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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산 이효석
가산 이효석 선생은 1907년 2월23일 강원도 평창 봉평면 창동리273번지(현재의 창동리 남안동 4리4반 681번지)에서 출생하여 1942년5월25일 평양에서 급환으로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은 시절 한창 실의에 잠기기도 하였으나 창작 활동의 활기를 되찾아 초기에는 경향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던 이효석은 수닭을 계기로 차츰 향토를 배경으로한 서정적인 세계로 이행해 나갔다.
<화분>에 이어 같은 작품으로 그는 자연과 인간의 본능을 시적 경지로 끌어 올렸다 는 평을 받았으며 <메밀꽃>은 한국단편문학의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남아있다.
2.생애
한국단편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있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자인 이효석은 평창출신의 문인으로 그에 대한 자료를 평창문화원발간 자료를 기초로 여기 소개코자 한다.
그의 삶을 주요사건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그의 작품 및 평론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출생과 유년시절
1907년 2월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본마을 창동리 서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쭉 빠진 협곡의 마을인데 효석의 생가는이 마을의 중간쯤 되는 우경산밑 이다. 뒷산은 둥그스럼하게 치달린 산으로서 산세가 우악하게 생겨 주변경관을 맑게 한다.
이 산 좌편으로 폭 약80m, 길이 약 900m로 흘러내린 경사진 밭이 완만하게 놓여있다. 생가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다. 생가 뒷편 언덕에 는 밤나무 몇그루, 돌배나무 한그루 등이 큰나무로 서 있고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각 한그루씩 서 있다. 생가 중심으로 우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고, 앞마당이을 지나 좌편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다. 말하자면 이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린 집이다. 이 집에서 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다.
1914년 8세때 외학을 하게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평창에서는 하숙을 하였는데 봉평집에 다니곤 했다. 이때의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가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효석은 봉평과 평창 사이 100리를 거의 걸어서 다녔다. 그래서 그 길은 자연 집에서 나와 남안리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여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리 물레방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봉평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즉 봉평장터 걸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점)이란 주점도 지나왔었다.
봉평시내를 빠져나와서는 장평까지 20리, 노루목고개('메밀꽃 필 무렵' 작품 속에 나오는 고개)를 넘게 되면 장평의 개울(동작품속에 나오는 개울)에 이르며 이 개울을 건너서는 장평 삼거리(한길은 봉평으로 가는길, 한길은 강릉, 하길은 평창길)에 닿게되고 장평에서 대화까지는 30리, 하장평, 재산, 재재(고개이름)를 넘어 신리, 상대화리, 대화로 이어진다.
대화면의 대화거리는 곧 대화장터인데 이 거리도 효석이 걸어다녔던 길목이 된다. 대화에서 평창까지는 40리, 다시 이 길을 거쳐 평창 하숙집에 오게 된다. 6년 동안 효석은 이 100리 길을 왕래하였는데 그렇다며 효석은 이 길을 몇 번이나 걸어서 내왕했겠는가는 그 자신도 모르리라. 효석은 이 100리 길 속에서 자연을 배웠다.
봄에는 꽃피는 동산구비를, 여름에는 들판에 깔린 오곡의 청파, 뜨거운 햇빛, 소나기, 숲의 청산들을 바라보며 가을은 자즈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밭을 지나면서 멀리 물들어가는 단풍산의 원경에 취하고 낙엽도 밟게 되며 겨울은 산촌에 내리는 눈을맞이하였고 산악 지대의 설경에 파묻혀 살았다.
절기마다 다른 분위기와 변화해가는 자연의 순환을 맛보게 되었다. 또 절기마다 하늘과 구름의 색깔이 다르게 변하였고, 바람결 또한 그렇게 변하며 불던 것을 직접 피부로 느끼며 유년시절을 지내왔던 것이다. 후에 그의 작품속에 나오는 자연의 숨소리가 싱그러 운 것은 이 유년시절에 체험하고 몸에 밴 소질에서 풀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효석은 외학을 하면서도 우등생으로 평창공립보통학교 6년간 과정을 전부 마쳤던 것이다. 여기까지를 유년기로 정의한다.
다시 청운을 싣고 경성으로 1920년(14세)에 효석은 청운의 꿈을 가슴에 싣고 더 먼 외학의 길을 경성으로 오른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현민 유진오를 만나게 된다. 처음은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아 곧 수송동 하숙으로 옮기고 그야말로 타관살이가 제대로 시작되었고 또 본격적인 공부생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교에서 효석과 진오는 수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교 이때 벌써 두사람은 깊은 우정을 맺고 문학쪽으로 재질을 드러내 효석은 산문을, 진오는 시를 창작하면서 서로 평을 주고 받는 수학과정을 거치며 서구문학을 섭렵하기도 하고 자작소품들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직업생활과 작품활동 가난한 가운데 직업을 구하였지만 이웃의 눈총, 또 스스로도 못마땅하여 경성농업학교로 직업을 옮겨 하향하다시피한 그였지만 작품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중앙의 신문, 문예지, 월간잡지 등을 통하여 왕성한 발표를 해 나갔다. 가난한 와중에서도 이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만은 정력을 다 바쳐 빈틈없는 작업을 하는 정열을 보였다. 이런 시기에 1932년 현민(유진오)이 경성을 찾아왔다. 그의 끊임없는 작품활동에 대하여 찬사를 주고 싶었던 것이며, 또 그의 생활근황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민이 찾아오기 이전 장녀 나미가 태어났기에 이런 소식을 접하고 축하를 겸한 나들이기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아무튼 효석은 여기 경성농업학교에서 3년간(1931~1934초까지)을 있었는데, 이 기간동안 경제적 궁핍을 무던히 겪으면서도 거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창작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이 때에 쏟아져 나온 작품량은 일생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분량쯤 되었다 하고 질도 순수했음이라 한다. 이 당시 문학의 분류는 정리가 미비하였는데, 소설 그것도 단편소설의 범주를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다시 직장을 옮기게 되었으니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였다. 그 때가 1934년, 그가 28세가 되던 해이다. 그는 이곳에 가서도 창작의욕을 잃지 않았다. 창작, 수필, 서간논평, 번역 등 여러 방면에서 작품을 다루고 작품 게재지 또한 다양하게 취급되었다. 등단의 위세로서가 아니라 중견작가로서의 발돋움을 해 가는 그이 이름은 경향을 막론하고 명성을 날려갔고 따라서 문명을 드날리는 이름만큼이나 그의 작품은 깔끔하게 그리고 다량으로 각 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병적으로 침식을 딪고 작품활동을 하였기에 가족 들은 상당히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전직 1년 후인 1935년에 차녀 유미가 출생하였다. 그의 직계는 본인을 합하여 4명이 되었기 단란한 가족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과의 시간보다는 자기 시간에 치중하여 작품에 몰두하였다. 유미가 출생한 다음해인 1936년에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이 쓰여지기도 하였다. 다시 1937년에 장남 우현이 출생하여 가족은 5명이 되었고, 생활에 대한 빈곤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났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족과 시간을 나누고 자녀들과 같이 놀기도 하 였다지만 작품에 대한 의욕은 변함이 없어 가족과는 잠깐씩이었고 게속 작품 쓰기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여간 경성농업학교 및 숭실전문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의 작품은 거의 쓰여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만큼 왕성한 면을 보였던 것이다.
병과 사
1941년 35세 되던 해에 뇌막염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계속하여 큰 수술을 받는 곤욕을 치루었다. 그 와중에도 작품은 계속 발표되었으나 병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1년후인 1942년 36세가 되는 5월에 다시 눕게 되었고, 5월 6일에는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하였고, 5월 10일에는 치유될 수 없는 형편에서 퇴원하여 귀가하게 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다.
혼수상태 무의식의 나날과 시간이 흐르다가 결국 25일 하오에 별세하고 말았다.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엄친에 의하여 당시 부모가 사시던 곳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고등골 산가에 안장하게 되었으나 그후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변 산록으로 묘소를 이장 하였다.
1998년9월9일 묘소가 경기도 파주시 동화 경모묘지공원으로 이장됨
3.생활과 성격
가산의 평소생활은 검소하고 단조로운 편이었다고 한다. 성격은 외유내강한 편이었으며 정감이 넘치고 단정한 몸가짐으로 고상한 성격을 지닌 신사였다고 한다.
집에서는 자상하고 온화한 일면을 보이는 반면 엄격한 일면도 있어서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어려웠다고 한다.
산책을 즐기고 기지가 넘치는 말도 잘하며 기분이 좋을 때는 피아노 연주에도 일가견을 보여 예술가적인 기질을 풀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작품구상을 한다든지 작품 쓰기에 들어가면 몰아경으로 매달 리는 집념에 사로잡혔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는 유년시절 산과 들 바람같은 자연 속에 살아왔기에 그 감정은 풀잎마냥 여리고 또 깨끗하여 그 성격 그대로 성년이 되어서도 작용, 선비형 몸체를 유지했다고 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이런 때문이었는가는 몰라도 그의 작품 경향도 섬세하고 서정성이 깊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족간은 화목하였다고 하나 늘 독보적 외톨이의 세계를 끌어안고 명상과 그리고 작품속에 살았다는 것이 정확한 일면이라고 한다. 또 그는 京城과 鏡城 , 평양 등지의 객창을 통하여 향수에 젖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 작품 또는 향수에 따른 산촌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이제 간추려 말한다면 그는 현대적 지성을 갖춘 선비로써 순진하면서도 예리한 모습으로 비활동적인 단아한 작품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다고 보아진다.
제22회 효석문학상 시상 보도자료
제목 : 평창군 봉평 메밀꽃 필무렵 무대에서 [행사중심으로]
2001 효석문화제가 8월31-9월3일까지 작가 이효석의 고향 강원 평창군 봉평면 일대에서 열린다.
31일에는 22년 전통의 효석백일장, 사진촬영대회, 향토음식 경연대회, 어린이 뮤지컬(짱구는 못말려)문학심포지움,「메밀꽃 필무렵」영화 상영이 열린다.
9월1일에는 전국사진 촬영대회,가족사진 촬영대회,가장행열,제2회 이효석 문학상 시상식 이효석문화의 꽃이라고 할수 있는 문학의 밤이 메밀꽃밭속에서의 열린다.
보름달이 뜰무렵에는 보름달 맞이 행사가 이어지는데 한모음 실내악단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추억을 달밤이 된것이다.
달밤의 메밀밭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9월2일 축제 셋째날에는 메밀꽃 필무렵의 무대가 되었던 봉평장날로 장날의 풍성함과 함께 메밀음식 개발시연, 전통민속놀이,허생원 목침뺏기,세계22개국이 모여 국제 메밀 생태 관광세미나와 저녁시간에는 4만평의 메밀밭위에서 국제 메일 가족 음악회가 열린다.
축제 마지막 날에는 사물놀이와 거리 콘서트 영화상영등이 있고 축제 기간중의 행사로는 각종 전시회(메밀의 고향 어제와 오늘,시화전,야생화,산채등)가 있고 체험마당이 다체롭게 열린다. 체험마당에서는 부부가 함께 또는 부자가 함께 참여하는
물가마당(도리께마당,메밀국수 만들기,판화찍기등)을 비롯한 관광객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축제의 자랑거리인 1930년에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였던 봉평장터가 재현돼 사라진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특별 마련된 무이예술관에서는 메밀그림전시회,도자기 만들기 체험,내가 만든판화 찍기,한가정 1가훈 갖기 행사로 컴퓨터 소화체로 유명한 소화 이천섭의 소화체의 가훈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제목 : `메밀꽃 필 무렵' 직접 체험하세요 [행사중심으로]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의 산실인 가산 이효석선생의 고향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8월31일부터 9월3일 까지 효석문화제가 열린다.
가산 선생의 생가터가 있는 봉평면 창동리 일대 3만여평의 메밀밭 풍경을 주무대로 열리는 효석문화제는 1일 축하행사로 풍물놀이와 허생원,장돌뱅이,소달구지가 이어지는 장꾼들의 행렬로 막이 오르게 된다.
지난 22년간 이어온 효석백일장을 확대,개편한 이 행사는 가산 이효석(李孝 石)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후진 양성과 창작·연구활동을 지원,격려하게 된다.
효석문학상 수상식 등 55여 문화행사가 마련됐다.
사흘동안에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에서 문학의 밤 행사가 펼쳐지는데 시낭송과 노래의 만남,달맞이행사,백일장,문학심포지엄,사진촬영대회 등이 열린다. 또 밤에는 메밀꽃 필 무렵 연극과 영화가 상영된다
행사기간중 봉평농협 2층 대회의실에서는 효석문학을 재조명하는 심포지엄 과 국제 메밀 생태 세미나와 세계22개의 메밀식품이 전시를 이룬다.
축제장소에 마련도 1930년대의 봉평장터가 재현되고 메밀국수 올챙이국수 등 토속음식도 맞볼 수 있다.
제목 : 봉평은 지금 '메밀꽃 필 무렵'.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자 가산 이효석(李孝石)선생을 기리는 효석문화제가 8월31일부터 3일까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서 개최된다.
봉평의 이효석의 고향이자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이효석의 생가와 가산공원, 물레방앗간 등이 있는 남안동 마을을 주무대로 열리는 이번 축제에는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가장행렬과 문학의 밤, 효석백일장, 문학 심포지엄, 제2회 효석문학상시상식등 관련행사가 마련된다.
특히 이번 축제에는 여울목-노루목고개-문학비-유품전시장-충주집- 가산공원-물레방아-생가를 연결하는 작품배경지 답사코스가 마련돼 관광객이 가산 문향의 정취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1930년대의 봉평장터를 재현하고 전통 먹거리 행사장도 문을 연다.
이 밖에 7만평에 심어진 메밀밭을 배경으로 한 전국 사진촬영대회와 허생원 팔씨름대회, 세계22개의 메밀식품 전시회도 마련되는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제목 : 가을은 축제의 계절…볼거리 먹거리 푸짐 [행사장중심]
가을은 역시 축제의 계절.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지방자치 단체들은 가을축제 준비에 한창이다.강원도 평창의 효석문화제
◇효석문화제=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인 가산 이효석을 기념하는 문학축제로 올해 세 번째로 8월31∼9월3일 평창군 봉평면의 장터와 물레방아 주변 7만여평의 메밀밭,가산공원 일대에서 열린 다.첫날인 31일,효석 백일장,문학심포지움을 을 개최하고 9월1일에는 효석문학상 시상식,‘메밀꽃 필 무렵’ 무대공연,가장행렬 등이 예정돼 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작품 배경지 답사와 봉평장터 재현.주최측인 효석문화제위원회는 여울목,노루목고개,문학비,충주집,가산공원,물레방아,생가 등을 둘러봄으로써 관광객들에게 메밀밭에 얽힌 이효석의 문학적 정취를 체험토록 한다는 계획이다.
봉평장터 재현은 ‘메밀꽃 필 무렵’을 저술한 1930년대의 봉평장터를 재구성한 것으로 40여개 상점에서 메밀국수,부침 등 즉석요리를 선보이게 된다.효석문화제 위원회(033-335-2323).
제목 : 메밀꽃 핀 '봉평',문학기행지로 인기 [배경지중심]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메밀꽃이 가을보다 먼저 찾아오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일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으로 유명한 이곳이 최근 문학기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가산 이효석 생가 일대는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어 장돌뱅이의 삶과 사랑, 혈육과의 만남을 한편의 서정시와 풍경화로 일궈낸 소설의 무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실존인물 허생원이 살았던 집, 허생원이 나귀 등에 물건을 싣고 나가 팔았던 봉평장터, 허생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아들 동이의 등에 업혀 건너던 장평냇물, 허생원이 봉평 미인과 사랑을 나눴던 물레방앗간이 그대로 복원되거나 남아 있다.
'메밀꽃…'의 무대는 봉평∼장평∼대화에 이르는 팔십리 길로 봉평장에서 별 재미를 못 본 장돌뱅이들이 달빛 젖은 밤길을 따라 거닐며 주고받는 사연으로 전개된다.
봉평중학 앞에 위치한 가산공원 문학비에는 "효석의 인생은 짧았지만 그 짧은 인생속에서 남긴 문학은 조선의 언어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헌사되어 있다. 이 효석의 문학공원은 '메밀꽃…'에서 성서방네 처녀와 허생원이 하룻밤의 짧은 사랑을 나눈 물레방아가 있던 곳. 1991년 10월 당시 문화부에서 이곳을 문화마을로 지정, 기념조각과 물레방아를 복원했다.
가산공원에서 1.5㎞ 정도 떨어진 창동리에는 이효석의 생가 터가 있다. 지금은 홍종률씨 일가가 살고 있으며 가옥 구조도 바뀌었다. 텃밭에 세워진 '가산 이효석 생가터'라는 표지석만이 나그네의 발길을 달래준다.
봉평에서 메밀꽃이 가장 많이 피는 곳은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축제장 주변과 물레방아간 생가가는길, 올해부터 추가된 무이 예술촌 주변도 약 3만평의 메밀을 볼 수 있다. 그동안 명맥만 유지했으나 최근 메밀이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재배면적이 늘어나 '메밀 고장'으로서의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봉평의 또다른 명소는 팔석정. 조선 중종 때 강릉부사로 부임하던 양사언이 이곳을 지나다가 빼어난 산수에 취해 8일간 노닐었다고 한다. 양사언이 바위에 조각해 놓은 팔석정이라는 글씨체가 아직도 선연히 남아 있다.
평창군은 8월31부터 9월3일까지 가산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효석문화제'를 연다.
가장행렬과 문학의 밤, 효석백일장, 요리공연, 사진촬영대회 등 50여가지의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특히 여울묵 노루묵고개 문학비 유품전시장 충주집 가산공원 물레방아 생가를 연결하는 작품배경지 답사코스를 마련,관광객들에게 가산 문향의 정취를 체험토록하는 한편 1930년대의 봉평장터를 재현하고 전통 먹거리 코너를 개설했다.
이밖에 7만여평에 심어진 메밀밭을 배경으로 한 전국 사진촬영대회와 허생원팔씨름대회,세계메밀 식품 전시회와 참여국가들의 전통 민속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제목:봉평에 메밀꽃 관광마을[배경지를 중심]
한국 현대문학에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소설가 이효석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일대가 소설 그대로 메밀꽃으로 단장된 가운데 효석문학제를 8월31일부터 9월3까지 다체로운 문학행사를 시작으로 열린다.
평창군이 이 소설의 주무대인 봉평장터를 옛 모습으로 가꾸고 봉평면 일대에 메밀꽃 오솔길을 조성하는 등 향토특산물인 메밀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키로 한 것이다. .
또 제주도의 유채밭에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메밀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도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봉평 메밀」의 성가를 높여 나간다는 복안도 추진중이다.
메밀꽃이 활짝 피는 계절인 9월에 「효석문화제」도 열어 아름다운 메밀꽃을 피운 재배농가도 선발하고 막국수와 전병등 메밀음식 경연대회도 열 계획이다.
이 축제 때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어물장수와 땜장이·엿장수·생강장수등과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는 당나귀 끌고 다니는 전통복장의 장돌뱅이가 등장하는 봉평장터가 옛날 그대로 재현된다.
제목 : 봉평, 메밀꽃 필 무렵 [여행중심]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메밀꽃 이 눈부시다. 흰꽃이 구름처럼 펼쳐진 들녘.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에는 벌써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가을을 알린다. 이효석의 표현대로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하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40년대. 효석이 살던 때만큼 메밀밭은 많지 않다. 한동안 수입 메밀에 밀려 봉평의 메밀밭은사라질 위기를 맞았었다. 그러나 요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다시 메밀밭이 늘어나고 있다.봉평 들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메밀밭을 합치면 10만평 정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초순에 심은 메밀은 8월 하순쯤 꽃을 피우기 시작, 9월초까지온통 들녘을 하얗게 수놓는다.
봉평에는 소설의 무대가 됐던 방앗간이 옛모습으로 복원돼 있고 효석의 생가도 남아 있다. 가산공원을 지나 방앗간 앞에 서면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오른쪽 7만평이 모두 메밀밭.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사랑을 나누던 방앗간에는 손으로 돌리던 재래식 탈곡기와 먼지가 내려앉은 방아가 여행객을 맞는다.
어린아이들은 신기한 물레방아에 환호성을 지르고 여고생들은 「안개꽃보다 더 예쁜 메밀꽃」을감상하기 위해 얼굴을 바싹 갖다댄다.
물레방앗간에서 효석 생가까지는 1.5㎞ 정도. 가는 길에는 사람 키가 넘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효석 생가의 옛모습은희미하기만 하다. 답사객들이 몰려들면서 마당에 있던 외양간을 헐고 지붕도 양철판으로 바꾸었다. 그나마 창고 옆에 걸린 디딜방아나 떡메에서 「그 시절 그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생가에는 현재 홍종률씨(54)가 살고 있다. 홍씨의 증조부가 효석의 부친으로부터 집을 사들였다고 한다. 귀퉁이에는 「이효석 생가터」라는 자그마한 비석이 서있다. 주말에 이곳을 찾는사200~300명 정도. 요즘은 관광객들에게 메밀수제비와 메밀전, 막걸리를 파는 「추억의 주막」으로 탈바꿈했다.
「메밀꽃 피더니 여름이 갑니다. 메밀소녀의 웃음과 함께 여름이 갑니다」. 「2년을 별러서 다녀갑니다. 어머니 품같은 포근함에 당신같은 천재가 태어나나 봅니다」.
봉평에서는 온갖 메밀요리를 먹어볼 수 있다. 메밀막국수와 메밀전, 메밀칼국수 등 메밀요리가 많다. 별미는 막국수. 순메밀 및 밀가루와 섞은 것 2가지가 있다. 막국수 3,500원. 순메밀 5,000원.
봉평 주위의 장급여관은 모두 5~6곳. 민박도 있다.대부분 봉평면에 있다.
[ 효석문화제는 어디서 출발했는가? ]
효석문화제 기획국
문학혼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이곳 봉평, 가산 이효석선생의 문학적 향기와, 향토사랑의 숨결을 가슴깊이 새겨보면서, 생전에 남겼던 문학혼의 찬란한 발자취를 기리고, 그의 문학적 업적을 승화하기 위하여 1972년 5월 17일 평창에서 발기인 16명 교육계 및 지역인사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되어 같은해 5월25일 제 1회 추모 백일장을 개최한 이래 74년에는 진부에 있는 이효석 선생의 묘를 장평으로 옮기우는 등 활발한 추모사업을 시작해 왔었다.80년에는 가산이효석 문화비 건립을하기에 이르렀다. 그후에도 가산이효석 추모사업회를 발기하는등 지역사회에 이효석 문학을 알리는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 왔었다. 더욱이 효석문화제를 통하여 가산 이효석 문학을 바로 아는 계기를 마련 심포지움을 열고 새로운 지평에 있어서의 문학적 업적들을 평가해 왔었다. 선생께서는 짧았던 작품활동기간이었지만, 많은 작품을 남겼고, 또 그 작품들은 뛰어난 감각과 독특한 문체, 간결하고 섬세한 문장과, 향토색 짙은 서정성으로 소설문학을 시문학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격찬을 받고 있다.
이러한 주옥같은 작품들이 우리에게 뿌려준 문학의 향기는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의 터전을 가꾸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확신하고 한나라의 발전과 융성은 문화가 건전하고 민족의 얼이 살아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문학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면서, 선생의 작품 모두가, 한국 문학의 한 맥을 형성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그 빛을 더해가고 있다. 서구의 물질문명과 왜색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우리의 고유문화가,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요즈음, 선인들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높은 자긍심으로 가산문학선양회에서, 해마다 이러한 백일장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며, 소망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가산 선생이 태어나고,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인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이곳 봉평은 90년 6월 13일 문화부에서, 시범 문화마을로 지정한 이래, 효석백일장 개최, 물레방아복원, 가산공원조성 등, 가산선생의 명성에 걸맞는, 문화마을로 가꾸기 위해, 각종 선양사업을 추진해 왔다. 특히 가산문학선양회를 중심으로 의욕적이고 다양한 선양사업을 계획하여 추진하고 있는 것은, 이효석선생의 예술혼을, 지역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마을에 걸맞는 주민정신을 한차원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군에서도, 가산 이효석선생의 생가복원, 기념관건립 등을 계획하고, 시범문화마을을 전국민적인 문학의 성지로 발돋움시키려, 현재 효석문화제 위원회를 중심으로 문학공원부지 23,000평을 구입하고 설계가 완성되어 2002년에 준공을 목표로 작업중에 있음은 문화마을로서의 자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진행중인 효석문화제는 분명한 명제의 향토적인 축제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축제와 뭔가 선별화된 축제로서의 자리매김의 기회가 될것이며 이점에서 효석 문화제의 향후 방향을 소개하고 문화인물로서의 문화축제가 성공을 바란다. 우리나라는 주로 주민화합이나 휼륭한 인물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방마다 축제가 있어져 왔었다.최근 지방자치 단체들은 앞다투어 축제를 개발 할려고 하고 있고 이미 축제를 진행하는 곳도 적지 않게 많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지역축제는 대부분 내용이 거의 통일되어있다. 즉 이벤트가 거의 흡사하다는 것은 축제에 있어서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적, 예술적으로나 운영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완숙한 축제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축제에 관여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는 축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다는 점, 그리고 오랫 동안의 관주도로 인해 축제가 형식화되었다는 점, 축제 현장의 시간적 공간적 변화에 따른 대응력이 부족하다는 점, 축제를 이끌어 갈 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의 일반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방자치 이후로 우후죽순(雨後竹筍)과 같이 생겨난 수많은 축제들은 역사적 전통성은 물론이고 축제의 의의나 방향도 불분명하다. 특히 축제를 운동장 중심의 물리적(物理的)인 행사나 격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관이나 사회예술 단체나 학교 등에서 주관하는 모든 문화예술 행사를 축제로 인식하는 상황이니 축제의 기획이나 축제다운 축제가 어려울 수밖에 더 있겠는가? 지역축제의 첫 번째 의의는 지역성과 역사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다수 축제들은 지역성이나 역사성을 상실한 지 오래일 뿐만 아니라 현대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인 축제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역축제의 본질과 의의를 정립하기란 쉽지 않다. 왜 이렇게 정체불명의 축제가 난무(亂舞)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한마디로 전통의 단절에 있다. 원시에서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세로 이어 내려오는 축제의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그 전통이 단절되어 버렸다. 전통적 삶의 형식과 내용은 민족 자체의 역량에 의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외세 열강에 의한 사이비 근대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삶과 문화가 왜곡되어 역사의 단절을 초래했다.
축체의 정체성이 없이 다른 시,군도 하니 우리도 한다는 식의 축제는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정체성이 없는 축제는 그 축제를 준비하는 이들의 생각에 매년 흐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평창군의 축제의 대부분이 주민 화합의 축제로 가고 있다. 막대한 예산을 쓰는 축제가 지역 주민과의 소득에 아무런 역할을 잘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효석문화제는 정체성이 확실한 그리고 오랜기간 준비되어져 온 축제라고 할 수 있겠다.
「효석문화제」는 금년으로 3회 째를 맞이하였으나 실제로 근30여년전부터 지역의 학생들에게 문학적 소양을 길러주고자 시작했던 가산문학선양회의 효석백일장이 승화되어 전국대회로 확대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효석 선생을 추모하고 그의 문학적 세계를 알리면서 이벤트를 접목시켜 다수의 문학인 및 외래 관광객을 유입시켜 관광수입을 증대시키고 21세기의 세계속에 평창군을 홍보하기 위하여 효석문화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백일장은 올해로서 22회째를 맞고 있기도 하다. 운영에 관계되는 관계자 일동이 초심을 되찾아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이벤트를 개최하는 의의를 재인식하고 이벤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와 도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한다.
우리는 역사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지역 축제는 구성원들의 문화적 이질성 때문에 축제가 다원주의적 경향 즉, 가치중립적인 열거식 축제가 될 가능성과 '이벤트의 다양성'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를 가진다. 공공단체에서 주관하는 축제가 아니라 실생활의 현실에서 잉태된 이 효석문화제는 미숙하지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많다. 우선 축제 기획력의 부족이다. 부재하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부족한 기획력과 열악한 실행력은 축제를 백화점식 무성격의 축제로 만들 소지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대개의 지역 축제에서 나타난 문제점들 가운데 전문인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이벤트 회사에 축제의 기본 계획이나 철학이 없이 그냥 끌려가 하나의 거창한 행사를 하는 것으로 축제를 했다고들 한다. 사실 효석문화제는 지금까지 근 20회를 해오는 동안 짬짬히 하여 왔던 2부 순서를 정리한 것이라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닌가 싶다.
효석 문화제가 1, 2회의 행사에 성공적인라고 평가하는 것은 20년의 축척된 기술들이 있었다.
우리는 관광 축제로 가기 위한 초기 설정에서 몇가지의 분명한 목표가 정해졌다.
그것은 · 교류 인구 증가 시도 · 도시민과 면민간의 교류의 장 · 지역 산업 진흥 및 마케팅 확대 · 면민이 참가하고 면민이 즐기는 축제 · 지역간 교류, 도시 교류에 의한 협력과 정보 교환 · 평창군의 이미지 향상(Image up)과 관광 PR · 면민의 단결력 강화, 고향의식 고양(高揚)등은 목표로 삼고 「효석문화제」는 단순한 관광사업이 아니고, 인구 오천여 명의 면민이 전원 참가하여 지역 활성화와 이미지 향상을 꾀하는 이벤트로서 도 안팎으로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이 이벤트를 개최함으로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여러 가지 추억과 감동을 얻는 것은 물론 면민들에게 있어서도 메밀을 심고 옛고향을 느낄 수 있는 자연으로서의 빅 이벤트(Big Event)를 개최했다는 자부심과 일치 협력하는 연대감이 솟아나고 있다. 그러나 이벤트가 연례 사업으로 정착해온 반면에 입장객 증가에만 매달려서 본래의 취지인 「환대하는 마음」이 엷어지고 개최 내용이 매너리즘에 빠져 먼곳에서 힘들게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불쾌한 추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각 행사장 안의 장치, 설비 등이나 관광객에 대한 접객 서비스 등 소프트웨어 면에서의 체제 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벤트가 어디까지나 「평창군」을 PR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인식을 기본으로 우리들이 행동한다면 그것이 관광객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되는 계기가 되어 「다시 평창군 오고 싶다」, 「다음에는 친구들을 데려와야지」하는 생각을 일으켜서 자연스럽게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관광객의 증가와 이미지 향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이번에도 「평창 메밀」에 집중하여 「우리 면에서 재배한 메밀가루 100%의 메밀국수」를 한곳에 모으고 봉평 산 메밀가루를 사용한 메밀국수 만들기 체험이나 우호도시 특산물전을 열어서 관광객들에게 넓게 소개함과 동시에 현 내외에 널리 PR하여 입장객 회복을 꾀해야 하겠다.
참가형의 이벤트로서는 메밀국수 만들기, 두부만들기, 봉숭아 물들이기, 물가동네,도리깨마당을 행사장 전체에서 개최하고, 오후 시간대에는 문학과 각종 공연들을 통한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이번 축제의 이미지 향상도 꾀하고 방문객들의 기쁨도 주는 기회로 삼는다.
메인테마인 농촌,문학,자연 문학과의 만남 , "보기" "놀기" "맛보기" "몸으로 느끼는 체험" 소개 흥청거림 속에서도 정서가 있는 내용이 되도록 연구 「효석문화제」의 이미지 창출·확대 메밀에 의한 교류, 문화, 예술 소개한다는게 축제 기본적인 주제이다. 효석문화제 존재하는 한 이러한 기본적인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고 본다. 이것이 변해버리면 다른 축제처럼 소위 백화점식 축제로 흘러갈 위험성이 있기때문이다.
또한 축제는 행사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소득과 무관한 축제는 깊은 우려와 함께 지속성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숙제가 많이 있다. 평창군만 보더라도 군안에 적어도 여섯 개 이상의 축제가 있지만 한결같이 주는 축제로 머물고 있다는데 계속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현재로선는 1억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고 있지만 위원회는 5천만원 이하로 내려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축제는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곳 평창 봉평에 축제의 참여자들은 무슨 공연을 볼려고 이곳에 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대도시 공연단체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이벤트와는 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리라고 본다. 우리가 보여 줄려고하는 것은 메밀꽃 그리고 이효석의 냄새,시골의 향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볼 때 효석문화제는 봉평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이다. 메밀꽃 필무렵의 작품 속에서의 봉평장터 재현은 1930년대의 장터를 옛모습 그대로 그려보고 외지 관광객들의 옛 추억을 되새기는데 의미를 부여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봉평을 한번 다녀감으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한번 읽어본거나 다름없는 축제한 부분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이미 지난해에 몇만평의 메밀을 심어 축제를 계획했던 지방자치 단체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러한 축제는 예산만 낭비하는 축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돈 들이는 축제는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돈만 있으면 축제를 열 수 있다는 생각은 지역 축제에 있어서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역 주민 모두가 연예인화 되면 지역 축제에 있어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언제라도 사람만 모이면 공연을 할 수 있고 축제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지속적으로 지방자치 단체에 도움을 받으며 축제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축제 운영자들은 기억해야 될 것이다. 효석문화제를 하고 난 이후에 내방 관광객 수는 대부분 지역에서 배로 증가하였다 작년의 흥정천 방문객 수는 지금 45,000명을 넘었다.
(관광시즌) 지난해에 비하여 많은 숫자라고 본다. 효석문화제의 불변의 법칙이 존재한다. 이 법칙이 무너지면 효석문화제도 의미를 상실해 간다고 지역 주민은 느끼고 있다.
"문학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축제의 이벤트이다.(심포지움,백일장,거리백일장,문학의 밤) 다음으로는 "먹는 즐거움의 광장" 이다(메밀국수,메밀전병,산체, 산골두부 등...)효석문화제는 무엇가 차별화된 먹거리를 만들어 내야만 축제의 성공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봉평이 아니면 맛볼수 없는 식재를 살린 메뉴나 전통의 맛을 준비한다. 끝으로는 " 느낌의 즐거움 더해가는 선물코너" 이것 역시 어느 축제에나 나오는 것들이 아니라 청정 평창군의 특산품을 전시·판매한다.이미 지난해에 좋은 평가가 있었다.
앞으로의 축제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몇 명의 머리로 만들어 가는 축제가 아니라 주민 모두가 협력하는 관광축제를 만들어 가는 일에 함께 노력 할 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전설과 설화]
1. 태기산(泰岐山)과 태기왕(泰岐王)
태기산은 봉평면과 횡성군 둔내면에 연해 있는 해발 1,261m의 산으로 꼭대기에는 태기산성(泰岐山城)이라고 불리우는 성터가 남아 있으며 이와 관련되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부족국가 시대에 맥국(貊國)의 왕 태기가 춘천 지방에서 다른 부족에게 쫓겨 원주로 옮겼다. 이에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강릉지방의 예국(濊國)과 최후의 전투를 하려고 덕고산(德高山=태기산)에 이르러 군막(軍幕)을 치고 산성을 축성, 병마를 훈련시켰다. 태기왕의 부하 중 삼형제(森炯濟)와 호령(號令)의 두 장군이 있었다. 삼형제 장군은 삼형제봉에 진을 치고 군사 3백명으로 일대를 이루고 호령 장군은 호령봉(現 회령봉)에 군사 5백명으로 진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웃 땅 진부면 도주골(現 도사리)로부터 예국의 대군이 쳐들어 와 호령장 군과 그 밑의 군사들을 전부 멸하고 태기산으로 몰려 왔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삼형제 장군은 진을 버리고 군사를 몰아 태기산성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산성이 함락(陷落)되고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고는 태기왕을 호위하여 산성을 벗어 급히 피난을 하였다. 태기왕은 워낙 당황하였는데다 적군의 추격(追擊)이 급하여 피난하던 중 옥산대(玉散臺;現안흥동)에서 옥새(玉璽)를 잃어버리고 왕유(王留)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멸인(滅人;現 면온)에 도착했다.
태기왕의 막하에는 삼형제(森炯濟) 장군과 호령(號令) 장군이 있었다. 두 장군이 맥국 군사를 통솔한 셈이다.
삼형제 장군은 삼형제봉에 진을 치고 군사 3백명으로 일대를 이루고 호령 장군은 호령봉(現 회령봉)에 군사 5백명으로 진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웃 땅 진부면 도주골(現 도사리)로부터 예국의 대군이 쳐들어 와 호령장군과 그 밑의 군사들을 전부 멸하고 태기산으로 몰려 왔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삼형제 장군은 진을 버리고 군사를 몰아 태기산성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산성이 함락(陷落)되고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고는 태기왕을 호위하여 산성을 벗언 급히 피난을 하였다. 태기왕은 워낙 당황하였는데다 적군의 추격(追擊)이 급하여 피난하던 중 옥산대(玉散臺;現안흥동)에서 옥새(玉璽)를 잃어버리고 왕유(王留)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멸인(滅人;現 면온)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왕을 호위하던 군사들이 전멸하여 더 이상어찌할 수 없게 되자 삼형제 장군은 단신으로 왕을 모시고 백옥포(白玉浦;白衣의 장군이 왕의 옥체를 업고 물에 빠졌다 하여 부르는 이름)에 투신(投身)하여 최후를 마쳤다. 태기왕이 예국군에게 쫓기어 피난하다가 해가 저문 곳이라하여 무일리(無日里)라 했는데, 지금의 무이리(武夷里)가 바로 그 곳이다. 봉평 덕거리에 덕고산이 있고, 평촌리에 삼형제봉이 있으며,흥정리에 호령봉이 있다. 진부면에 두루골(도사리)이 있으며,무이리·옥산대·면온 등의 지명이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맥국 태기왕 전설은 그 현장성이 지명과 얽혀 내려온 셈이다.
2. 금강평(金崗坪) 이야기
흥정리(興亭里)의 금강평은 3거리로 되어 있는데, 역시 세골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합수(合水)가 되는 곳으로 한 줄기는 대각동(大角洞)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고, 다른 한 줄기는 직동(直洞)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며, 또 다른 한 줄기는 양지동(陽地洞)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다. 그러므로 금강평은 벌써 어느 정도의 들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물론 그 지형에 있어서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한 주형(舟形)이라든가 또는 금강산(金剛山)을 닮았다고하여 금강평이라고 칭한다는 설도 민간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주형'에 대한 전설이 지금도 민간(民間)속에 전해지고 있으니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금강평에는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부자집에는 새며느리가 들어오게 되었다. 얼마나 일이 많았던지 이 새 며느리는 3년 동안이나 한번도 손(手)이 말라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부잣집에 찾아드는 손님이 그만큼 빈번하게 많았으며, 또 집에서 묵고 있는 객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3년 동안이나 손 한번 마르지 못하고 일만 계속한 며느리는 그만 지쳐버릴 지경이었는데, 어느날 시주를 온 중을 대하게 되었다. 며느리는 중에게 자기의 사정을 낱낱이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이 손을 좀 말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 하고 묻게 되었다. 중은 지형을 한참 살펴보더니 주형(舟形)의 그 뱃머리가 되는 지점에 방아를 해 놓으라고 알려 주었다. 중이 떠난 뒤 며느리는 시부모님께 진언을 드려 결국 그자리에 방앗간을 설치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그 부자는 그만 망(亡)하고 말았다.
망해서 빈한(貧閑)하여지니 며느리는 자연 일거리가 없어 늘 손이 마른 상태로 살게 되었다. 풀이컨대 배(舟)머리 쪽을 밤낮없이 찧어 대니 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전설은 호강에 겨우면 호강을 잘 감수할 일이지 그것을 참지 못하고 짓까불면 복을 잃는다는 교훈으로 가훈(家訓)같이 전해지는 이 지방의 특색있는 이야기다.
이 금강평에는 60 년대경에 후로링 공장도 있어 한때 번창한 시절도 있었으며 지금도 이 금강평은 어떤 전기(轉機)에 의해서 개발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는 곳으로 지목되고 있다.
【봉평 가는 길】
승용차로 서울에서 봉평까지 승용차를 이용해 여행하실 경우에는 중부고속도로로 진입,
광주 곤지암을 경유, 호법 인터체인지에서 영동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여주-원주를 지나 새말, 장평 인터체인지로 나오시면 됩니다. 봉평 도로표지판이 보임 톨케이트에서 나오셔서 바로 우회전하여 7키로 정도 오시면 봉평면 입구가 보입니다. 서울서 장평인터체인지 까지는 신갈기점 142키로로 2시간이 소요 됩니다.
[주변 관광지]
허브나라 농원은 허브라는 특이한 자연식품을 재배 및 음미할 수 있는 농원이다. '농장내 '허브가든'은 차, 약용, 공예용 등 대략 여덟 군데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으며, 이곳에 100여종의 허브들이 오밀조밀 심어져 있다.
허브가든은 허브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곳.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허브밭에 색깔과 향기별로 꽃이 심어져 있다. 모든 꽃에 이름표를 붙였고 사람의 생활과 관련한 해설을 써 놓았다. 아이들과 꽃이름을 외우며 한 바퀴를 돌아보자면 한 나절이 모자랄 정도이다. 농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허브를 이용한 레스토랑, 허브 상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전시실, 통나무 별장 형태의 숙박시설이 함께 있다. 허브 제육, 허브 닭찜 등은 이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이다.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다. 허브나라가 자리한 곳은 흥정계곡의 중간. 평창강의 상류인 흥정계곡은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주민들만 쉬쉬하며 찾던 곳인데 허브나라가 문을 열면서 외지에도 알려졌다. 기암 사이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계곡물이 신록의 빛을 받아 더욱 싱그럽다
산채시험장
평창군 봉평면 흥정리에는 국내 유일의 산채시험장(0374-335-4617)이 있다.
산채시험장은 이름 그대로 강원도의 특산품인 산나물을 육성, 개량하는 곳이다. 산나물의 유전자원을 수집하여 교잡육종을 통해 우량품종화하여 강원도 산나물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관광자원화하기 위한 실험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산나물 480여종 가운데 197종의 유전자원을 수집하여 재배·분양하고 있다.
산채시험장에서는 산채를 봄철 한때의 먹을 거리로서 이용되는 채소가 아니라 청정 무공해 건강식품으로서 국민건강에 기여하는 소중한 우리의 `민속채소'로 규정한다. 산채시험장에서는 그동안 해발 600m 이상의 지역에서만 재배가 가능한 누룩치, 산마늘 등을 향토산채로 개발했으며 음나무(개두릅), 영아자, 잔대, 꿩의 다리, 더덕, 삼엽채, 삼나물, 원추리, 부지갱이, 쥐오줌풀, 콩제비꽃 등을 대량 시험재배하고 있다.
산채시험장 실험에 따르면 산나물은 각종 약리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참취는 종창, 방광염, 인후염, 곰취는 거담, 천식, 참나물은 간염, 고혈압, 중풍, 폐렴, 두릅은 당뇨, 위암, 신장염, 산마늘은 감기, 해독 치료에 각각 좋은 효과를 낸다.
5월말부터 7월말까지 두 달 동안은 산채시험장의 온갖 산채가 가장 왕성하게 꽃을 피운다. 대화산나물축제 기간 동안 산채시험장은 산채전시회를 연다. 또 가까이에 있는 국립평창청소년수련원(0374-333-8830)은 산채시험장 특별견학 및 산채설명회를 갖는다.
봉 산 서 재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 이항로 선생의 영정이 있다.
봉평 시가지 진입로 국도변 평촌리 동편 산기슭에 위치한 '봉산서재'는 율곡 이이 선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때 이 곳에서18년간(1526-1543) 거주하는 동안 사임당 신씨에게서 율곡선생을 잉태하였 는데(1536년 봅)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창건(創建)한사당(祠堂)이다.
1896년 이 곳 창촌에 거주하던 유학자 홍재홍(洪在鴻) 선생이 주동(主動)이 되어 고종(高宗)에게 탄원을 올려 판관대(判官臺)를 중심으로 한 사방 오리를 서재위토(書齋位土)로 하사(下賜) 받고 건축허가도 받았으나 당시 국가정변이 있어 무효가 되었다.(그때 홍재홍학자는 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상소함으로 왕이 시상열사형을 받음으로무효가됨)
다시 1904년에 태은 추성구선생이 강를도부에 허가서를 내서 허가를 받고 주민일동으로1906년 겅축하고 1907년에 단청까지 마무리 하였다.
서재경내(書齋境內) 재실(齋室)엔 율곡 선생의 존영(尊影)과 화서 이항로(李恒老)를 모시고 지방 주민과 유림(儒林)이 춘추 (春秋)로 받들어 제사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판 관 대(判官臺)
* 이율곡 선생 탄생의 전설
이율곡 선생의 부친 이원수 공이 지금의 인천지방 수운판관을 지낼때 말미를 얻어 이곳의 본가에 오던 중 대화면 반정(상한내리)에 이르렀다. 그때 날이 저물고 피로하여 길가의 여인숙에서 유숙하려고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에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홀로 여인숙을 경영하던 주모가 꿈을 꾸었는데, 용 한 마리가 가슴에 가득히 안겨오는 것이었다. 꿈을 깬 주모는 놀랍고 이상하여 일어나 곰곰히 생각에 잠기었다. 이는 비범한 인물을 잉태할 꿈이며, 하늘이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자신을 돌이켜보니 과부의 몸이라 잉태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주모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지붕 밑에 유숙하는 판관을 생각하고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시고 가여히 여겨 받아주십시요."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판관은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내 그대를 행실이 바른 여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물리쳤다. 주모는 "손님께서는 아무 말씀 마시고 오늘 하룻밤만 정을 맺게 하여 주십시요." 하고 재차 애걸하였다. 그러나 판관이 끝내 거절하는 바람에 주모의 소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주모는 부끄럽고 서운한 마음으로 조반상을 지어 손님에게 드리면서 쳐다보니 얼굴에 상서로운 서기가 감돌았다. 주모는 자기의 운수가 아님을 한탄하였다.
한편 사임당 신씨는 친정인 강릉의 오죽헌에 머물고 있었는데, 간 밤에 용이 가슴에 가득히 안겨오는 꿈을 꾸고 짐을 챙겨 급히 이곳의 본가로 향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보니 남편 원수 공이 와 있었다. 그날 밤 부부는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그로부터 신씨는 율곡을 잉태하였다.
본가에서 며칠을 머물던 판관은 임지로 돌아가다가 또다시 전번의 주막집에 들게 되었다. 그때 판관은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애절한 하소연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리어 주모에게 전번의 일을 사과하고 정을 맺기를 청했다. 그랬더니 주모가 이르기를 "어르신네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번에 쇤네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룻밤을 모시고자 한 것은 비범한 자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나 지금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서기가 스러졌으니 뜻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길에 댁에서는 비범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만 안 된 것은 몇 해 안가 아이에게 호환이 있을까 두럽습니다." 하였다.
판관이 당황하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호환을 면할 방법을 물었다. 주모는 판관에게 "집으로 돌아가 뒷동산에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으면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판관은 급히 돌아가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어놓고 임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몇년 후, 집에 돌아온 판관에게 한 스님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들을 시주하든지 밤나무 천 그루를 시주하라고 하였다. 판관은 짚히는 것이 있어 밤나무를 심어놓은 동산으로 스님을 안내하였다. 스님과 판관은 밤나무를 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도 한 그루가 모자랐다. 판관이 어쩔줄 몰라 하는데, 그 옆에 있던 참나무과의 낙엽 활엽교목이 불쑥 "나도 밤나무요"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스님이 거대한 호랑이로 둔갑하더니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였다. 그후로 그 나무를 '나도밤나무' 곧 '너도밤나무'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무 심는 공덕이 커서 생명도 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팔 석 정
조선조의 명필가인 봉래 양사언이 8일간 머물렀다는 팔석정 일대는 깨끗한 물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짙은 운치와 낭만에 젖어들게 한다. 커다란 암반들이 굽이치는 시냇물과 벗하며 곳곳에 솟구쳐 있어 신비스러운 경관을 선사한 팔석정(八石亭)은 봉평면 평촌리 앞들 물가에 위치하고 있는 명승지(名勝地)를 말한다.
이 곳에는 8개의 큰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바위들은 주변의 풍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팔석정(八石亭)은 8 개의 바위를 가리켜 붙여진 이름이지만 여기에는상당한 유래가 있다.
--- 강릉부사로 있던 양사언은 시서에 능하고 자연경관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동·영서(嶺東·嶺西) 지방을 두루 돌며 풍치 좋은 곳에 머물러 시작(詩作)을 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곤 하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은 이 곳에 이르렀는데 그 수려(秀麗)한 경관에 매료되어 8일 동안 이나 머물게 되었다. 8일 동안 머물렀다 하여 8일경(八日亭)이란 정자를 건립하게 하고 1년에 세번씩 봄에는 춘화(春花)라 하여 즐기고 여름 에는 하방(夏芳),가을에는 추국(秋菊)으로 즐기며 시상과 시작에 도취하였다. 그는 강릉(江陵)에서 임기(任期)를 끝내고 고성 지방 (高城地方)으로 전근(轉勤)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다시 여기 팔석정(八石亭)에 와서 바위마다 이름을 부쳤으니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석대투간(石臺投竿),석지청련(石池淸蓮),석실한수(石室閑睡),석구도기(石臼搗器),석평위기(石坪圍碁)라 하고 그 바위 중심부에 글씨를 쓰고 그것을 각색(刻索)케 하였다. 이 이름들은 그 바위의 생김새에 따라 지어놓은 이름으로 이후부터 이 곳을 팔석정(八石亭)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 바위에 각색(刻索)된 글씨는 그야말로 명필(名筆)에 속한 그의 일필휘호(一筆揮毫)이고 대자(大字)이며 심각(沈刻)되었다. 양사언(楊士彦)이 이 곳을 떠나 고성(高城)으로 부임(赴任)하였지만 이곳 사람들 특히 사림 유생(士林儒生)들은 이 팔석정의 내용들을 전부 암송(暗誦)하는 실정이었고 이와 같은 소문은 사방에 퍼져 많은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이 찾아들었고, 지방 유생들도 매일 같이 이 곳에 모여 학문과 시서(詩書)를 논하고 취흥(醉興)에 젖었다고 한다.
효 석 문 화 마 을
흥 정 계 곡
흥정산(1276m)과 회령봉(1309m)에서 내려오는 계류가 흥정삼거리에서 만나 흥정천을 이루어 봉평을 지나 평창강으로 흘러든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흥정계곡은 흥정산에서 발원한 계곡이 흥정리, 원길리를 거쳐 흐르는 긴 계곡이다. 비교적 수량이 풍부한 편이며, 흥정산에서 발원해 내려오는 물이라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계곡으로, 열목어가 서식하는 곳이다. 계곡은 허브나라농원 옆의 구유소 부근을 제외하면 물의 흐름이 완만해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무이교 옆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계속 흥정계곡을 따라오르게 되는데, 약 1k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산채시험장이 있고 또 약 2.5km를 더 가면 유명한 허브나라농원이 있다. 이 허브나라농원 옆이 구유소다. 구유소는 흥정계곡에서 물이 가장 깊고 물살이 센 곳으로 생김새가 소나 말의 구유를 닮았다 해서 구유소라 불린다고 한다.
허브나라농원을 지나 계속 시멘트 길을 가면, 지금은 폐교된 무이초등학교 흥정분교가 있다. 이후로도 계곡은 계속 이어지지만 자연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흥정계곡은 몇 년 전만 해도 한적한 계곡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밀려드는 인파로 몹시 시달리고 있다. 산채시험장, 허브나라농원이 끼어 있고, 아이들의 물놀이에 적당하기 때문인 듯하다.
제21회 효석백일장 일반부 장원작
단추
유은미
베시시 웃는 네 모습
비로소 제 위치를 알아
당당히 서있는 그 모습
세상의 눈동자 되어
알고도 모르는 척
베시시 웃는 네 모습
** 제22회 효석백일장 안내 **
행사기간: 2001년 8월 31일
곳 : 평창군 봉평 중 ,고등학교
주최 : 효석 문화제 위원회,강원일보사
주관 : 가 산 문 학 선 양 회
후원 : 강원도 교육청,평창군청,평창교육청, 평창문화원, 휘닉스파크, 해태샘물
1. 목적
전국 일반, 초,중,고생들의 예술 창작 능력을 고취하고 이효석선생의 문학의 가치를 알리려함.
2. 참가대상및 인원
대상 : 전국 유치원생,초(저학년,고학년)중,고등학교생,대학생,일반인.
인원 : 학교당 각부문 10명 (초등부는 저학년,고학년구분 각 10명)
3. 개최일시
2001. 8. 31. 10:00 시
4. 개최장소
봉평 중 고등학교 (우천시 별첨내용 참조와 주변행사장)(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5. 신청서 접수처
가산문학선양회 335-2323 , 335-2322(fax)
봉평고등학교 교무실 (봉평면 창동리 소재) 담당자 김남극 선생(019-274-1961)
문의 : 033-335-2323(효석문화제 위원회)
e-mail 신청가능 (srbm@kornet.net)
6. 신청서 접수방법 ( 기간 엄수)
-신청서-2001년 8월 29일 17:00( 도착분에 한함)
-신청서접수방법-직접 방문또는 FAX,EMAIL,(평창군 관내학교는 평창교육청 공문함 이용가능)
7. 행사내용
■ 제 1 부 ■
가) 개회식 : 2001년 8월 31일 10시 봉평중,고등학교 운동장
나) 백일장 :
1) 부문 : 시부,산문부 ① 초등학교 저학년부 ( 1--3학년 )
② 초등학교 고학년부 ( 4--6학년 )
③ 중 등 부
④ 고 등 부
⑤ 대학,일 반 부 ( 주부 백일장 포함)
2) 참가자 준비물
① 연필(볼펜) , 책받침
② 원고지는 당일 본회에서 배부
3) 시제 : 당일 제시
4) 시상 내용
각 부문 : 장원(1),차상(1),차하(1),장려(2)
다) 사생대회 :
1) 부문 : ① 유치부(사설,병설,유아학원)
② 초등학교 저학년부 ( 1--3학년 )
③ 초등학교 고학년부 ( 4--6학년 )
④ 중 등 부
⑤ 고 등 부
2) 참가자 준비물
① 유치부 및 초등학교 저학년부 : 크레파스화,화구일체
② 초등학교 고학년부 : 수체화 화구일체 (이젤 포함)
③ 중등부,고등부는 초등학교 고학년부와 동일
④ 각 부문 공히 본회에서 화지 배부
(유치부및 초등학교 저학년 8절, 그외는 4 절 )
3) 화제 : 당일 지정된 장소내에서 자유화(유치부) ,생활화(초등학교저학년부), 사생화(초등학교고학년부,중,고등부)
(※ 우천시에는 초등 부 생활화, 중,고등부 사생화(한국화 포함 ,제목 당일 게시)
4) 시상내용
각 부문 : 금상(1) , 은상(1) , 동상(1) , 장려(2) ,가작,(초등부 가작은 학교별 심사)
유치부는 단체별 시상
라) 서예 대회 :
1) 부문 : ① 초등학교 ( 4--6학년 )
② 중 등 부
③ 고 등 부
④ 일 반 부
※일반부는 희망자가 없을 경우에는 취소할 수 있다.
※초등학교부 저학년 서예는 고학년에 함께 실시
2) 참가자 지참물
① 붓,벼루,연적(물통) ---각부 공통
② 각부 공히 본회 에서 화선지 배부
③ 연습지는 각자 지참
3) 글본 내용
==예시된 글체 중에서 당일 지정한다==
가).초등학생부(화선지 크기 :4절)
정기어린 태기산
흥정계곡 맑은물 (14자)
나).중 등 부 (화선지 크기 : 2절)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38자)
다).고등부,일반부 (화선지 크기 : 2절)
고등부---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은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40자)
일반부---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젓었다(40자)
4) 시상 내용
각 부문 : 금상(1) , 은상(1) , 동상(1) , 장려(2)
마) 한시,휘호대회 :
1) 부문 : ④ 일 반 부
2) 참가자 지참물
① 붓,벼루,연적(물통) ---각부 공통
② 각부 공히 본회 에서 화선지 배부 (각부공통)
③ 연습지는 각자 지참
3) 글본 내용
봉평 , 메밀꽃 , 효석백일장
바) 우수학교 표창 : 성적이 뛰어난 학교로 표창
( 선발은 가산문학선양회 백일장 포상 기준에 의하며 가작은 점수에 포함되지 않음)
** 9시 50분 : 효석문화제 주 행사장 집합
우천시에는 지정된 교실로 각 부문별로 입실(행사요원의 안내)
사)백일장 시간별 일정
09;00 봉평중,고 운동장 집결시간 소요시간 내용
10:00---10:20 개회식
10:20---10:30 지정장소 이동
10:30---12:30 백일장 120분 대회
12:30---16:00 식사및 효석문화제 관람,심사
16:00 ----수상작 전시(지정장소)
아)시상식
시상식은 없으며 수상자 명단은 봉평홈페이지(www.bongpyong.co.kr)에 공고함
상장과 상품은 학교및 주소지로 우송함.
자)우천시 행사계획
1)개회식-생략
2)행사장소-전체 시,산문부문:봉평중,고등학교 교실
초등부 사생:봉평중고 복도
중,고등부 사생:봉평중,고등학교 철쭉관
전체 서예부문 : 봉평신협 2층 회의실
3)유의사항 : 인솔교사및 개인은 봉평중,고등학교 현관에서 접수증및 안내를 받은후 행사장소로 이동할 것
※시간은사정에따라변경될수있음
[거리 백일장]
행사기간: 2001년 8월31-9월3일
장 소: 봉평면 창동리 일원
주 관: 가산문학선양회
협 조: 강원도,평창군,강원일보,휘닉스파크,해태샘물
행사내용
* 주 제: 가산 이효석과 메밀꽃
* 부 문: 시, 산문,
* 참가대상: 전국의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대학, 일반
진행방법: 원고지 배부 → 작품 접수 → 심사 → 심사결과 공고(신문) → 상장 및 상품 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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