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77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자목련’]
자목련
이건 무슨 그리움일까
가슴 속 자수정 된 옛사랑
신기루로 피어나네
내게도 목련 닮은 민얼굴*이 있었지
서러운 소맷자락 누항에 펄럭일 때
보랏빛 자욱한 청춘의 강
억센 세월의 망루로 휘돌아 갔지
이건 보라색 옛 손수건의
슬픈 미소들
퍽이나 가난한 그리움으로 남은
(2005 . 4 . 25)
*민얼굴 ~ 꾸미지 않은 수수한 얼굴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자목련>은 봄날에 피어나는 자목련의 짙은 보랏빛을 보며, 지나간 청춘과 옛사랑의 기억을 애틋하게 반추하는 서정시입니다. 화려함 뒤에 슬픔을 간직한 자목련의 이미지를 시각적, 정서적 대조를 통해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의 매력을 몇 가지 핵심 지점으로 짚어보겠습니다.
1. 색채의 변주와 정서적 등가물 (자목련 - 자수정 - 보랏빛 – 보라색)
시인은 '자목련'이라는 대상을 단순히 자연물로 두지 않고, 화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삼습니다.
⚫자수정 : 가슴 속에 단단하게 굳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는 '옛사랑'을 비유합니다. 단단한 광물(자수정)과 금방 지고 마는 식물(목련)의 대비가 묘한 여운을 줍니다.
⚫보랏빛 자욱한 청춘의 강 : 보라색은 신비롭지만 동시에 우울하고 서글픈 정조를 띱니다. 시인은 청춘의 시기를 이 보랏빛 강물에 비유하며 화려함과 쓸쓸함이 공존했던 그 시절을 시각화합니다.
⚫보라색 옛 손수건 :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손수건은 눈물을 닦아내던 이별의 매개체이자, 슬픈 미소를 머금은 과거의 구체적 증거물입니다.
2. '민얼굴'과 '누항'의 대비: 가난했지만 순수했던 청춘
"내게도 목련 닮은 민얼굴이 있었지 / 서러운 소맷자락 누항에 펄럭일 때“
화자는 자목련의 순박한 피어남을 보며 자신의 꾸밈없던 시절, 즉 '민얼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 청춘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서러운 소맷자락'과 '누항(좁고 지저분한 거리, 즉 가난한 삶의 공간)'이라는 시어를 통해, 물질적으로는 퍽 핍진하고 서글펐던 과거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원망하기보다 '목련 닮은' 순수함으로 기억하며, 가난했기에 오히려 더 애틋했던 사랑의 깊이를 더합니다.
3. '신기루'와 '세월의 망루' : 시간의 덧없음
과거의 기억은 봄날의 자목련처럼 '신기루'로 피어오르지만, 거칠고 무정한 시간인 '억센 세월의 망루'를 거치며 흘러가 버렸습니다. 붙잡을 수 없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휘돌아 갔지'라는 영탄조의 어조에 잘 녹아있습니다.
4. 맺음말 : '가난한 그리움'의 미학
마지막 행의 "퍽이나 가난한 그리움으로 남은"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입니다. 문장이 명사(그리움)로 미완성된 채 끝나면서, 독자에게 그 그리움의 깊이를 헤아려보게 만드는 여운을 남깁니다.
여기서 '가난한 그리움'은 중의적입니다. 과거의 삶이 가난했기에 품게 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희미해지고 소박해진 그리움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쪽이든 화자의 절제된 슬픔과 담담한 수용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 총 평
<자목련>은 봄날의 짧은 개화와 낙화를 보며 인생의 한 시절을 돌아보는 정통 서정시의 미덕을 잘 보여줍니다. 화려한 수사학 대신 '보라색'이 주는 일관된 시각적 이미지와 감정의 절제를 통해,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을 법한 '빛바랜 손수건 같은 첫사랑'의 기억을 따스하고도 서글프게 복원해 낸 수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