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을이 언제나 그리고 모두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야만의 질서가 또아리를 틀고
이긴 자, 성공한 자는 모든 것을 누리고
약한 자는 그들의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데
불합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과 상황,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던 역사를
우리 모두는 등껍질처럼 짊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의식의 꿈틀거림
그것을 두고 우리는 일반 역사와는 다른 이름으로
정신사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정신사의 뿌리에는 신화나 설화가 있고
그것이 가지를 쳐 하나는 종교로,
다른 하나는 철학으로 자라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작용하여
음악과 미술, 문학과 같은 것들도 하나의 가지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은 것은
그저 막연한 추측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문학의 한 갈래인 소설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만의 질서가 당연한 것이라는 듯한 분위기의 소설,
거기서 나오게 된 소설의 한 갈래가 ‘비극’인지는 모르지만
그 비극마저도 그 안에 희망의 씨앗이 없다면
그런 소설이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물론 나는 소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문학이론이라고 하는 책들을 몇 권 읽기는 했고
제법 적지 않은 소설을 읽기도 했지만
소설 역사의 맥락을 짚을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니
쉽게 말해서 이 분야에 대해 무식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소설은 “재미있는” 것인 듯한데
무식한 입장에서 요구하는 것이
재미 너머에 “의미와 가치”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어쩌면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이걸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내가 보기에 길리언 폴린의 이 소설은
읽는 맛은 있지만, 의미나 가치라는 점에서는
줄 만한 점수가 별로 없다고 혹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설이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치졸한 생각이고
그걸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깊고 긴 울림을 지닌 이야기여야 한다는 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그다지 남을 것이 없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즐겨 읽던 중국무협소설이나
별 의미 없이 그냥 재미만 있던 만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읽느라고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될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렇게 혹평을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가서 사람을 죽이고 마는, 이 소설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통해 사랑과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소득이었으나
아무튼 나는 길리언 폴린의 소설은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