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설을 뚫고 나온 섬진강 매화가 눈송이처럼 날릴 때 구례군 산동면 마을마다 산수유가 산허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그 색이 바랠 무렵 하동 80리 벚꽃이 화사한 얼굴을 내민다.
사이사이 피고 지는 진달래, 철쭉, 배꽃, 사과꽃은 덤이다.
지리산 자락, 섬진강의 봄은 꽃바람 속에 무르익는다.
국내 최대의 산수유 단지인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꽃잎은 길이가 4~5mm에 불과하나 촘촘히 피는 데다 수천 그루가 한꺼번에 만개해 장관이다.
전라북도 진안에서 발원해 전라남도 곡성과 구례, 경상남도 하동을 지나 다시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에서 남해로 흘러드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이 꽃이 지는가 하면 저 꽃이 피고, 저 꽃이 지기도 전에 질세라 피어나는 흐드러진 꽃사태에 외지인들은 넋을 잃는다.
예로부터 구례는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라 했다. 큰 것은 지리산, 섬진강, 들판이요 아름다운 것은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이다. 또한 전남 동북쪽 소백산맥 남단에 위치한 구례군은 행정구역상 3개 도 5개 시군이 만난다. 북쪽은 남원, 동쪽은 하동과 지리산 줄기, 서쪽은 곡성, 남서부는 순천시와 섬진강, 동남쪽은 광양시와 백운산이 감싸는 지형이다. 사통팔달 영호남이 어우러지는 이곳 인심이 넉넉하지 않을 수 없다.
산수유축제가 막바지에 이른 구례군 산동면 상위마을 계곡을 따라 오르며 얼굴도 씻고 손도 씻어 겨울 묵은내를 지운다. 중국 산동성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오면서 산수유 나무를 가져다 심었다 해서 ‘산동’이라 불린다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중국 산동(山東)이나 구례군 산동(山洞)면이나 산수유 주산지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산동면에서도 북쪽 상위마을은 전국 산수유 생산량의 30%를 차지한다.
세상의 꽃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나 불가에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 화엄(華嚴)이 있다. 불법의 진리를 체득하여 정각을 이룬 공덕의 꽃은 결코 시들지 않나니 화엄사 대웅전 독경소리를 들으며 이번에는 세속의 때를 씻는다. 지리산 자락에는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등 8개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 한국 불교문화의 요람으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 화엄사는 각황전, 4사자3층석탑, 각황전 앞 석등, 영산회 괘불탱 등 3점의 국보와 대웅전 등 5점의 보물을 지닌 명찰이다. 하지만 보유하고 있는 국보나 보물로 사찰의 가치를 매기는 게 얼마나 불경한 일인가.
◁ 섬진강 물이 잔잔한 이유는 원효대사의 효심 때문이라고 한다. 강물 소리에 잠을 잘 수 없다는 어머니의 하소연에 원효는 섬진강으로 달려가 불공을 드리고 물소리를 오산 밑에 가둬버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 조선 영조시대에 방풍림으로 조성한 1000여 그루의 노송숲이 현재 하동 송림공원이 됐다.
구례와 하동의 경계에 있는 화개장터. 매년 4월초 이곳에서 ‘영호남이 어우러져 만나는 십리벚꽃 세계’라는 이름의 벚꽃축제가 열린다.
산수유꽃축제가 막을 내리고 곡우(4월20일)를 전후해 구례에서는 ‘남악제’가 열린다. 삼국시대부터 열렸다는 이 행사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고 주민과 화랑이 한데 어울려 궁도, 명창대회, 씨름대회를 한 것에서 유래해 오늘날에는 구례 군민화합 잔치마당이 됐다. 그러나 염불보다 잿밥이라던가. 객(客)은 남악제와 더불어 열리는 향토음식축제에 군침을 삼킨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섬진강에서 건져 올린 은어, 참게 생각에 허기가 더하다(아쉽게도 은어는 5월에서 8월이 제철이다). 서둘러 지리산 욕쟁이할머니 박종악(72)씨가 운영하는 ‘그 옛날 산채식당’(061-782-4439)에 들어갔다. 50년도 넘은 이 집은 지리산 산채의 원조로 워낙 이름이 난 터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한 번 구운 소금으로 간을 해 한상 가득 차려온 산나물이 접시를 세지 않아도 서른 가지가 족히 넘는다. 비빔밥도 별미라지만 두릅, 산더덕, 취나물, 돌나물, 돌미나리, 죽순, 표고버섯의 향기는 고추장에 뒤섞어버리기 아깝다. 역시 산채백반이 제격이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넘어가기 전 남쪽 문척면에 자리잡고 있는 오산을 지나치지 말자. 지리산 준봉에 가려 놓치기 십상인 531m의 이 야트막한 산 정상에 오르면 등 뒤로는 암벽에 기둥을 박고 건축한 사성암(四聖庵)이 있고 발 아래는 ‘천하명당’이라 일컫는 구례가 한눈에 들어온다. 레저족에게는 활공장으로 각광받는 장소다. 이곳에 서면 조선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왜 구례, 남원, 진주, 성주를 살기 좋은 땅으로 꼽았는지 알 수 있다. 멀리 ‘구름 속을 나는 새가 사는 집’ 운조루(雲鳥樓) 99칸(현재는 60칸만 전해짐)이 봄 햇살에 어른거린다.
◁ 지리산 녹차는 찻잎을 채취해 솥에다 볶고 멍석에 비벼서 만드는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사진은 하동의 차 재배지. ▷ ‘봄이 어디만큼 왔을까.’ 산동마을 외양간에서 송아지가 세상구경을 한다.
◁ 박경리의 ‘토지’가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더욱 유명해진 평사리. 푸릇푸릇 자라는 보리가 55만평에 달하는 들판을 덮고 있다. ▷ 코뚜레를 한 소가 힘겹게 쟁기질을 할 때마다 밭은 검은 기왓장처럼 갈아 엎어진다(구례 산동면).
이제 섬진강을 끼고 동쪽으로 19번 도로를 달리면 화개장터다. 장터를 지나자마자 동서 화합의 다리 ‘남도대교’가 나오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도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즘 하동은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드라마 촬영 때문에 외지인의 발걸음이 부쩍 잦아졌다. 화개장터에서 남동쪽으로 달리다 하동군 악양면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55만평의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보리밭 푸른 물이 들판을 적시는 이곳이 평사리다. 하동군은 3년 전 평사리 땅 3000여평을 매입해 소설 속의 ‘최참판댁’을 복원해놓았다. 그 주변으로 드라마 ‘토지’를 위한 세트장이 지어져 어느새 소설 속의 평사리는 현실 속의 평사리가 됐다. 드라마 촬영장과 주민들이 실제 거주하는 초가집이 어우러져 실제 마을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이채롭다.
지리산에서는 차, 매실, 밤을 따고 섬진강에서는 재첩과 은어를 거둬들이는 풍요로운 고장 하동. 최근 음식에서 의류까지 온통 녹색열풍이라 지리산 야생차도 상종가다. 그러나 재첩 채취량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인근 식당들의 시름도 깊어간다. 섬진강산(産) 재첩만 고집한다는 여여식당(051-884-0080) 박우경(51) 사장은 “섬진강 주변에 제철소다 화력발전소다 자꾸 들어서면서 오염이 되니까 채취량이 예년 70% 수준이고 값도 자꾸 뛰어 걱정”이란다. “중국산은 값이 3분의 1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섬진강 거 아니면 안 써. 중국산은 심심해서 어떻게 먹나. 재첩은 바닷물과 민물이 섞여 염도가 적당할 때 가장 맛이 나거든. 섬진강 재첩이 최고지.” 재첩국과 재첩무침을 내놓으며 박 사장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굽이 도는 섬진강에 재첩잡이 배가 오르내린다. 5월쯤 강물의 한기가 걷히면 직접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재첩을 채취하는 아낙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때가 흐드러진 봄이다.
◁ 100% 섬진강 재첩만 사용한다는 여여식당의 재첩국과 재첩무침. ▷ 서른 가지가 넘는 제철 나물로 차려 낸 ‘그 옛날 산채식당’의 산채백반.
악양 명물이 된 최참판댁. 하동군이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땅 3000여평을 매입, 소설 속의 최참판댁을 복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