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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창 여행3 - 난창 8.1 기의기념관에서 중국대륙을 뒤흔든 현대 역사를 되돌아보다!
10월 20일 소흥 에서 기차로 3시간반만에 남창 서역 에 도착해 지하철로 빠이꽝창 八一广场
(팔일광장) 역에 내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八一起義紀念館(8.1기의기념관)”을 찾아
신분증을 검사하고 엑스레이 기계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니 입장료는 공짜로 마당에
서 있는 인물중에 주은래, 주덕, 유백승, 섭정, 하룡과 이입삼 등은 들어본 인물들 입니다?
기념관에는 학생들을 비롯해 남녀노소 인산인해인데 표정을 보니 진지함과 자부심이 가득해
보이니 어디 가든 시끄러운 중국인 들이 기념관에서는 조용하니 숙연해질 지경인데
1927년 8월 1일 남창에서 무장봉기 자료들을 주로 해서... 일본군과 전쟁과 1946년
국공내전에 현재의 중국 육해공군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남창기의 는 국민당 입장에서 보면 무장폭동 으로 만약 국민당이 승리해 중국을 장악했다면
1950년에 6.25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안타까운데... 국민당에 비해 세력이 10% 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모택동의 공산당이 어떻게 내전에서 승리했는지 연유 를 생각해봅니다.
중국 공산당 은 1921년 상하이에서 13명이 모여 창립 모임이 열려 코민테른 의
지도를 받은 천두슈 (陳獨秀 진독수) 를 지도자로 하여 주로 도시 노동자 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형성했는데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國共合作) 으로
1926년 부터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손잡고 공동으로 북벌(北伐) 을 개시 합니다.
하지만 쑨원이 사망한후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 (蔣介石 장개석) 는 반공(反共) 주의자라
1927년 4월 12일 국공합작 (國共合作) 중임에도 배신해 상하이에서 쿠데타 를
일으켜 수십만명의 공산당원과 노동자를 체포해 죽이자 국공합작은 끝이나고
중국공산당은 큰 타격을 받게되며 1927년 8월 1일 남창 에서 주은래의 지도로 봉기합니다.
주은래, 류보청, 주더와 국민혁명군 20군단장 하룡, 11군 24사단장 엽정등 3만명은 8월 1일
장시성의 성도 남창에서 봉기하니 송경령, 주은래, 허룽 235인이 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광저우로 진격했으나 국민당군에 패배 한후 모택동은 정강산에 들어가 노동혁명군 1군을
창설하는데 엽검영이 쓴 비문이 남아있으며 조선인 정율성은 인민해방 군가 를 작곡 합니다.
봉기는 실패했지만 8월 1일은 중국인민군 건군 기념일이 되었는데 장가계 토비 출신 하룡은
여동생을 모택동의 부인 으로 출가시켰으며... 코민테른과 공산당의 정책이 연이어
실패하자 노동자 아닌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마오쩌둥 이 두각을 나타냅니다.
모택동은 정강산 근거지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도시를 포위 하는 전략이 성공했으니 상해에
근거를 둔 공산당 중앙도 도시 노동계급 중심의 혁명 노선만을 주장할 수 없게 되는데
농촌에서 이루어진 토지혁명과 유격전술 로 홍군의 존재는 모택동을 지도자로 부각시킵니다.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 서금)에 소비에트 정권을 구축하게 되는데 1930년에 이르자
소비에트 15개소, 홍군 6만, 노농적위대 10만의 규모로 성장하니 농촌에서 이루어진
토지 혁명과 유격전술 로 다져진 홍군은 국민당의 4차에 걸친 포위 공격을 모두 격퇴합니다.
하지만 5차 공격때 장개석은 50만 병력과 비행기 200대를 동원하였고 철저한 경제 봉쇄 로
이중 포위망 을 구축하니 정면대결 전술을 펼쳤던 공산당은 패배하여 1934년 7월
강서 소비에트를 포기하니 홍군의 주력 10만은 국민당군의 포위와 추격을 뚫고 탈출 합니다.
1934년 10월 탈출을 시작한 홍군 은 4개의 봉쇄선을 뚫는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에 도착해 회의가 열렸으니 모택동은
국민당의 5차 포위공격에 대해 공산당 지도부가 유격전이 아닌 진지전
전술을 택한 것을 비판해 당권과 군권을 쥘때 주은래와 등소평이 이를 지지합니다.
대장정 (大長征) 이란 1934년부터 2년간에 걸쳐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 을
건너 1만 2,500km 를 초인적인 힘으로 행군하는데 이 결과 공산당의 혁명 근거지가
중국 동남부에서 서북부 로 옮겨졌으며 마오쩌둥이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홍군은 추격해 오는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서북 지방 싼시성에 도달하였는데 10만
으로 출발한 병력은 연안에 도착했을 때는 1만으로 줄어들었지만 중국의 청년들은 장정
이라는 영웅적 투쟁에 자극을 받아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에 걸쳐 공산당에 가담 합니다.
홍군은 1935년 5월 양자강을 건너 부대를 3개로 나누고 국민당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소부대로 이동했으니 그들은 추격군의 예상을 뛰어넘어 귀주 산악지역을 넘었으며 마냥
도망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습공격 으로 국민당군의 추격의 발길을 멈칫하게 하기도 합니다.
운남을 지나 사천에 접어들어서도 국민당군의 추격은 계속되었으니 산악지대 강 대도하 를
국민당군이 도착하기 전에 건너기 위해 임표의 선봉대 는 하루에 120km 를 강행군해
노정교 다리 에 도착하니 다리 좌우의 거점을 확보해야 본부대가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도하 를 건너자 이번에는 해발 4,000m 가 넘는 대설산 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산을 넘어
7월에는 호북에서 탈출한 제4방면군과 감숙에서 합류했는데, 근처 섬서성 보안
소비에트는 규모는 작지만 공산당 근거지로 유지단과 고강등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홍군은 1935년 10월 섬서성에 도착하기 까지 국민당군의 봉쇄망을 뚫고 지방군벌과 싸우면서
11개 성을 통과하며 18개 산맥을 넘고 17개 강을 건너 1만 2,500km의 대장정 (大長征) 을
이룩했지만 제1방면군 8만여명은 장정이 끝났을때 8,000명 에 불과했으나 2방면군과
4방면군이 합류해 3만명 이 되었으며 죽음을 넘어 장정을한 병사들은 최정예 부대가 됩니다.
항일투쟁과 공산혁명의 중심부대가 되었으며 지나간 곳곳에는 혁명의 씨앗 이 뿌려졌는데
일본의 무력침략이 본격화되니 상해와 북경에서 전에 없는 강력한 항일운동이 일어나자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함께 항일투쟁에 나서자 제안했고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투쟁 에
나서라는 국민적 요구와 서안사건의 영향으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이 성립되게 됩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을 일으켜 1932년 3월에는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장악한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화북지방을 중국에서 분리할 목적으로 군사 도발을
일삼자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학생, 노동자들이 시위와 파업, 대중집회가
개최되었으며 국민당 정부에 철저한 항전을 요구하고 일본제품 불매 운동을 결의합니다.
1932년 상해에서 손문의 미망인 송경령 과 채원배, 노신 등이 참여해 중국민권보장동맹이
만들어져 반공과 독재강화에 몰두하는 장개석 정부에 항일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으며
공산당은 1934년 7월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화북으로
이동해서는 조선인 부대까지 포함한 항일연군 을 조직하였으니 1937년에는 4만에 달합니다.
일본이 1935년 하북, 산서, 하남성 자치정부 를 수립하자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투쟁 에
나서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지고 공산당은 1936년 항일투쟁에 일치하여 나서자는
제안을 하나 장개석은 국내의 적을 일소한 다음 외국의 침략을 막는다며 연안을 공격합니다.
장학량 은 만주 군벌 장작림의 장남으로 아버지가 1928년 일본 관동군에 의한 열차 폭파
사건으로 사망한후 항일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니 서안사건으로 중국의 2차 국공합작 을
성사시켰으나 10년형을 받고 1949년 장개석 정부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가 가택연금 됩니다.
장학량은 만주사변후 북경에서 국민당군에 합류하였는데 장개석 정부에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투쟁에 나설 것' 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1936년 장학량군과 홍군 사이에는 비밀
협정으로 전투가 중지되었는데 12월 12일 장개석은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서안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장학량은 서안에 찾아온 장개석을 감금하고 함께 8가지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글을
공표하는데 남경 정부를 개편하고 각당 각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책임을 질 것이며
내전을 정지하고 상해에서 체포된 애국 지도자와 정치범을 석방할 것이며 민중의
집회 · 결사등 모든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고 구국회의를 즉시 소집할 것을 요구합니다.
별다른 수가 없으니 장개석은 결국 주은래와 담판 을 하는데 부인 송미령 이 서안에
도착하고 타협이 벌어져 12월 25일 장개석이 석방되고 장학량의 요구는
관철되었으며, 약속을 문서화하자는 주은래의 말에 '말한 이상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결과가 있을 것이다' 라면서 문서화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1937년 9월 22일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으니 장개석은 뿌리 뽑으려고 노력한 공산당과
다시 손을 잡을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었고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공산당의 주장이 국민들로 부터 명분 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국민당이 공산당을 합법단체로 인정하자 공산당은 토지개혁의 중지, 소비에트 정부 해체,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받는 지방정부로 편입을 골자로 국민당의 제안을 받아들이니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 (八路軍) 과 국민혁명군 신편 제4군 (新四軍)으로 재편됩니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수도 남경에서 패하여 후퇴하는 동안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은
유격전술로 일본군의 교통망과 주둔지 를 교란했으며 해방구를 키우니 일본의 점령지는
점과 선으로 고립되었고 넓은 농촌 지역은 항일유격대와 팔로군이 통제하는 형국이 됩니다.
위기를 느낀 장개석은 1938년 10월 무한 함락을 계기로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으니
신사군을 안휘 · 강소성에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린후 포위 공격하는데 국민정부는
종전후 공산당과 결전에 대비 군사력을 온존시키며 미국의 승리를 기다리는 태도를 취합니다.
일본은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략하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전쟁에 돌입한후 1941년 부터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자 1942년 말까지
해방구는 줄어들었고 인구도 절반으로 감소했으며 홍군의 수도 40만에서 30만으로 줍니다.
일제와 국민당정부의 해방구 포위로 위기에 몰린 공산당은 자력갱생 슬로건 아래 생산증대
운동으로 항전체제를 가다듬었으니 1944년에는 화북지역 곳곳에서 일제에 맞선 반격을
가할수 있게 되자 일본은 대도시와 점령지의 변경 지역에 몰려 포위 고립된 상황이 됩니다.
소련은 1945년 4월 얄타회담에서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일본과 전쟁을 하겠다고 통보했었는데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사흘후인 8월 9일 극동의 500km 전선에 걸쳐 일본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니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 선언을 하게 되자 이제 내전은 시간문제라!
1945년 8월말 모택동은 장개석의 초청으로 중경으로 가서 미국 대사와 함께 평화교섭 을
위한 회담을 하는데, 이때 국민당군의 전력이 월등했으니 10월 들어 국민당은 200만의
군대를 동원해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를 공격하니 미국은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내전은 누가 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일이었으니...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앞서 있었는데 공산당은 군사력은 약했지만
해방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토지 개혁등 정책이 중국인민들로 부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1946년 6월 200만 국민당군이 홍군 근거지를 공격하니 홍군은 거점에서 밀려났고 국민당군은
연안을 점령했는데 홍군은 도시거점을 지키는데 주력하지 않고 군대를 빼돌려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택하니 표면적으로는 공산당의 근거지가 점령당했지만 홍군의 군사력이
타격을 입은건 아니었으며 철도를 공격해 국민당군의 보급선을 끊고 산서지역을 장악
했으니 국민당군이 승리를 거듭하던 1946~ 1947년에 국민당군 70만 명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1945년말 국민당군 7만5천이 친황다오에 상륙, 산해관으로 진격해 2만7천의 공산군을 격파
하고 만주를 점령하자 조선인들은 연안에서 온 조선의용군 1천명을 선두로 국민당군이
아닌 공산군에 지원했으니 그 수는 12만으로 국공내전에 해남도 까지 진격했으며 4만명은
북한으로 넘어와 6.25때 남침하는데 일본이 조선인을 우대해 한인을 차별한 탓에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자 한인들이 조선인 마을을 습격 할때 공산당 조직이 보호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47년 국민대회를 개최해 총통인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 을
채택했으며 공산당도 47년 2월 당중앙위원회에서 국민당 정부를 전복한다는 정책을 결정
했으니 3월 중경, 남경, 상해, 북경 등에 남아있던 공산당 대표단이 철수, 협상은 끝납니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 에서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난 1947년경에 이르면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으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부패와 물가폭등 에 대한 도시 노동자들의 항의시위가 계속되고 농촌에서는 납세거부
시위가 일어났으니 이는 국민당이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민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이 장악한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농민들이 땅을 가질 수 있었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일은 없게되자 자유주의자들도 공산당 편으로 돌아서고 있었으니
특정지역을 점령하지 않고도 국민당군을 붕괴시키려는 공산당의 계획은 성공해 1946년
국민당군 400만에 대해 100만에 불과했던 공산당 군대가 1947년에는 200만 으로 증가합니다.
국민당 정부가 장악한 지역에서 물가가 폭등하는등 경제가 붕괴되자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장개석은 1949년 남경정부를 유지하는 선에서 공산당과 평화교섭을 제안하자 공산당은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범죄자 처벌, 군대 재편성과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을 요구 합니다.
이에 장개석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하고 1949년 봄 부터 정부의 금괴와 정예부대를
대만으로 빼돌리기 시작했으니 내전 3년만인 1949년 1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 했으며 4월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 하자 국민당
정부는 광동과 중경, 다시 성도로 옮겼다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대만으로 철수 합니다.
중국의 내전은 베트남 전쟁 과도 흡사하니.....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월남이나
국민당 정부는 압도적인 병력과 전투기와 군함에 탱크와 대포 등 화력을
갖추었으나 홍군이나 베트콩(월맹) 은 전투기등 공군이나 해군은 없고
소총에 겨우 박격포를 가진 원시적인 군대 였음에도 결국 승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국민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월남군이나 국민당군은 부정부패 가 심한데다가
오만하여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으니 마을에 진주하면 식사며 고기와 술에
여자 접대등 온갖 "민폐" 를 끼쳐 원성을 산데 비해 홍군은
농작물 보호를 위해 농민의 밭을 둘러가는등 민폐를 끼치는건 극도로 삼갔습니다.
두번째 공산당은 농촌에서 토지 개혁 을 실시했는데 조선과 중국에서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 되어 온갖 서러움을 받았으니 "자기 논밭을 갖는게 평생에 소원" 인데
자본가와 지주를 대변하는 국민당은 무상몰수-무상분배는 어렵더라도 시세보다 싸게
유상몰수-유상분배 라도 정책을 취해 내전에서 승리했으면 6.25도 없었을 것이니 아쉽네요?
홍군이 국민당 정부 수도 남경을 공격할때 범선과 나룻배 를 타고 양자강을 도강하는 사진을
보면서 이런 원시적인 군대에 패배 한게 믿기지 않는데... 장개석은 대만으로 쫃겨간후
며느리가 보석을 탐해 밀수 에 연루되자 불러서 보석함을 주는지라 열어보니 권총 이라
며느리가 자살하는데 대륙에 있을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부정부패를 방치한게 뼈아프네요?
대한민국이 농지개혁을 하지않고 6.25 를 당했으면... 인민군이 내려와 소작농에게
자나깨나 평생에 소원인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했으면 어떤일이 벌어졌을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한데.... 미군정은 50% 에서 80% 에 이르던 소작료를 25% 로
인하했으며...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에게서 몰수한 농지를 소작농에게 불하 합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는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 (農地改革法) 을 제정했고 조봉암
농림부 장관은 1950년 5월 농지 불하를 시작 했으니 소작농에게 1년 소출의
1.5 배를 매각 지가로 산정하여 매년 소출의 30% 씩 5년간 균등
상환하도록 하는데... 한달 남짓 후인 1950년 6월 25일 에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조선이 고려를 무느뜨리고 개국하면서 정도전과 조준은 고려시대의 토지 문서를 빼앗아
불사르고 무효화 한 후에 농민들에게 새로 토지대장 을 발급했으니 백성의
기본적인 삶 을 위한 것인데, 현대에 이르러 농민은 소수로 줄어들었지만 오늘날에도
공산당의 득세를 막기위해서는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막는게 정부의 급선무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