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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3 -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로 도쿠가와가 에도 막부를 수립해 통일 시대로!
아시카가 막부는 1467년 쇼군의 후계를 두고 삼촌과 조카가 써워 “오닌의 난(응인난)“ 이 벌어지니
교토에서 10년간 시가전을 벌였음에도 승부가 나지 않아 논공행상이 없는지라, 지방에서 올라온
무장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립하니, 200여개 나라로 갈라져 120년간을 싸우니 센고쿠 시대 입니다.
일본 도카이도 (東海道 동해도) 지방에서 아이치현의 서부는 오와리국(나고야) 으로 지배자는 오다씨이며
동부는 미카와로 마쓰다이라씨가 자리를 잡았는데 120년간 전란의 사대를 마감하고 통일을 연 이는
아이치현 사람으로....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입니다.
1598년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요도도노와 사이에 난 아들 히데요리 를 보필할 5대로 에
마에다 도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데루모토, 우키다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가쯔를 세우고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5봉행을 임명해 "10인 합의 체제" 를 만듭니다.
히데요시 사후 고지식한 중신으로 문치파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자신이 어린 주군을 보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 와 사돈이
되는등 서서히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하니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봉행 미쓰나리가 반발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야심을 드러내니, 도요토미에 불만이 있던 다테 마사무네 외에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 도요토미가 내부의 오와리국 출신 다이묘를
포섭하는 한편으로 매일 성대한 연회를 열어서 부와 재력을 과시하고 세력을 확장합니다.
다테 마사무네 (伊達政宗 이달정종) 는 동북 데와국 요네자와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죽을 고비를 수없이
겪으며 숱한 전쟁에서 승리해 오슈지역을 제패하고 센다이번을 세운 사람으로 1593년 임진왜란
에 참전해서 진주성을 함락시켰으며.... 일찍 태어났더라면 일본의 주인 자리를 노릴 그릇이라고 합니다.
오와리 다이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오카야마현 쪽의 이시다 미츠나리는 오미파라고 불리던, 가문 내에서
신참 다이묘들과 기타 거대 가문들을 규합하여 도요토미가 내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었고, 양자를 모두
제어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1599년 병사하자 분쟁은 걷잡을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1599년 4월 5대로 체제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자 가토 기요마사 등 7인의 무단파 장수들은
오사카성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니.... 이시다 미쓰나리는 대로 우에스기
가게카쓰 (上杉景勝) 의 도움을 받아서 후시미성 (伏見城) 으로 탈출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봉행 지위에서 물러나 사와야마 성( 佐和山城) 에 은거 합니다.
자신의 영지(사와야마성 (佐和山城) 으로 돌아간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대항하고자
아이즈(후쿠시마)의 우에스기씨와 접촉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위하려는데....
1600년 6월 아이즈(후쿠시마현 서부) 의 우에스기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고발
과 우에스기 가문의 도발적인 대답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토벌한다는 구실로 출진합니다.
교토에 머물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를 후시미성에 두고 아이즈 정벌에 나서
에도에서 거병해 아이즈로 올라가던 도중에 기회(?) 를 얻은 미쓰나리는 서국의
영주들을 규합해서는 모리 데루모토를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내세워 서군이 거병하게 됩니다.
미쓰나리는 우에스기 가문과 힘을 합해 이에야스군을 동서에서 협공하고자 계획했으니...
사와야마에서 병력을 증강하고 구니토모에서 철포를 모았으며 시마 기요오키와
가모 사토이에를 가신으로 삼고 나쓰카 마사이에와 모의해 이에야스를 급습하려고 합니다.
이를 간파한 이에야스는 서둘러 에도로 귀환하니 미쓰나리는 서국의 다이묘들과
문치파 일원들을 규합하여 병사를 일으키는데 사려깊은 오타니 요시쓰구 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며 미쓰나리를 만류했지만 결국에는 뜻을 함께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요시쓰구는 한센병(문둥병) 을 앓고 있었는데 다회 때 찻잔을 돌려 마시는 와중에
얼굴에서 고름이 떨어지자 다른 이들은 병이 옮을까 두려워 마시는 시늉만 했지만
미쓰나리는 차를 단숨에 들이켰기 때문에 요시쓰구는 그를 진정한 친우로 여겼다고 합니다.
요시쓰구는“자네가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영주들 부터 백성들 까지 수군거린다네.
자네는 인망이 부족하네. 자네가 나선다면 도요토미 가문의 대사를 맹세한
이들까지 이에야스 쪽으로 돌아설 것이네! 그러니.... 총대장은
모리 데루모토, 부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 를 세우고 자네는 끝까지 나서지 말게.”
항상 미쓰나리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요시쓰구 는 그가 무장파와 반목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꿰뚫고 있었으니 미쓰나리 또한 요시쓰구의 충고를 들여서인지 서군의
총대장으로 모리 데루모토를 추대했으며 자신은 참모의 자리에 머무르고자 했습니다.
1600년 7월 히로시마의 모리 테루모토는 오사카성에 입성해 히데요리에게 문안하고
서군의 총대장으로 취임하자 미쓰나리는 거병선언을 발표하여 주고쿠 (中国),
시코쿠(四国), 큐슈 (九州) 의 각 다이묘가 추종해오니 10만의 병력 이 모이게 됩니다.
아이즈 정벌에 나선 무단파 장수들의 식솔은 오사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미쓰나리는
이들을 인질로 잡아 동군의 사기를 꺾고자 했으나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 가
인질이 될것을 거부해 자결하니 오히려 무장파의 분노를 샀으며 인질계획은 중지됩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 죄상 13개조 고소장을 발표하며 세력을 규합했는데 서군 총세는
9만 4천명에 달했으니 미쓰나리는 병력을 이끌고 2년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숨을 거둔 교토의 후시미성 (伏見城) 을 공격하자.... 불과 2천으로 성을 지키던
도리이 모토타다 는 20분지 1 병력에 불과하나 성을 베개 삼아 무려 13일이나 버팁니다.
도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는 열세살때 스루가국 슨푸(시즈오카) 에서 이마가와씨 가문에
인질생활을 하던 이에야스를 찾아가 시중을 드는데 때까치의 사육 방법이 나쁘다고
툇마루에서 걷어차인 일화는 유명한데 1600년 우에스기씨 정벌에 나선 이에야스로
부터 후시미성 수비를 명령받았는데.... 1600년 7월 19일 후시미성은 서군측에 포위 됩니다.
미쓰나리측의 영주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등....
4만 대군이 일제히 공격했으니 도리이 모토타다는 미끼로 버려진 말 이
된 셈이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2천 병사로 13일간에 걸쳐 농성 으로 저지합니다.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 는“싸우는 것이야말로 장수의 참된 길”이라며 신하의
자살 권유를 뿌리치고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싸우다
결국에는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하니..... "미카와 무사의 귀감" 이란 칭송을 받습니다.
성안 배신자의 방화로 적군이 쏟아져 들어오니 도리이 모토타다는 62세로 자결했는데
후시미성 천장에 피가 묻어 있을 정도로 치열한 격전이었으니 이에야스는
모토타다의 희생을 발판 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에도 막부를 열게 됩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사한 도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 의 장남에게
이와키타이라번 10만석을 하사한후 다시 야마가타번 24만석의 다이묘로 승격 시켰습니다.
도리이 모토타다와 병사 유해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2개월 동안 후시미성
에 방치되었고 혈흔과 얼굴, 투구의 흔적 들이 마룻바닥을 붉게 물들였으니....
아무리 지우고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지라 마룻바닥의 판자를 뜯어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절로 옮겨 천장으로 만들어 부처님에 대한 공양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정유재란시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 선비 강항(姜沆) 은 히데요시 사후 일본 승려를 따라
후시미성에 몰래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간양록(看羊錄) 에서 자신이 본
후시미성에 대해 "다섯 걸음마다 절 이 하나씩 있고 열걸음마다 누각 이
하나씩 있는데, 이리저리 이어져 있어 어느 길을 따라 나가야 할지를 모를 정도다.”
“귀신이 재목을 가져다 돕는다고 해도 1, 2년 정도로는 공사를 마치지 못할 텐데
이걸 1년이 못되어 다 지었다니.... 왜놈들이 얼마나 제 백성을 혹사 시켰는지
왜인들이 얼마나 힘을 쏟아 일했을 지를 족히 상상하고도 남았다." 고
적고 있는데... 강항이 방문한 1년후에 후시미성에서 처절한 전투 가 벌어진 것입니다.
도리이 모토타다의 항전은 서군의 발목을 묶어두었고 이에야스에게 서군과 일전을 벌일
명분을 제공했으니 서군은 후시미성을 점령한뒤 오가키성에서 농성을 준비했는
데.... 미쓰나리는 부대를 후퇴시켜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에 대적하는 쪽으로 수정합니다.
미쓰나리는 동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랐기에 병력을 뒤로 물려 세키가하라를 전장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인데 또한 서군 장수중에 죽은 히데요시의
처남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가 이에야스에게 회유당해 마쓰오산 에서
진군을 멈추고 눈치를 보고 있었기에..... 그를 설득하기 위한 이유 였을 수도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신 함으로써 동군이 승리하는데
히데아키는 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고다이인의 오빠 인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3살때 히데요시의 양자 가 된후 하시바 히데토시라
불리며 단바(교토) 가메야마 10만석을 받았고 1591년에는 히데요시의 성을 받습니다.
하지만 1593년 8월에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자 필요 없게된
히데아키는 다음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 로 보내져 이름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로 바뀌었으며 1594년 11월에 히고(구마모토) 의 미하라성 성주로 부임합니다.
그전에 히데요시는 아들이 없었으니 누나 닛슈의 아들을 양자 로 들여 후계자로 삼아
간바쿠(關白) 지위를 무려주니 도요토미 히데쓰구 였는데 이제 진짜 아들이
태어난지라 장래를 염려해 1595년 모반혐의를 씌워 히데쓰구를 고야산 으로
추방한후 할복 시키는데 단바의 영지중 일부는 이시다 미쓰나리 에게 주어집니다.
히데아키는 이 사건에 연루 되면서 단바의 가메야마 10만석 영지를 몰수당하고
추방되나 고모인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의 도움 으로 돌아왔으며
이무렵 양아버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은거하면서 양자 히데아키에게
지쿠젠국과 지쿠고국 등 2개국(후쿠오카) 52만석 의 거대한 영지를 물려줍니다.
1592년 임진왜란의 일본군 총대장이 어리지만 히데요시 밑에서 자란 우키다 히데이에
였듯이 1597년 정유재란 총대장 은 16세에 불과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인데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이 명나라군에 포위당하자 남해안 28개 왜성에서
8만 병력을 차출해 조명연합군을 격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군감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아키가 총대장으로 부산성을 수비하지 않고
경솔하게 울산으로 병력을 냈다고 참소 하니 그는 히데요시로 부터
에치젠(후쿠이현) 기타노쇼 18만석으로 영지 감봉 처분 을
받았으며 고바야카와 가문의 영지는 이시다 미나리가 대신 하여 관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고다이로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정 에 의해
영지 감봉과 이동 처분은 무효화 되었으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에야스 에게
큰 신세 를 진 셈인데 이게 모두 이에야스의 원대한 계획 중에 하나이니
1만 3천을 지휘한 19살 히데아키는 결국 배신해 서군을 공격하면서 전세는 결정됩니다.
이에야스는 후계자 3남 히데타다에게 3만 8천의 군사로 나카센도 中山道 방면으로 진군
시키는데 사나다 마사유키 와 노부유키 2천의 우에다성 을 공략하다가 발목이 잡혀
정작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하니 대노한 이에야스는 자식을 죽이려고
했으나 중신들이 말리는 바람에 참는데 히데타다는 온화한 인품 덕에 후계자를 지킵니다.
대군이 진군할때는 대장은 서전에 이겨 사기를 올리고 싶은 유혹을 참고 견고한 성채는
무시하고 지나쳐야 하는 것이니, 정유재란 왜군 우군 가토등 6만 4천은 곽재우의
화왕산을 무시 했으나 충청과 전라감사 이광의 남도 근왕군 6만은 용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 1,600 을 공격하다가 조선군은 몰살당하고 권율이 1천을 수습했을 뿐 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은 도카이도 東海道(동해도) 방면으로 진군하며 배후에 있는
히타치국 常陸國 사타케씨의 공격 에 대비해 에도성 에 잠시 머물면서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선봉 을 이끌고 기요스성으로 진군시킵니다.
후쿠시마는 미노국으로 쳐들어가 9월 30일 오다 히데노부의 기후성 岐阜城 을 점령하니
이에야스는 10월 20일 대군을 이끌고 미노국 오가키성 大垣城 인근에 진을 치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가신 시마 기요오키를 보내 동군의 부대를 기습해 승리를 거둡니다.
1600년 10월 21일(음력 9월 15일) 이에야스와 가토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그리고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는 동군 8만 2천명 (12만 중에 히데타다 3만 8천 빠짐)과
이시다 미츠나리, 모리 테루모토, 오타니 요시쓰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지휘하는 서군 10만 4천명 은 교토 비와호 동쪽 세키가하라에서 전투 를 치릅니다.
한나절만에 결판이난 전투는 동군이 포진이나 군세면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사전교섭과 밀약의 명수였던 이에야스는 전투 전에 적군 장수 80여명에게 180통
편지를 보내 투항할 것을 권하자 고바야카와와 와키자카 등 많은 장수들이 동요합니다.
서군은 먼저 세키가하라에 도착해 미쓰나리가 사사오산, 우키타 히데이에가 덴만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마쓰오산, 모리 히데모토가 난구산에 포진해 학익진 의
형태를 갖추고 고지에서 동군을 포위하는 지리적 이점마저 선점했으니 훗날 독일군의
전략가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진영도만 보고 100% 서군이 승리했다고 장담했습니다.
1600년 9월 15일 안개가 걷히자 동군 이이 나오마사와 이에야스 4남 마쓰다이라 타다요시
부대 6천명이 동군의 선봉인 6천 후쿠시마 부대의 옆을 박차고 나가 서군의 주력인
1만 8천 우키다 부대를 향해 발포하자...... 우키다 부대가 응사하니 최초의 총성인가 합니다.
이이 나오마사에게 선수를 빼앗겨 격노한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 6천도 역시 우키다
를 향해 발포하면서 돌격하자.... 찔끔한 이이 나오마사 부대는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1천 6백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를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이 나오마사가 선봉으로 정해진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를 제치고 비겁하게(?)
먼저 공격에 나선건 이 전쟁은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전투"
라고 보아 원래 도요토미의 가신이었던 후쿠시마가 선봉 인건 말이
안된다며 도쿠가와 가문에서 선공 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5천 5백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와 5천 호소가와 다다오키
부대가 동시에 6천 미쓰나리를 공격했고 이시다군은 부대의 주축인 시마 키요오키
가 부상을 입으며 퇴각했으나 대포를 발사하며 응사해서 전투는 호각지세를 유지합니다.
서군 1천 7백 오타니 요시쓰구 는 2천 5백 도도 다카도라의 부대와 3천 교고쿠 다카토모
부대가 압도적인 군세로 공격에 나섰지만 요시쓰구는 전투의 달인 이라는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적은 수의 군대로 몇배나 되는 적의 공격을 격퇴했으며 4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도 후루다 시게가쯔, 오다 나가마쓰군을 맞이해서는 호각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서군 대부분은 산 위에서 전투 형세를 관망하는지라, 3분지 1인 35,000명 만이
싸우니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에야스는 초조해져 1만 5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가 포진해 있는 마쓰오산을 향해 대포를 쏘아 행동을 재촉하니, 배반을
저울질 하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는 마쓰오산을 내려옵니다.
산을 내려온 고바야카와 부대는 오타니 부대 의 우측을 공격하지만 1천 7백 오타니군은
1차 방어에 성공하는데??? 이는 선봉장 마쓰노 시게모토가 「방패속의 반역은
무사로써는 절대 있을수 없는 일 (盾裏の反逆は武士としてあるまじき事)」이라며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부대를 히데아키 부대에 합류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열을 정비한 고바야카와 부대가 재차 공격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서군에
속한채 끝까지 눈치를 보며 판세를 저울질하고 있던 소규모의 부대들 또한
오타니 요시쓰구 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니 오타니 요시쓰구는 접전중에 자결
했고 요시쓰구 부대가 붕괴되는 동시에 서군의 진형 전체가 무너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배후인 난구산에서 동군을 포위하고 있던 3만의 모리군 중에 모리 히데모토의 부대는
이에야스와 내통한 3천 깃카와 히로이에의 병력에 가로막혀 전투에 가담조차 하지
못하니 아군의 배신에 서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전투는 동군의 대승리로 끝나는데
전투에 동원된 조총의 숫자가 당시 유럽 20개국이 보유한 조총 보다도 더 많았다고 합니다?
서군의 패배를 목격한 난구산(南宮山) 의 모리(毛利) 부대는 전투를 포기하고
철군하는데 모리 부대를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 이케다 데루마사
등이 추격했으나 모리부대는 죠소가베 모리치카 (長宗我部盛親),
나쓰카 (長束) 부대 등이 후방을 방어한 덕분에 오사카로 무사히 퇴각했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도쿠가와군에게 패배했지만 비교적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사쓰마번의
시마즈군 과 야마구치 조슈번의 모리군 은 영지가 축소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에도말기 까지 명맥을 유지해 그 후예들이 개항기 샷쵸동맹 (薩長同盟) 을 맺고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메이지유신 주역이 된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전장을 빠져나온 이시다 미쓰나리 는 이부키 산으로 도주하여 후루하시 라는 마을로
숨어들었는데 이 마을은 기근이 들었을 때 미쓰나리가 세금을 면제해주고
쌀을 나누어 주는등 선정 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은 숨겨주려고 했으나...
미쓰나리는 주민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추격군에게 자진출두 했다고 합니다.
미쓰나리는 그를 추격하던 옛 친우 다나카 요시마사에게 사로잡혀 이에야스 앞으로
끌려온 뒤에도 단지 무운이 없었을 뿐이라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서군을 배신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 마주쳤을 때는....
“다이코의 은혜를 저버린 자가 수치도 모르는가”하고 크게 호통을 쳤다고도 합니다.
처형장으로 호송되는 와중에 미쓰나리가 목이 마르다고 하자 간수가 물이 없으니 대신
감을 건네었는데 미쓰나리는 감은 가래를 만들기 때문에 몸에 좋지 않다고 거절하니
간수는 내일 처형될 사람이 몸에 좋은 것을 따져 무엇 하냐며 비웃자 미쓰나리는
“대의를 품은 자는 최후의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야 한다” 라며..... 의연하게 답했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크리스챤이니 천주교 교리때문에 할복을 거부하고 처형됐는데
전투에서 승리한 동군은 10월 23일 이시다 미쓰나리 일족이 지키던 사와야마성
을 함락시키고 오미국 (近江國) 을 점령했으며..... 도주했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11월 6일에 교토에서 처형되고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도 이에야스에게 항복합니다.
서군이 고바야카와 등 배신으로 참패하자 5천 호소카와 타다오키군과 격전을 벌이던...
정유재란 시천전투에서 8천으로 4만의 조명연합군을 전멸시켰던 사쓰마(가고시마)
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다른 영주들 처럼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후세에
“시마즈의 퇴각작전 (島津の退き口)” 명명된 적진 중앙돌파 퇴각작전을 감행합니다!
사쓰마 1600명 병사중 생존자들은 호소카와 군을 버리고 후쿠시마군 을 목표로 일제히
조총을 쏘아대며 돌진하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라 허를 찔린채 우왕대는 사이
후쿠시마 부대를 돌파 하는데 성공하고는 이어 배반자 고바야가와군을 돌파 한데
이어 이에야스의 직신(直臣) 인 마쓰다이라, 이이, 혼다 세부대의 반격마저 물리칩니다.
사쓰마 부대는 진격을 계속해서 이에야스의 호위병인 하시모토 부대 (旗本部隊) 마저
돌파하자 기세에 놀란 이에야스는 자리를 박차고 말 위에 올라 대전을 준비하는데
시마즈 부대는 이에야쓰의 본진 앞에서 방향을 틀어 이세가도(伊勢街道) 로 철퇴합니다.
사쓰마군은 적진을 통과해 고향 규슈쪽이 아닌 동남쪽을 향해 질주하니 독안에 든 쥐 라
도쿠가와군이 뒤를 추격하는데 사쓰마군은 백여명씩 후미에 남아 주군을 위해
죽음으로써 위치를 사수하며 전멸 하기를 몇번 되풀이하니 결국 사쓰마군은 주군
시마즈 요시히로 를 옹위해 가고시마에 도착 했는데 병사수는 80명 이 남았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도호쿠, 호쿠리쿠, 규슈 등지에서
벌어지던 소소한 전투도 빠르게 끝이 났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오사카성에 입성합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직할 영지를 오사카 성과 그 일대의 65여만 석(본래는 220여만 석)으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자신을 적대한 서군 가담측 가문 100여명 660만석을 개역
(추방) 또는 감봉, 전봉했으며..... 예전부터 따르던 중신들 및 일족들을 전국의 요지에 배치합니다.
1603년에 세이이다이쇼군 (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 에 취임하고 에도에 바쿠후(幕府) 를 열어서 전국을
통일했으며 1605년에는 쇼군 직을 삼남인 27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그 자신은 '오고쇼
(大御所)' 라 칭하며 겉으로는 은퇴하니 도쿠가와 정권은 도쿠가와 자식들이 세습한다는걸 보여준 것입니다.
쇼군 취임 당시 이미 60이 넘은데다 전임자가 세운 정권이 두번이나 뒤집어지는 걸 경험한 이에야스
로서는 자신이 죽기전에 아들에게 지위가 계승되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으니..... 그는 슨푸
(시즈오카) 에 거처하고 하야시 라잔(林 羅山) 과 차야 시로지로, 윌리엄 애덤스 등 인재를 등용합니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엄밀히 말하면 서군에 섰다가
숙청당한건 도요토미파 중에서 이시다의 문치파 뿐이었고, 승리한 동군은 온전히 도쿠가와 가문의
힘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가문에는 충성을 다하면서도 이시다의 문치파가 싫어서
돌아선 무단파 다이묘들의 힘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은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에도 도쿠가와 막부는 1609년에 사쓰마번이 유구국(오키나와) 을 침공하는 것을 승인하는데,
사쓰마번은 그 전인 1590년에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류큐에 군량미를 내놓아라,
규슈 가라쓰의 나고야성 (名護屋城) 축조 비용을 분담해라 등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및 조선에 조공무역을 하던 류큐국에서는 사쓰마의 요구 중에 일부만 지불한 적이 있는
데..... 그후 류쿠국의 대신 웨카타 리잔이 유구에 사자로 온 사쓰마번 승려를
모욕하자 가바야마 히사타카를 장군에 임명하고 3,000명 병사와 선박 80척을 동원합니다.
1609년 3월 4일 사쓰마군은 가고시마를 출항해 7일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를 점령했고
3월 25일 류큐 왕국의 본토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에 도착해서는 나키진 구스쿠
(今帰仁城) 를 함락시키니..... 5월 15일 사쓰마번은 쇼네이왕과 100여명의 신하
들을 가고시마로 데려오니 에도까지 끌려가서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항복합니다.
유구(오키나와)는 중국과 조선에 조공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고 있었으니 사쓰마번이 유구를 정복후
대외적으로는 조공무역 유지를 위해 독립국가인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통화까지 주조하고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해서 설탕을 약탈하고 있었으니 사쓰마번은 일본 260개 번 중에도
조슈번, 가가번, 센다이번, 도사번, 후쿠이번, 미토번, 우와지마번과 더불어 웅번이라 불리었습니다.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 라는 식으로 외교노선을
설정하고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고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
그후 메이지 시대인 1872년, 류큐는 청나라와의 책봉 체제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정식으로
일본 국가에 병합되었으며..... 류큐번이 설치되었고 당시 류큐 국왕이었던
쇼 타이(尚泰) 는 에도를 방문해 류큐번왕으로 임명되었고 화족(귀족 계급) 으로 편입됩니다.
1879년 3월 27일 일본에서 시행된 ‘폐번치현 (廃藩置県)’ 에 따라 모든 번이 해체되고 새로운 현(県)
체제가 도입되면서 류큐번 또한 해체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었으니 ‘류큐 처분 (琉球処分)’
이라고 하며, 1879년에 처음 부임한 오키나와현의 초대 지사는 나베시마 나오키치 (鍋島直吉)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