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이란 영화가 있다. 지난해 12월3일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한 문화 담소 행사로 영화 상영회와 감독과의 대화를 할 때, 난 ‘팬심’ 가득한 마음으로 보러 갔다. 영화 앞부분에 북한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이) 영상을 보는 ‘엄마’로서의 추상미가 나왔다. 이 장면은 감독과의 대화에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꽃제비 영상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전쟁고아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한다.
가족 이미지로 체화된 혈맹
북한의 전쟁고아가 전시에, 전후에도 사회주의 국제연대의 하나로 ‘사회주의 형제국’들에 위탁 양육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1959년까지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지로 1만 명 넘는 고아들이 보내졌다가 돌아온 사실은 잘 몰랐다. 고아들과 양육 관계자들의 드라마틱한 사연이 넘쳐날 것이다. 전쟁고아를 매개로 보니 사회주의 진영의 ‘형제’라는 가족 메타포(은유)도 새롭게 느껴진다.
폴란드 사례를 보니 부모 잃은 전쟁고아들에게 진심을 다한 파란 눈의 양육자들은 사실상 새 부모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북한의 귀국 명령으로 그 부모와 또 헤어지는 건 고아들의 생애에 또 다른 ‘이산’(離散)이 새겨지는 건 아니었을까?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생경한 ‘꽃제비’란 단어에도 관심이 갔다. 찾아보니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이 있었는데, 내겐 ‘부랑아’란 의미로 다가왔다. 추상미는 1990년대 북한 식량난 이후 대규모로 생겨난 부랑아의 모습에서 북한 전쟁고아의 흔적을 직관한 셈이다. 그날 난 집에 돌아와서 늦게까지 사진 폴더를 들여다봤다.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2016)이란 책에 쓰려고 모아두었지만, 결국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다음 숙제로 미뤄둔 한국전쟁 고아 사진들과 관련 기록들이었다.
사진 속 피사체로 포착된 아이들. ‘고아’일까? ‘미아’(부모와 헤어진 아이들)나 ‘기아’(생활고로 부모가 버린 아이들)일까? 기록을 보면, ‘전쟁고아’ ‘부랑 고아’ ‘요구호 아동’ 등 다양한 이름이 나열돼 있다. 아이들 얼굴만 보면 참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오가지만, 사진 속 구도와 배치에서 ‘전쟁고아’들을 포착하는 시선의 의도는 너무 단순해서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한마디로 미군(또는 유엔군이나 ‘자유 진영’)의 ‘반공인도주의’적 구원을 전시하고 있다. 전쟁고아는 “공산악마의 침략을 심판하고 한국을 군사적으로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십자군’ 미군의 인도주의적 구호와 원조를 확인하는 피사체로서 포착된다. 어디 이게 미군 사진병의 사진뿐이었을까. 당시 보도사진과 기사, ‘삐라’(전단) 등을 통해 이런 시각적 이미지는 양산됐고, 지금까지도 각종 전쟁 사진집과 사진전 등을 통해 재생산된다.
흥미로운 건 전쟁고아에 대한 구원의 손길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가족 이미지를 강력히 차용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를 잃었지만(더구나 공산악마의 침략과 파괴·학살로), 미(국)군이 고아들의 ‘새아버지’가 되어주면서 한-미 관계는 반공인도주의로 계약된 ‘혈맹’이 된다. 한국의 자리는 당연히 ‘보육’돼야 하는 ‘고아’다. 가끔 고아들의 어머니 자리로 젠더화되어 재현되기도 한다. 반공자유주의 가족의 탄생이다.
행복산 고아원의 웃음
한국전쟁 때 고아가 얼마나 많았는지 여러 추정치가 있지만, 5만여 명에서 17만여 명까지 분분하다. 1958년 보건사회부가 낸 통계에 따르면, 1953년 ‘육아 시설’이 440개였고, 수용 아동이 5만3964명이었다. 연령대로 보면, 7~13살이 제일 많고, 다음으로 14살 이상, 6살 미만 순이었다. 전쟁고아가 모두 수용되기에 역부족이었으므로 실제로는 5만4천 명을 훨씬 상회했을 것이다. 게다가 거리에서 생존을 이어가던 ‘부랑(고)아’도 많았다. 부모가 있든 없든 간에 부모 보호 밖에 방치된 셈이어서 전쟁고아 문제로 연속해서 볼 수 있다.(소현숙, ‘전쟁고아들이 겪은 전후’, 2018)
행콕(Ronald L. Hancock) 상병에게 포착된 일곱 아이는 서울 거리에 흔했던 부랑아 모습을 하고 있다. 행콕은 1950년 6월28일부터 한국에서 사진 활동을 하면서 군과 전투뿐 아니라 전쟁의 일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피사체를 인도주의적인 시선으로 포착하곤 했다.
‘수복’ 직후 서울은 곳곳이 폐허였고, 그 더미 사이사이에서 아이들이 기어나왔다. “흙투성이가 된 거무칙칙한 얼굴 속 하얀 이빨”에 맨발로 “유랑 걸식”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아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깡통을 내밀거나 울면서 깡통을 본다. 그러면 미군은 먹을 것을 주거나 아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당시 고아원, 보육원 관련 신문기사에서 보통 묘사되는 장면이다.
미군은 그렇게 데려간 고아들을 부대 마스코트로 삼고 간단한 통역, 심부름을 시키면서 부대 안에서 돌보거나 비공식적으로 입양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기존 육아시설을 후원·원조했는데, 육·해·공군과 해병대 모두가 마치 경쟁하듯 나섰다. 심지어 직접 시설을 세우고 한국인 원장과 직원을 고용해 간접 운영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부산 아미동 산봉우리에 세워진 ‘행복산’(Happy Mountain) 고아원이다. 이 시설은 미8군 배속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8201부대)의 부산팀 장교인 매키언(Clifford G. Mckeon)이 1950년 11월에 세웠다. UNCACK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의 통로였고, 피란민과 전쟁고아의 식량, 위생, 집, 교육 등의 구호 활동을 한국 정부와 지방 행정기관과 함께 집행하는 민사(Civil Affairs) 관련 군 조직이었다. 게다가 부산 팀은 물자가 들어오는 항만 시설을 관할하는 제2 병참사령부에 있었다.
사진❶는 라그론(G. Lagrones) 상병이 찍은 시리즈 중 하나다. 그는 행복산으로 올라가는 계단들 아래 또는 옆 위치에서 아이들을 포착했다. 다른 사진을 보면 다리가 잘린 아이들이 목발을 하고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그런데도 라그론은 그게 행복한 상태임을 응시하려 했을까? 아이들은 하나같이 밝게 웃고 있다. 사진❷의 아이들도 악기를 즐겁게 연주하고 있다. 밝은 표정, 옷차림, 악기를 포착하는 것만으로 부족했을까? 고아원 정문에 쓰인 문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른 위대한 나라들처럼 한국의 미래는 오늘 아이들의 교육과 복지에 달려 있다!”
인도주의 빛났던 매키언 소령과 헤스 중령
1951년 8월 기준으로 이곳에 163명의 고아가 있었다. 그중 80여 명이 유아였다. 그 후 아이들이 급격히 늘어나 1952년 3월에는 650명이 되었다. 고아원 운영 관리가 한국 정부 사회부로 이관되기 전까지 “매키언 그룹의 동정”으로만 유지됐다. 매키언 소령이 전역해 한국을 떠나게 되어 고아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아이들은 오직 그를 위해 배우고 익힌 송별가를 불렀다. 전쟁터에서 집이 불타고 부모도 잃고 굶주리고 몸과 마음이 다쳤는데, “어린이의 아버지” 매키언 소령이 “하늘보다 높은 덕 바다보다 넓은 사랑”으로 다 품어주었으니 “성스러운 그 이름” 영원히 기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동아일보> 1952년 3월6일치) 매키언과 송별한 바로 직후 고아원 운영 관리자가 고아들을 위한 구호 양곡 258가마를 횡령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이와 대조적으로 고아들의 아버지 매키언과 미군의 인도주의는 더 빛이 나게 되었다.
그보다 더 이름이 빛나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있다. 그가 쓴 회고록이 바탕이 되어 1957년 미국에서 <전송가>(Battle Hymn)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한국 공군의 아버지로도 평가받는 헤스(Dean F. Hess)다. 그는 ‘장난감 자동차 작전’으로 전쟁고아 1천여 명을 제주도로 수송했고, 한국보육원을 세우고 후원했다.
전쟁고아 구출 작전의 전개가 참 드라마틱하다. 서울 소개(1·4 후퇴)를 앞두고 서울시립고아원 아이들을 인천항에서 미군 수송선 LST에 태우고 제주도로 데려가, 제6146 공군부대가 있는 K-40기지 근방에 있는 제주농업학교 건물을 확보해 수용하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흥남 철수’로 작전이 어그러졌다. LST는 인천으로 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추운 인천항 부둣가에 버려졌다. 아이 7명이 곧바로 죽어나갔다.
그때 헤스 중령이 나서서 제5공군 사령부에 수송기를 요청했다. 함경남도 흥남과 원산에서 대규모 철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서울과 인천도 군 작전의 우선순위에 따라 대량 소개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쟁고아 1천여 명을 태울 비행기를 보내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기도에 응답이 있었”던 것인지 C-54 수송기 15대가 왔다. 그것도 담요와 의약품을 충분히 가지고 공군 간호장교 등이 동행한 비행기였다. 1950년 12월20일 전쟁고아 907명, 직원 100여 명 등 1천여 명은 그렇게 제주도로 피란할 수 있었다.(딘 헤스, <신념의 조인>, 288~292쪽, 2010)
1951년 3월 헤스 중령은 프란체스카 리 여사의 추천을 받은 황온순을 원장으로 맞이했다. 황온순은 한국보육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여러 악조건을 이겨내며 전쟁고아 900여 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헤스 중령도 제주도 임무를 아예 한국 공군 조종사 훈련과 한국보육원 후원·원조로 설정할 정도로 온 힘을 쏟아부었다.
한국보육원의 고아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아프지 않도록 치료받는 데 그치지 않고 잘 교육받았다. 아이들에게 ‘아동시 헌법’을 만들어 민주주의 교육을 했고, 보이스카우트 활동과 ‘브라스밴드’를 운영했으며, 제주 지역사회와 연계하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제주 도민들 사이에서 한국보육원은 ‘유엔고아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다.(이방원, ‘전쟁고아의 어머니 황온순의 아동복지활동’, 2108)
무자비한 파괴자와 선의의 구원자
사진❸은 미국과 일본의 제5공군으로부터 전달된 구호물자와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등이 비행기로 공수된 것을 아이들이 맞이하러 가는 모습이다. 여기저기서 보내는 선물을 받기 위해 이 많은 아이가 직접 비행기 앞으로 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건 의도를 갖고 다분히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가운데 아이들을 안고 있는 여성이 바로 황온순 원장이다. 원장 뒤편에 비행기 안을 들여다보는 뒷모습의 장교가 헤스 중령이다. 이 사진 이미지의 수신자는 누구일까?
한국으로 구호·원조 물자와 돈을 보내주는 미국 등 자유 진영의 시민들이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종교적 믿음으로 승화시킨 자유 진영의 여러 종교 단체(특히 기독교 복음주의 단체들)와 신도들이다. 전쟁고아들을 통해 자유 진영의 결속감을 가족의 이미지로 꾀했다. 다시 말해 사진의 ‘기록’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전쟁고아를 통해 ‘적’의 만행을 생생히 고발하고 ‘우리’를 상상된 혈연관계로 결속하는 사상심리전으로 발전했다.
사진❹가 바로 미 해병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연출되는 여러 장면을 영화로 담는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이렇게 제작된 영상은 유엔군, 미국, 자유 진영의 여러 국가에 뉴스 영상으로, 영화의 자료 영상으로 활용됐다.
매키언 소령, 헤스 중령, 많은 미군이 한국의 전쟁고아들에게 선의로 인도적 구호 활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때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아이들을 진심으로 도우려 했고 아꼈다. 헤스의 말처럼 “주검을 수없이 목격했던 우리 장병들은 새로이 피어나는 생명들을 보살피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이처럼 온정을 베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신념의 조인>, 320쪽)
헤스가 유럽과 한국에서 수많은 전투 출격 횟수를 기록하는 동안 고아원과 피란민들을 오폭한 적이 있고, 이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고아에게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며 자신의 죄과를 용서받으려 했다는 글도 있다. 뭐가 되었든 난 고아들의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했던 그 마음은 ‘숭고한 구원자’의 그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젠 그 마음마저 전쟁고아를 활용한 미군의 사상심리전 프레임에서 어떻게 재현됐는지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사상심리전으로 재현된 구원 이미지가 대량 파괴의 이면이자 사후적 수습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군은 전쟁을 하면서 적군뿐만 아니라 비전투 지역에 대량으로 인적·물적 피해를 낳았고, 점령 후에는 민간 구호와 원조(작전)를 하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했다. 이 모순을 봉합하는 길은 하나였다. ‘적’에겐 무자비한 파괴자이지만, ‘우리’에겐 선의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양면 함께 살펴야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봉합된 이미지보다 더 잔인하게 나타났다. 적과 우리를 가르는 경계가 톱질 전쟁으로 이동하는 전선만큼이나 요동쳤기 때문이다. 최전선에서 대량 폭격과 기총소사하는 헤스 중령에게도 그 상황은 비켜가지 않았다. 예컨대 부서진 대동강철교를 건너는 피란민, 특히 아이들을 순수한 우리라고 인식했지만, 아군의 최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란민과 아이들은 적 게릴라가 변장했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인식이 바로 수많은 ‘노근리 사건’들을 전국 곳곳에서 일으켰다. 이런 맥락에서 미군을 숭고한 구원자로 재현하는 사진 속 시각은, ‘우리’를 파괴했던 사진 속 사각과 함께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