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뜨개질을 시키면 하지 않던 아이가 혼자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로 “뭐해?” 하며 다가온다. “우리 딸 필통 만들고 있지.” 곧바로 “나도 해볼래.” 이럴 때 “그럴래?” 하며 실과 바늘을 내민다. 꽤 오래 잡고 있는 딸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딸 의외라고? 아니다. 갖고 있었다. 단지 밖으로 꺼내 놓을 타임을 맞추지 못했거나 명령 또는 교육의 이름으로 방해를 받아서 내놓지 못했을 뿐이다. |
7. 관심 “어떤 밥, 무슨 반찬, 무엇을 먹든 언제나 ‘잘’은 꼭 먹어야 한다.”(어느 아빠) 관심의 크기나 깊이에 따라서 삶은 사뭇 달라진다.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발전의 첫 출발지는 관심이다. 호기심도 상상도 모두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는 과학이나 예술로 발현된다. 모든 위대함은 바로 작은 관심에서 비롯된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주어진 일만 하는 피동적인 삶을 사는 죽은 사람과 같다. 동물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모든 시작이 그렇듯이, 모든 출발이 그렇듯이, 관심을 무엇에 두느냐, 그리고 이것에 얼마나 열중하느냐에 따라 관심은 전혀 다른 결과로 발전하고 변모하게 된다. 관심에 집중할 줄 아는 아이는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할 여지가 누구보다도 더 높다. 여기서 성공이란, 단순한 지위라는 오름의 위치나 가진 것의 차지라는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성공은 자기의지에의 결과로서, 성공이라기보다는 성취도라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듯하다. 고로 성공은 만족이며 행복으로 채워질 때 그 성취도를 높일 수 있다. 다시 들어보자.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아인슈타인) 만들어지는 것 관심에 집중할 수 있는 아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물론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것은 있으나 이는 부모나 아이가 자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말 그대로 타고나는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인간의 힘에 미치지 않아 무능할 뿐이다. 절대자나 신, 그리고 우연이나 운(운명)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나를 버리는 포기·체념일 뿐이다. 많은 것들이 삶을 좌우지할지라도 인간을 바꾸거나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의지밖에는 없다. 자기의지야말로 가장 인간답다. ‘나의 외모와 당신(당시 유명 배우)의 머리를 닮는다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아이가 나올 것이오.’(버나드 쇼) 유명 배우가 버나드 쇼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당신의 머리와 나의 외모를 닮은, 똑똑하고 잘 생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이에 대한 버나드 쇼의 대답이다. 소위 머리 좋다고 하는 부모 사이에서 천치가 나오기도 하고, 부모를 보면 전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도 버젓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뛰어난 아이라 해도 그것만 믿고 내팽개쳐 버린다면 그 아이는 타고난 머리만큼의 삶은커녕 더 형편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태어나서의 어릴 적 천재는 오히려 천치바보를 만들 수가 있다. 이래서 뇌신경학자들은 천재를 자폐증환자처럼 보통 인간과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아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이에게 주어진 천재는 평생의 올가미가 되어 결코 긍정적인 힘이 되어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짐이 된다. 이래서 관심에 집중하는 아이는 ‘만들어진다’고 했다.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이다. 만들어지는 곳의 첫 공장은 당연히 가정이다. 그 공장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공장의 성격과 성공은 달라진다. 운영자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다.
관심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결국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건축물에 ‘무샤라비에’라는 덧문이 있다고 한다. 완전히 막힌 목조 발코니의 덧문으로, 밖에서 비쳐드는 빛을 은은하게 실내로 받아들이면서도, 방 안이 바깥에서 들여다보이지 않게 한 덧문이다. 방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선 안을 볼 수 없게 한 가림막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을 이 ‘무샤라비에’와 비유해본다. 내 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남은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 모든 관심은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이래서 관심은 신비로움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에 있어 신비로움을 갖게 하는 것이 천재성보다 훨씬 더 값어치를 한다. 잘 또는 제대로 한 아빠가 외국에 나가 공부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글, “어떤 밥, 무슨 반찬, 무엇을 먹든 언제나 ‘잘’은 꼭 먹어야 한다.”라는 글귀가 ‘관심’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한 아빠의 자식에 대한 관심이 느껴지고, 이 헤아림에서 깊은 사랑도 느껴진다. ‘잘’ 먹어야 한다. ‘잘’을 먹어야 한다. ‘잘’이란 한 어절의 짧은 단어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잘’이란 ‘제대로’와 같다. 이런 뜻에서 ‘관심’도 마찬가지다.
어른의 그것과는 달리 어린이들의 관심은 다양하다. 이러한 수많은 관심들을 아이의 것으로 ‘잘’ 그리고 ‘제대로’ 이끌어주는 일이 부모의 역할일진대, 손쉽게 전자공장의 그것처럼 컨베이어작업대에 올려놓을지, 까다롭고 힘들더라도 부모자식 간의 상호 나눔의 공감대로 이끌어갈 것인지는 아이들을 만들어가는 공장주인 부모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레디메이드(머신메이드)의 아이, 또는 핸드메이드의 아이로 구별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아이를 이나저나 똑같은 공산품·기성품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두리양식장에 가둬두고 크기나 모양이 다 똑같은 양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업중심의 정책으로 만든 아파트라는 기계적 공간은, 인간의 최소한의 생물학적 활동의 순환체제만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아파트에서 오래 살면 살수록 생리적 욕구만을 충족시키려는 동물적 본능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떼오도르 폴 김) 거의 모두 아파트에서 사는 우리들은 이 말에 뜨끔하지 않는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은 가장 동물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생리적 욕구만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인간의 재능 고대 그리스 신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재능을 동시에 선물했다고 한다. 하나는 물건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창조성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창조성이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있어서 우리 부모는 이처럼 사랑스러운 우리의 자식을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에 맞춰 ‘잘’ ‘제대로’ 이끌고 있는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성품을 창조적 산물로는 보지 않는다. 해야 할 마땅한 일이라 해도 의무나 책임에서만 한다면 부모의 자식사랑도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백묵의 역할은 칠판의 글자가 되어야 하듯이, 제대로 된 임무란 제자리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의지의 발현이다.’(햐쿠조오) 그저 곱게 다듬어져 보기만 좋게 곽 안에 넣은 채로인 백묵으로의 자식에 만족할 것인가. 쓰임으로 인해 다라질 백묵으로서의 자식으로 곽에서 꺼내 놓을 것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기계구입비 등등의 장부목록과 구매가 아니라 구입한 장비의 사용이다. 행동이며 실천이 되어야 한다. 학벌이나 자격증이 아니라 지식의 행동화가 중요하다. 책장 안의 책일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책장 밖으로 나오게 해야 비로소 지식이 된다. 백묵마저 이러하거늘, 하물며 인간이, 더군다나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아이들을... 어느 학생의 꽃 유치원으로 책 한 권이 배달돼 왔다. 대학생이 된 유치원 제자가 보내왔고 그 제자가 저자인 책이다. 어린이용 꽃에 관한 책이다. ‘창의성은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에게서 나온다.’(티나 실리그) 어리다하여 책을 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움직임의 강도에 따라 창의성도 비례할 것이기 때문이다. 덜 움직이려드는 어른들은 적어도 창의성에 관해 어린이와 청년보다 어리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의적이지 못한 어른들이 어린이들이나 청년들의 생각까지도 붙들고 지배하려고 든다. 그 제자를 일일선생으로 유치원으로 초대했다. 오빠 같고 형 같은 대학생 선생을 유치원생들은 교사들보다 더 좋아하며 반겼다. “내가 너희 나이 때 꽃이나 동물들을 무척 좋아했단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것을 책으로 낼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내가 가장 힘들어 했던 중학생 때 쓴 거란다.”
| | | ▲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주고자 하다보면 나 자신이 먼저 그 재미에 더 빠져든다. |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는 밤 12시까지 책상 맡에 앉아있었기에 부모는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은 그렇지가 않았다. 반에서 성적은 중간 이하였다. 걱정이 된 엄마는 아들의 책상서랍을 열어보게 된다. 여기서 발견한 꽃 이야기의 글들, 아들이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책상에서 학교공부보다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던 게다. 아빠에게 얘기했고 엄마는 혼내줄 것을 요청했다. 아빠도 아들의 꽃 이야기를 읽는다. 그러나 아빠는 아들을 혼내기보다는 꽃의 전설에 관한 다른 책을 구해 아들에게 선물한다. 선물할 책 앞머리에 노자가 한 말을 써넣어 아빠의 생각으로 갈음했다. 분명한 비전 ‘삶의 기술을 진정 터득한 자에게는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 정신과 육체, 배움과 휴식, 사랑과 종교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모든 일에 분명한 비전을 좇아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일하고 있다고 하든 놀고 있다고 하든 개의치 않는다.’ 이후 아들은 자기의 글에 꽃의 전설을 추가하게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공부에 열중하게도 되었단다. 그러니까 내가 어린 너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노는 것도 아주 아주 깊이 빠져들어 놀라는 거야. 어중간하게, 대충대충 놀지는 말라는 거야. 대충 놀면 어중이떠중이가 된다. 내 말을 알아들을까? 하여튼 노는 것도 일등으로 놀아봐!”
번듯한 대학교의 2학년 재학생으로 불쑥 커서 다가온 제자는 옛 선생에게 부모님이 고맙다고 했다. 아빠의 책 선물과 그 한 마디로 자기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변화하게 했으니 고맙고, 엄마가 자식들의 정서생활을 고려하여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게 해준 것도 고맙다고 했다. 거기서 꽃과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것’이다. 만들어짐이 일방적으로 행해진다면 작위적이 될 것이며 이것은 어떤 결과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른 방법은 아니다. 이는 틀(프라임)에 끼워 넣는 것으로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만들어짐과는 전혀 다르다.
다윈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법률가로 만들어지려했다. 그러나 아들 다윈이 따라와 주지 않자, 법대에서 신학대학으로 전학시켜 목사의 길로 아들을 만들려고 했다. 당시 법률가나 목사는 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빈둥거리며 지내야 했다. 목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연에 흥미를 쏟아 부었다.
기회가 온다. 배를 타고 남아메리카로 가게 되는 데 그의 나라 영국에서는 볼 수 없는 생물들을 관찰하는 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배를 타는 일도, 새로운 생물들을 만나는 일도 남들은 모두 다 귀찮아하며 기피했지만 다윈은 달랐다. 온 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몇 달 동안의 거칠고 지루한 항해로 지쳐 쉬고 있을 때 그는 관심을 갖던 새로운 세상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 고향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그의 연구는 계속되었으며 오히려 깊이를 더해갔다. 끝내 다윈은 진화론을 탄생시킨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그의 욕심으로 법률가나 목사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 다윈은 스무 살이 지나 관심 분야에서 기회를 얻자 이를 놓치지 않고 온 힘을 쏟아 그가 뜻하는 바를 이뤄내고 말았다. 이것 역시 관심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년이 되어 스스로 찾아낸 것이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관심이 깊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특별하고도 꾸준한 관심이 그를 만들어냈다. 이런 경우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심 또는 주체 꽃의 저자인 제자는 다윈의 가정과는 달리 가족 모두에 의해서 함께 만들어진 더욱 바람직한 경우이다. 하지만 ‘만들어지는 것’에도 그 주체는 언제나 ‘나’이다. 그 주체가 내가 되지 않고 부모나 잘 나가는 다른 사람이 기준이 된다면 나는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 ‘만들어진 나’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만들어진 나’의 기둥은 반드시 ‘나’이어야 한다. 부모가 이러한 ‘나’의 조언자가 되어주는 바, 조언자는 기둥을 지지하고 지탱해주는 벽이요 대들보이다. 기둥이나 대들보는 버팀목으로써 집 전체를 든든하게, 결국 한 개인을 튼실하게 만들 수 있다. 기둥과 대들보의 축조는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또 제자나 다윈 모두 실패한 경험을 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실패에 실망하지 말자. ‘변덕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혼동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삶이란, 흔들리는 자신의 중심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이다.’(그라시안) 아직 미숙하고 어린 나이에는 중심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누굴까? 아이에 가장 순수하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다. 바로 부모가 아닌가.
또 제자나 다윈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도피하지 않았다. 관심은 대상(상대)에 대한 열의나 열정이지만 실패하더라도 도피하지 않는 꾸준함으로 이끌어갈 때 관심은 진정해지고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관심은 내가 마주보는 상대가 아니라 결국 내가 스스로 맞잡은 내가 된다. 이럴 때 관심은 바라보기만 하는 관심거리로만 남아있지 않는다. 내 안으로 들어온 관심, 바로 내 것이 된다.
아이들에게도 주체성을 품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에게 너무 이르다? 천만의 말씀. 어린 아이들을 들여다보라.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게 될 것이다. 지지 않으려하고 굽히지 않으려하고 제 주장도 펼 줄 안다. ‘싫어’는 그 하나다. 누구나 ‘싫어’라는 말은 ‘엄마·아빠’ 다음으로 배우는 단어라고 한다. 말을 막 하려드는 만 두 살 즈음이다. ‘싫어’는 자존심의 다른 표현이다. 이를 부모들이 드세다거나 고집을 부린다거나 버릇없다고 폄하한다. 이것이 잘못이다. 아이들에게도 자기의지가 있다. 단지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누가 다듬어줘야 할까. <아빠 먼저> 누구더라? 일곱 살 진하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자기 물건이나 친구와 함께 논 장난감들을 정리하려 들지 않는 진하인데, 이렇게 가지런히 신발을 모아놓고 덮개도 제자리에, 그리고 문까지 꼭 닫고나오다니... 진하가 다녀온 화장실 풍경에서 아이의 다른 면을 본다. 다른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진하의 행동을 칭찬해주었다. 후에 물었다. “화장실에서만?” 현관문이나 딴 곳에선 달랐다. 집에서도 달랐다. 벗어던진 신발짝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내팽개치곤 하던 그 전 그대로였다. 신발뿐만이 아니다. 가방도 옷가지들도 마찬가지다. 워낙 힘이 넘쳐나는 아이라 주변이 어수선하다. 정리만 잘하면 정말 멋진 아이인데... “아빠가 화장실을 깨끗이 쓰라고 했어요.” “아빠한테 배운 거로구나? 진하 아빠 정말 멋지다. 화장실 말고 다른 곳에선?” “아빠가 얘기 안 했어.” 아이들은 아직 구체적으로 확장해서 사고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가. 교육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이다. 교육이라 해서 학교나 책을 통한 교육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엔 아이의 주변 모든 것이 교육의 장이 된다. 아빠가 현관 등 다른 곳에서도 솔선수범을 보였다면 분명히 그대로 따라 했을 진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다. 진하가 먼저 말을 건네 온다. “선생님, 화장실이 깨끗하니까 지저분하게 하고 나올 수 없었어.”
아이들의 잘못된 버릇에 대해 아이들을 절대 탓할 게 아니다. 몸이든 두뇌든 굳어져있지 않아 유연한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을 갖추게 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고 유연하기에 쉽게 습관화할 수가 있다. 하지만 자유롭게 키운다는 그릇된 생각으로 이를 방치해버린다면? 자유란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두는 건 절대 아니다. 이를 방치해두면 정신이 산만해서 집중력이 없는 아이, 나아가 자기만 아는 아이로 굳혀질 수가 있다. “요즘 아이들은”, 하며 혀를 차며 말하는 어른에게 먼저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 말을 하는 어른들만 모른다. 그 말은 ‘요즘 어른들은’과 같다. 누워서 침을 뱉는 일이라는 것도 침을 뱉어내는 그 자신만 모른다. 어릴 때 갖추지 못하면 평생으로 이어지는 게 어릴 때 습관이고 버릇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있다. 다시 더 말하지만 자유분방하게, 구속 받지 않게 키우겠노라고 해서 아이의 잘못된 버릇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물론 자유는 중요하다. 하지만 자유로만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다시 되돌려놓기 여간 쉽지 않은 버릇으로 고착시키고 만다. 속담에서 세 살이라고 하지만 어린이 때에 이미 만들어진 습관은 평생을 좌우하는바, 부모나 어른들의 행동거지가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세 살 아이가 무엇으로 배우겠는가. 무엇을 보고 듣고 따라하겠는가. 어린이집의 한 선생을 아이들이 보면,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자고 했지만 선생이 거의 지키지 않는다. 아이와 달리 할 일 많아 바쁘다느니, 아이들 챙겨야 한다느니... 하며. 이건 못하는 것이다.
| | | ▲ 오동명 작가 |
어릴 적 버릇을 쉽게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선생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배운 대로 말로만 아이들에게 명령할 뿐이다. 아이들을 매일 대하는 선생으로서 이제라도 고쳐야할 버릇이지만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몸에 단단히 굳어져있기 때문이다. 이 버릇은 특별한 자각 없이는 여든까지 죽을 때까지 갖고 갈 수밖에 없다. 어찌 신발뿐이겠는가.
굳어져 고착되기 전인 우리의 아이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갖는 일, 바로 ‘부모 먼저’가 이래서 어떤 교육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욱 소중하다. 아이를 탓하는 순간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같다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유리거울보다 자식거울에서 행동이나 말이 다듬어진다면 부모도 바뀔 수 있다. ‘부모 먼저’는 ‘남 탓’에서 ‘내 탓’으로 돌리게 하는 아이들로부터의 배움의 실천이기도 하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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