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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린 야구, 버렸던 글러브 다시 잡았네요”
뛰어난 기량 불구 떠났던 야구인…공 다시 잡은 김희수씨(넘버원베이스볼 대표)
김도현기자(dhkim@skyedaily.com)
9명이 수비와 공격을 나누어 펼치는 야구 경기에서 수비 선수들은 통상 타자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경기를 한다. 날아오는 타구를 바라보기 위해 뒤편 관중석을 등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포수는 유일하게 뒤편 관중석과 그라운드 전체를 바라보는 포지션이다. 포수는 타석에 들어서는 상대 선수에 맞춰 자기 편의 수비 위치를 조정하고 투수의 구질을 주문하는 등 경기 전체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포지션이다. 투수가 던지는 빠르고 강한 공을 받아내기 위해 다른 야수(내·외야수)들에 비해 더 많은 장비를 착용하는 포수는 매 경기마다 마스크, 미트, 가슴·정강이·낭심 보호대 등을 착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지고 시야가 좁아지며 체력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젊은 선수일수록 포수를 기피하는 현상도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투수놀음이여도 경기는 포수가 지배한다”고 말하는 야구인도 있다. 포수 유망주 출신 김희수 넘버원베이스볼 대표가 그렇다. 김 대표는 힘겨운 포수를 맡으며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받던 야구선수였다. 그러나 부상·방황 등의 이유로 그라운드를 떠났던 불운을 겪기도 했다. 야구계를 떠났던 그는 한 때 야구장에 가는 것조차 싫었다. 생계 탓에 등졌던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왔다는 그는 야구를 꿈꾸거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야구를 할 수 있어 이제는 행복하다고 전했다. 그는 야구 레슨 모임 ‘넘버원베이스볼’을 세우고 사회인 선수들과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가 김희수 넘버원베이스볼 대표를 만나 유망주 시절의 사연과 현재 활동상을 들어봤다.
▲ 한 때 국내 최고의 포수 유망주였던 김희수 넘버원베이스볼 대표는 주변의 시기와 방황
그리고 부상의 여파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김 대표는 야구를 떠나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자리를
전전하던 중 자동차 세일즈맨의 길에 올랐고 판촉을 위해 다시 야구공을 잡던 중 과거 신들린 듯
빠지고 열심히 했던 야구의 삶에 다시 푹 빠졌다. 그는 사회인 선수들을 레슨하거나 야구 꿈나무를
지도하는 일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한 때는 야구장에 가기 싫을 정도로 야구가 싫었습니다. 야구는 제 인생에서 마치지 못한 꿈과 같았기에 힘들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보기 싫어 떠난 그라운드 위에 어느 순간 제가 돌아와 있더군요. 이제는 야구에 꿈을 갖는 사람들과 야구에 푹 빠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김희수(29) 넘버원베이스볼 대표는 과거 야구 유망주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포수 자리를 놓고 국내 1·2위를 다퉜다는 김 대표는 현재는 자동차 세일즈맨을 하면서 동시에 야구 레슨 모임인 ‘넘버원베이스볼’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넘버원베이스볼’을 통해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 활동 중인 일반인들과 초등학교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코치 및 레슨활동을 하고 있다.
운명처럼 나타난 야구공…태극마크 달며 승승장구
“하굣길에 우연히 야구공을 주웠어요. 제가 다니던 영중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어 종종 아이들이 학교 여기저기에 떨어진 야구공을 주워 놀곤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그 공을 주워 교문을 나서려는데 야구부 주장이 제 앞에 서더니 왜 공을 훔쳐 가느냐며 다그치기 시작했어요”
야구부 주장은 경찰을 부르겠다며 엄포를 놓았고 대신 야구부에 들어오면 봐주겠다며 그를 회유했다. 야구부 주장의 꾐에 넘어가 야구부에 들어갔다는 김 대표는 우연히 시작한 야구에서 큰 재미를 느꼈다. 통상 정확한 포지션 구분이 없는 유소년 야구에서 그는 팀의 에이스들이 주로 맡는 포지션인 투수·포수·유격수를 두루 맡았다. 타순에서도 4번을 맡기 시작하며 팀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야구명문 양천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다. 그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99년에 양천중학교는 ‘추계 서울특별시 중학교 야구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맹위를 떨쳤다.
2000년 ‘문화체육부장관기 대회’에서는 양천중학교는 4강에 진출했고 그는 이 대회에서 13타수 10안타, 7할6푼9리의 기록으로 타격상을 받았다. 김 대표는 같은 해 열린 ‘제1회 AA청소년야구대회’의 대표선수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와 함께 발탁된 선수들은 나지완(기아타이거즈), 임훈(SK와이번스), 최진행(한화이글스), 황목치승(LG트윈스) 등으로 이들은 오늘날 한국 프로야구의 대들보로 성장했다.
▲ 우연한 기회로 야구공을 잡은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우연을 운명으로 바꿨다. 그는 유소년
시절,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당시 같이 뛰던
선수들이 오늘날 프로야구의 기둥으로 성장한 것과 달리 김 대표는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부상으로
운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사진은 그의 첫 유니폼과 제1회 AA청소년야구대회
우승 기념 사진 <사진=넘버원베이스볼>
“그 당시 전국에서 잘한다는 친구들은 다 모인 것 같아요. 뛰어난 선수들 사이에서 저 역시 주축으로 활약했죠. 일본과의 결승전을 앞두고 선수들이 결의를 다졌던 것이 생각나네요. 어린 마음에도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였거든요. 선발 포수로 출장했던 경기에서 우리가 일본을 이기고 우승컵을 차지할 때는 정말 짜릿했습니다”
이 같은 활약으로 그의 이름은 야구계에서는 유명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야구를 했던 선수들 중 상당수가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장밋빛으로 물들 것 같은 그의 야구인생은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질투와 시기 그리고 부상…“야구가 싫었어요”
장충고등학교로 진학한 그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연습경기 등에서 곧장 선발 포수 자리를 독차지했다. 하지만 1학년이 선배들을 밀어내고 주전을 도맡자 선배들이 이를 곱게 볼 리 없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운동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운동할 당시 선배들한테 기합도 많이 받고 매도 맞았었어요. 그런데 점점 그 기합과 집합이 제 개인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일종의 괴롭힘이었죠. 좋아서 시작한 야구가 처음으로 싫어지더군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어서 야구부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때 당시 천안북일고의 김상국 감독님이 제 소식을 접하시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야구를 절대 그만두면 안 된다고 만류하시며 제게 천안으로 내려오라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야구만 알고 자랐던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래서 짐 싸서 바로 천안으로 내려갔어요”
하지만 천안북일고에서도 그는 자리 잡기가 힘들었다. 성장 환경과 살아온 지역이 달라 기존 선수들과 섞이기가 힘들었다. 또 기존 선수들은 숙소생활을 오래하면서 가족 같은 환경에서 운동을 해왔다. 그래서 야구부 사이에 그가 섞일 자리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쾌활했다던 그도 그 자리에서 주눅 들고 말았다.
“어린 마음에 그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들이 왜 날 안 받아 줄까하는 답답함이 더 컸어요. 그래서 더욱 운동만 했죠. 받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들을 등지고 홀로 왕따가 돼버린 것 같아요”
당시 천안북일고는 그를 포함해 총 5명의 포수 자원을 보유했다. 그가 독하게 마음먹고 운동에 전념하자 다른 포수들은 경기 출전 등을 위해 포지션을 전향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됐다. 자신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김 대표는 부원들과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는 또 다시 그라운드를 등졌다.
“그 때 아마 사춘기가 온 것 같아요.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야구를 잊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제 야구 인생의 종착점은 그 때가 아닌가 싶어요”
그가 떠난 이후 천안북일고는 그의 1년 선배인 나주환(전 SK와이번즈)과 안영명(한화이글스)이 주축을 이루면서 전국대회 5관왕을 달성했다. 당시 프로야구팀의 스카우터들은 천안북일고 선수들을 주목했지만 김 대표는 이미 팀을 떠난 이후였다.
“또다시 절 잡아주신 분은 김상국 감독님이셨어요. 제 사정과 상황을 아신 감독님은 야구만은 포기하지 말라하시며 전학을 권유하시더라고요. 저도 다시 마음을 추슬러서 야구에 전념하겠다는 마음을 다 잡고 감독님이 주선해준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고등학교 진학 이후 두 번 전학했던 그는 속초상고에서 야구의 꽃을 피우려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프로야구 지명에 탈락하며 사실상 선수로써의 야구인생을
안타깝게 접어야 했다. <사진=넘버원베이스볼>
속초상고(현 설악고)로 전학을 간 그는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훈련에 매진했다. 그해 겨울 속초상고는 고등학교 야구팀들이 전지훈련 장소로 주로 찾는 경남 남해로 훈련을 떠났다. 그곳에서 벌어진 다른 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훈련기간 동안 열 게임을 치렀어요. 그 경기에서 제가 친 홈런이 열 몇 개 정도 돼요. 각 프로팀 스카우터들이 겨울이면 남해에 와서 연습경기를 보곤 하는데 제가 연타석 홈런을 치니까 다들 저를 기억해 내고 관심을 보였어요”
“모 팀의 스카우터는 ‘신인 지명에서 몇 차에 몇 번으로 너를 택하겠다’는 구체적인 약속까지 하셨어요. 고3 끝나면 바로 계약을 진행하자는 것이었죠. 저도 프로야구의 꿈을 키우며 고3 내내 야구에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광주일고와의 청룡기 경기에서 공을 던지는데 오른쪽 어깨에서 ‘탁’ 소리가 나더니 아프기 시작했어요. 아픔을 참고 경기 끝난 후 병원에 가보니 ‘회전근 파열’ 진단이 나오더군요. 전 결국 수술대 위에 올랐습니다”
프로야구 신인 지명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는 수술을 하고 재활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그 해 프로야구 신인지명자 명단에 빠져있었다. 신인 지명을 약속했던 그 팀도 그의 수술경력을 부담스러워 했는지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실의에 빠져 재활 중인 그에게 연락을 준 곳은 탐라대학교였다.
“탐라대 측에서 고맙게도 재활중인 저에게 장학생을 제안하더군요. 저도 이미 프로 진출이 좌절된 상태였고 후일을 기약하자는 마음에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부상 부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어요. 결국 탐라대 소속으로 딱 한 게임만을 뛴 채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마지막 경기에 지명 타자로 출전한 그는 4타수 3안타 3도루의 기록을 남긴 채 결국 야구계를 떠나게 됐다. 마지막까지 그를 잡으려는 대학과 야구계의 권유를 뒤로 한 채 김 대표는 공익근무요원 생활을 시작하며 두 번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3개월에 한 대 판 카 세일즈맨…결국 그라운드로
“소집해제 이후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가정형편이 부유한 것도 아니고 저도 스스로 제 살 길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었죠. 음식배달부터 단란주점 웨이터, 당구장 직원까지 잠깐잠깐 했던 일까지 합치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아시는 분의 소개로 자동차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김 대표는 3개월 동안 한 대의 차도 팔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명함을 보고 연락한 고객에게 첫 차를 팔 수 있었다. 하다못해 명함이라도 돌려야 차를 팔 수 있음을 그는 깨달았다.
“차는 누구나 팔 수 있지만 제가 파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차보다 저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여러 동호회를 알아보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야구뿐이라 결국 야구 동호회를 노크하게 됐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던 그라운드를 생계 때문에 돌아온 셈이죠”
그는 여러 사회인 야구팀에 가입해 활동하며 점차 인맥을 넓혀갔다. 이른바 ‘선출(선수출신)’이라 불리는 그를 사회인 야구팀들은 모두 반겼다. 그는 동호회원들이 차를 구매하거나 주위에 소개를 시켜주는 일이 많아지면서 실적이 좋은 세일즈맨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야구를 다시 시작하니 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어요. ‘재미’가 있다고 할까요. 야구를 다시 시작한 목적은 처음에는 영업이나 다름 없었어요. 하지만 사람들과 만나고 웃고 떠들며 좋아하는 야구를 하니 예전엔 정복하고 싶고 더 잘하고만 싶었던 야구가 재미있게 느껴지더군요”
▲ 내년 3월 태어날 아이의 태명을 ‘김 포수’라고 지을 만큼 야구를 사랑하는 김 대표는
현재 일반인과 야구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레슨 및 코치생활을 하고 있다. 야구를 즐길 수 있게 돼
행복하다는 그는 사람들이 야구를 통해 꿈과 행복을 나누는 데 일조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스카이데일리
결국 그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프리랜서 영업직으로 전환했다. 프리랜서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는 일반인과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한 야구레슨장을 열었다. 또 그는 강서리틀야구단에서 코치직도 함께 맡고 있다.
“추운 겨울날에도 고사리 같은 손이 터져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공에 집중하는 어린 선수들을 볼 때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어요. 그토록 야구에 빠져있었던 제 어린 날이 떠올려지기도 하고요”
오는 3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김 대표는 아이의 태명을 ‘김포수’로 지어 놓고 아들이 태어난다면 포수로 키울 생각이라고 전했다.
“야구를 피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좋아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처럼 야구를 좋아하고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가 야구인으로써 남은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