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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Interview #01
이 10년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Great!’ 일거야.
뮤지션이 되는 건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으니깐 말이야.
94년에 발표한 ‘오아시스’ 로 그 때까지의 UK락의 지도를 갈아 치우고, 작품을 거듭하는 족족 활약의 무대를 세계로 펼쳐나간 오아시스. 2004년에 데뷔 10주년을 맞은 그들은 지금과 현대를 대표하는 락밴드로 성장했다. ‘앨범을 내는 것이 꿈이었어’ 라던 결성 시기부터 눈 깜짝할 새에 세계의 정점을 찍을 때 까지, 그리고 그 뒤에 있던 형제의 고집과 불화와 멤버 탈퇴 등의 수많은 곤란. 그 파란만장한 밴드 역사를 노엘 갤러거가 되돌아 본다.
-오늘은 지금까지의 10년을 되돌아보려고 하는데 먼저 오아시스에 들어오기 전의 당신은 그들을 혹평하고 있었죠. 자신이 밴드에 들어가서 이 밴드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까라고 생각했나요?
‘아니, 나는 가입하기 전부터 오아시스를 평가하고 있었어, 무대에 서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말이야. 옛날에 밴드를 하고 있던 녀석들을 많이 봐왔으니까 칭찬할 만하다고 느꼈어. 물론 리암은 동생이니까 자랑이라고 생각했고. 녀석들한테는 좋은 곡이 한곡 있었어. ’Take Me’ 라는 무시무시하게 좋은 곡이었지. 어느 날 오후에 리허설 보러오라고 들어서 말이야, 리암이 세컨드 기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엄청난 기타리스트라는 걸 그 녀석들이 알고 있었으니까 같이 리허설 하자고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 때부터 1개월 정도 같이 하는 동안 언젠가부터 가입해서 곡을 쓰고 있었어.’
-당신이 들어가서의 맨 처음의 오아시스의 라이브는 어떤 인상이었나요?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지. 일초일초, 모든 순간이 훌룡했어. 나는 꽤 불안하게 되었지만... 밴드로써 기그(gig)를 하는 것은 내 꿈이었으니까 밴드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지. 설마 리암하고 밴드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니까 꿈이 현실이 된 걸까나. 마지막까지 모두가 전곡에 박수 쳐주었어. 물론 대부분 친구들이었지만 진짜 좋은 경험이었지.’
-그때부터 크리에이션과 계약해서 앨범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지금와서 새삼스럽게 데뷔 앨범을 돌아보면 어떤 작품이었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옛날부터 송라이터가 돼서 밴드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레코드를 내는게 꿈이었지. 자기 자신의 레코드를 음반가게에서 본 순간, 자신이 쓴 곡을 라디오에서 들었던 순간의 기분은 어떤 말을 써도 표현이 안돼. 정말 자랑이었지, 멋진 기분이었어. 지금까지 어떤 일을 했을 때 보다도 굉장해. 그 전부를 합친 것 보다 말이야. 지금도 그래, 새로운 앨범이 완성되면 두근두근거려. 앨범이 나오기 전에 가게에 있던 것은 슈퍼소닉 싱글이었어. 앨범 판매 전에 싱글을 3장 냈으니까. 앨범도 좋은 성적이 나올거라고 우리들은 그냥 왠지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정말로 두근두근 했던 것은 슈퍼소닉이 나올 때 였을꺼야. 싱글을 손에 들고 “누군가가 이걸 사줄까?” 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게 차트에 들어갔지. (전체 영국 차트 31위) 그런데 ‘Top of the pops’ 에 안나와서 낙담하기도 했어. 그래도 두 번째 싱글 ‘Shakermaker’ 은 슈퍼소닉 보다 몇 천장 더 팔렸어. (전영 11위) 그걸로 TV에도 출현했고. 세 번째 ‘Live Forever’ 은 Top10에 들어갔어 (전영 10위). 저 당시는 정말 자극적인 기대 였어. 싱글을 낼 때 마다 커졌으니까 굉장하지.’
-그럼, 데뷔 앨범은 1위가 되었단 의미이지만 그 당시에는 ‘당연하지’ 정도로 느꼈던 것 인가요?
‘그건 생각해보고.... 음.. 아니, 그럴지도. (생각한 후) 팔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10년 후에 이렇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거 라고는 생각 못했어. 자신들의 베스트 앨범으로 취급당할 거란 거 말야. 나는 좋다고 생각할뿐더러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이렇게 길게 살아 남을 줄이야! 라고는 느껴.’
-94년에 처음 일본에 왔었네요.
‘나는 그 5년 전에도 일본에 갔던 적이 있었어. 맨체스터 밴드,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로디로써. 뭐, 그건 재껴두고 도쿄 공항에 도착했을 때 멤버들한테 ‘팬이 엄청나게 올거야’ 라고 말했더니 모두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라고 하더라고. 그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건 마치 비틀즈 멤버가 된 것 같았어서야. 우리가 가는 곳 마다 팬 천지여서 엄청난 락스타 같았어. 기뻤지. 팬들이 모두 선물도 주고. 우리 공연을 전부 본 소녀가 엄청난 고가의 선물을 줬어. 시계나 보석 등등. 그건 정말 좋은 추억이었지.’
-그럼, 오아시스의 이름을 보다 더 넓어지게 한 두 번째 앨범 ‘Morning Glory'에 대해서도 말해주세요.
‘[오아시스]로 길게 투어를 했으니까 말야, 다음 앨범 데모를 만들 틈이 없었어. 그래서 우리는.... 어느날 저녁 투어로 독일에 있을 때, 호텔에서 내쫓긴 적이 있어, 행동거지가 좀 나빳어서. 그래서 나는 투어 버스 뒤에 앉았는데, 스튜디오에 들어가는게 1개월 후로 닥쳐서 누군가가 뭔가 곡 쓴거 있냐고 물어봤어. ‘썼어’ 라고 대답했더니 ‘그럼 연주해봐’ 라고 말해서 억지로 기타를 꺼내서 앨범 전곡을 연주했어. 처음부터 끝까지. 뭐, 이런 것이 있었지만 모닝 글로리는 별로 기억이 안나. 어쨌든 너무도 잘 진행됬었으니까.
-알렌 맥기가 계약 시점에서 이미 50곡 정도 있으니까, 그걸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넣었다, 라고 말했었죠?
‘계약하기 전에 맨 처음 앨범 3장 분의 곡은 써놨었어. 예를 들면, 3장 째에 제일 마지막 노래 ‘All around the world'는 슈퍼소닉 보다도 전에 써놨었고.’
-에엣, 그랬던거에요?
‘그 당시는 일을 하지 않았어. 할 것도 없었으니까 맨체스터 플랫에서 낮에도 밤에도 하루 종일 곡을 썼어. 30곡인가 35곡은 썼을거야. 처음 3장의 앨범의 곡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썼던 곡이 ’some might say'야. 즉, 대부분 전부 모닝글로리 전에 썼단 거지. 그 중에서 좋은 걸 골랐을 뿐이야.‘
-그 모닝글로리는 미국에서도 96년 3월 9일에 4위까지 올라갔어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좀만 기다려봐..... 그건 모닝글로리 였나. 나는 들은 적이 없어, ’Roll with it'이 싫으니까. 몇곡인가 싫어하는 곡이 있어. 그 앨범은 우리가 세계에 등장할 징조 같은 것이었어. ‘wonderwall'이 판매되고 2년 정도 후에 우리는 세계 거대 밴드가 됬지. 좋아하는 곡들은 ’Champagne Supernova', 'Morning Glory', 'some might say', 'Don't look back in anger'야. Don't look back in anger는 지금은 혼자 걷기 시작해서 옛날의 wonderwall보다 큰 곡이 되었어. 그래도 불가사의야. 미국에서는 모두 wonderwall만을 들으러 콘서트에 오는게 아닐까 라고 우리는 느끼고 있던 정도로 말야, 불가사의하지만 그런걸 하나하나 신경쓰지도 않고 말야.'
-처음으로 성공을 실감한 것은 어떤 순간이었나요?
‘냅워스에서 연주했을 때. 그 만큼의 사람들 앞에서 말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거다!‘ 라고 생각한 특정의 순간이라고 말할 말한 것은 없어. 우리는 한달에 앨범을 백만장 가깝게 팔았으니까. Don't look back in anger와 wonderwall이 판매되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됬어. 다만 지금 되돌아보고 ‘혹시 그게 정점이었을지도’ 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 든다고 하면 역시 냅워스네. 그래도 ‘드디어 해냈어!’ 라고 절실히 생각한 기억은 없어. 그리고 아직 끝난게 아니니까. 나랑 리암은 아직도 하고 있다고. 냅워스에서는 2일간 25만명이 왔어. 7일간의 공연이었어도 했었을거야. 300만명이 티켓을 사려고 했으니까. 이 나라에서 최고 큰 콘서트였어. 그러니까 '해냈어!' 라는 지점일거야. 전에 영국 축구 팀을 보러 웸블리 스타디움에 갔는데 관중이 모두 Don't look back in anger을 부르더라고. 몇천명의 사람들이 말야. 이것도 정말 끝내줬지.’
-그럼, 이런 성공을 거두고부터의 3번째 앨범 ‘Be here now’는요?
‘(딱잘라 단호하게) 세 번째 앨범은 싫어. 가사가 허접해서. 음악, 즉 가사를 제외한 곡의 부분이 너무 긴 것도. 바꿀 수 있는 거라면 쓸데없는 부분을 삭제해서 가사를 바꾸고 싶어. 그 때 행복했던 시기도 아니었고, 아니, 밴드의 멤버로 있는 것은 최고로 행복했던 시기였어. 이런 때에 어떻게 음악을 만들까를 우리는 잃어버렸었어. 우리는 즐기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밤새워 술을 마시고 엄청난 양의 마약을 했어. 꿈 꿨던 것 보다 많은 돈도 있었고, 우리는 뭐든지 할 의욕이 있었지. 내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저질렀던 실수는 냅워스 후에 당분간 그림자를 감추지 않았던 거야. 우리는 그대로 계속해 가기로 했었어. 우리, 나는 정신 상태가 정상인 때에 앨범을 만들려고 했어. 곡도 그다지 좋지 않았고. 그런데도 700만장이 팔렸어, 믿을 수가 없어.’
-그 후, 일본에서는 부도칸에서 공연 하셨는데요, 비틀즈도 공연 했던 그 회장에서 어떤 인상을 가졌었나요?
‘음... 일본에서 하는 어떤 기그와도 별로 차이가 없었어. 다만 크다? 거기서는 스모 뭐시기를 한다고 하던데?’
-그건 국기관이라고 하는 다른 곳이에요.
‘그런가, 뭐.... 여하튼 거기서 공연 할 수 있어서 기뻤어. 비틀즈도 했던 장소니까 말야. 다만 일본 사람들은 너무 예의차리고 온화하니까 회장이 클 수록 밴드는 망설이게 되. 영국에서는 회장이 클수록 떠들썩하거든. 일본에서는 회장이 크면 클 수록 관객이 냉정하게 되는 듯해서 진짜 이해가 안가. 부도칸은... 확실히 특별한 장소였어, 비틀즈가 공연 했던 곳이니까. 근데 우리가 좋은 기그를 했는지 아닌지는 몰라. 아니, 좋은 기그가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 투어의 제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재미는 있었는데 별로 프로스럽진 않았으니까.’
-이런 엄청난 시기를 지내면서 멤버 체인지도 있어 심기일전한 4번째 앨범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를 냈죠.
‘Be here now 후에 일년 간의 휴식을 취했어. 그게... 내 사생활이 파탄한 시작이었다고 생각해. Be here now 투어가 끝나고 돌아온게 98년 3월 이었어. 엄청난 양의 마약을 해서 그 해 여름엔 가정에 영향이 나오게 되었지. 그래서 마약을 그만두고 이혼하기로 결심했어. 그때부터 앨범을 만들었는데, 별로 만들어야만 하는건 아니었어. 곡 중엔 맘에 안드는 것도 있었고. 그래도 ‘Fuckin' In The Bushes’는 맘에 들었어. 엄청 좋아. ‘Go Let It Out’도 좋고. ‘Where Did It All Go Wrong’도. ‘Gas Panic’도 좋아. 그니까 내가 좋아하는 앨범은 아니지만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어. 쉽게 진행되진 않았지만 말야. 누구에게 있어서도 이게 제일 좋아하지 않는 앨범이지 않을까나.’
-마약을 그만두고 바꿔 태어나서 만든 ‘Heathen Chemistry’는 좋았나요?
‘Heathen Chemistry? (생각하고나서) 조금 돌아가는데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의 제작 도중에 본헤드랑 귁시가 그만뒀어. 거기다가 크리에이션 레코드가 폐쇄됬고. 그니까 우리가 프랑스에서 레코딩하고 있는 사이에 주변이 모두 붕괴됬어. 거기에 관련되지 않으면 좋았었겠지만 말려드는 건 피하지 못했어. 두 멤버가 빠지면 레코드 회사는 레코드를 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꽤 압박 심한 시기였어. 모두 이혼하지, 나는 마약은 끊었지만 아직 처방 받고 있는 대체 마약에 빠져있었고. 진짜 어처구니 없는 시기였지. 음악 면에 까지 나쁜 영향을 받았어. 그리고 앤디와 겜이 들어오고 투어에 나가게 되고... 기그는 좋았는데 뭔가가 부족했어. 아마 곡이었을거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우선 앨범을 1장 레코딩하기로 했어. 스튜디오에서 밴드의 에너지가 변할까라고 생각해서 말야. 내 스튜디오를 썼어. 먼저 몇곡인가 해보고 엄청 좋았기 때문에 그대로 계속했어. 프로듀스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라는 것으로 뭐, 내가 한거지만. 그 앨범은 엄청 마음에 들어. ‘Stop Crying Your Heart Out’, ‘She Is Love’은 관객에게도 반응이 좋아. ‘Little By Little’, ‘Songbird’, ‘The Hindu Times’, ‘Force Of Nature’.... Heathen Chemistry가 좋았으니까 또 앨범을 만들기로 했어.’
-커리어가 있는 프로 뮤지션을 넣은 것은 더욱 프로패셔널한 밴드로 만들고 싶어서 였나요?
‘아니, 달라. 겜은 크리에이션의 헤비 스테레오에 있었고, 앤디는 라이드에 있었지? 그니까 얼굴만 아는 사이였어. 본헤드랑 귁시가 탈퇴했을 때 투어는 이미 표를 팔고 있었으니까 중지했더라면 파산 했을거야. 그니까 누군가를 넣지 않으면 안됬지만 섹션 뮤지션은 내가 싫어했어. 마침 그 당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뭐라 해도 친구였으니까. 겜은 좋은 기타리스트에 베이시스터, 앤디는 좋은 기타리스트에 키보드도 잘하고. 모두가 잘 맞았다는 점은 레코드가 증명해준다고 생각해.’
-급하게 되돌아 봤는데 어떤 10년 이었다고 생각하나요?
‘...... 짧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Great!!' 일까나. 여러 굴곡은 있었지만. 스타트는 좋고, 그 부턴 내려가는 고개가 됬었어. 그리고 지금은 다시 상승 하고 있는 중이고. 10년 후에 다시 너랑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그 때는 내려가는 언덕일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밴드에 참가한 사람들 (오아시스 멤버)은 지금까지 11명 있지만 (서포트, 멤버 포함해서) 음악을 같이 만든 것은 재밌어, 제일 뒤의 사람에게는 그닥 재밌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겨우 6번째 앨범을 만들자고 필사가 되어있고 작업은 재밌어. 뮤지션이 되는 것은 어렸을 때 부터의 꿈이었어. 그것이 현실의 생활이 되어있는건 아주 멋있고.
일본 잡지 Crossbeat의 오아시스 스페셜 에디션 북입니다.
의역 난무, 오역도 있겠지만 대~충 그까이꺼 내용과 뜻만 통함 되잖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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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니요~ 히스토리 인터뷰라고 예전에 인터뷰한걸 모아둔 것 같아요^^ 이번 건 데뷔 10주년 기념으로 2004년의 인터뷰에요! 재밌게 읽으셨다니 너무 뿌듯하네요 ㅜㅜ♡
역시 노엘은 구라쟁이네요 ㅋㅋ 마약끊을때 그냥 끊어야겟지 생각하고 바로 끊엇다고 어디서 본거같은데 ㅋㅋ 처방전 마약 먹엇으면서!
대부분 그렇게 말했지만 처방약을 먹었다는 얘기도 몇 번 하긴 했어요^^
어떤 금단증상 같은 건 없었나?
난 그 라이프스타일에 중독됐었어. 코카인을 한다는 건 내 스스로의 자아에 중독된다는 것, 그 뿐이었어. 내 친구들은 여전히 거기 빠져 있었지. 하지만 난 내 스스로 그걸 끊었어. 그렇지 않았으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됐겠지. 시간당 4천 파운드씩이나 내고,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아니, 난 할 수 있어" 싶더라구.
그래서 난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됐고, 처방된 약물들 - 수면제나 각성제, 진정제 같은 - 에 살짝 빠지게 됐는데, 의사가 그러더군. "솔직히 얘기하자면, 차라리 마약을 다시 하는 게 나아요. 이 약물들은 몸에 더 안좋거든요." (http://cafe.daum.net/oasislife/6UyN/156)
그리고 http://cafe.daum.net/oasislife/6UyN/305에서는
"우린 Morning Glory가 가라앉고 멀리 사라질 때까지 Be Here Now나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를 만들면 안됐어. 난 마약은 끊었지만 코카인 대신 의사한테 처방받은 각성제나 진정제를 잔뜩 먹었었지. 음악을 만들만한 영감이 전혀 없었어."라고 말하기도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