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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
창조 -창세기 1장-
이 장의 깊이와 풍성함을 간단한 연구 개요로 다 전개할 수는 없으므로 주요 진리들로 제한하기로 한다.
1. 창조주
어떤 과학자나 역사가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라는 구절을 증명할 수는 없다. 이 간단한 서술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를 논파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를,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론자를,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자를 논파한다. 이 구절은 물질은 영원하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 그리고 창조와 역사의 배후에 신의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는 운명론자를 논파한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고, 보고, 이름을 지으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는 물질이 “저절로 존재케“ 되었고, 생명도 “우연히“ 발생하였으며, 모든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는 낮은 형태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같은 종(種)안에서의 변화(이를테면 말이나 집고양이로의 발전)를 인정하지만 한 종류의 피조물에서 다른 종류로와 변화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
자신에 무엇을 덧붙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창조는 하나님을 제한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원한 분이 시간과 인간의 역사 속에 자신을 제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저술가(Author)요, 지탱자(sustainer)요, 창조의 목적이라는 점이다(골 1:15-17/계 4:11).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신다(요 1:1-5/시 19 참조).
창조는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가?
창조가 계시하는 것은-
1)그의 지혜와 능력(욥 28:23-26/잠 3:19)
2)그의 영광(시 8:3-9)
3)그의 능력과 하나님되심(롬 1:18-21)
4)대수롭지 않은 존재인 인간에 대한 사랑(시 8:3-9)
5)그의 섭리로 돌보심(사 40:12- 이하)이다.
우리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꽃들과 새들에게서 조차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손길을 보았다.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란 이름은 “엘로힘“(Elohim)이다.
창조에 연관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의 어원은 “엘“(E1)로서 “능력, 강함, 탁월성“을 뜻한다. 창세기 2장 4절에 “여호와 하나님“(Lord God)이란 말이 나오는데 원문의 “여호와 엘로힘“(Jehovah Elohim)을 번역한 것이다. “여호와“는 언약과 연관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백성과 그를 연결시키는 이름이다. 이것은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으로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출 3:14-15)이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2. 창조
우주의 원창조(original creation / 1:1)는 사탄의 타락(사 14:12)이전의 일이며 하나님의 수제품(인간을 일컬음)이 타락하기 전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세기 1장 1절과 1장 2절 사이에 “간격“이 있음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2절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되었고“라고 읽을 수 있겠다. 이사야 45장 18절은 하나님이 땅을 “공허한 중에“(히브리어-“형태가 없이“)창조하시지 않았음을 진술한다. 그러므로 땅의 혼돈된 상황은 심판을 받은 결과임이 분명하다. 에스겔 28장 11-19절은 원창조 시의 가장 높은 피조물인 루시퍼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이로 말미암아 심판을 초래했음을 암시해 준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서 벌써 활동하므로 그의 타락은 그보다 먼저 생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곧 창세기 1장의 창조 활동들은 사실상 몰락한 우주의 회복이란 뜻이 된다. 만물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 가운데 있다. 아래 도표는 창조의 6일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나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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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조성하심>> <<하나님이 조성하신 바를 채우심>>
첫째날/빛의 창조(3-5) 네째날/광명(비치는 광명들, 14-19)
둘째날/궁창과 물(6-8) 다섯째날/새와 물고기(20-23)
세째날/땅과 식물(9-13) 여섯째날/동물과 인간(24-31)
일곱째날/하나님이 쉬셨다-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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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하늘에 광명들을 두시기 전에 빛이 있게 하셨다.
“궁창“이란 단어는 “넓게 펼쳐져 있음“ 또는 “팽창“의 뜻으로 우주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창조에 있어서조차도 분리의 원칙이 적용됨에 유의하자. 즉,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서 빛을 나누시고 땅에서 물을 나누셨다(고후 6:14-18). 또 한 가지 주목할 일은 각 생물은 “각 종류에 따라“ 재생산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점진적인 진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시가 없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가축의 새 품종을 개량할 수는 있으나, 소(牛)로 순록(馴鹿/ 사슴의 일종)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인간은 창조의 면류관이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회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 인간을 데려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쓴“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몇몇 천사들이 이미 하나님께 반역하였음과, 인간도 물론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첫 인간을 “그의 형상을 따라“ 빚으셨다(형상이란 물론 인간의 인격성(지, 정, 의, 자유)을 가리키는 말이며 육체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을 보자.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게 되었으며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왕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공격이란 말이 설명된다. 전에는 사탄(루시퍼)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우주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다음으로 그는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통치의 자리를 잃었다(시 8/히 2:5-18). 그러나 이 통치권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다시 주어졌다(롬 5장 참조). 지상에 계실 때 예수는 물고기(눅 5/마 17:24- 이하), 새(마 26:74-75)와 짐승들(마 21:1-7)을 다스리심을 증명하셨다(계 1:5-6 을 읽자).
인간의 식성은 본래 채식성이었으나 창세기 9장 3-4절에서 변했다. 사도행전 10장과 복음서 전체의 가르침으로 볼 때 어떤 식으로나 식성을 제한하는 것은 폐지된다.
3. 새 창조
고린도후서 4장 3-6절과 5장 17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적인 새 창조를 이루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바울은 이 새로운 창조를 예증하기 위해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이용한다.
1)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우주가 그러했듯이 죄로 인해 타락했다. 인간은 “혼돈과 공허“ 속에 죄인으로 태어나며 그의 생애는 목적이 없고 공허하며 흑암 중에 있다.
2)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자신의 일을 시작하신다(창 1:2).
구원은 반드시 주님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며 어떤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3)성령은 말씀을 사용하신다.
“비취어 깨닫게 하신다“(시 119:130)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요 5:24). 히브리서 4장 12절은 말씀하시기를 마치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물과 땅을 나누셨듯이 말씀은 “쪼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4)그리스도를 믿음이 생명을 준다 !
이것은 제 3일에 땅이 나타난 것으로 예증된다. 이것은 실제적인 부활이다. 죽음을 벗어난 생명이다. 제 3일에 이 일이 발생했음에도 큰 의미가 있으니 곧 부활의 날이다.
5)이제 믿는 자는 “각기 종류대로 열매를 맺고“ 번식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영적인 의미로)
믿는 자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천국의 빚을 지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왕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린다“(롬 5:17-).
아담이 옛 창조의 머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머리이시다. 그는 마지막 아담이시다(고전 15:45-49). 구약은 “아담의 세대들의 책“이며(창 5:1), 저주로 끝난다(말 4:6).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들의 책“(마 1:1)이며, “다시 저주가 없으며“(계 22:3)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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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창세기 2장
1. 첫 안식일(2:1-3)
“안식“이란 단어의 뜻은 단순히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지쳐서 쉬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시 121:4). 그보다는 그의 창조의 사역을 멈추셨다. 그 임무는 이제 완성되었다. 그는 피조물들을 축복하셨고(1:22), 인간을 복주신 다음(1:26), 이제 안식일을 축복하셔서 특별한 날로 정해 놓으신다. 여기서는 인간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없다. 사실 아담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은 아담에게 첫 날이었다.
안식일은 출애굽기 20장 8-11절에 이르기까지 구약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이 구절에 보면 하나님은 특별한 언약의 표시로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셨다. 이방인들에게 안식일을 주었다는 말은 성경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시편 147편 19-20절은 구약의 모세, 율법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배를 당한 한 가지 이유는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었다(느 13:15-22).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그는 안식일을 지키셨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바리새인들의 규율을 따르지는 않으셨다(막 2:23-28).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최종적으로 이스라엘과 결별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온전해지기까지는 안식일에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한 주의 첫 날(일요일/ 主日)은 교제와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이었다(행 20:7/고전16:1-3/계 1:10). 그 첫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마 28:1/요 20:1) 새로운 창조를 이룩한 그의 사역의 완성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고후 5:17). 두 개의 특별한 날들, 안식일과 주일(the Lord's, Day)은 서로 다른 것을 기념하므로 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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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주일
1)옛창조의 완성(육적) 1)새 창조의 완성(영적)
2)이스라엘에게만 2)모든 신자에게
3)노력해서 얻는 구원을 말함: 4)은혜로 얻는구원을 말함 :
6일간 일하고 쉼을 얻음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다음으로 그를 위해 수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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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4장에 보면 구약의 안식일은 장차 올 안식의 왕국을 모형으로 보여 주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가지는 영적인 안식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골로새서 2장 13-17절은 안식일이 율법의 “그림자“에 속한 것이며 은혜의 충만한 빛에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일 누가 안식일에 예배드리려 한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주일(主日)에 예배하는 신자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갈라디아서 4장 9-11절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의 속박으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로마서 14장 4-13절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연약한 양심과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시임을 암시해 준다. 물론 안식교인이나 재림교인이 토요일에 예배하는 것을 더 좋아하면 그렇게 해도 좋으나 우리가 일요일을 특히 강조한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로마서 14장이 다루고 있는 전체의 논점이다."
2. 첫 동산(2:4-14)
성경 역사는 네 개의 동산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에덴-죄가 들어온 곳
2) 겟세마네-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괴로워한 곳
3) 갈보리-그가 죽어 장사지낸 곳(요 19:41-42 참조)
4) 천국의 낙원(계 21:1- 이하)
이 부분에 이르러서 모세는 하나님이 첫 부부에게 주신 첫 가정을 설명한다. 여기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에 포함시키지 않은 보다 상세한 일들이 나오는데 이 일들은 보충적인 사건들이지 모순된 사건들은 아니다. 5절은 하나님이 땅의 경작을 돕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듯 “만들어“ 졌다.(formed /렘 18:1 이하에 나오는 단어와 같음) 남자는 동산 밖에서 창조되어 동산에 있게 하였던 반면에 여자는 동산에서 창조되었다. 남자는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손질하고), 보호할(지킬/ 이 말은 사탄의 공격을 암시한다) 책임이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활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으며 모든 것이 좋고 즐거운 것들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풍성함 가운데 동산의 생활을 즐기도록 허락하셨다.
두 나무는 중요하다.
3장 22절에 보면 생명나무는 인류에게 생명을 유지시켜 준 것으로 되어 있다(계 22:2 참조). 아담이 범죄한 후에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며(롬 5:12- 이하)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속하려고 죽지 않아도 되었다. 지식의 나무(선악과)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그 과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뜻하고 죽음의 형벌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3. 처음 법(2:15-17)
아담은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완전한 피조물이었다. 그러나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치권을 가진 왕으로 만드셨다(1:26- 이하).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다른 것을 다스릴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은 시험을 거쳐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강압이 아닌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 법은 완전히 정당하고 의로운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자유스러움과 풍성한 식량을 누리고 있었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아도 되었다.
4. 첫 결혼(2:18-25)
창조의 모든 일은 “심히 좋았다“(1:31). 다만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이 구절은 결혼의 근거가 된다.
결혼은
1) 동반자를 제공하는 것이며
2) 종족을 이어가는 것이며
3) 서로 도와 최선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다.
“돕는 배필“이란 성경대로라면 “그를 위한 배필, 곧 그의 필요에 대처하는 배필“이어야 한다. 이 동반자는 동물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사실로 보아 이성이 없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사이에 고정된 큰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최초의 여자를 만드실 때 첫 남자의 살과 뼈로 만드셨으며 그 곳을 “살로 대신 채우셨다“(21절). 22절에 나오는 “만드시고“라는 단어는 사실상 성전을 세운다고 할 때의 “세운다“는 뜻이다. 하와가 아담에게서 만들어졌음은 인류 종족의 단일성과 여자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하와가 남자의 발에서 만들어져 짓밟히거나, 남자의 머리에서 만들어져 지배하거나 하지 못하게 남자의 심장 근처에서 만들어짐으로 남자의 사랑을 받도록 되었다는 말은 흔히 지적되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데려오는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는데(2:19), 이는 첫 인간이 지성과 언어와 말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그는 자기 신부의 이름을 “여자“(히브리어로는 “Ishshah“이며, “남자“를 뜻하는 “Ish“와 관계되어 있다)라고 이름지었다. 이처럼 그 이름이나 본질로 볼 때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속한다. 모든 결혼식이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는가. 그러면 모든 가정이 지상의 천국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다(엡 5:21-33).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인간이 그의 옆구리를 열어 젖힘으로(요 19:31-39)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그가 인간의 본성을 입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을 입게 되었다. 하와는 아담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만족케 하신다.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은 아담이 의지적으로 금지된 과일을 먹었으며 하와가 속은 것처럼 속은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는 기꺼이 죄인이 되어서 그의 신부와 함께 머물고저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기꺼이 우리 대신 죄를 입으시어 우리가 그와 함께 영원히 있도록 하셨다. 그 사랑과 은혜가 놀랍기 그지없다! 이 장면에서 하와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창조되었음도 주목하자. 이처럼 우리는 창세 전에 선택을 받은 것이다(엡 1:4).
자세히 보면, 이 구절들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 있는 교회에 대한 세 가지모습을 볼 수 있다.
1) 하와는 신부이고(엡 5:22-33)
2) 아담의 몸의 일부이며(엡 2:22/엡 4:16- 이하)
3) 세움을 입었으니, 곧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교회를 암시한다(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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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타락-창세기 3장-
1. 유혹(3:1-6)
1) 유혹자
하나님은 죄를 만드신 분이 아니시며 인간을 범죄하도록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우리는 앞서 사탄이 창세기 1장 3절 이하 이전에 죄에 빠졌음을 보았다. 그는 처음에 아름다운 천사였으며,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하였으나(욥 38:4-7), 그의 죄가 창조 세계를 타락시켰다(사 14:12-17/겔 28:11-19).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하와에게 왔으며 자기의 본성을 결코 나타내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속이는 뱀이고 4장에서는 살인하는 자이다(요 8:44).
2) 표적
사탄은 하와의 마음을 목표로 삼았고 그녀를 속이는데 성공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일부분이다(골 3:9-10). 그러므로 사탄이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탄은 거짓말을 사용하는데, 그 자신이 거짓말장이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3) 전술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 사탄이 우리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자 마귀의 거짓말이 통할 여지가 생겼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일으켰으며(3:1)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였고(3:4), 다음으로 자기의 거짓말로 대신하였다(3:5).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손상시키려 하는 것에 유의하자. 사탄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막고 계신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그의 사랑에 의문을 일으킬 때 우리는 사탄의 손에 놀림을 당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라는 말을 꺼내 유혹을 상당히 훌륭한 것으로 만든다. 사탄 자신이 “가장 높은 분과 같이“(사 14:14)되고 싶어했다. 수십세기 후에는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면 “세상 모든 왕국들“을 주겠다고 제안했다(마 4:8).
4) 비극
하와는 마귀에게 처소를 제공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마귀)와 대항해야 했다.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 아담이 어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하와는 “임의로“(freely)라는 말을 빼고 3장 2절을 말했고 “만지지도“란 말을 첨부하여 3장 3절의 말을 했으며,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변경시켰다.
6절에서는 육신의 정욕(먹음직도 하고)과, 안목의 정욕(보암직도 하고)과,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을 보게 된다(요일 2:15-17 참조).
혼자 죄를 짓는 것은 어렵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다른 사람과 죄를 나누어 가지게 한다. 아담은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 세상을 심판 가운데 던져 넣었다."
2. 저주(3:7-19)
1) 내적(7-13절)
즉각적으로 순수함과 영화로움을 상실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벌거벗은 것을 감추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자기 노력이란 옷을 허락지 않으셨다(21절). 이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욕망을 잃은 것이다. 하나님이 접근하시는 것을 듣고 숨었다 ! 죄의식, 두려움, 수치심이 불순종하기 전에 그들이 즐겼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린다.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남자가 여자의 핑계를 대고 여자는 뱀의 핑계를 대듯 자기 방어가 커가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죄의 비극적인 내적 결과들을 본다.
2) 외적(14-19절)
뱀이 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어다니는 짐승이 아니었던 것같다. 이 단어는 총명과 영화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피조물이 사탄에게 양보하였고 유혹에 동참했으므로 심판과 저주를 받아 흙 속의 낮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인의 심판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딤전 2:8-15).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남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 여자는 아이들을 낳는 데 특별한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암시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남자에게 내려진 심판은 일하는 것이다.
낙원 대신 황폐가, 동산에서 다스리는 기쁨 대신 밭에서의 땀과 노역을 얻게 되었다. 일이 하나님의 형벌은 아니다. 일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15). 형벌은 일할 때의 땀과 노고이며 자연의 방해이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고 속박을 받게 되었다(롬 8:15-25).
3) 영원히(15절)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복음이다. 여인의 씨(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사탄과 그의 씨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갈 4:4-5/3:15- 이하). 이 지점으로부터 흐름이 나뉘어진다. 사탄과 그의 가족(씨)은 하나님과 그의 가족에게 대항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사이에 적개심(대립)을 부으시고 사탄이 지옥에 던져질 때 전쟁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계 20:10).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다시 살펴보고 사탄에게도 하나님처럼 그 자녀들이 있음에 유의하자.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데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는 가인이“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했다. 즉 마귀의 자녀인 것이다. 구약은 대립하는 두 씨들의 기록이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를 통하여 사탄을 이기신 승리의 기록이다."
3. 구원(3:20-24)
아담이 들었던 유일한 복음은 하나님이 3장 15절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믿었으며 구원을 받았다. 그가 그 말씀을 믿은 줄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아담이 그 아내의 이름을 “생명“ 또는 “생명 수여자“의 뜻을 가진 “이브(Eve)“라고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죽을 것이라고 하셨고 930년 후에 육신적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영적으로도 죽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인에게서 구세주가 탄생할 것을 약속했으며, 아담은 이 약속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죄의 육체적인 결과를 변경시키지는 않으셨으나 영원한 결과인 지옥(hell)은 면제시키셨다.
가죽 옷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구원을 상징한다.
피가 흘려져야 하고 죄인 때문에 죄없는 생명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들은 나뭇잎으로 죄와 수치를 가리려 했다(3:7). 그러나 이러한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도 받지 않으신다 !
성경에서 옷은 흔히 구원의 상징이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깨끗한 옷으로 입혀졌다(눅 15:22). 이사야 61장 10절과 스가랴 3장을 보자. 자기의(自己 義)와 선한 행위라는 옷은 더러운 옷(사 64:6)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가리려 하셨음에 유의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에 대한 감정을 인준하셨다. 사람들이 이것을 거꾸로 하여 나체로 돌아가는 것은 타락의 징표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표준은 항상 “품위있는 복장“에 있다.
22-24절은 이상한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몰아내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 그들이 먹었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었다. 이 말은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구세주가 오셔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냄으로 그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곳에 두신 검이 그 길을 막았다. 이 말은 “검 같은 불꽃“이라고 번역할수도 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해주는 하나님의 불이다.이제 우리는 로마서 5장을 펴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역전시켜 하나님 앞으로 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어떻게 우리에게 열어 놓으셨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비교한 것을 유의해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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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담 그리스도-마지막 아담
흙으로 만들어짐 하늘로부터 오신 주(主)
완전한 동산에서 시험받음-배부름 광야에서 시험받음-배고픔
사탄에게 짐 사탄을 이김
낙원에서 쫓겨남-도둑 죽어가는 도둑에게 낙원을 열음
죄, 죽음, 심판을 초래 의, 생명, 평화를 가져오심
아내를 사랑하여 고의로 죄를 지음 그의 교회를 사랑하셔서 고의로 죽으시고, 죄를 짊어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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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에는 여러 번의 “더욱“이란 말이 나오는 서술들이 있다(9, 15, 17, 20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아담이 있던 곳으로 보낼 뿐만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