숙신·말갈·물길·거란·선비 등과 우리는 전혀 다른 민족으로 보고 가르치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예맥은 사서에서 곧 사라져 잊혀지고 맙니다. 사실로 치면 예맥이 다른 이름들로 바뀌어 간 것에 불과한데 말이죠. 예맥은 지속적으로 다른 명칭으로 바뀌어 가는데, 그것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숙신이나 말갈·여진 등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민족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예를 들면 김복순씨는 변함이 없는데 사람들은 ‘예솔 엄마’와 ‘부산댁’을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이죠. 이를 알려면 ‘예솔 엄마’와 ‘부산댁’이 어디에 사는지를 알면 됩니다. 만약 이사를 갔다면 ‘예솔 엄마’가 움직일 때 ‘부산댁’이 어디로 움직이는 지를 관찰하면 될 일이죠. 뿐만 아니라 ‘예솔 엄마’와 ‘부산댁’의 인상착의와 행동양식을 파악하면 ‘예솔 엄마’와 ‘부산댁’의 관계는 금방 알 수가 있죠. 그리고 한족(韓族)이라는 말도 그 근원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한(韓)이라는 말이 그저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 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착각하고 있네요. 그저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것을 앵무새처럼 인용하고 있습니다[이 점은「환국(桓國)ㆍ한국(汗國)ㆍ한국(韓國)」부분에서 다시 상세히 분석해 드립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기원후 5세기경에 고구려로 통일되는 것은 인정합니다. 앞서 본 대로 이런 분석들은 얼마나 단편적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사학계의 생각들 가운데 받아들일 만한 것은 고구려에 의해 여러 쥬신이 통합되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합시다. 첫째, 예맥은 쥬신의 역사의 뿌리이자 여명기 쥬신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고 이 예맥은 동호와 숙신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맥 = 동호 = 숙신 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이누는 제외됩니다. 둘째, 한반도에 사는 쥬신(한국인)이 역사의 여명으로 보는 고조선은 예맥의 나라이지만 그 예맥을 모두 포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맥의 일부가 단지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왔다고 해서 그들만이 예맥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셋째, 예맥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조선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던 민족에 대한 일종의 범칭(凡稱)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사라지면서 물길ㆍ말갈ㆍ여진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맥이라는 민족과 물길ㆍ말갈ㆍ여진 등과 다르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는 곳이 같고 생물학적 특성과 체질이 같고 문화가 같은데 도대체 왜,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넷째, 예맥ㆍ동호ㆍ숙신은 쥬신을 구성하는 3대 구성요소로 고구려는 그 성장 과정에서 이들을 통합하여 이들에게 보다 강한 일체감을 부여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漢)나라가 중국인들에게 한족(漢族)이라는 일체감을 부여했듯이 고구려 역시 쥬신에게 고려(高麗), 또는 쥬신이라는 일체감을 생성시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예맥ㆍ숙신ㆍ동호를 포괄하는 말은 ‘원(原)쥬신’ 또는 ‘범(凡)쥬신’이라는 표현이 가장 타당하리라 봅니다. 앞으로는 우리 민족의 원뿌리에 대해 욕설을 사용하지 말고 이 용어들을 사용하기를 권고 드립니다. 이제 예맥이 어떤 방식으로 초기 쥬신의 역사를 형성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아리수’를 아십니까? ‘아리수’(阿利水)를 아십니까? ‘아리’는 ‘(깨끗하고) 큰’ 이라는 뜻이므로 ‘아리수’는 큰 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바로 서울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한강(漢江)을 옛말로 ‘아리수’라고 합니다. 강 이름으로는 매우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한강은 그 길이만도 4백km가 넘는 큰 강입니다.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둘로 나뉘며 남한강을 본류로 하는데 강원도에서 시작하여 광대한 충주호(忠州湖)에 27억 5천만 톤의 물을 채우고 서울로 흘러갑니다. 한강은 공업용수 ·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서울 ·춘천 ·원주 ·제천 · 충주 등 유역 도시의 먹는 물을 제공합니다. 그뿐입니까? 한강은 1백만 kw 이상의 전력을 생산하기도 하여 가히 ‘민족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한강과 관련하여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습니다.
2004년 3월 24일 서울시는 지난 2001년부터 페트병으로 공급하고 있는 서울의 수돗물에 대하여 그 이미지를 고급화하기 위해 명칭을 ‘아리수’로 변경했습니다. 그때까지 서울시가 공급하는 페트병 수돗물은 거의 60~70만 병에 이릅니다. 그런 와중에 그해 9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아리수’라는 명칭을 두고 서울 시의원과 벤처기업간의 논쟁이 벌어진 것이죠. 서울시 의원 한 사람이 ‘아리수’가 『일본서기』 등에 나오는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에서 유래했으며 일본의 삼한정벌론(三韓征伐論)을 정당화하려고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광개토왕비문을 조작하면서 사용했던 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해서 아동용 한글교육 사이트 ‘아리수 한글’이라는 벤처 기업은 이 시의원을 규탄하면서 “‘아리수’가 일본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아무런 고증도 없이 보도되었으며 ‘아리수’가 한강의 옛 이름이라는 사실은 국내 학계에서 확인되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아리수(阿利水)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고구려 시대에 한강을 ‘아리’ + ‘수(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좀 더 알아봅시다. 한강은 한사군(漢四郡)시대나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수(帶水)라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강의 이름이 ‘아리수’라고 한 것은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碑))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영락대제비는 ①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세계(世系) 및 영락대제의 행장(行狀), ② 영락대제의 정복활동과 그 성과, ③ 영락대제 능에 대한 관리방법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은 ② 정복활동과 성과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죠. 바로 영락대제비에는 한강을 아리수(阿利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보시죠.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부여의 잔당들(백제)’의 근거지인 여러 성들을 토벌하였다. … [토벌한 여러 성들의 이름 나열] … 그러나 ‘부여의 잔당’들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여기저기서 대항하여 싸우니 이에 왕이 크게 노하였다. 왕은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성들을 압박하자 … ‘부여의 잔당’들은 개구멍(근거지를 낮추어 부른 말)에 숨어들어가 있다가 잔당의 우두머리(백제 아신왕)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옷감 1천 필과 남녀 1천명을 데리고 나와서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머슴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왕)은 이런 허물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왕은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잔당 우두머리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原文]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여기서 보면 백제에 대하여 ‘잔(殘)’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백제(百濟)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것은 부여의 잔당(殘黨)이란 듯입니다. 즉 이 당시 부여는 힘도 없이 사실상 고구려의 보호국(속국)에 불과하면서도 그 잔당들이 여기저기서 부여를 만들어서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으니 이것을 성가시게 생각한데서 나온 말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노골적으로 부여를 비난하여 ‘부여의 잔당’이라고 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 역시 부여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당시 사정을 좀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부여의 잔당’이라고 번역 해드린 것이지요. 이 부분은 백제(반도부여) 편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어쨌든 한강을‘아리수’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 25)에도 한강을 ‘욱리하(郁利河)’라고 하는데 이 ‘욱리(郁利)’라는 발음은 ‘유리[yùli]’로 나타나 결국 아리수와 유사한 발음이 납니다. 그 후 한강은 백제가 동진(東晋)과 교류하고 중국 문화를 수입하면서부터 중국식 명칭인 ‘한수(漢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한강은 ‘아리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버리고 한강(漢江)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새끼 중국인’을 자처하는 소중화주의자(小中華主義者)들 덕분이라고 봐야겠지요? 이들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이 강 이름조차도 ‘한강(漢江)’이라고 바꾸어버렸죠. 서울(Seoul)도 ‘한성(漢城)’이라고 부르죠. 참, 못 말리겠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사대(事大)ㆍ중화주의자(中華主義者)들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들은 한국이 중국의 식민지가 되면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병이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것이죠. 정말 세대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강(漢江)을 ‘아리수’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 혼란이 심하다면 한강의 한문(漢文) 표기를 중단해야하고 한[‘한’이란 크다는 순우리말]가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릅니다. “김 선생, 좀 지나치게 굴지 마. 한강이라는 지명은 벌써 1천 5백년도 넘게 사용 되어 왔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이름을 고쳐라 마라 하는 것이 교양이 있는 소린가 말이야?” 옳으신 말씀입니다. 혼란이 심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한강을 아리수로 불러야 한다고 하는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몸속에 뿌리 깊은 새끼중화주의를 경계하려 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아리수’라는 말 안에는 엄청난 쥬신의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1) 아리ㄱ 오손(Arig-Usun)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의 시조인 아름다운 성녀(聖女) 알랑 고아에 관해서 『몽골비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아름다운 여인 바르고진을 아리ㄱ 오손(Arig-Usun : 청결한 강이라는 뜻)에서 만나 알랑 고아를 낳습니다. 그런데 코릴라르타이-메르겐에게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는 무리들이 나타납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람들을 모아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어 성스러운 산 보르칸으로 이동합니다. 성스러운 보르칸 산은 땅이 좋고 사냥감이 풍부한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코릴라르는 코리족(Kohri)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의 명칭이라고 합니다. 이 명칭은 주몽이 코리 부족에서 일단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뒤 국명을 코리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高 : 으뜸) 구려(Kohri)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몽골비사』에는 세 개의 몽골 기원설화가 실려 있습니다. 맨 앞에 있는 늑대 설화는 돌궐의 것을 모방한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개, 즉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이동설화와 알랑 고아의 설화는 몽골 고유의 설화라고 합니다(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머니즘과 제사습속』1998). 앞으로 다른 장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알랑 고아 설화는 고구려의 유화부인(柳花夫人) 이야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고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한역하면 고주몽(高朱蒙)입니다. 활의 명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메르겐은 신라의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말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쥬신의 마음의 고향인 바이칼 호수에는 삼십 개에 가까운 섬들이 있고 그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 바로 ‘알흔섬’입니다.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온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알흔섬’사람들의 말로는 이 곳이 바로 코리(Khori)족의 발원지로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夫餘族)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합니다(제가 보기에 이들이 말하는 민족의 발생기원은 이들의 말처럼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민족 이동의 방향도 이들의 말과는 좀 다릅니다. 이 점들은 앞으로 계속 분석해 드리지요). 이 부리야트족은 칭기즈칸의 종족으로 알려져 있죠. 김병모 선생에 따르면 이 종족이 한국인들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사실을 한반도에 사는 우리만 모른다는 거죠. 그렇지만 이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에서는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정재승 :『조선일보』2003.09.25).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들을 왜 우리만 모르는지. 일부러 피하는 걸까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처럼 중국이 ‘부모의 나라’여서 그런가요? 그래서 중국에 누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숨긴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과거에는 영광스러웠지만 이제는 별 볼일 없다 뭐 그런 걸까요? 그런데 ‘뿌리를 찾는 일’은 볼 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알혼섬’ 바다는 바이칼호 전 지역 중 가장 수심이 깊고 풍랑이 센 곳으로 예부터 이곳 뱃길을 항해하는 상인에 의해 몸을 던지게 되는 부리야트 심청의 인당수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 비극적인 아가씨는 ‘알혼섬’의 바이칼 인당수에 몸을 던지자 금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로 다시 환생하여 신들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유명한 이야기중의 하나가 ‘나무꾼과 선녀’ 입니다. 이 이야기는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와 내몽골·티베트·만주지역 등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나 바이칼호가 그 원류라는 점이 학계의 중론이라고 합니다(이 부분은 다른 장에서 상세히 분석해 드립니다). (2) ‘아리수’를 아십니까?
‘아리수’ 이야기를 한다더니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아리수’로 돌아가 봅시다.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에 ‘아리수’가 나온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리수’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나온다는 것이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동명성왕)은 대략 개루부 출신(‘舊唐書’)으로 2천년 전 동부여를 떠나 졸본으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죠? 고주몽은 원래 부여사람으로 동부여를 출발하여 보화산(寶花山)을 거쳐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 제사, 묵골 등을 만나 졸본(현재의 환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엄리대수입니다. 대수(大水)는 문자 그대로 큰물 즉 강(江 : 가람)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러면 엄리(奄利[yănlì])는 무얼까요? 두 가지 각도에서 분석해야죠. 하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다른 하나는 그 위치가 어디인지 말이죠. 첫째, 엄리(奄利[)는 ‘야리[yănlì]’에 가까운 발음이 나고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엄리를 큰 강을 의미하는 ‘아리가람’을 한자음을 빌려서 표시한 말이라고 합니다(신채호,「조선사연구초」『丹齋申采浩全集(下)』1982). 즉 ‘아리수’라는 말이죠.
둘째, 엄리대수를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는 흑룡강으로 보았습니다[『塞外民族史硏究(下)』]. 그럴 수밖에요. 엄리대수는 양자강(揚子江)과 같이 큰 가람을 의미하죠. 그리고 만주와 몽골에서 크고도 큰 강을 의미하는 것은 흑룡강 밖에는 없지요. 흑룡강은 아무르강, 또는 몽골어로 에르군네무렌(Ergünne- Muren)이라고 합니다. 어, 그러면 흑룡강도 ‘아리수’가 되는군요. 어허, 한강(漢江)과 흑룡강(黑龍江)의 원래 이름이 같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무려 1천여 km가 떨어진 두 강의 원래 이름이 같다고 하니 말입니다. (3) 어, 압록강과 ‘아리ㄱ 오손(Arig-Usun)’도 ‘아리수’라고요?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만주 지역의 여러 가지 연구를 진행했던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압록강(鴨綠江)도 엄리대수라고 하였습니다. 일단은 한강과 흑룡강 사이에 있는 강이 압록강이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아 다행이죠. 압록강에서 ‘압록(鴨綠)’도 앞에서 본 엄리(奄利[yănlì])와 마찬가지로 ‘야뤼(鴨綠[yālù])로 발음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라토리 쿠라키치의 견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죠? 뿐만 아니라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엄리대수의 다른 명칭으로 ‘아리수’(阿利水[아리 강]), 오열수(烏列水 [아오리에 강]), 무열수(武列水 [우리에 강]) 등을 지적하였습니다(白鳥庫吉, 「黑龍江の異名について」『塞外民族史硏究(下)』74-75쪽). 이형석 한국 하천연구소 대표에 따르면, 주자(朱子)는 천하에 황하·장강·압록강 등, 세 개의 큰 강이 있고 그 가운데 여진이 일어난 곳이 압록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신당서』와 『구당서』 등에 의하면 압록강(鴨綠江)은 물색이 오리대가리처럼 파랗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의 다른 이름으로는 안민강(安民江)·요수(遼水)·청하(淸河)·아리수(阿利水)·패수(浿水)·엄수(淹水)·엄리수(淹梨水)·엄체수(淹遞水)·시엄수(施淹水)·욱리하(郁里河)·비류수(沸流水)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에서는 ‘야루’(yalu), 또는 ‘아리, 야루장’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압록강도 아리수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만주족(만주 쥬신)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하고 갑시다. 흑룡강을 ‘아리수’라고 하더니 이제 압록강도 ‘아리수’라고 하였죠? 그런데 이것만 문제가 아니죠. 칭기즈칸의 선조들이 떠나온 ‘아리ㄱ 오손(Arig-Usun)’이라는 말로 돌아가 봅시다. ‘아리ㄱ 오손(Arig-Usun)’이라는 말에는 문제의 그 ‘아리’가 또 들어가 있죠? 즉 ‘아리ㄱ + 오손(물, 또는 강)’에서 오손이란 강이란 뜻이므로 결국은 수(水)로 바꿀 수 있죠? 그렇다면 ‘아리ㄱ 오손(Arig-Usun)’도 결국은 ‘아리수’가 됩니다. 그런데 칭기즈칸의 원제국(1217~1368)은 13세기에 나타나는데『몽골비사』의 이야기는 훨씬 이전의 이야기죠. 그리고 『몽골비사』에서 말하는 ‘아리ㄱ 오손’은 ‘아리수’라는 것은 알겠는데 정확한 위치를 추적하기가 어렵죠. 그런데 선비족의 원주지 가운데서도 또 ‘아리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타브가치[탁발선비(拓跋鮮卑)]는 북위(北魏 : 386~493)를 건설한 민족인데 이들의 원주지(原住地)가 원제국의 건설자 몽골의 원주지와 겹칠(같거나 인근지역) 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속이 거의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타브가치는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사신이 와서 북위의 세조(世祖)에게 민족 발상지를 설명해주자 세조가 그 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축문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魏書』「烏洛侯傳」). 그런데 앞서 본대로 1980년 이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그 장소 가까이에도 ‘아리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축문이 발견된 장소는 내몽골 자치구인 후룬뷔일멍(呼倫貝爾盟) 어룬춘(鄂倫春) 자치기(自治旗)의 천연동굴인데 이 동굴이 바로 아리하(阿里河)진 서북 10km 지점이라는 것이죠[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97쪽]. 이 지역은 대체로 따싱안링산맥[대흥안령(大興安嶺山脈)]과 샤오싱안링산맥[소흥안령(小興安嶺山脈)]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⑤]은 이 지역의 위치를 표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위제국을 건설한 타브가치의 한 무리들이 결국은 후일 요나라나 원나라를 건설한 것으로 볼 수가 있죠. 그런데 [그림 ⑤]를 보면 부여를 기점으로 마치 서로 대칭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여에서 출발했다면 한 무리는 서쪽으로 한 무리는 남쪽으로 가서 ‘아리수’와 닮은 강가에서 터전을 잡다보니 우연하게도 비슷한 거리를 이동했을 수도 있겠군요. 지금까지 분석을 해보니, 이상한 일이 생겨났지요. 서울을 끼고 도는 한강도 ‘아리수’요, 압록강과 흑룡강도 ‘아리수’고, 『몽골비사』에서 칭기즈칸의 선조들이나 선비족이 떠나온 고향도 ‘아리수’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이야기는 그 동안 제 글을 열심히 읽으신 독자분이라면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제가 앞의 장(‘똥고양이와 단군신화’)에서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평양이라는 지명이 원래는 베이징(北京) 부근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 지명이 베이징 → 만주 즙안(集安) → 평양(평안도)에서 계속 나타난다고 말씀드린 바 있죠? 전문가들에 의하면 유목민들은 어떤 곳에 살다가 불가피하게 이동해야 하는 경우, 그 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자신의 뿌리나 토템과 관련된 신성(神聖)한 지명(地名)을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즉 유목민들은 이동할 때 자기 민족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들고 다닙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땅에 대한 집착도 없지요. 이것은 유목민들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떠도는 민족일수록 뿌리에 대한 집착은 한층 강하다는 사실만은 알아둡시다. (4) 땅 이름, 강 이름을 들고 다닌다니?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김 선생, 그런 게 어디 있어. 당신 말이야. 운이 좋아서 평양이나 한강 정도는 찾아냈겠지. 예맥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당신이 우리와 족보가 같다는 동호도 그런 게 있어?” 좋은 지적이십니다. 앞에서 지적한 북위가 바로 동호지요?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동호로 분류되는 선비ㆍ오환(烏桓)의 경우에도 이런 것은 많이 발견되고 오히려 그 때문에 현재의 우리민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좀 구체적으로 볼까요? 왕침의 『위서(魏書)』에는 오환의 영혼의 안식처로 ‘붉은 산[적산(赤山)]’이 나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오환은 본래 동호(東胡)이고 그 오환의 명칭이 오환산(烏桓山)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있습니다(「烏桓傳」).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오환산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요나라 때는 오주(烏州)에 오환(烏丸山)이 있었고(『요사(遼史)』「地理志」), 청나라 때 학자가 쓴 책에서는 아로과이비(阿魯科爾泌)부 오란령(烏蘭嶺) 서북쪽 1백여리 지점에 오료산(烏遼山 = 烏丸山)이 있다고 합니다(張睦, 『蒙古遊牧記』). 청나라 말기 학자 띵첸(丁謙)은 오환(烏桓)이 몽골어의 울라간(Ulagan)의 음역이라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丁謙, 「烏桓鮮卑傳地理考證」『蓬萊軒地理學叢書』1915 浙江圖書款叢書). 그런데 여기 나타나는 오환산들의 거리가 많이 떨어진 것으로 봐서 오환산이 여기저기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아리수’처럼 오환산도 유목민들이 그 지명을 들고 다닌 것입니다. 『요사』에 따르면 요나라의 성종(聖宗)은 오환산(적산)이 위치한 경주(慶州) 부근에 말을 세운 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愛其奇秀) “짐이 죽으면 이 곳에 마땅히 묻혀야겠군(吾萬世後當葬此 : 『遼史』「地理志」).”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오환산이란 죽으면 돌아가는 산으로 볼 수 있겠지요. 이 산은 쥬신의 마음의 고향이자 조상님들과 그 신령들이 살고 있는 곳이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환인들이 병들었을 경우에는 주로 쑥뜸과 달군 돌로 아픈 부위를 문질렀다고 하는군요(王沈,『魏書』). ‘단군신화’ 이야기가 생각나지요? (이 부분은 ‘똥고양이와 단군신화’를 참고해 보세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오환의 ‘붉은 산[적산(赤山)]’은 바로 쥬신의 성산(聖山) 부르항산(Burkhan Khaldun), 또는 불함산(不咸山)과 흡사한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박원길 교수의 책(『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68~72쪽)을 참고로 하시면 됩니다. 몽골 전문가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현재 몽골에서도 지명조사의 결과 부르항(Burkhan)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다고 합니다. 부르항 산의 특징이 버드나무가 자라며 사람들의 출입이 가능한 나지막한 산이라는 것이지요. 『몽골비사』에서는 “주변에 수풀이 우거지고 사냥감이 많은 곳(9, 102, 103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특징들이 오환의 거주지 곳곳에 나타나는 붉은 산[赤山]과 자연 환경적 특성이 거의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민족이 이동할 때 그 땅이름도 가지고 다니는 경우는 비단 쥬신의 역사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요. 앵글로색슨(Anglo-Saxon) 민족의 경우에도 영국의 요크(York = Yorkshire)를 미국에 옮겨온 것이 바로 뉴요크(New York)아닙니까? 캐나다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도 영국의 잉글랜드(England)를 옮겨 놓은 것이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도 영국의 웨일즈(Wales)를 옮겨다 놓은 것이죠. 미국의 버지니아(Virginia)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와 퀸즈랜드, 뉴질랜드의 퀸즈타운(Queens town) 등은 모두 영국 여왕을 기리는 땅이름이죠? (참 앵글로색슨 민족도 쥬신족 만큼이나 세상을 두루 다녔군요)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지명만으로도 민족의 역사의 일부를 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요? 구체적으로 범(凡)쥬신은 한족(漢族)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허베이(河北) → 요동 (遼東) → 만주 → 북만주 등으로 이동하여 부여가 건설되었고, 다시 북만주(길림, 또는 농안지역) → 압록강 중류(고구려)ㆍ어룬춘 아리하(몽골) → 한반도 중부 ‘아리수’ 유역 등지로 이동해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한족(漢族)들의 압박이 거세어지자 다수의 쥬신이 북만주로 이동하여 흑룡강을 제2의 근거지로 삼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흑룡강을 원(原) ‘아리수’라고 부릅니다. 흑룡(黑龍)이라니 기분이 좋지 않군요. 마치 적(敵)그리스도나 사탄과 같은 느낌을 주는 말이군요. 어쨌거나 ‘아리수’라는 이름을 토대로 쥬신의 이동 방향을 추정해보면 [그림 ⑥]이 됩니다.
그런데 ‘아리수’(흑룡강)로 쥬신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오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신구 세력의 갈등이 생기게 되자 신세력, 또는 개혁세력들이 ‘아리수’를 떠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들은 다시 옮겨간 곳에서도 또 그 지역에 흐르는 강을 ‘아리수’로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유목민들의 특성상 이들이 부여의 원(原) ‘아리수’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 하는 곳의 강 이름을 ‘아리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선비(북위)나 몽골·고구려 등은 부여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무리는 후일 북위(北魏)나 원(元) 제국을 건설한 몽골로, 또 한 무리는 고구려(高句麗)로 내려온 것이죠. (5) 누가 한강을 아리수로 불렀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서울을 끼고 도는 한강을 또 ‘아리수’라고 부른 주체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고구려요? 제가 볼 때는 아닙니다. 이 말은 부여의 세력들이 남하하여 잃어버린 ‘아리수’(현재의 흑룡강, 또는 아무르강)를 재현한 것이지요. 흔히 말하는 백제인(百濟人), 즉 ‘반도 부여인(夫餘人)’들을 말합니다. 사실 유사하지요. 서울의 한강은 흑룡강(아무르강)보다 폭은 좁지만 대도시를 끼고 도는 큰 강임에는 틀림이 없죠. 파리의 세느강이나 런던의 템즈강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결국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동호를 포함한 예맥족의 이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예맥족의 이동의 원인을 고조선을 기점으로 간단히 보고 갑시다. 한족(漢族) 세력이 요동(遼東)으로 몰려온 것은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원전 3세기 초로 연(燕)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무려 2천여 리나 되는 고조선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침공으로 고조선의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으며 세력이 매우 약화됩니다. 둘째, 진(秦)ㆍ한(漢)교체기에 위만(衛滿)을 비롯한 사람들이 대거 동쪽으로 밀려온 일입니다. 결국 위만이 고조선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지요. 셋째, 한무제(漢武帝) 때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고조선을 멸망시키는데 이 때 한(漢)나라는 고조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4개의 군[낙랑(樂浪)·현도(玄菟)·진번(眞番)·임둔(臨屯)]을 두려고 계획합니다. 이 가운데 실질적인 것은 현도와 낙랑이라고 합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세워지기까지 요동과 만주, 즉 쥬신의 고토를 이끈 나라는 부여(夫餘)입니다. 부여는 국가의 안전을 고려하여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반농반목(半農半牧) 국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여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여는 길림(吉林) 북쪽에서 북류 송화강을 따라서 동쪽으로는 장광재령(張廣才領),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기까지 만주의 가장 광활하고 넓은 평원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나라입니다. 부여국을 건국한 동명왕은 고구려ㆍ백제는 물론이고 발해에까지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여는 쥬신의 뿌리와 깊이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여는 안전한 곳에 터전을 잡고 한나라와 불편한 관계를 피하면서 거의 600년에서 700년 정도의 역사를 유지합니다. 이제부터는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예맥의 이동을 사서(史書)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퍼온거라 다 읽지는 못했지만 한단고기 내용 부정도 있는 것 같다는;; |
첫댓글 방대안 양의 글들 잘 보았습니다.' 김운회의 대쥬신을 참고로 작성한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엔 중국도 일본과 다를바 없어 보입니다. 요즘들어 속속들이 밝혀지는 홍산문화만 보더라도 우리들은 중국에서 선진문물을 전해준 스승국임을 틀립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는지 우리는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역사의 전환점에 놓였을때 마다 역사가 쪼그라드는 쪽으로만 발전해왔죠.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근처의 경제대국이 된것도 과거 역사를 돌이켜볼때 신기하기만 합니다. 아무튼 증산도의 말을 인용하자면 배사율을 범하는 것은 가장 중죄이니 언젠가는 그들은 그것에 대한 합당한 댓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꼼꼼하게 잘 읽어보았습니다! 중간에 끊기는 게 아쉽군요. 나머지 글이 있으면 계속 올려 주시길.....~~
너무 길어서 제카페로 스크랩했다가 나중에 보려니까, '탈퇴한 회원의 글은 스크랩할 수 없다'고 하네요, 그새 탈퇴하셨는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