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글
김학 수필가님의 안타까운 부음을 듣고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김학 선생님은 과거 전라북도 군산에서 방송하는 ‘서해방송’ 프로듀서로 일했습니다. 저는 고향이 충남 청양 장평이라 충청지역인 대전방송의 전파보다 군산에서 방송하는 서해방송 라디오의 전파가 잘 잡혀 서해방송을 즐겨 들었습니다.
청년시절 시골에서 잠시 농사지을 때, 서해방송국에 글을 보내 방송된 적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수필문단에서 김학 선생님을 뵙게 됐습니다. 문예지에 발표되는 수필작품을 통해 자주 뵈었고, 수필문학 세미나에서도 몇 차례 뵙기도 했습니다.
故 김학 수필가
특히 충북 수안보에서 열렸던 1박 2일 일정의 전국 수필문학 모임에는 수필가 육상구 선생님의 권유로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 황토방갈로에서 하룻밤 숙박하면서 서로 기억나는 작품에 대해서도 친숙하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김학 선생님과는 이메일도 자주 오갔고, 페이스 북을 통해 서로 안부도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학 선생님은 제가 대전수필문학회장으로 있을 때,『수필예술』 동인지를 받아보시면 꼭 답장을 주시곤 하였지요. 답장뿐만 아니라 신작 수필을 이메일로 보내주시곤 했습니다.
▲ 고 김학 선생님이 생시에 보내주신 이메일 - 따뜻하게 교류하는 수필가들이 많아서일까, 대전수필문학회에 대한 관심이 남달리 크셨다.
아직 젊으신 줄로 알았던 김학 선생님이 79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작품 창작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전국 수필문학인들과의 도타운 인정 교류도 활발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김학 선생님의 활동 무대인 전북지역 수필문학 애호가들에게는 훌륭한 글짓기 지도 선생님 역할을 하셨는데, 너무 안타까운 연세로 별세하시니, 수필계의 큰 별 하나가 떨어진 것입니다.
생시에 따뜻했던 인품을 존경하며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2021년 1월 30일
대전에서 윤승원 올림
다시 읽어보는 고인의 수필
반성문 쓰는 아버지
김 학(수필가)
나는 2남 1녀의 아버지다. 그 아이들의 나이는 어느새 40대에 접어들었다. 나는 자녀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방송국 프로듀서로서 직장 일에 바빠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을 내지 못했다.
또 문학을 한답시고 글벗들과 어울려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불평불만 없이 잘 자라주었다. 그러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뒤 성적이 상위그룹에서 머물렀으니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키우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사실 나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몰랐다. 아버지 역할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인 31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상여가 나갈 때 어머니는 큰아들인 나에게 삼베옷을 입히고 대나무 지팡이를 들려주며 상여 뒤를 따라가라고 하셨다. 나는 부끄럽다며 그 상복을 입지 않으려고 버둥거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 그런데 그 때는 그것이 불효인 줄도 몰랐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나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배울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가 외아들이셨기 때문에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도 계시지 않았으니, 곁눈질로 배울 수도 없었다. 내 아들 형제가 아버지 노릇을 잘하는 걸 보면서 나 스스로 반성하곤 한다.
내가 아버지 노릇을 잘못했기에, 두 아들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지 많은 관심을 쏟는다. 며칠 전에는 백승종의『조선의 아버지들』이란 책을 세 권 사서 아이들에게 우송해 주기도 했다.
그 책에는 조선시대의 이름난 아버지 12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책을 읽고 나한테서 배우지 못한 성공적인 아버지 노릇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조선조 청백리 정갑손이란 대쪽영감이 있었다. 자신은 조상대대로 초가집에 살며, 무명 이불을 덮고 살았다고 한다. 그가 함길도 감사로 근무하던 중 출장을 갔을 때 향시(鄕試)가 열려 그의 장남이 장원을 차지했단다.
출장에서 돌아온 정갑손은 향시 합격자 명단으로 확인하다 아들 이름을 발견하고 합격을 취소해 버렸다. 그러자 그 아들은 경상도 외가로 내려가 다시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고, 한양에서 치른 과거에서도 장원급제를 했다고 한다. 본 실력으로 장원을 했는데도 오해를 살까 봐 그렇게 경계했으니, 얼마나 결백한 사람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란 말을 잊고 살았다. 그 호칭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부나 숙부가 계셨더라면 그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했을 텐데 그런 기회도 나에겐 없었고 그 ‘아버지’ 대신 ‘어머니’란 호칭은 다른 사람보다 배 이상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전남 강진에서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은 아내가 보내 준 붉은 치마에 편지를 써서 책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냈다. 그것이 이른바 유명한 『하피첩』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비록『하피첩』을 만들어 줄 수는 없어도 이렇게 수필로서 내 마음을 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에게 밥상머리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밥상머리교육-유언(1~49)]을 시리즈로 써서 아이들에게 카톡으로 보내주고 있다.
나의 아이들이 나의 이 뜻을 마음에 깊이 새겨주면 좋겠다. 나는 팔순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아들딸에게 아버지로서 때늦은 반성문을 쓰고 있다.
■ 수필가 김학 :
1943년 전북 임실 출생인 고인은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전주해성중·고 교사와 서해방송 프로듀서, KBS 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을 지냈다.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전북펜클럽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전북 수필계의 원로인 고인은 40여 년간 수필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다. 전북대 평생교육원, 안골노인복지관, 꽃밭정이노인복지관, 신아문예대학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저서로는 <손가락이 바쁜 시대> <수필아, 고맙다> <지구촌 여행기> 등 수필집 17권,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등 수필평론집 2권이 있다. 목정문화상, 전주시예술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한국현대문학 100주년 기념 문학상 수필집 부문 금관상, 원종린 수필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첫댓글 수필문학계 거목이신 김학 수필가님께서 어제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