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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원문보기 글쓴이: 백파
* [2017년 8월. 180차 산행] ♣ 제천 <월악산> *
▶ 2017년 9월 17일 (일요일)
• [산행코스] • 송계리 덕주골→ 덕주사→ 마애불상(磨崖佛像)→ 960고지[전망대]→ 헬기장→ 송계삼거리(갈림길)→ 신륵사삼거리(영봉입구)→ 월악산영봉(靈峰, 1,097m)→ 신륵사삼거리→ 신륵사 방향 능선길→ 절골→ 신륵사→ 주차장→ 귀경(오후 8시) <민속칼국수>
• [프롤로그] — 위기의 나라, 걱정이 깊어가는 가을,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이 높고 청명한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무궁한 하늘, 신선하고 맑은 날이 마음을 환하게 열어주는 계절이다. 피부에 와 닿는 가을의 질감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그러나 작금 나라의 안팎은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 북의 핵(核)과 미사일이, 머리 위의 불덩이가 되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이나 미국은 북한에 대한 강력한 제재와 응징을 결의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800만 달러 대북지원을 확정·발표했다. 우리는 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핵으로는 독자적으로 북과 맞설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안보의 동맹국인 미국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마음은 여간 혼란스럽지 않다. 북(北)은 핵과 미사일로 ‘미군철수’를 조건으로, 미국과 상대하며 우리를 철저히 무시한다. 그것은 북(北)의 전략(戰略)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존이나 국가 존망이 걸린, 중대한 국면에 직면해 있다.
그런 가운데, 문재인 정권은 한풀이하듯 전(前) 정권에 대한 전(全) 방위 사정의 칼날을 세우면서, 자기 코드가 아닌 방송사 대표나 공기업 임원들을 노골적으로 압박하여 내몰고 있다. 문제(?)의 인사(人士)들을 공공연히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노골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독주한다. 검찰은 물론, 심지어 사법부 대법원까지도 하나의 코드로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소위 '소비주도성장'을 내세우며,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제재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권력에 편승한 노조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모든 경제 상황이 불안한 현실이다. 경제가 침체의 길로 들어서는 징조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우외환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청명한 계절인데, 우리의 걱정은 더욱 깊어가는 가을이다.
• [산으로 가는 길] — 태풍의 북상한다는 일기예보, 월악산으로…
이번 제180차 산행은 당초 <설악산 공룡능선>의 종주를 ‘무박(無泊)’으로 시행하기로 계획했으나, 제5호 태풍 '탈림(TALIM)'이 북상하면서 설악산에 30~80㎜의 많은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급거 ‘당일’ 제천의 <월악산>으로 산행지를 변경하였다. 우중(雨中)에 험난한 ‘공룡능선’을 종주하는 것은 여간 위험하지 않으므로 남정균 회장과 민창우 대장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오늘은 남정균 회장, 호산아 고문·장병국 고문, 김의락 자문위원, 김준섭·허영옥 부회장, 유형상 부대장, 박은배 총무를 비롯하여 전진국, 안상규, 강재훈 삼총사, 전평국 님, 이명자·나천옥 님, 허향순 님, 이슬비와 그 지기, 김재철 님의 부인, 꽃구름의 지기 이달호 님 등이 참석했다. 오늘은 전평국 님과 이슬비 님이 오랜 만에 나와서 반가웠다. 민 대장은 집안에 갑자기 위중한 일이 생겨, 군자동에 나와서 출발하는 우리를 배웅하고 돌아갔다.
• [국립공원 월악산(月岳山)] — 백두대간 포암산에서 북으로 갈라져 나간 월악지맥
저 풍기 소백산(小白山)에서 서쪽으로 죽령(竹嶺)을 넘어온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경상북도 동로면의 <벌재>를 지나면서 ‘문경시 구간’으로 들어선다. 백두대간 문경시 구간은 동로의 황장산-대미산을 지나 꼭두바위봉-포암산-관음리의 ‘하늘재’를 경유하여, 탄항산-부봉-마패봉-‘문경새재’(제3관문)에 이르고, 이어서 조령산-이화령-황악산-백화산-희양산-악휘봉-대야산-조항산-청화산 등 장대한 산줄기를 이루며 속리산 문장대로 이어진다.
붉은 선이 <백두대간> 마루금 - (사진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두 번 크릭하면 사진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산행지 월악산(月岳山)은 백두대간 포암산과 꼭두바위봉 중간의 마골치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월악지맥(月岳支脈)의 끝에 위치해 있다. 월악지맥은 만수봉-덕주봉-마애봉을 경유하여 월악산 영봉으로 이어진다. 월악산은 월악지맥의 주봉(主峰)으로 영봉-중봉-하봉으로 이어지다가 남한강 충주호[청풍호]를 만나 그 맥을 다한다. 하늘로 솟은 월악산 영봉(靈峰)의 높이는 1,097m이다. 198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월악산은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인근에 만수봉(萬壽峰, 983m), 하설산(夏雪山, 1,028m),어래산(御來山, 815m), 다랑산(多郞山, 591m), 신선봉(神仙峰, 967m) 등의 수많은 첩첩산봉들을 거느리고 있다. 월악산 영봉은 서쪽으로 충북 제천시 남부 지역인 한수면과, 동쪽으로 덕산면 지역에 걸쳐져 있다.
예로부터 ‘월악산’은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왔다. '산꼭대기 바위덩어리에 달이 걸리는 산'이라 월악산(月岳山)이라고 한다. 주봉우리가 신령스러운 봉우리라고 해서 '영봉'(靈峰)이라고 불리는데 일설에는 주봉이 ‘영봉’이라고 부르는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 단 두 곳뿐이라고 한다. 몽골의 침입 당시 이 지역으로 사람들이 피난하여 몽골군이 쫒았는데 날씨가 갑자기 사나워져 몽골군이 월악산의 신령이 노했다 여기고 추격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있다. 산 자체가 여자산신령이 머무는 곳이라 음기가 강하다는 얘기가 있다. 산의 지형도 여인의 모습이라고 해서 충주호 쪽에서 올려다보면 여인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모습이고, 제천 덕산 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여인의 젖가슴이라고 한다. 또 미륵리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덕주사에는 남근석이 3개나 서 있고 주위에 남근석이 종종 보이는데 이건 산의 강한 음기를 누르려는 민간신앙의 흔적이다.
월악산 영봉과 중봉
• [산행의 들머리, 송계계곡(松界溪谷) 덕주골] —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오늘 산행의 들머리는 송계계곡 8경 가운데 하나인 ‘자연대’가 있는 덕주골이다. 송계계곡(松界溪谷)은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와 남쪽의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포암산(布巖山)을 연결하는 약 7㎞의 계곡(溪谷)이다. 백두대간 포암산(布巖山, 962m)에서 발원한 달천이 월악산 서쪽 사면을 끼고 흐르면서 만들어진 명승으로, ‘월악계곡’이라고도 한다. 계곡일대에는 월광폭포·월악산 영봉·자연대·수경대·학소대·와룡대·망폭대·팔랑소 등의 8경이 있으며, 기암괴석(奇巖怪石)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가히 절경을 이룬다.
충주댐 청풍호와 송계계곡 하류의 마을(송계리)
송계계곡의 최상류,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는 백두대간의 고개 ‘하늘재’가 있다. 이 고개는 조선시대 초기 태종 때, 조령(鳥嶺, 문경새재)이 개통되기 이전에 사용한 고개이다. 오늘날에는 ‘하늘재’라 불리는데 백두대간 중에서 가장 야트막한 안부(해발 525m)이다. 신라시대엔 계립령(鷄立嶺)이라 불렀다. 월악산 송계계곡은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애절한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나라 잃은 비운의 왕자는 하늘재를 넘어와 ‘미륵불(彌勒佛)’을 만들어 불심에 귀의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공주는 영봉 아래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고 그 곳 덕주사(德周寺)에 은거했다고 한다. 가수 주현미가 부른 <월악산(月岳山)>이라는 노래가 이 사연을 담고 있다.
월악산 난간머리 희미한 저 달아
천 년 사직 한(恨)이 서린
1천 3백리, 너는 아느냐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불(磨崖佛)에
심어놓고 떠나신 우리 님을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금강산 천 리 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짚신에
삿갓 쓰고 걸어온 하늘재를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 [덕주골, 동문에서 덕주사(德周寺)] — 사찰로 들어가는 포장도로
오전 10시 15분, 송계리 ‘덕주골’에서 산행에 돌입했다. 덕주골은 송계 8경의 하나인 자연대가 있는 지점이다. 산행의 들머리 초입에서 대원들이 오붓하게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길목에 눈부시게 밝은 분홍색의 다알리아꽃이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 강력한 태풍이 북상한다는 예보가 있었으나, 이곳 송계리의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드리워있을 뿐 날씨는 아주 산뜻했다. 음식점과 토산품 상점 그리고 팬션 등이 즐비한 마을을 지나 산으로 들기 시작했다. 송계 덕주골에서 덕주사까지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인데, 차가 다니는 포장도로였다. 그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계곡은 물이 많지 않았다.
[모든 사진의 원본을 보는 방법] * 사진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두 번 크릭하면 사진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계곡, 물이 많지 않는 계곡에 거울처럼 맑은 물이 고여 있는 소(沼)가 있다. 송계계곡 8경 중의 하나인 수경대(水鏡臺)이다. 안내판이 수경대를 설명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2, <제사지(祭祀志)>에, ‘국가에서 제사(祭祀)하는 것에 대하여 대사(大祀)인 삼산(三山)과 중사(中祀)인 오악(五嶽)에 이어 소사(小사)를 올리는 산으로 금강산, 설악산과 함게 월형산(月兄山)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월악산은 신라 시대 월형산으로, 수경대(水鏡臺)는 신라시대부터 월악신사(月岳神祀)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자연의 소(沼)를 만들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수경대(水鏡臺)
계곡을 조금 올라가면 동문(東門)이 있다. 복원된 동문의 좌우에 돌무더기로 쌓은 성곽도 보인다. 이곳 계립령[하늘재]은 신라와 고려시대까지는 중원을 잇는 요로이며 국방의 요지(要地)였다. 남문(南門)은 송계리에 있다. 오전 10시 30분, 덕주사 앞에 도착했다.
복원된 월악산 동문(東門)
덕주사(德主寺)는 신라 진평왕 9년(586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月兄山) ‘월악사(月岳寺)’였으나 신라 경순황이 천 년 사직(社稷)을 왕건에서 손국(遜國)한 뒤 경순왕의 딸인 덕주공주(德主公主)가 망국의 한을 품고 높이 15미터 거암에 마애여래불(磨崖如來佛, 보물 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하여, 산의 이름을 월악산(月岳寺)으로, 절의 이름을 덕주사(德主寺로) 개명하여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월악산 덕주사
덕주사 앞 산행 들머리 - 영봉 안내비 앞에서
덕주사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와 입석(立石)의 여래상이 있고, ‘월악산 영봉’을 음각(陰刻)한, 운치 있는 표지석이 있어 그것을 배경으로 한 폭의 사진을 담았다. 이정표가 알린다. 이곳 덕주사는 덕주골에서 1km 올라 온 지점이고, 영봉까지는 4.9km이다.
• [덕주사(德周寺)에서 마애불(磨崖佛)까지] — 평평한 자연석이 깔린 숲길
덕주사 맞은 편, 계곡의 다리를 건너 울창한 숲속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돌길이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길은 완만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숲길이었다. 한 여름의 울창한 수림이 아직 그대로 성성한 모습이다. 팍팍한 돌길이지만 숲의 그늘이 드리워져 한결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전 11시 15분, 마애불(磨崖佛)에 도착했다. 보물 406호 지정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은 월악산 영봉 남쪽 기슭 상덕주사 ‘극락보전’ 앞, 큰 바위에 새긴 불상이다.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문이 있다.
월악산 중턱의 마애불에는 덕주공주가 오빠 마의태자와 함께 나라 패망의 한을 달래며 바위에 여래불을 새기면서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서라벌을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신라의 재건을 위해, 병사를 모아서 기르고자 금강산으로 가던 중, 문경의 ‘하늘재’에 이르러, 마의태자의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말씀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조성하여 만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태자는 그 장소를 찾아 석불 입상을 세우고, 공주는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영봉 아래 바위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 마애불이다.(그러나 학계에 의하면, 머리가 크고 비만한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덕주사 마애여래불상(磨崖如來佛像) - 磨崖라는 말은 '바위 절벽에 새긴다'는 뜻이므로
마애여래불상은 바위 절벽에 새긴 석가여래(釋迦如來)의 불상을 말한다.(보물 406호)
극락보전(極樂寶殿) -마애불의 좌측 위쪽에 있다
문경에서 하늘재 넘기 전 관세음보살의 꿈을 꾼 곳이 지금의 문경읍 관음리(觀音里)이고, 하늘재를 넘어와 마의태자가 미륵석불입상을 세운 곳이 지금의 미륵리(彌勒里)이다. 그리고 마애불이 있는 곳은 덕주사의 동쪽 월악산 영봉(靈峰) 아래이다. 덕주공주의 마애불은 남쪽을 향하고 있고, 미륵사의 미륵입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현세불인 여래불과 미래불인 미륵불이 서로 마주 보고 있도록 조성되었다. 석가여래(釋迦如來)에 귀의하여 현실의 아픔을 달래고 미륵(彌勒)에 의지하여 미래의 안녕을 기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이 두 부처는 미륵사의 마의태자와 덕주사의 덕주공주가 애틋한 남매의 정(情)을 불심을 통하여 승화하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 [마애불(磨崖佛)에서 960고지 전망대까지] — 하늘로 오르는 가파르고 긴 철계단
마애불을 참배하고 나서 다시 산행에 돌입했다. 본격적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길은 무지막지하게 뻗어 올라간 철계단이었다. 가파른 암반 위에 설치되어 있는 철계단은 얼마간 숲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 차례 계단을 올라가면 또 다시 긴 철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다시 나타나는 계단을 더욱 가팔라지고 크고 작은 바위와 경사진 슬라브 암반이 앞을 가로 막는다. 그리고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장대하고 오래된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발 밑 바위틈에는 가을 꽃 구절초가 소담하게 피어 하늘거리고 있다.
고도를 높여가니 시야가 열리면서 주변의 산세가 눈에 들어온다. 동남쪽으로 월악지맥의 산줄기가 꿈틀거리고 있고 서남쪽으로는 멀리 문경의 주흘산 연봉이 아스라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 아래 열리는 풍경은 어디를 보아도 그냥 첩첩청산이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니 거대한 노송이 드리워진 큰 바위 위에 나무테크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앞서 올라온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대로 산행을 진행했다.
가파른 철계단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파란 하늘을 찌르는 완강한 철계단, 구름 걷힌 청남빛 하늘이 이마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곡예를 하듯 만들어진 철계단은 그야말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아득히, 계단을 앞서 올라간 대원의 모습이 하늘과 맞닿아 아득하게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이나 그 위에 올라 포즈를 잡은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철계단
송계리 풍경
• [960전망대에서 조망] — 산이 산을 업고, 산이 물을 품고 있는 절경, 청풍호
12시 20분, 960고지 <전망대>에 올랐다. 사방의 하늘이 활짝 열린 곳이다. 하늘에는 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사방의 풍경이 아득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발아래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인 청풍호가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그 옆으로 허옇게 머리를 드러낸 뭉툭하게 솟은 암봉, 월악산 영봉이 가슴에 안긴다. 오늘 우리가 올라갈 그 정상의 산봉이다. ‘영봉, 아직도 갈 길이 아득하구나!’ 서쪽으로는 우리가 올라온 송계계곡과, 그 건너편에는 북바위산으로 올라가는 산줄기가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멀리 백두대간의 검푸른 산너울과 문경의 주흘산-부봉의 연봉이 아득하게 보인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들로 둘러싸여 있으니 온통 산 속이 다 산이요 산 밖이 모두 산이다. 첩첩청산이다.
960고지 전망대에어 바라본 월악산 영봉-중봉-하봉
• [영봉으로 가는 능선 길] — 헬기장-송계삼거리-(영봉)신륵사삼거리로 이어지는 평탄한 길
‘960전망대’에서 영봉으로 가는 길은 아주 평탄한 능선 길이었다. 활엽수의 숲 그늘이 드리워진 산길은 아주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각 12시 48분, 영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헬기착륙장에 도착했다. 많은 등산객들이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영봉을 등정하고 나서 식사를 하기로 했으므로 그대로 전진해 나갔다. 안부의 ‘송계삼거리’(이정표)는 960전망대와 영봉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이곳은 송계리 동창교로 내려가는 분기점이다. 삼거리를 지나서 조금 나아가니 영봉의 바위 절벽이 눈앞을 가로 막는다. 영봉의 옆구리를 돌아가는 산록의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선두의 김준섭 부회장, 전진국 대원 등 일군의 대원들이 영봉 아래 ‘신륵사삼거리’(이정표)를 지나 영봉(靈峰)의 등정에 돌입했다.
• [월악산 영봉을 오르는 길] — 철계단을 타고 오르는 천하의 영산(靈山)
월악산 영봉(靈峰)은 거대한 하나의 암봉이다. 영봉으로 올라가는 초입은 낙석(落石)의 피해를 막기 위해 나무테크 길 위에 터널식 철망을 시설해 놓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오직 철계단이다. 직벽의 바위를 타고 오르는 계단 길이다. 이어지는 가파른 철계단을 치고 오른다.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다. 바위틈에 피어있는 구절초가 하얀 몸짓으로 하늘거리고 있는데, 거대한 바위절벽에는 낙락장송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한 차례 계단을 오르고 나니, 여러 층의 철계단이 절벽 바위에 첩첩이 올라가는 모습이 아득하게 올려다 보였다.
올려다보니, 수많은 철계단이 암벽의 옆구리를 치고 올라가는데, 암봉이 워낙 직벽(直壁)이라 계단을 일(一) 자로 올리지 못하고 철주에 철주를 세워 지그재그로 시설해 놓았다. 우리 나라 산에서 철계단을 이렇게 많이 시설해 놓은 것 본 것은 처음이다. 그야말로 ‘철계단의 종합선물세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필자가 10여 년 전, 영봉을 오를 때 전혀 없었던 시설이다. 그때는 바위틈을 타고 오르면서 철봉이나 군데군데의 설치해 놓은 자일을 타고 올랐었다. 당시는 상당히 힘들고 위험한 월악산이었다. 그러나 몸으로 부딪친 쾌감이 있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오를 수 있는 시설을 해 놓은 것이다.
• [월악산 영봉에서의 조망] — 백두대간과 월악지맥의 첩첩 산군을 바라보며…
월악산(月岳山)의 주봉인 영봉(靈峰)은 험준하고 가파르며 높이 150, 둘레 4km나 되는 거대한 암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로부터 신령스런 봉우리라 하여 ‘영봉(靈峰)’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산 중에 ‘영봉’이라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둘 뿐이다. 영봉의 정상에는 크고 둥근 자연석 바윗돌로 정상석(頂上石)을 세워놓았다. 암봉의 주변에는 철봉으로 가드레일을 시설해 놓았다.
영봉은 1,097m로 월악지맥의 주봉으로 월악산 일대의 모든 산들을 조망할 수 있다. 우선 영봉에서 북쪽으로 중봉-하봉으로 내려가는 산줄기 아래 청풍호가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남쪽으로는 멀리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수많은 산군을 거느리고 이어지고 있고, 동쪽은 신륵사로 내려가는 덕산지구의 용하계곡이며 그 건너에 솟은 것은 어래산과 백두대간 문수봉의 산군이 포진하고 있다. 서쪽은 송계계곡과 그 건너의 북바위산의 산줄기가 솟아 있다.
월악산 영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에서 북으로 갈라져 나온 월악지맥, 멀리 뾰족한 산봉이 문경의 주흘산-부봉이다
오늘의 산행 포인트인 정상(頂上)에서 사방을 조망(眺望)했다. 오후 1시 55분, 정상에서 한 차례 계단을 타고 내려와, 영봉의 중간 지점인 평지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 후 하산 길에 들어가지 전의 대원들
• [신륵사로 내려오는 하산 길] — 능선 길과 신륵사 절골의 길을 따라
오후 2시 40분, 식사 후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민 대장이 계획한 예정대로 영봉 아래 신륵사삼거리(이정표)에서 동쪽의 덕산면 신륵사-절골 방향으로 길머리를 잡았다. 덕주사-송계리와는 반대 방향이다. 산은 능선 길이었다. 산길은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고 있었다. 군데군데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장대한 노송(老松)들이 영산의 기운을 느끼게 했다. 오후 3시 38분, 이정표가 있는 능선에서 신륵사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골 계곡으로 들어서니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뒤덮었다. 한참 동안 밀림이 숲속을 지나니 나무펜스가 있는 산의 출입구를 나왔다. 큰길이 나왔다. 2km의 하산 길은 넓고 완만했다.
• [오늘 산행의 마무리] — 신륵사 주차장에 무사히 하산을 완료하다
오후 4시 30분, 모든 대원들이 신륵사 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주차장 앞 맑은 계곡에 나아가 차가운 물에 더운 땀을 씻었다. 청랑한 물의 기운이 더운 몸을 청신하게 풀어주었다. 오늘은 서쪽 송계리에서 우람한 영봉을 넘어 동쪽의 신륵사로 넘어왔다. 온몸이 묵직해지고 다리는 알이 꽉 찬 느낌이다. 거대한 월악산 영봉의 무게가 우리의 온 몸에 실린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은 맑은 기운으로 충만했다. 세상의 걱정도 잠시 내려놓은 자연의 시간…
• [원활한 귀경 길, 그리고 따뜻한 뒤풀이] — 김의락 위원의 정성에 감사드리며 …
오후 4시 52분, 덕산면 신륵사 주차장을 출발하여 귀경길에 올랐다. 서울로 올라가는 중부내륙고속도로는 비교적 원활하게 소통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실시한 이천-신갈 영동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했다. 거침없이 상경할 수 있었다. 우리의 권용길 기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오후 8시 정각, 서울에 도착했다. 구의동 <민속 칼국수집>에서 따끈한 칼국수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오늘은 제 180차 산행을 기념하여 김의락 자문위원이 저녁을 샀다. 2002년 새재사랑산악회가 창립된 이래 13년 동안 총무의 일을 담당하여 산악회 운영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다. 우리 산악회와 대원들을 생각하는 정성이 여간 고맙지 않다.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오늘은 ‘180차 산행’을 기념하여 ‘기념타올’을 제작하여 대원들에게 배포했다. 우리 나름 조촐한 역사의 새김이었다. 그것으로 우리들의 우정과 건승을 다짐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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