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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일제가 망쳐놓은 고성 이씨 탑동종택 임청각(臨淸閣)
이장희 추천 0 조회 62 14.04.01 21: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성 이씨 탑동종택 임청각(臨淸閣)

 

안동시내에서 안동댐 방향으로 가다가 법흥 고가도로에서 백여미터 좌측에 임청각군자정과

고성이씨 탑동종택이란 두 안내간판이 각각 몇 십미터 떨어져 서있다.

 

답사의 목적을 가진자는 으례히 사전지식을 어느정도 준비해서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에 도착하면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당황스럽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같다.

 

눈 크게 뜨고 몇 개 설치도 안된 이정표 보고 따라 도착해보면 이런 애로를 느끼게 된다.

 

첫째, 안동시내 방면에서 이곳으로 좌회전을 할 수가없다. 

교통법규를 지키자면 안동댐 주차장까지 올라가서 차를 돌려서 내려와야한다.

 

둘째, 차를 돌려 내려온 들 어떻게 진입하는가의 문제다.

안동댐에서 내려오는 방향이면 먼저 탑동종택(임청각)이 나타나는데, 좁은 사잇길로 승용차

한 대는 통행이 가능해 종택 담벼락에 몇 번의 핸들수정을 거쳐 주차할 수 는있다.

그나마 다른 방문객의 차량들이 없을 경우다.

 

군자정(君子亭)은 아예 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조그만 철길 통로로 걸어 가야만했다.

안동댐에서 차를 돌려 내려오다 만난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란 레스토랑.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이란 그림을 그린 모양이다............

중앙선 철로 밑의 묘한 자리에 위치하고있다.여기서 탑동종택은 불과 몇 백미터만 내려가면 된다.

 

좁은 사잇길 입구로 들어가 바라본 "고성 이씨 탑동종택(임청각)"

임청각을 찾으려면 ‘ ‘신세동 칠층전탑’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찾아야 쉽다.

고성이씨는 철성(鐵城)이씨라고도 부르는데, 안동에 처음으로 정착한 이는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용헌(容軒) 이원(李原)의 여섯 째 아들인 이증(李增)공이다.

 

가옥전체를 당호인 임청각(臨淸閣)이라 부르고, 임청각에 딸린 별당채를 군자정이라 부르는 데,

임청각은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증의 아들 명이 벼슬에서 물러나 지은 건물로 이곳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생가(生家) 이기도 하다.

 

당호인 임청각은 송나라의 시인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짖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하여 臨淸閣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국보 제16호인 신세동 칠층전탑(新世洞 七層塼塔)이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으로

높이 16.8m, 기단폭 7.75m이다. 이 일대가 법흥리인 점으로 미루어 현재 ‘고성이씨 탑동파종택’

이 자리한 곳이 8세기에 건립했다는 법흥사지로 추측되나 전탑 이외의 다른 유물은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다.”는 안내판을 달고 떡 버티고 서서 방문자를 맞는다.

원래는 아흔아홉 간 집으로, 양반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 양반여자들의 공간인 안채, 노비여자

들의 공간인 안 행랑채, 노비남자들의 공간인 바깥 행랑채 등으로 건물 군이 남녀별, 계층별로

뚜렷한 구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또 안채와 바깥채 기단의 높이차이가 2m나 되어 건물의 위계질

서를 매우 분명하게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었던 1930년

대 후반,그들이 태백산맥 인근의 지하자원과 삼림자원을 반출하여 대륙으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

으로 청량리와 경주를 연결하는 중앙선철로(1936년에 착공하여 1942년에 개통)를 이 집을 통과

하게 건설하면서 파괴하여 50여 간 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도 채 3m정도의

간격밖에 두지 않고 집 앞을 막고 선 대문보다 훨씬 더 높은 중앙선철로의 방음벽에 갇혀 쇠락해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일제가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고 그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독립운동가 석주 선생의 생가를

파괴하기 위해 일부러 신세동 칠층전탑과 임청각을 통과하도록 설계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곳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그것은 일제식민사관의 잔재일 뿐,실제로
1894년 최초의 항일의병을 일으킨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며 그 후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고,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한 곳으로서 가장 늦게까지 독립운동을 한 곳이다.

 

그러니 왜놈들은 철도를 낸다는 구실로 주산을 쉽게 자를 수 있고, 문화재를 쉽게 파괴할 수 있어

철도노선을 우회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의 저자인 대산 이상정(1710-1781)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곳이 안동 8경 또는 임하 9경이라 불리우는 풍치를

가진 절경이었다. 왜놈들이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오늘까지도 저러고 있으니 보는이의

가슴이 답답 할 뿐이다.

 

                     仙魚臺下銀魚肥  선어대 아래에 물고기는 살쪘고
                     歸來亭上白雲遊
  귀래정 위에는 흰구름 노니는데
                     西岳寺樓前日樂
  서악사 누 위에서 즐거웠던 지난날 
                     臨淸閣軒古時愁
  임청각 마루에서 옛시름 겨워하네
    
                     鶴駕山影照三郡
  학가산 그늘은 세 고을에 드리우고
                     燕尾園名傳萬秋
  연미원 이름은 만세에 이어지니
                     西厓祠前松竹綠
  병산 앞에는 송죽이 푸르고
                     退溪門下洛江流  도산 아래는 강물이 흐르누나

 

임청각 군자정으로 들어가는 철길밑 통로.허리를 굽혀야 머리가 성하다.

임청각은 지금 일부건물이 보수공사중이다.

김학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전문위원의 설명을 첨부하면,

1763년 4월4일, 안동 선비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1726~73)은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봄나들이

에 나섰다.강호처사를 자처했던 그에게 소매 가득 불어오는 강바람과 온 산을 뒤덮은 신록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좌명공신의 자손이었으며, 퇴계의 친필 편액이 걸린 대저택 임청각

(보물 제182호)은 바로 그의 거주지였다. 그런 허주에게는 고상한 취미가 있었다. 고서(古書)·

탄금(彈琴)·화훼(花卉)·서화(書畵)·주유벽(舟遊癖)이 그것인데, 세상에서는 이를 ‘허주오벽(五癖)’

이라 불렀다.

 

전용 범선을 가졌던 허주는 풍경이 아름다운 때를 만나면 어김없이 배를 타고 낙동강을 유람했다.

일견 여간 호사스러운 취미가 아니었지만 정작 배 안에는 시종 한두 사람과 거문고가 고작이었다.

사실 허주는 주유의 조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가 살던 임청각이 강가에 위치하여배를 띄우기에

쉬웠거니와 낙동강변에는 선대의 누정이 있어 정박, 유숙하기에도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허주가 택한 경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을 따라 굽이굽이 펼쳐지는 12경승지였다.

이른 아침 임청각 앞 동호에서 배를 띄운 허주가 양정(羊汀), 칠탄(七灘), 사빈서원(泗濱書院),

선창(船倉), 낙연(落淵), 선찰(仙刹)과 선유정(仙遊亭), 몽선각(夢仙閣), 백운정(白雲亭)과 

내앞마을(川前里), 이호(伊湖), 선어대(鮮魚帶)를 거쳐 귀착지인 반구정(伴鷗亭)으로 돌아오기

까지는 예정대로 꼬박 닷새가 소요되었다.

 

허주가 거쳐간 곳은 저마다 경관이 수려하여 ‘안동8경’ 또는 ‘임하9경’으로 불리는 절경지였다.

임청각, 선유정, 몽선각, 백운정, 반구정은 택리지에도 소개된 국중의 명소였고,내앞마을은

학봉 김성일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풍치좋은 명소였다는 설명이다.

임청각의 주인은 관리비가 없어 국가에 헌납 하였다고한다.

이완용과 매국노의 자손들이 일제때 긁어모은 재산 돌려달라고 하는 것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이야기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은 살기가 힘들고,매국노의 자식새끼들은 등 뜨시고 배부른 소리하고 자빠졌다........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였던 이곳을 "광복회 안동시지회"사무실로 사용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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