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하공묘갈명(處士河公墓碣銘)
아 이곳이 처사 하처사의 무덤인가? 하처사의 무덤이라면, 내 차마 붓을 적셔 그 비석에 명을 쓰겠는가? 처사는 남방의 높은 선비로, 내가 젊을 때 따라 놀면서 높이 섬기기를 게을리 않았는데, 옛날 어느 해에 처사가 별세하여 내가 가만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우리 유림이 쇠퇴해지는구나!] 하면서 제문을 지어 통곡했고, 그 뒤에 추가하여 효자전을 서술하여 이따금 읽으면서 슬퍼한 적이 있다.
이제 또 묘명을 짓는 책임이 욕되게 노쇠한 나에게 맡겨지니 어찌 감히 감당하리오? 그러나 처사를 아는 이는 나와 같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 하여 사양하겠는가? 드디어 그 세계와 행록에 의거하여 서술하는 바이다.
진양하씨는 고려 평장사 휘 공진으로부터 시작되어 자손이 커져 수십대에 고관대작이 서로 전하여 진양의 여러 성씨 중에서 가장 드러났다. 가정연간에 휘 수일 이란 분이 학문이 이름나서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드렸으니, 처사의 고조이시며 증조는 완이요, 조는 자온이며, 고는 억으로 3대는 드러나지 않았다. 비는 광산노씨로 선비 륜의 따님이다.
처사의 휘는 세희이며 자는 호여로 성품이 간결 정직 온순하여, 어릴때부터 이미 선비의 기풍이 있었고 5~6세에 능히 글을 지어 독서를 즐겼으며, 밤낮을 잊고 자시 힘으로 노력하였다. 스승이 소학을 가르치니 처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으로 만다는 것이 여기에 있구나!”하며 몸을 따라 행하였다.
열네살에 조모의 병환이 위독할 때에 처사가 손가락 피를 들여 수명을 연장하니, 고장과 이웃이 효동자라 일컬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섬김에 지성으로 뜻을 즐겁게 하기로 마음을 먹어 모부인이 장수 건강하여 매양 말하기를, “내 아이가 나를 잘 봉양하니 삼생(소, 말, 양)의 고기로 봉양함을 원하지 않는다.” 하셨다. 모부인이 병이 드니, 처사가 날마다 탕약을 모시면서 변을 맛보았고, 초상을 고례대로 행하여, 죽을 마시고 여막에 살며 3년을 마쳤다. 대왕께서 들으시고 효자정려를 내리셨다.
처사가 어릴 때부터 뜻이 높고 높아, 스스로 분수를 지키며 세상 따라 구차하게 할 수 없어 과거 공부를 버리고 고결하게 홀로 계시며 강한 뜻으로 힘써 배우며 몸을 살핌에 예가 있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선행을 보면 따랐다.
자제를 가르침에 반드시 먼저 의를 행한 뒤에 문예를 가르치며, 친척에게 그 사람의 귀천의 신분으로 후대 박대하지 않았으며 벗들과 사귐에 처음부터 한결 같은 마음이 변절이 없었다. 그 다음 씀이 담박하여 야단스럽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으며, 입으로 상업이나 재물 이익을 말하지 않고 남의 잘못을 들으면 말하기를 “다만 나도 스스로 잘 알지 못할 일인데, 어찌 꼭 남의 단점을 말하라?” 하셨다.
서로 친한 이들이 효도하고 우애하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문학가나 명예로운 사대부들이었다.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후덕한 군자라 하였다. 부인은 재취 곽씨로 전적 륭의 따님이며, 이씨는 선비 필백의 딸로 아들이 없어 족자 윤청으로 계자를 삼았다. 사위는 5인으로 정상혜, 한우석, 배윤수, 윤상보, 한주부이다. 처사의 무덤이 진주 관아 서쪽 오십리 남쪽 바위에 있다.
명하여 가로되 편안하고 고요하여 깨끗하여 티가 없으며, 부드럽고 정성스러우며, 많아도 자랑하지 않았으니, 그 기품이 온화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슬퍼 탄식하게 한다.
출처: 국역 서계집
주) 하세희(河世熙)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호여(皥如), 호는 석계(石溪)이다.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현손이자 하억(河檍)의 아들이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예학(禮學)에 밝아 사림(士林)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마을에 석계정사(石溪
精舍)를 지어 글을 읽으며 자연을 즐기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으며, 끝내 돌아가시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상례가 끝나고도 화
려한 것을 피하고 죽으로만 연명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水谷面) 사곡마을 입구에 그의 효행을 기리고자 세운 비가 남아 있다.
2019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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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處士河公墓碣銘.
嗚呼此西山河處士葬耶河處士葬而吾忍泚筆於銘其碣耶處士南中高士吾少時從遊尊事之不怠昔年處士亡吾竊自嘆曰吾黨衰矣爲哀詞哭之其後追述孝子傳往往讀而悲之今又其墓銘之責辱及衰朽此重事惡敢當然知處士者莫如我也豈可以非其人辭遂據其世系行錄而敍之曰晉陽之河自高麗平章事拱辰其世始大子孫累十世貴顯相傳爲晉陽諸姓之最而嘉靖間有諱受一以學問名鄕人立祠祀之於處士爲高相曾祖琬祖自溫父檍三世不顯母光山盧氏士人腀之女處士諱世熙字皥如性簡正溫醇幼少已有儒者風五六歲能解屬文嗜讀書忘日夜自力師敎以小學處士受而喜曰做人樣子在此率己而行之年十四祖母疾劇處士斷指以進得延齡鄕隣稱孝童子云早孤事母至誠以養志爲心母夫人壽考康寧每言吾兒善事我不願人三牲之養也及夫人疾處士日侍藥嘗糞喪而治喪如古禮歠粥居廬以終三年上聞之命旌表孝子之閭處士自少落落自守不能隨世苟合棄擧子業高潔獨居强志力學檢身有禮有過則改見善則遷敎子弟必先行誼而後文藝於親戚不以其人之貴賤而厚薄之與朋友交初持一心無所變節處心淡泊不喜棼華口不言生産財利聞人之過則曰但吾自不爲何必言人之短所相與善非孝友良善必文學名譽士大夫識不識咸曰厚德君子夫人再娶郭氏典籍瀜之女李氏士人必白之女無子取族子胤淸爲后女四人其壻鄭相惠韓宇錫裵胤脩尹商保韓主簿處士墓在晉州治西五十里南巖銘曰.
恬而靜潔而無瑕巽而慤多而不誇其風穆如俾後人咨 嗟.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