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망명 미사일 北과학자 고백, 북한 내부붕괴 준비할 때 최근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비밀리에 망명, 미국의회에서 복면 증언을 한 탈북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복면증언자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자신의 회고록을 싣고 북한의 실상과 복면증언 뒤 부인에 대한 테러 위험 등에 대해 밝혔다.
- 5월 20일 미의회에서 마약관련 청문회에서의 북한고위관료와 미사일과학자가 복면을 쓰고 증언을 한느 모습. 이중 한 사람은 증언 뒤 곧바로 틀북자인 주인에게서 테러의 가능성이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밝히면서 김대중 정권이 북에 준 현금으로 인해 북한의 미사일 생산이 부쩍 늘었다는 말을 북한 동료에게서 들었다고 말해 대북송금 달러가 북한 군부로 흘러들어갔음을 간접 증명했다.
이 복면증언자는 "북한에 현금을 지원한 햇볕정책은 최악의 선택이며 김대중 정권은 현금 대화의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아 북한의 미사일 생산 확대를 가능케 했고 결국 북한 정권에 테러기술수출을 장려한 꼴이 됐고 세계 안전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게 한 셈"이라며 "현재 상태에서 북한과 대화를 통해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정권에게 경제지원을 하는 것은 북한정권에 테러 특허를 내주는 꼴" 이라며 위험성을 지적했다.
복면증언자는 WSJ에 기고를 하면서 가족들의 신변위험 때문에 가명을 쓰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제는 구소련의 경우와 같이 북한내부의 붕괴를 준비할 때"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 의회가 북한 탈북자들이 미국망명이 더 쉬워지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과 함께 인권시민단체들은 북한의 엘리트 수천명을 탈북시키는 일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고 탈북자를 지원해온 신동철 목사가 밝히고 있어 북한사회에서의 중간계층의 대량 탈북사태가 머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유해성 기자 chongmu@hses.com
다음은 북한에서 미사일 기술자로 일해온 탈북자이자 복면증언을 한 이복구(가명)씨의 회고록 전문이다.
이복구라는 이름은 내 실명이 아니라, 나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채택한 이름이다.
다년간 나는 북한군의 미사일 유도(誘導)시스템 및 그와 관련 된 전자기기(電子器機)를 제조하는 탄약공단(彈藥工團)에서 기술부(技術部)의 책임자로 근무했다. 나는 북한정권의 대량파괴무기(大量破壞武器)에 참여하고 있는 10만명 정도의 과학자 및 기술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내가 나의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고 있을 동안, 대량 기아, 억압받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권력남용과 북한정권의 고위 정치 군관들의 지나친 생활 스타일을 나는 목격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아주 사소한 과오로 인하여 수용소로 보내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가장 큰 기밀에 속하는 사항 중 그 일부를 취급할 만큼 신뢰를 받게 되었다.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이란을 통치하고 있을 당시, 나는 신규 유도시스템이 장착된 우리의 미사일 한발을 발사 시험하기 위해, 이란으로 파견되었었다.
1차 걸프전쟁 당시 사담 후세인을 위한 전시체제에서 근무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동료들에게, 그리고 이 같은 미사일의 판매, 서비스 및 설치를 위하여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기타 사람들을 상대로 컨설팅을 담당했다. 나는 전자 및 유도 원자재를--우리의 수입선의 90%가 일본의 수출업자들--주문, 감독 및 모니터링을 하였다.
나는 60명 정도의 러시아 과학자들 중의 일부 사람들과 함께 일했는데, 이들은 북한 정권의 핵무기, 화학무기 및 생물무기전에 종사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골라 뽑은 사람들이었으며--그리고 그곳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드디어, 나도 대부분의 나의 동포들처럼, 스탈린의 감옥으로 변한 나의 조국을 탈출할 수 있는 날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 날이 6년 전에 찾아왔다. 1997년 해가 떨어진 후, 나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 나는 중국에서 충분한 돈을 가지고 2년 동안 살았으며, 접선 및 일을 구하기 쉬운 기술이 있어서 대부분의 탈북자들보다는 기아와 체포에 자신을 덜 노출시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중국 당국자들에 의하여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간직한 채 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체포란 북한으로 송환되는 즉시 사형선고로 끝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고맙게도 한 중국의 조선족이 나에게 알려주기를, 누가 운항하는지는 밝히지 않은 채, 고깃배 한 척이 그 날 밤 수십 여명의 불법 노동자들을 실어 나르기로 되어 있다고 하여, 나는 밀항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으로 탈출하였다.
"햇볕정책에 위태롭다" 남한 관리 "북한 잔학상과 대량살상무기 함부로 말하면 신변 위험" 명백한 경고
도착하자마자, 나는 한국정보기관의 심문을 받았으며,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울에서 순진한 미국인 심문자들에게 넘겨지기도 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의 관리들이 내가 만일 내가 종사해 온 대량파괴무기에 관하여 또는 내가 목격한 잔학상을 함부로 말하게 되면 나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명백히 하였다. 나의 증언이 한국의 "햇볕정책"을 위태롭게 할 수 도 있다고 그들이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음이 곧 명백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북한이 와해되면 한국에 경제적인 후과(後果)를 미치기 때문에, 북의 강압정권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만난 북 동료 "남한서 돈받은 뒤 미사일 생산수준 정상화" 증언
믿기 어려운 것은, 김정일 정권을 지지하는 것이 전 세계에 중대한 후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서울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중국-북한 국경을 여행하는 중에, 나는 지난날의 동료들을 만나 우리의 구형 미사일 유도 시스템 공단에서의 생산수준이, 남한으로부터의 상당량의 외화를 수령하고 나서부터 정상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한 정보기관 계속 "나서지 말라" 압력, 일본 통해 미국 망명, 복면 증언
1997년, 내가 공단을 떠날 때, 경화 부족으로 인하여, 일제 부품(日製 部品) 수입을 위한 지불능력의 제한으로 인하여 노동 1호의 생산이 1993년의 30%까지 줄어들었었다.
지난해, 한국정보기관으로부터 밖으로 나서지 말아달라는 압력이 계속됨에 따라, 한국의 손아귀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리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일본을 여행한다는 핑계로, 여권을 획득했으며, 그리고, 지하활동가의 도움을 받아서, 지난달 미국으로 들어 올 수 있는 비자도 얻었다. 여기 있는 동안, 나의 신변보호 때문에 얼굴 가리개를 쓰고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상원의 공개 및 비공개 회의에서 내가 알고 있는 평양의 대량파괴무기에 관하여 증언했다.
복면증언 뒤 정보기관 즉각적 반응, 탈북자였던 妻, "테러 위험" 위협적 전화
한국측 정보기관으로부터 내 활동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내 처는 탈북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에 체포되어 북한 형무소로 보내졌었고 그 후 재차 탈출한 사람인데, 테러로 쓰러져 가료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위협적인 전화통화를 당하게 되었다. 고맙게도 리처드 루가, 피터 피츠제랄드 그리고 다니엘 아카카 등의 상원의원들--내가 영원히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의 개입으로, 지금까지 내 처에 대한 취급, 괴롭힘, 협박이 잠시동안 중단되게 되었다.
북한의 무기 취급 관리로서 그리고 탈북자로서의 경험과, 그리고 내가 가진 지식과 그리고 타 탈북자들 및 현 북한관리들과의 유지되고 있는 관계 등이, 지금, 이라크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평양의 미치광이 정권과 현실적으로 전력 대결을 하고 있는 미국 관리들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몇 가지 중요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돈주고 산 평화는 북한에 '테러 특허' 주는 꼴
첫째로, 현금과의 교환으로 북한정권이 핵무기와 대량파괴무기 계획을 중단하겠다는 보증이 지켜질 것으로 평양을 "이해"하는 것은 부도덕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같은 이해가 부도덕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귀결되기 때문이다: 즉 평양이 테러리즘을 수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평양에 대하여 평양이 마음대로 그들 인민들에 대하여 테러를 자행해도 좋다는 특허를 내주는 보증과의 교환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실패로 끝날 운명이라는 것은, 클린턴의 합의가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북한정권에 대하여 재정적(財政的) 지원을 하고, 합법화(合法化)해주거나 혹은 힘을 실어주는 여하(如何)한 노력도 단지 그들의 대량파괴무기 개발의 욕망과 능력만을 강화시켜 줄 뿐인 것이다.
나는 통치자들이 인민들의 대량의 기아사태에 대하여 무관심한 그런 나라에서 왔다
-남한의 형제 자매들에 비하여 평균적 신장이 7인치나 작고, 주민들이 아침 일찍 기상하여 미친 지도자를 찬양하는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지르는 대중연설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나라에서 말이다.
그러나 10년 전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사실, 즉 나의 동포들이 김정일(金正日)이 사악하고 미치광이이며 파멸적인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또 공개적으로 확인할 정도로 점차적으로 사실화로 되어가고 있다. 더욱 더, 북한군부와 WMD산업 안에 있는 나와 같은 중간급(中間級) 관료들은 북한정권이 다른 나라에 부리는 허세는 그들의 고립과 절망과 그리고 권력 장악의 종말이 가깝다는 증거로 보고 있다.
수천명의 엘리트 탈북을 추진해 총 한방 쏘지 않고 내부 폭발시켜야
지금은 남한과 미국이 북한정권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를 전세계에 털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그들이 그 곳을 떠남으로 해서 북한정권의 생존에 필요로 하는 기술을 박탈할 수 있는 나와 같은 수천 명의 탈북자들을 격려할 때인 것이다. 동시에 서울은 그 잔인한 "햇볕정책"을 끝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북한동포들을 노예로 선고하는 정책인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 동포들에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 너무나 많은 돈의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정책, 인도적 원조가 북한 정권에게 돌아가기보다는 실제적으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주장하고 확인하는 것, 그리고 대량의 탈북사태를 격려하는 것이야말로, 동독(東獨)사람들이 헝가리를 통하여 오스트리아로 탈출할 때 일어난 사건이 북한에서도 되풀이 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총 한방 쏘지 않고 소련의 내부 폭발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온 것이다. 이는 압박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내 조국 인민들을 위하여 그리고 세계의 안전을 위하여 실질적이고 바람직한 전망일 것이다.
A Defector's Story
Wall Street Journal 2003. 6. 5
BOK KU LEE
Bok Ku Lee is not my real name, but one I've adopted to protect my family.
For a number of years I served as head of the technical department at a munitions complex that made missile guidance systems and related electronic devices for North Korea's military. I was one of 100,000 or so scientific and professional people involved in the regime's weapons of mass destruction industry.
While I made enough money to modestly feed my family, I witnessed mass starvation and oppression of those less fortunate, and unspeakable abuses of power and lifestyle excesses by senior political officials of the regime. As did everyone, I lived in constant fear of being sent to the gulag for the slightest indiscretion.
* * *
Nonetheless, I was trusted with some of the regime's biggest secrets. While serving, I was sent to Iran to test launch one of our missiles with a new guidance system for the then-ruling Ayatollah Khomeini. I consulted with colleagues who were sent to serve on an operational war basis for Saddam Hussein during the first Gulf War, and others who were sent to other countries to sell, service and install such missile systems. I ordered, supervised and monitored the foreign purchases of electronic and guidance material -- 90% of which came from Japanese suppliers. I worked with some of the 60 or so Russian scientists who had been "cherry picked" by the regime to work in Pyongyang's nuclear, atomic, chemical and biological warfare programs -- and who continue to work there.
Yet, like most of my fellow countrymen, I longed for the day when I could escape the Stalinist prison my country had become. That day came six years ago. I made my escape in July 1997 by crossing the Yalu River into China after sundown. I lived in China for two years with enough money, contacts and employable skills to make me less vulnerable to starvation or capture than most North Korean refugees. That said, I lived in constant terror of capture by Chinese authorities, for I knew that such capture would have resulted in a death sentence upon repatriation to the North. In 1999, thanks to an ethnic Korean in China who notified me of a fishing boat scheduled to ferry dozens of illegal laborers that very night, and, unknown to the operators of this boat, I escaped to South Korea as a true stowaway.
Upon my arrival, I was debriefed by South Korea's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and occasionally put in the hands of unsophisticated American questioners in Seoul. Remarkably, the South Korean officials made it clear to me that I would be in danger if I were to speak out about the WMD programs I had worked on or the atrocities I had witnessed. It soon became obvious that they feared my testimony because it might jeopardize South Korea's "sunshine policy," which seeks to keep the North's repressive regime in power in order to avoid the economic consequences to the South were it to collapse.
Incredibly, Seoul seems unwilling to accept that propping up Kim Jong Il's regime has had grave consequences for the world. While traveling to the China-North Korea border last year, I met with former colleagues and learned that the production at our old missile guidance system plant was up to normal levels following receipt by the regime of substantial amounts of foreign currency from the South. In 1997, when I left the plant, the output had shriveled to 30% of the pre-Nodong One launch in 1993 due to the lack of hard currency that had limited the capacity to pay for Japanese parts imports.
Last year, facing increased pressures from the South Korean Intelligence Service to remain an invisible man, I decided to do all I could to escape from South Korea's hands. I obtained a passport under the pretense of traveling to Japan, and, with the aid of an underground-railroad activist, obtained a visa that brought me to the U.S. last month. While here, I put on a hood to protect my identity, held a press conference in Washington and testified before the Senate in open and closed sessions about what I know about Pyongyang's weapons of mass destruction.
The reaction to my activities on the part of the South Korean intelligence was immediate. My wife, a North Korean escapee who'd been captured by the Chinese and sent to a North Korean prison before escaping again, was subjected to threatening phone calls from police and intelligence officials that so terrorized her as to cause her collapse and hospitalization. Thanks to the intervention of Sens. Richard Lugar, Peter Fitzgerald and Daniel Akaka -- to whom I shall remain forever grateful -- South Korean officials have since been contacted about the treatment of my wife, and the harassment and intimidation have, for the moment, ceased.
My experience as a North Korean weapons official and defector, and my knowledge and ongoing relations with other defectors and current North Korean officials, led me to a few critical conclusions that may be of value to American officials who now, in a post-Iraq world, are confronting full-force the reality of Pyongyang's lunatic regime.
First, "understandings" with Pyongyang that cause the exchange of hard currency for "guarantees" that the regime will discontinue its nuclear and WMD programs are both immoral and doomed to failure. Immoral because such understandings come, in the end, to this: promises by Pyongyang not to export terrorism are exchanged for assurances to Pyongyang that it is licensed to commit as much terrorism against its own people as it wishes. And doomed to failure because, as the Clinton agreements prove, any effort to finance, legitimize or empower the regime only strengthens its desire and capacity to develop weapons of mass destruction.
I come from a country whose rulers are indifferent to the mass starvation of their own people -- one whose citizens are on average more than seven inches shorter than their Southern brothers and sisters, and one that requires its citizens to rise early in the morning to join screeching public-address systems in singing absurd songs of praise to a deranged leader. But -- and this is now increasingly true and true to a degree that would have seemed impossible 10 years ago -- my fellow countrymen know and openly acknowledge that Kim Jong Il is both evil and lunatic and doomed. More and more, midlevel officials like me in the North Korean military and WMD industry see the regime's blustering threats against other countries as evidence of its isolation, desperation and declining hold on power.
* * *
The time has come for South Korea and the U.S. to encourage the defection of thousands like me who are prepared to tell the world what they know and whose departure will deprive the regime of skills it needs to survive. Such mass defections will occur if the defectors are given a reasonable prospect for safe harbor outside of North Korea. At the same time, Seoul should end its barbarous "sunshine policy," which sentences fellow Koreans to slavery because giving them freedom would cost too much money.
In short, the time has come to recognize that a policy of promoting democracy, insisting and ensuring that humanitarian aid actually go to the hungry rather than the regime, and encouraging mass defections, will cause the repeat in North Korea of what happened when East Germans defected to Austria through Hungary, thereby triggering the implosion of the Soviet Union without a shot being fired. This is a real and likely prospect for the oppressed people of my country and for world secur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