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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의 피란길 행사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행사에 보내주신 격려와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3~15일자 소식과 후기를 함께 보내드립니다.
(13日次) 4월 22일(木)
'고향길이 정다워라'
4월 22일(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흐리다. 7시 반에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9시 반에 여관 근처에 있는 이강수 고창군수의 선거사무실에 들러 잠시 환담하였다. 외가가 고향 면의 청도 김씨 문중이어서 서로 교분을 트고 지낸 사이라 집안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였다.
10시경에 이곳에서 나와 가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아산방면으로 걷기를 시작하였다. 큰형님께서 가문의 자랑인 화목과 우애를 다지며 무사히 고향마을까지 걸어가기를 축원하며 파이팅을 선창하시고 윤상조카의 차로 걷기행진에 동참하셨다. 안정님 숙모와 소영 동생이 새로 걷기에 합류하고.
고창읍에서 가까운 신상리 마을에 소를 키우며 영농에 종사하는 팔촌 동생이 살고 있는데 바로 도로변에 집에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구제역 경보가 내려 집에는 못 들어가고.
두 시간여를 걸어서 아산면에서 해리면 중간지점에 이르니 청도 김씨 세장비가 있는 제각이 있고 그 옆으로는 아버지의 학업을 적극 후원한 증조할아버지 처가인 아산면 월성마을이 가까이 있다. 그 조금 못 미쳐서는 복순 동생의 외가마을 오정동이 길 가까운 곳에 있었고.
걷기를 마무리하고 차로 해리면을 거쳐 선운사로 가는 길목 왕거리에 고모의 묘소가 있어 잠시 그곳에 들러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여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고모의 묘역을 몇 년 전 친정에서 정비한 후에 가끔 들러 가는 곳이다.
심원면의 도로변에 있는 식당에서 바지락 죽으로 점심을 들고 선운사 경내의 우체국수련원에 여장을 풀었다. 묵는 인원이 13명이나 되어 동백호텔에 별도로 방 하나 더 얻고.
내진 동생이 안산에서 수원, 정읍, 흥덕을 경유해서 저녁 무렵에 도착하여 함께 식사를 하며 동동주도 한잔씩 마셨다. 성균관대학교 후배인 광주여자대학 김일중 교수가 신문을 보고 뜻 깊은 행사하는 것을 알았다며 특산막걸리를 택배로 보내드리겠다고 전화를 하고 전북일보에서 내일 아침에 취재차 선운사 쪽으로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어느덧 우리 걷기도 마무리에 접어든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말처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
2010년 4월 22일 저녁
산벚꽃이 아름다운 선운사에서
(14日次) 4월 23일(金)
'오전 수업하는 기분으로'
4월 23일(금요일), 피란길 걷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숨을 고르며 여유롭게 보내고 있다. 오전 9시에 전북일보기자가 숙소인 선운사로 찾아와서 한 시간여 취재를 마치고 돌아갔다. 60년 전 피난길을 걸었다니 나이가 그렇게 들어 보이지 않아서 약간 의아한 느낌이라고 한다. 집안 식구들의 눈빛이 한결같이 선하게 보여서 좋은 인상이라는 말도 곁들여서. 다른 이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집안이라면 감사한 일이 아닌가?
취재 도중 어떤 감정이었는가 물어서 차령고개를 넘어올 때 가족 모두 숙연한 기분이었다는 말을 하려는데 목이 메어 눈시울이 붉어지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경우가 두세 번이나 되었다. 젊은 여기자가 너무나 감동적인 사연이어서 취재에 큰 관심과 열의가 느껴진다고 거듭 말하기도.
소영 동생이 아나운서의 멘트처럼 조리 있게 우리 가문의 행사가 성공리에 마무리 될수 있기를 바라는 출발인사와 함께 파이팅을 선창하고 10시 넘어 어제 걷기를 마친 아산-해리 구간 지점에서 걷기 시작하여 12시 반에 상하면에 접어드는 지점에서 오늘 걷기를 마무리했다.
도중에 광주의 천혜경로원 박영숙 사무국장과 박소영 간호사외 5명의 할머니 일행이 떡과 빵, 단술, 음료수 등을 한 아름 싸들고 방문하여 반가운 해후를 하였다. 손님들에게는 어제 맛있게 먹은 바지락 죽을 대접하고 우리는 정성들여 가져 온 음식들로 점심을 가름하였다. 강선옥 어머니는 낯선 잠자리와 식당을 오가는 거동이 힘드셔서 그분들과 함께 광주로 가시고.
해리에서 상하로 가는 길목에서 고향 이웃마을 장암에 사는 김기현이라는 분이 차를 세우고 쫓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농민운동하며 목포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는 등 여러 차례 걷기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 걷기행사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알고 있던 차에 이렇게 걷는 현장에서 뵙게 되어 반갑다는 말과 함께.
해진 동생 가족과 윤자누님, 명희 동생이 선운사로 내려오고 소영 동생은 이틀간의 참여를 끝내고 저녁에 광주로 돌아갔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전만 걷기를 하고 마치니 마치 오전 수업만 하고 공부를 마치는 학교 수업같이 힘들지 않아 좋다네. 그동안 열심히 걸었으니 여유를 가질 만도 하지 않은가? 오후의 자유 시간에 해수목욕탕에 몸을 담그기도 하고 힘이 넘치는 여자 분들은 경관이 좋은 도솔암까지 다녀오기도 하였다.
선운사 일원의 산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는 계절에 이틀씩이나 선운사 경내에서 머물 수 있음을 기뻐하며 피날레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바란다.
2010년 4월 23일 저녁
고향의 명찰 선운사에서
(15日次) 4월 24일(土)
'축제로 끝난 회상의 피란길 대장정'
4월 24일(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선운사까지 산책을 하고 돌아와 묵고 있는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들고 두 편으로 나누어 스타렉스 승용차로 16km가량 떨어진 상하면계 지점에 도착하니 고창읍에 사시는 큰형님 내외와 서울에서 내려 온 윤길 조카, 일산에서 내려온 공진동생 내외와 윤혁 조카 부부, 윤미 조카 등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 26명의 가족들이 원을 그리고 모여서서 윤길 조카의 선창을 따라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6km쯤 되는 고향마을까지의 마무리 걷기를 시작하였다.
한 시간 쯤 지나 상하면 소재지에 이르러 볼일들을 보며 쉬는 사이에 원중, 대석 두 아들과 영선 동생 내외가 서울에서 승용차로 뒤쫓아 내려와서 합류하였다. 피란길의 5남매가 다녔던 상하조등학교에서 기념촬영을 하자고 교정에 들어서니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들이 일행을 반긴다. 먼저 5남매가 찍고 다시 그 후에 학교를 다닌 동생들까지 동창생 모두 찍자고 하니 큰형님께서 80여 년 전 상하소학교 1학년을 다니셨다며 기쁘게 참여하신다.
이번 걷기에서 맹위를 떨친 안청도(청도 김씨가 아닌 여성들) 일행이 우리도 따로 한 커트 찍자고 나서고 일행 모두가 함께 포즈를 취하는 등 웃음이 만발하는 대가족의 분위기가 너무나 평화롭다. 초등학교 주변의 도로가 잘 정비된 터에 꽃가루가 뿌려져 그 위를 즈려밟고 가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예정시각에 정확히 맞춰 고산의 고향집에 당도하니 서울에서 숨차게 달려온 봉희 동생의 딸 수진, 효진 자매와 사위 이승윤 군이 합류하여 총 33명의 가족이 도착행사에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윤길 조카의 사회로 규진 큰형님의 환영인사(증조부 때부터의 가문의 내력과 6.25 당시의 힘들고 어려웠던 상황 설명이 젊은 세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윤자누님을 비롯한 태호, 한용, 행진, 명희 등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당사자들의 소회, 피란길에 나섰던 5명과 걷기행사에 동참하여 맹활약으로 힘을 보탠 복순, 원진, 공진, 봉희 동생, 김혜경, 방정숙, 이명례 제수 등 완주한 이들에게 하용 공 후손모임의 이름으로 공로패를 증정하였다.
『 회상의 피란길 완보 기념패 』
기간 : 2010. 4. 10 - 4. 24(15일간)
구간 : 서울 - 고창 800리길(320여km)
김태호. 김혜경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런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하여 당시에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하용 공 후손 두 가족들이 전쟁초기에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8월말 고향인 전북고창으로 800여리 길을 18일에 걸쳐 험난한 피란길에 올랐다.
피란길을 떠날 때 세 살 - 열두 살의 어린이들이 이제 장성하여 60-70대의 노년이 되어 당시 피란을 같이 가지 못하고 헤어져 여태 생사를 모르는 김재철 아버님의 생존을 기리고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북한 의용군에 징집되어 헤어진 후 57년 만인 2007년 5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시 소식을 접하게 된 김찬진(1996년 사망) 형님의 북한거주 가족과 한 울타리를 이루고 온 겨레가 하나 되는 통일 시대의 도래와 후손들의 번영을 염원하는 뜻을 담아 60년 전의 피란길을 회상하는 걷기 행사를 두 분은 무사히 마치시어 이에 기념패를 드립니다.
2010년 4월 24일
만석 김하용 공 후손모임
도착행사를 마치니 12시가 넘었다. 고향집 뒤 언덕 너머에 있는 증조할아버지 내외 묘소에 들러 성묘하고 면소재지의 대성식당에서 점심을 든 후에 공음면 구수리에 있는 선영에서 시편 15편 봉독과 찬송가 492장을 부른 후 기도로 간략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성묘행사를 마무리하니 오후 3시가 가깝다. 바쁜 일정이 있는 이들이 먼저 떠나고 여러 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각기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기로 하며 대장정 마지막 날의 공식행사를 마무리하였다.
어렸을 때 같이 자란 동네의 또래들이 다음 달에 고향에서 만나 정담을 나누며 회포를 풀기로 하였는데 우리 행사로 여러 명이 내려와 있으니 이 기회에 만나는 것이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고 모임날짜를 오늘로 앞당겼다고 한다. 뒤늦게 도착하는 이들을 보지 않고 가면 서운하지 않겠는가,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녁까지 기다려 구시포에서 식사를 함께하고 광주로 돌아오니 저녁 10시가 넘었다. 일부는 벌써 서울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고.
지난 8일에 광주를 출발하여 17일 만에 돌아오니 몸은 고단하나 큰일을 치려 낸 성취감으로 마음은 뿌듯하다. 행사에 참여하고 성원한 우리 가족 모두 그러하리라.
가문의 새로운 역사를 굵직하게 새긴 15일간의 회상의 피란길 대장정이 아무런 사고 없이 집안의 화목과 우애를 다지고 긍지와 보람을 되새기며 나라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큰 축제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가족은 물론 친지와 단체 등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2010년 4월 25일 오전
광주의 집에서
Epilogue
'회상의 피란길 후기'
4월 25일 오전, 3주 만에 교회예배에 참석하여 교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 예배 때 피란길 걷기 행사내용을 한 시간여 교인들에게 이야기해 드리며 15일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후 4시경에 집에 돌아와 두 시간 가량 자고 일어나니 쌓인 피로가 가신듯 몸이 가볍다.
오전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머니가 서둘러 일어나셔서 내게로 오며 같이 가자고 말씀하신다. 이틀간 고창에 다녀오신 후 걷기가 불편하고 약간 불안하신 표정이다. 그래도 선운사에서 전북일보 취재현장에 동석하셔서 사진도 함께 찍고 기사에 이름도 오르셨으니 의미 있는 나들이라고 생각한다.
4월 26일, 아침에 일어나 한 시간 가량 걷기를 하고 오전에 이번 행사에 취재 보도한 언론사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감사의 메일을 보냈다.
' 금번 저희 회상의 피란길 걷기행사에 깊은 관심과 큰 성원을 보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희는 지난 24일 오전 11시에 전라북도 고창의 고향마을에 무사히 도착하여 온 가족이 함께 한 가운데
숙연하면서도 축제분위기로 걷기행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나라와 사회에 큰 이슈가 많은데도 저희 행사를 비중 있게 다루어 주신 것을 가문의 큰 광영으로 새기고
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에 밑거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귀사와 기자님의 앞날에 기쁨과 보람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광주에서 김태호 드림'
이에 대하여 중앙일보 기자가 회신을 보내왔다.
'참 좋은 소식이네요.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가족이 한 마음으로 피란길을 걷는 모습이 제가 근래에 봤던 어떤 봄꽃보다 예쁘고 아름다웠습니다.
앞으로도 교수님 가정에 사랑과 화목이 늘 깃들길 기원합니다.
중앙일보 한은화'
오전에 컴퓨터 가게에 가서 중앙일보 기사를 컬러로 20부 복사했다. 내가 쓴 글을 책자로 제본하는 작업을 자주하여서 친숙한 사이인데 중아일보 기사를 보았다며 크게 반기고 컬러복사도 무료로 해주어 고마웠다. 좋은 종이로 컬러 복사하니 신문원본보다 보기에 좋고 보관도 편할 듯하니 원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컬러복사해도 좋으리라.
점심때는 광주대학교 퇴직교수회장이 동료 교수 몇 명과 함께 식사를 초대하여 큰 행사를 성공리에 마무리 한 것을 축하해주었다.
내일의 강의와 주일학교 성경공부 자료 준비 등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 가족 모두 평상의 일에 열심 하기를.
* 언론보도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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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자식들과 세간을 손수레에 싣고 800리 피란길에 오르셨던 아버지. 한국전쟁 60년 맞은 해, 당신의 길 되짚어보니 눈물이 납니다."
김태호(66) 광주대 명예교수의 가족들은 24일 고창군 상하면 고산마을에서 '6·25 60주년 회상의 피난길'도보 여행을 마무리했다.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주민센터 앞 광장에서 출발한 지 14일 만이다.
'잊어버리고 살면 안된다'고 피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던 김교수의 어머니 강선옥씨(91)는 치매를 앓으면서 조금씩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래도 자녀들이 무엇을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듯 60년 전 김교수의 아버지가 기록해 놓은 피란 길 도보여행 마지막날 '나는 안데리고 갈래?'하며 동행을 자처했다.
"짐도 없이 맨몸으로 걸어봐도 꽤 힘이 들더라구요. 어린아이와 짐까지 들고 피란 간 부모님을 생각하면 통일에 대한 마음이 한 없이 애절해 집니다."
1950년 8월 29일, 김교수의 아버지 고 김재순씨(당시 43세)는 7남매를 데리고 서울서 출발, 공주~부여~논산~김제~부안을 거쳐 고향인 고창까지 총 320㎞에 이르는 피란길을 떠났다.
지난 2007년 5월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당시 의용군으로 나갔던 김교수의 둘째형이 1996년 북한에서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북쪽 가족들과의 만남도 이뤄졌다.
이후 김교수가 가족 모임에서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를 기리고 고생하신 부모님을 추억하자'고 제안, 함께 피란길에 올랐던 남동생 행진(63)씨, 사촌동생 한용(64)씨를 중심으로 가족 10명이 도보여행에 함께했다. 또 직장일에 바쁜 자녀들은 주말에 내려와 도보여행에 동참했다.
모든 여건이 나아졌다고 해도 60을 훌쩍 넘긴 노인들에겐 하루에 20~25㎞씩 걷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이에따라 김교수 가족은 1년전부터 걷기 연습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지난해 11월에는 사전답사도 마쳤다.
김교수는 "송탄에서 평택으로 향하던 길에서는 국도와 철로가 가까워 수시로 기차가 오가는 것을 보면서 통일열차가 북녘땅까지 질주 할 수 있기를 기원하기도 했다"며 "가족을 보고싶은 날이면 아무때나 서로 찾아가 만날 수 있는 통일이 빨리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첫댓글 장하십니다.대단하십니다. 염원의 남북통일이 반드시 오리라 싶은 희망과 기대로 나역시 마음으로나마 함께 걸은 기분입니다. 실제로 동행에 잠시라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잘 지내신다니 주님의 은혜요 믿음의 형제들에게 더 없는 기쁨입니다. 할렐루야! 더욱 건강하시고 다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