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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때에(2017 창조절 둘째주일)
욥기 38:1-15
먼저, 지난 5일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영상으로(클릭) 보시겠습니다.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는 ‘강서 지역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2차 주민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토론회에서 장애아 학부모들은 “어떤 모욕도 감수하겠지만, 아이들을 위한 학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며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양해를 구했습니다. 장애아 학부모들은 큰절을 올리고 무릎까지 꿇었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조롱과 야유뿐이었습니다. 반대하는 이들은 “쇼 하지마!”라고 소리치며, 무릎 꿇은 이들을 조롱했습니다. 저는 노컷 뉴스 영상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정의의 하나님, 장애아 학부모들을 조롱하고 그들을 품지 않으며 야유를 던지는 이들을 지나치지 마시고, 반드시 그들의 악행의 백배를 벌하여 주셔서 당신의 살아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반대하는 이들은 혐오시설이라고 반대하고, 특수학교가 들어오면 집값이 내려간다고 반대합니다. 자기 아이들이 장애아들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합니다. 저는 그 영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반대하고 야유하고 조롱을 퍼붓는 저 주민 중에 기독교인은 없을까? 강서구에도 교회들이 많을 터인데, 그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반대하는 주민과 장애아를 둔 교인이 함께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기도를 할까? 어느 편을 들어도 문제가 있으니 그냥 침묵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일까?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일까? 그것이 죄의 대가라면, 왜 부모의 죄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교회가 이런 삶의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장애아로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하나님은 얼마나 잔인한 분이신가?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이들의 반대논리를 합리화하는 기제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에 관한 해답을 찾고 싶어 욥기를 읽었습니다.
■ 욥의 이야기
욥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은 동방 우스 땅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당대의 의인이었고,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부자인데다가 훌륭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잘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여 회의가 열렸는데 사탄도 함께 자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세상에 욥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때 사탄은, 하나님께서 온갖 복을 다 주셨으니 경외하는 것이지 그에게 주신 것을 빼앗으면 그도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 자신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를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사탄은 그의 자녀와 재산을 다 빼앗고, 온몸에 종기가 나게 합니다. 동방 최대의 부자에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온몸에 종기가 나서 괴로워하는 욥에게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시오!” (2:9)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이에 욥의 절친한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위로하러 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오히려 그의 속을 뒤집어 놓는 말만 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욥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결과이며, 항변하는 욥의 말을 꼬투리 잡아 비난하고, 욥은 그에 항변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후라는 젊은이는 욥과 세 친구를 싸잡아 비난하고, 욥은 또 이에 대해 항변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일부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욥은 회개하고, 욥의 친구들 역시 욥에게 자신들의 경솔함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욥에게 복을 주셔서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고, 그 후에도 140년을 복된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욥기의 이야깁니다.
■ 고난은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이 닥쳐오면 ‘혹시 하나님께 죄지은 것이 없는가?’ 자신을 돌아봅니다. 고난이든 복이든 하나님의 섭리요, 행실의 열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많은 구절은 의인과 악인에 관해 말씀하면서, 의인은 복을 받을 것이고 악인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이지, 우리의 현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선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장애아를 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조차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아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듯하지만, 장애아를 둔 부모입장에서는. “내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고난을 받느니, 아주 작은 고난도 이겨낼 힘도 없어서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이 더 복이겠지요. 욥도 나중에는 갑절의 복을 받는다지만, 그런 복을 받기보다는 욥의 자녀를 한꺼번에 잃는 일이 없었던 편이 훨씬 더 큰 복일 것입니다.
욥에게 갑절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의 자녀를 죽이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욥의 세 친구처럼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분명히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을 거야’ 혹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그런 고난을 주셨을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장애아를 둔 부모에게도 스스럼없이 ‘그들의 장애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탐욕으로 찌든 어른들의 잘못을 깨우치시기 위해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죄 없는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삼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이들이 장애아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유전자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장애아를 둔 부모,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위로하시는 분이시지, 어른들의 죄의 책임을 묻기 위해 죄 없는 아이들에게 장애를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였다면 우리는 공평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착한 사람에게 왜 고난이 닥치는가?
자연의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자연의 법칙은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자연재해 앞에서 비껴갈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건지시기 위해서 자연의 법칙에 간섭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착한 사람들만 지진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이 아니라, 지진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질문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강요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들의 동정과 연민과 자신이 그래도 좋은 사람이요,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욥은 자신이 당하는 일이 상당히 공평하지 못하며,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친구들도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에게 ‘지금 네가 당하고 있는 일은 죄의 결과’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하는 질문을 넘어서 “이 일에 대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가져온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욥이 그런 일을 당해서 마땅한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엘리후라는 똑똑한 청년은 그가 배운 구약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동원하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는 욥을 책망하고,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책망합니다. 사실, 그들 모두는 전지전능하시며 무소 부재하신 완벽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보다 욥이 선하다는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웠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빠진 함정은 욥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더욱 고귀해지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지만, 사실 더 많은 사람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더 냉소적이고 적의를 가지는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있는 이들에게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 섭리’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기에 예외 없이 고난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소소한 죄에 대해서 일일이 징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예외 없이 고통과 고난의 문제와 직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창조 섭리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에 막아주지 못하시는 분이시라면, 고난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방관자이실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이 훨씬 많이 일어나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을 때에는 그것을 극복하는 힘과 인내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힘겨운 삶의 무게를 지내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힘겨운 삶의 무게를 능가하는 희망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애꿎은 사람이 병에 걸리고, 애꿎은 사람이 강도를 당하며, 애꿎은 사람이 전쟁과 사고 때문에 사망한다. 그러니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나쁜 일을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은 믿음 있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는 논리일 뿐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원하지 않는 고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난은 인간 자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충제 달걀 파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분들은 ‘공장식축산’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돈벌이를 위한 인간의 욕심이 그런 파동을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건을 막으시거나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라, 그런 사건 앞에서 인간이 ‘공장식축산’의 문제점을 깨닫고, 가금류 가축이라도 좀 더 창조질서에 맞는 사육을 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 2절에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무지한 말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일진대 회개하라’고 다그치고 있으며, 욥은 ‘자기가 당하는 불행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 모두 무지한 말입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크신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인식 안에 가둬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다그치듯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냐? 네가 한 일도, 알 수 있는 창조의 신비는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그러면서 왜 고난의 근원이 내게 있다고 항변하느냐?” 이것이 욥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욥기의 메시지
욥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명확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세상사에서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침묵하지 않겠다. 그리하여 결국,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일 날’이 오게 할 것이다. 나는 그 일을 위해서 고난 중에 있는 너희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그 자리에서 함께 고난 겪으며 도와줄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며, 설령 욥처럼 배의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재를 선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장애아를 둔 부모들처럼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 것이며, 그들의 호소를 듣지 않을뿐더러 조롱하고 야유를 퍼붓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욥기는 욥과 친구의 대답과 그에 대한 반론과 하나님의 말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말인지 주위 깊게 읽지 않으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좋은 말씀인 줄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문장은 좋은 말씀이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욥을 비방하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다고 해서 다 ‘사랑’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나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죄의식에 빠지지도 마십시오. 이것만 확실하게 아십시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첫댓글 오늘 주신 말씀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큰 은혜를 얻게 하신 중한 말씀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