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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기독교는 필요하냐 ?
함석헌
우리는 “금일의 조선에 줄 바 최진최절(最珍最切)의 선물은 신기(新奇)치도 아닌 『구신약성서』 1권이 있는 줄 알 뿐”이라고 말하는 자들이다(본지 창간사). 까닭은 이것을 가져 가장 귀한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귀하다는 것은 금은이나 주옥같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요 석굴암의 조각이나 고려의 청자기같이 귀하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귀하다고 하는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만나가 귀했다는 것같이 귀하다는 말이다.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서는 “있는 재산을 다 팔아가지고”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동생을 버려두고” 떠나도록 귀한 것이다. 밥같이 물같이 공기같이(사실은 그보다도 더)귀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귀하다는 것은 이것을 못 가지어서는 맘에 섭섭하고 가지면 남에게 자랑거리가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요, 이것을 못 가지어서는 살 수가 없고 가지면 그로 인하여 사망의 골짜기에서 뛰어 나올 수가 있으므로 귀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랴 우리가 『성서』를 귀하다 함은 곧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다 목말랐던 자가 거기서 타는 목을 축이었으며, 그 물이 가슴속에서 샘으로 솟아 영원히 목마름을 면하게 되었고, 우리가 다 사망의 골짜기에 기운 없이 누웠던 자가 거기서 빛을 얻어 빛나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소망이 우리를 일으켜 어떠한 곤란에라도 견디며 나가려는 용기를 가지게 하였다. 고로 『성서』가 가르치는 진리는 우리에게는 유일무비(唯一無比)한 보패(寶貝)요 또 온갖 것을 포함한 전적 보패이다.
그러나 『성서』의 진리를 우리가 이렇듯 보패로 여긴다는 것이 곧 조선에 대하여서 보패가 된다고는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귀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귀치 않을 수도 있다. 남양의 토인이 자기의 지보(至寶)를 가져다 뉴욕신사에게 준다기로 그것이 뉴욕신사에게 지보 될 리는 없다. 만일 그렇게 주는 선물이 받는 편에 대하여 가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보내는 이쪽의 뜻을 달(達)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또 정말 그렇다면 보낼 필요도 별로 없다. 보내는 데는 우선 저편이 귀하게 여길 것이라야만 하겠다. 귀하게 여기기보다도 저편에 정말 긴절(緊切)히 필요한 것이어야만 되겠다. 그렇다. 살기 위하여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을 보낸 후에 비로소 우리가 조선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복음의 진리는 정말 조선에 필요한가? 이것을 진실하게 공평 신중하게 심사(深思)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묻는 말에 교회의 신자는 물론 필요하다고 다들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어떻게 필요한가 하는데 대하여는 대답이 각각 구구하다. 혹은 금일 우리 민족에게는 진취의 기상이 없는데 기독교는 불교ㆍ유교가 소극적ㆍ퇴영적인 것과 달라 적극적ㆍ진취적인 고로 기독교를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나는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의 간부 어느 분이 이런 의미의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혹은 금일 우리는 대동단결이 필요한데 신앙은 단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므로 필요하다고 한다(이것도 일전 서울기독청년회 간부 어느 분이 강연석상에서 학생들에게 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또 혹은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혹은 “예수의 고상한 인격을 모범하여” 퇴패해가는 도덕을 작흥(作興)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 그것뿐이랴. 그밖에도 종종(種種)이다. 그러나 그밖의 것은 이상 수종 중에 포함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현금(現今) 기독교 신자의 대체의 경향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연 이 모든 것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지 않는다. 물론 『성서』가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를 순종하면 이 모든 결과가 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를 믿는 근본 이유는 되지 못한다. 단순히 그런 것만을 위한다면 반드시 기독교가 아니면 안된달 것도 없을 것이요, 또 만일 그 모든 것도 기독교가 아니고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면, 다시금 더 근본적 설명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핵심진리는 다 아는 줄로 생각하는 까닭인지 조금도 설명하지 않고 한갓 가장자리 것만 현양(顯揚)하고 있으니 진리를 위하여 통심사(痛心事)이다.
그리고 지상천국론에 이르러서는 천만에도 없는 공상이다. 설령 달세계에나 화성에 왕래하는 날이 올지언정 지상에 천국은 결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리 말함은 투철한 역사안(眼)이 있거나 예견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요 명명백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靈)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나여야” 하지 거듭나지 않고는 억만년을 진보하여도 사람의 세상은 죄악의 세상이다. 섭섭한 일이지만 사실이니 할 수 없다. 육(肉)에서 영(靈)이 날 수 없으니 무가내하(無可奈何)다. 천국! 꿈에도 아니 올 것이다.
조선에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 따위 가장자리의 울긋불긋한 것, 외적 향상진보를 위하여서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아무데서도 구하여 얻을 수 없는 근본진리가 거기 있음으로써다. 복음의 진리는 직(直)히 사람의 영혼에 투입하여 힘줄과 골절을 쪼개며 이로써 완전히 갱생하여 생명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생활의 파멸을 당한 자들이다. 생야사야(生耶死耶) 하는 생명의 극한점에 선 우리들이다. 우리는 물질ㆍ정신을 물론하고 각하(脚下)에 사(死)의 암연(暗淵)을 굽어보고 부르르 떨고 있는 자들이다. 이제 여기서 더 밀린다면 새 힘을 얻어 암연을 건너뛰어 광명의 저쪽에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발이 선 자리에서 거꾸러져 거꾸로 암연에 삼켜버리는 것의 어느 한편이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우리 귀에 들리는 아우성소리가···········
“힘을 내어라! 희망을 가져라! 생기진작하라! 싸워 이기라!········”하는 소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귀먹은 듯이 잠잠하고 있다. 암연에서 피어오르는 냉음한 안개는 그들의 그림자를 삼켜버리련다. 부르짖는 자들의 터지게 부르짖는 목소리도 그 가운데 사라지련다!········듣지를 못해 그러나? 아니다. 못 듣기는 고사하고 듣지 않고도 다 잘 안다(마치 몽마에 잡힌 사람이 사지를 옴짝하지는 못하나 달아나야 하겠다는 것은 말갛게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면 왜 힘을 못 내나?·······묻지 말라. 어리석은 자야! 힘이 어디 있나? 우리를 몰아서 이 사망의 단애(斷崖)에 세운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여보아라.
사지를 쓰려 하면서도 쓰지 못하는 자가 몽마에 잡히었던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살길을 찾으려 하면서도 찾을 용기를 못 가지는 우리는 죄마(罪魔)에 잡힌 자다. 사망의 아비 죄가 우리를 잡았다. 죄다. 그렇다 죄다. 우리를 붙잡고 얽맨 자는 죄다. 우리로 하여금 의기를 잃게 하고 원기를 잃게 하고 소망을 잃게 하고 형제가 서로 싸우게 하고 서로 해하여 사지에 빠지게 한 것은 이 ‘죄’다. 살기 위하여 죄에서의 해방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죄의 기반(羈絆)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여라. 물론 우리는 우리에게 정치적ㆍ경제적 자유가 필요함을 안다. 대동단결이 필요함을 안다. 학문연구의 필요한 것도 안다. 학자ㆍ연구가ㆍ발명가가 나지 못함을 한하고 애타한다. 다 잘 안다. 때로는 나무라기도 하고 한(恨)도 하고 자탄도 하고 눈물도 흘린다. 그러기에 진취의 정신을 고취하는 이 대동단결을 부르짖는 이 도덕작흥(道德作興)ㆍ생기진작(生氣振作)을 절규하는 이를 향하여 감사를 마지않는다. 그러나 왜 한 가지만을 말하지 않는 것이 있는고? 가장 필요한 가장 근본인 한 가지를! “죄에서의 해방!”
격려하기만 하면 나갈 줄 아는가? 한 가지 신앙을 가진다고 하고 7일에 1차 예배당에 모이기만 하면 단결이 되는 줄 아는가? 부지런히 책을 보기만 하면 지식이 해박해지고 연구를 깊이 하면 발명이 능한 줄로 아는가? 노력만 하면 인격은 완성되는 줄로 아는가? 결코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다. 빛나는 희망도 용감한 진취력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사랑도 고귀한 진리도 위대한 발명도 심온(深蘊)한 지식도·········모두 다 죄에서 해방된 영혼의 소유자이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죄의 비늘(鱗)이 그의 눈에서 벗어진 연후에야, 죄의 귀창이 그의 귀에서 빠져 나온 연후에야, 죄의 병원충이 그의 오장육부에서 소멸되고 죄의 가시가 그의 가슴에서 따끔거리기를 그만둔 연후에야,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의 맘에 참 평화가 오고 은혜가 이슬같이 그 위에 내린다. 아래 평화로운 맘의 부드러운 흙이 준비되고 위에서 은혜의 풍성한 이슬이 내리기 시작한 후에야 희망도, 이상도, 발명도, 지식도, 덕행도, 죽순같이 솟아오른다. 그때에 눈은 참 오묘한 것을 보아내고, 귀는 참 미묘한 것을 드러내고 두뇌는 위대한 것을 발명하고 근육은 피로를 이기게 된다.
그러면 죄에서 해방될 필요는 그렇다 하거니와 그를 얻는 길은 어디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최급최대의 문제요 최근본의 문제다. 급(急), 대(大), 근본이라기보다도 이것이 문제의 전부요 이것이 해결 안 되면 그만이다.— 여기다. 우리의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唯一) 또 믿기만 하면(必然)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얻는다. 사망에서 뛰어나와 생명의 문으로 들어간다. 까닭은 간단하다. 우리에게 아담의 계통 곧 육의 계통을 받아서 난 우리에게 죄악을 이길 (즉 완전히 육에서 갱생할)힘이 없고 또 우리밖에 지음을 입은 자 중의 아무에게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육으로가 아니오 완전히 죄 없는 곳으로서 나고, 몸소 죄의 권위인 사망에까지 들어갔다가 부활함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을 이기는 권능 있음을 확실히 증명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서만이 죄악의 몸에서 벗어날 수가 있음으로써다.
왜 믿음으로 인하여 죄를 이기게 되느냐 하는 데는 이유는 없다. 하나님이 자기의 의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 약속을 하시었고 또 사실 역사상에 그 언약을 지키어 믿는 사람들이 허다히 이를 입증하는 것을 우리는 알 뿐이다.
우리가 조선에 기독교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로서다. 살아야 하겠다. 살기 위해서는 우선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죄에서의 해방은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하다. 수백 혈(頁) 수천 혈(頁)의 이상국을 쓸 것도 없고, 흥국책을 쓸 것도 없다. 선혈과 인육으로 장식하는 혁명론도 아니요 사회개조론도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죄에서의 해방’이다.
명석한 판단력과 통찰력 풍부한 두뇌를 가진 이는 곧 반대하여 우원(迂遠)한 것이요, 비논리적이라고 할 줄을 나는 밝히 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진리는 항상 듣고 아는 자에게는 원우(遠迂)한 것이요, 그를 행하고 사는 자에게는 첩경이요, 권능인 것도 더 밝히 안다.
그러면 이 백성에게 이 구신약성서 한권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가져 최진최절(最珍最切)의 선물로 보낼 것이구나! 그렇다 보내라! 한양에도 보내고, 시골에도 보내고, 한라산에서 백두산에까지 보내라! 그리하여 우리가 범죄함으로 인하여 얻은 상처를 고치고 불의로 인하여 매맞아 터진 데를 싸매어주심을 받아 다시 일어나 생명의 길로 나가게 하라.
1928.5.27
성서조선 1928. 7월 5호
저작집30; 18-59
전집20; 9-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