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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 15세 이상 관람가>
15년 전 <동사서독>을 왕가위 감독 자신이 재편집한, 새로운 <동사서독 리덕스>
1994년 작 <동사서독>을 감독 자신이 재편집한 버전으로, 2008년 칸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된 바 있다.
사막의 주막에 은거하는 구양봉은 현상금 사냥꾼들을 고용해 암살을 사주하는 중개인이다. 젊은 시절 사랑에 실패한 그는 몰인정하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구양봉의 주막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머물고 사라지는 정거장과 같다. 옛사랑의 죽음을 전해들은 구양봉은 마침내 자신을 둘러싼 고독의 근원을 찾기 시작한다. 왕가위 감독은 <동사서독>을 종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협영화로 만들고자 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을 영웅으로 그리기보다는 그들이 영웅이 되기 전, 평범한 사람이었을 때를 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어서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운명주의'를 띌 수 밖에 없었다. <동사서독>은 감독 자신의 회사 제트톤의 첫 번째 작품이었고, 감독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 관객의 외면을 받았었고 창고에 처박혀 있는 신세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감독은 마침내 원본을 찾아 복원과 재편집 과정을 거쳐 마음의 빚을 덜었다.
왕가위(Kar Wai Wong) 감독
현대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한 명인 왕가위 감독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도시 풍경 속 억압된 인간의 욕망, 소외, 기억 그리고 고독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농밀하고 우울하며 관능적인 스타일로 그려왔다.
왕가위는 데뷔작인 <열혈남아>에서 그만의 장기인 강렬한 비주얼 스타일을 보여주며 1989년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상영되어 새롭게 떠오르는 신예 감독으로 그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이어 장만옥, 양조위 등 홍콩 최고 스타들과 함께 작업하여 1960년대를 생생하게 포착해 낸 영화 <아비정전>과 올스타들을 한자리에 소집해 중국의 머나먼 대륙을 배경으로 모든 장르적 코드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난 무협 시대극 <동사서독>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왕가위는 <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투게더>를 통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서 자리매김해 나간다. 특히 엇갈린 사랑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어낸 수작 <중경삼림>은 국내 개봉 당시 '왕가위 열풍'을 낳으며 홍콩 영화에 대한 일반관객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다. 양조위, 장국영의 동성애 연기로 화제를 모았던 <해피 투게더>는 스타일리스트로 칭송받는 그의 혁신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50회 칸 영화제 최고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장만옥, 양조위 주연의 <화양연화>와, 공리, 장첸, 양조위, 장만옥, 장쯔이, 왕정문, 키무라 타쿠야 등 국제적인 캐스팅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던 그의 최초 SF 멜로 영화 <2046>을 내놓는다.
=== 줄거리 ===
갖지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그러나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백타산의 황무지 주막에 은거하는 구양봉(장국영 분)은 암살을 사주하는 중개인. 그는 10년 전, 검객의 꿈을 위해 사랑하던 여인 자애인(장만옥 분)을 형의 여자로 내어주고 스스로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에게는 매년 복사꽃이 피는 시절이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고 떠나는 친구 황약사(양가휘 분)가 있고 그 역시 구양봉 만큼이나 사랑에 대한 슬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어느날 모룡언(임청하 분)이 찾아와 자신의 여동생과의 결혼을 어긴 황약사를 죽여달라며 구양봉을 찾아오고 검객에게 남동생을 잃었다는 완사녀(양채니 분)는 돈 한푼 없이 나귀와 달걀만으로 살인청부를 부탁한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한 검객 맹무살수(양조위 분)는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겠다며 살인청부일을 자청해서 나서고 협객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은 가난한 무사 홍칠공(장학우 분)도 구양봉의 앞에 나타나 빠른 검술로 그에게 인정받으려 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아픈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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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서독>의 철학적 분석 ===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 이진경 / 소명출판 / 27 ~ 49쪽>
<동사서독>, 그 멈춘 기억의 장소를 통과하는 인연의 선들에 관하여
1. 사막과 산 사이의 공간
구양봉의 집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다시 말해 <동사서독>이 펼쳐지는 장소는 아주 특이한 공간이다. 먼저 그의 집은 사막과 산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사는 마을의 외부에 있다. 그곳은 떠도는 사람들이 떠돌 듯이 왔다가 떠돌며 떠나가는 곳이며, 탈주자들이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곳이다. 탈주선들이 만나고 교차하며 분기하여 흩어지는 곳, 그런 점에서 그곳은 일차적으로 탈주의 공간이다. 그곳은 그 자체로는 다양한 욕망이 흘러 다니고 교차하며 접속했다가 새로 분기하는 자유로운 흐름의 공간이고 유목의 공간이다. 언제나 '너머'를 갖는, 그래서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를 궁금해하는 순간 떠날 수 있는 공간이며, 욕망의 형태가 변이하고 '떠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은 마을 사람들의 삶, 성(城) 안의 사람들의 삶과 섞이고 교차하는 지대다. 그곳은 "살다 보면 원수진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사람들은 "실력은 있지만 돈은 없는", 그래서 약간의 돈을 주면 하고자 하는 일을 대신 해줄 사람들과 만나고 접속되는 공간이며, 마을 사람들과 마적대와 해결사들이 충돌하는 지대다. 또한 그곳은 다양한 인연의 선들이 '해결'이라는 유혹에 이끌려 모이고 교차하는 공간이며, 그 유혹을 통해 사람들의 욕망이 드러나고, 드러난 욕망이 명시적으로 목표를 추구하는 공간이다. 그곳은 욕망이 조건에 따라 특정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거나 수축되면서 배열되는 공간이요, 사랑이 그 대상을 얻고자 하는 공간이며, 미움과 증오, 복수심이 그 대상의 죽음을 사고자 하는 공간이고, 그러한 욕망이 돈으로 치환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곳은 마을의 외부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속에 자리잡은 욕망이 타인의 신체를 통해 외적으로 표현되는 세계고, 그런 만큼 그곳은 마을 사람들의 내면, 마을의 내부기도 하다.
요컨대 그 공간의 한 쪽은 황약사가 왔다가 떠나는 사막이다. 즉 욕망이 버려진, 그러나 그렇기에 욕망의 흐름이 새롭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요, '망각'의 공간이며, 버려진 공간이지만 새로운 시작의 공간인 사막이다. 다른 한 쪽에는 산이 있고, 그 산들 사이에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을 노리는 마적들이 닥쳐오는 그곳은 인연의 선만큼이나 복잡하게 주름이 잡힌 공간이고, 그렇기에 언제던지 떠날 수 있지만, 그 떠나는 선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뒤섞이며 새로운 흔적의 선을 그리는, 새로운 출발과 성공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다. '동사'와 '서독'이 만나고 헤어지는 공간은 사막과 산 사이에, 혹은 사막과 마을 사이에 있다.
<동사서독>의 모든 인물들은 이 공간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그 인물들은 한결같이 떠도는 방랑자요, 일상적 삶에서 벗어난 탈주자다. 혹자는 멀리 고향의 산을 그리면서 사막 한가운데 이합의 장소를 만들고 있고, 혹자는 사막에서 왔다가 사막으로 되돌아가고, 혹자는 사막에서 왔다가 산으로 가며, 혹자는 산과 마을이 있던 곳에서 와서 다시 그리고, 혹은 반대로 '사막'으로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방랑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 그들은 그 다양한 방향의 선을 타고 흐르는 자유로운 탈주자들이며, 정주민(定住民)인 마을 사람들과 대비되는 삶을 사는 떠도는 유목민들이다. 동쪽에서 왔다가 동쪽으로 되돌아가는 황약사, 황약사를 잃고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듯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린 모용언 / 모용연, 집과 아내를 버리고 떠돌다 들르게 된 눈먼 검객, 돈의 유혹에 머물렀다가 다시 그것을 버리고 새 길을 떠나는 홍칠 등등. 모용언 / 모용연은 행적을 바꾸고 이름을 바꾸어도 황약사와 결부된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으며, 눈먼 검객은 아내와 집을 버렸어도 마음은 그리로 향해 있다는 점에서 떠나도 떠나지 못하는 자다. 무엇보다 그 공간의 중심에 있는 구양봉 자신이 그렇다. 그는 실패한 사랑의 기억이라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상처에 여전히 사로잡힌 채 멈추어 있고, 그것을 감추려는 듯 오직 돈으로만 목숨을 사고 파는 해결사의 냉담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있으며, "사막 가운데 살면서 사막 자체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으며,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던 예전의 궁금증조차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누구보다도 더 고착된 내면을 갖는 떠돌이다. 거기서 탈주선은 끊어져 있고, 유목은 중단되어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유목의 공간 안에서 탈주자들을 다루고 있지만, 정반대로 그러한 공간조차 정착의 공간, 멈춤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떠나도 떠나지 못하는, 상처에 고착된 사람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시선은 사랑이라는 따뜻함을 다룰 때 더욱 냉정해지고, 탈주선이 흐를 수 있는 주변성에 주목할 때 더욱 비판적으로 된다. 그것은 독백적인 만큼 사색적이다.
2. 인연의 연쇄
<동사서독>은 복잡다기한 선들로 가득 차 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구양봉의 거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의 행적이 그리는 그 선들은 서로 독립적인 점들을 연결하면서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때론 풀어지는가 싶으면 또다시 다른 선이 접속되면서 얽히고 한다. 그러나 사방을 향해,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향해 무한으로 열린 이 연쇄의 가능성이, 그로 인한 공동의 삶을 구성하기보다는 각자의 삶을 사로잡고 교란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일상의 삶만큼이나 차라리 현실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가 선 자리, 자기와 연결된 어떤 하나의 선, 혹은 몇 개의 연쇄고리를 지키고자 하거나 되찾고자 연연해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동사서독>의 표면적인 '난해함'은 어쩌면 이처럼 등장인물들을 얽고 있는 복잡한 선들, 그 복잡한 관계들의 다기함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양봉은 자신의 야망과 사랑하는 여인 사이에서 동요했으며, 그로 인해 그 여인은 구양봉의 형수가 되었다. 바로 그 여인을 황약사는 사랑하지만, 구양봉을 따라 도망치길 거부했던 그 여인은 여전히 구양봉을 그리워하고, 그것이 황약사로 하여금 구양봉을 찾아가게 한다. 모용언은 그 황약사를 사랑하고, 모용언의 오빠인 모용연은 모용언을 사랑한다. 구양봉을 찾아온 눈멀어 가는 검객은 절친했던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정을 통한 것으로 인해 집을 떠나 방황하고 있었는데, 그 검객의 절친했던 친구는 바로 황약사다. 눈이 멀기 전에 아내가 있는 곳, 복사꽃이 핀다는 고향에 가고 싶다던 그 검객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황약사가 시작했던 마적과의 싸움에서 죽는다. 그리고 '해결사' 구양봉의 집 앞에서는 복수를 부탁하는 처녀가 주저앉아 진을 치고, 그 처녀는 복수의 대가를 요구하는 구양봉과 달리 몇 개의 달걀만으로 목숨을 걸었던 홍칠에게 끌린다. 과거의 구양봉처럼 강호에서 성공하려는 야망으로 고향에 남겨둔 홍칠의 우직한 아내는 구양봉의 집 건너편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이 복잡한 관계의 선들을 우리는 흔히 '인연'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대개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因)하여 '시작'되고, 그것으로 인해 분기되는 다른 선들을 그리며, 그 연기(緣起)의 선을 따라 현재를 구성한다. 그것은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만남이지만, 아주 작은 요인에 연(緣)하여 사태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게 되는 만남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한, 현재를 구속하는 과거의 흔적이고 그런 만큼 미래를 사로잡는 현재의 확장이다. 어떤 것을 이미 지나간 뒤에도 못 잊어 집착하는 한, 인연은 각자로 하여금 이전의 삶과 기억, 상처와 원한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요인이다. 또한 지나가 버리는 이 현재를 사로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얻고자 연연해하는 한, 인연은 저 넓은 가능성의 대양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다.
인연의 선과, 그 선에 사로잡힌 신체는 그 선을 연장하는 새로운 선을 만들고 그 선들은 또다시 다른 선들과 복잡하게 얽힌다. 구양봉의 집 한가운데 있는, 얇은 댓조각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새장은 이런 복잡한 인연의 꼬인 선을 표현하는 표현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구양봉과 모용언이 해결사와 고객으로서 황약사 및 오빠 모용연과 관련된 얘기를 할 때, 혹은 반대로 모용연이 황약사와 누이 모용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혹은 구양봉이 모용언의 애무 아래 형수의 손길을 느끼며 자신의 꼬일 대로 꼬인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한결같이 이 복잡한 새장의 주위를 돌며, 그 새장의 댓살 사이로 서로 보고 보인다. 또한 그들의 신체는 그 복잡한 관계 내지 인연의 선만큼 뒤얽힌 새장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다.
자유란 이 인연의 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거나, 혹은 이 인연의 선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과 연들을 잇는 선들이 교차하는 어떤 하나의 교점에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 인연을 긍정하는 경우든, 거기서 벗어나는 경우든. 그 선에 매여 있는 한, 이 선들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한 누구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한다. 혹은 '나'를 만들어 온 그 인연의 선에 집착하는 한, 이 인연의 선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은, 아니 그것을 향해 삶이 긍정적으로 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이 복잡한 인연의 선에 누구보다도 얽매여 있는 사람은 구양봉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행동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잃지만, 그 여인을 다시 얻고자 동반도주를, 아니 '납치'를 시도한다. 그것은 실패하고, 실패의 기억마저 더해진 과거의 기억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인연의 선에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든다. 오빠를 죽여 달라는 모용언과 황약사를 죽여 달라는 모용연의 사이에서도 그는 그 악연의 선을 풀어 주지 못하며, 반대로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자신마저 그 선에 사로 잡힌다. 동생의 복수를 부탁하는 처녀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는 그 처녀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하고, 그 처녀는 해결사 구양봉의 문 앞에 그대로 붙박힌다. 홍칠에 대해서도 그렇다. 떠나려는 그를 묶으려 하며, 돈에서 벗어나려는 그를 돈으로 다시 잡으려 한다.
동쪽에서 왔다가 동쪽으로 사라지듯 가버리는 황약사는 확실히 구양봉과 다르다. 사실 그는 이 복잡한 인연의 선에 가장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연의 끈은 강력하게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해마다 구양봉을 방문하게 하고, 어딘가로 되돌아가게 한다. 하지만 그는 '취생몽사(醉生夢死)'를 이해한다. 모든 것을 잊게 해준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달고 있는 술을 이해하고, 그 술을 보낸 마음을 이해한다. 번뇌란 기억에 의한 것이고, 기억으로 인해 고정되고 집착으로 인해 꼬이는 인연의 선 때문이라는 것을. 반대로 잊을 수 있다면, 그래서 집착하려는 대상도 잊고, 집착하는 자신도 잊을 수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지나간 모든 것을 두고 떠남이고, 멈춘 현재에서 벗어나는 변이(變異)며, 다가오는 저 자연스런 흐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홍칠 역시 구양봉처럼 여인을 버려 두고 천하를 구하려 강호를 방랑하는 검객이다. "신발도 신지 못한" 싸구려 검객이지만, 젊은 패기와 빠른 검으로 마적대와 충분히 대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미련스레 남편을 쫓아다니는 그의 아내처럼 소박한 단순함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인 구양봉의 의사(意思)에 반하여, 달걀 몇 개로 목숨 건 복수를 사려는 처녀의 청을 들어준다. 손가락은 하나 잃었지만, 덕분에 대의를 따를 때는 빨랐던 검(劍)이 대가(代價)의 금속에 얽매여 느려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해결사의 집을, 돈이 뻗치는 유혹을 버리고, 안 가본 곳을 향해 새로이 떠날 수 있다. 또한 여인을 버려 두고 떠나게 했던, 성공에 대한 자신의 집착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된 듯하다. 함께 가길 청하며 계속해서 따라오는 아내를 데리고 함께 떠나는 것을 보면. 더불어 그는 동생의 복수로 인해 해결사의 집 앞에 붙박혀 앉아 있던 처녀로 하여금 삶을 멈추게 하는 원한과 집착의 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 처녀도 이제 떠난다. 그건 단지 복수가 끝나서만은 아닌 듯하다. 차라리 그것은 소박하고 단순한 하나의 깨달음 때문은 아닐까? 그 여자는 자신의 복수심으로 인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사실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웠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면, 이들이 삶을 사로잡는 인연의 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황약사의 경우와 좀 다르다. 황약사가 '취생몽사'라는,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홍칠은 아무 것도 지우지 않으며, 차라리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초발심(初發心)을 다시 상기했을 뿐이다. 별다른 대가 없이 '달걀 몇 개만을 받고' 처녀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것이 그런 깨달음의 계기였다면, 그는 이미 반쯤은 '나를 위하여'로부터, '나'로부터 자유로워진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홍칠과 대가(代價)나 이익 없이는 어떤 공감(共感)에도 검을 쓰지 않았던 구양봉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홍칠과 황약사의 차이는 아주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황약사와 헤어져 저 먼 어떤 곳으로 가서 '독고구패'가 된 모용언 / 모용연은 어떨까? 그는 물을 가르며 칼을 휘두르지만, 그 휘두르는 모습의 뒤에는 모용연의 몸짓과 모용언의 비명이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 역시, 구양봉과 마찬가지로, 떠나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인 셈이다. 구양봉은 형수가 되었던 애인이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머물던 곳을 태우고 떠나지만, 그는 아무 것도 지우지 못한다. 그 여인이 보낸 술 '취생몽사'는 황약사의 경우와 반대로 구양봉에게는 애인의 과거가 보내는 농담이 된다. "잊으려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갖지는 못해도 잊지는 말라."
3. 기억과 신경증
기억은 인연의 '내면적인 형식'이다. 그것은 현재의 활동하는 사유와 신체에 새겨진, 그리하여 그것에 방향성을 부여하거나 적어도 그것에 간섭하여 영향을 미치는 인연의 힘이다. 그것은 사람을 사로잡으며, 머물게 하고 멈추게 한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과거는 소중하고 아름다워서. "오, 멈추어라 이 순간이여,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도다!" 혹은 안타깝고 아픈 과거는 안타깝고 아프기에. "오, 어떻게 그런 일이 나의 삶에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새로이 접하는 많은 것을 멈추어 선 과거의 어느 것에 계열화한다. 새로이 대면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것은 멈추어 선 과거에 연결되고, 과거의 동결된 이미지의 일부가 되며, 그것을 현재에 지속시키는 요소가 된다. 기억, 특히 지워지지 않는 어떤 기억은 새로운 것의 생성을 가로막고, 과거의 어딘가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한다. 아니, 과거의 그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반복하여 현재에 살아나게 만든다. 정신분석가가 말하는 '신경증'과 '반복강박'이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라캉 말대로 '반복강박(Wiederholungszwang)'이 "반복의 형식으로 작동하는 구조"라고 부를 수 있다면('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에세이),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억과 신경증의 긴밀한 연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프로이트의 수많은 사례를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 망각은 과거로 반복하여 계열화하는 이 사로잡음과 멈추게 함의 힘을 약화시키고, 이로써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발견하게 하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경우 망각은 단지 어떤 사실에 대한 '비-기억'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하나의 동일한 이미지, 동일한 것으로 연결하는 방식에 대한 망각이란 점에서 '반(反)-기억'이다(니체, 도덕의 계보학).
라캉의 말대로 '환상의 기표'는 어떤 것을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구멍과 공백이 나(의 욕망)와 대상 사이에 있지만, '환상'은 그것을 넘어서 동일시를 작동시킨다. 모용언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라고 '오인'한다. 그의 손은 구양봉의 몸을 더듬고 있지만, 그는 황약사를 애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내 몸을 빌린 것이다." 이는 구양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영언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지만, 형수가 된 연인, 자신의 욕망의 대상의 애무를 받고 있는 것이다. 몸을 빌린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환상의 기표 이전에, 이러한 동일시 이전에 '분열'이 있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진정한 욕망의 대상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분열, 어떤 대상에 이끌리는 욕망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욕망 사이의 분열, 황약사를 향해 쏠리고 끌려가는 욕망과 그것에 대해 자신의 위치,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거리를 유지하려는 욕망 사이의 분열. 이는 '대상에 대한 욕망'과 그런 '욕망에 대한 욕망'의 분열이다. 누이와 오빠, 여성과 남성의 형태로 출현했던 모용언과 모용연은 이러한 분열이, 혹은 분열된 이 두 욕망이 생산하는 상이한 주체들이다. 그래서 모용언은 자신과 황약사의 근접을 가로막는 '오빠'를 죽이고자 하며, 그래서 모용연은 '누이'의 욕망의 대상인 황약사를 죽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은 접근 불가능한 어떤 대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그 대상의 끊임없는 치환을 야기하는 힘이고, 그러한 대상에 대해 동일시와 환상을 생산하는 분열이다.
분열된 욕망, 그것은 하나의 주체 안에 공존하며 상이하게 배열되고 상이하게 투여되는 욕망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 자신의 '영혼'을 유지하고 균형잡는 동일한 욕망의 두 가지 양상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그 두 사람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외부에 의해서든, 내면에 의해서든 상처받은 사람, 그 상처로 인해 분열된 사람인 것이다. 상처를 잊지 못하는 한 계속해서 그 상처에 매이며 그 주위를 떠돌게 되는 상처받은 욕망. 그것은 '신경증적 욕망'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이다. 연기(緣起)하는 사건들로 수없이 상처받고 그 상처의 기억으로 다시 고통받으며, 그 상처를 지우지 못해 상처 주위를 분열된 채 떠도는 사람, 그것은 단지 모용언 / 모용연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다른 한편 이 영화에서 우리는 다른 종류의 또 하나의 상처받은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요구하지 않고, 외부 세계에 대해 전혀 손을 내밀지 않는, 구양봉의 형수 - 연인의 아이. 상처 주위에서 떠돌며 그 상처와 연관된 증상을 반복하여 드러내는 신경증과 달리, 통상 '자폐증'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욕망은 외부세계와 자신을 단절시키고 자신의 욕망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외부세계에 대한 불신,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자기 안으로 후퇴하여 자기 안에 머무는 '상처받은 영혼'이다.
그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불명료함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 그 아이 자신이 갖고 있는 위치의 지극히 불편한 이중성과 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의 자폐적 증상의 원인 역시 명시되지 않지만, 그 이중적 관계가 주는 불편함과 잠재적인 상처 때문인 것은 아닌지, 혹은 적어도 자기 '아버지'와 '삼촌'을 향해 분열되어 있는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불신 때문인 것은 아닌지? 어머니와 가족이라는 '일차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그런 종류의 분열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그 외부세계 전반에 대한 전적인 불신으로 이어진다면, 아이의 욕망이 외부세계와 전적으로 단절된 자폐적인 세계 속에 갇히게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아이의 경우만은 아니다. 구양봉을, 아직 잊혀지지 않은 사랑을 회상하는 여인과 겹치는 아이의 모습은 여인이 구양봉을 떠올리는 만큼 구양봉의 닫힌 욕망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상처로 인한 것이든, 외부세계에 대한 극도의 불신으로 그로부터 스스로 단절된 아이의 태도는, 상실한 사랑의 상처로 인해 외부 세계를 불신하게 되고, 믿을 수 없는 모든 외부자들에 대해 홀로 선 단독자의 위치를 스스로 갖는 구양봉의 태도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떠나간 여인에 대한 배신감, 떠나가게 한 자신에 대한 실망, 다시 돌이키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린 관계에 대한 절망, 이 모든 것이 구양봉으로 하여금 누구에게도 맘을 열지 않는, 오직 돈이라는 '외면적' 형식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해결사'가 되게 한 것은 아닌지? 동생의 복수를 염원하는 젊은 처녀의 간절한 염원에 대해서도 아무런 동정이나 공감도 느끼지 않으며 오직 돈만을 요구하는 저 과장된 냉혹함은,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게 된 자폐적 욕망의 다른 표현인 것은 아닌지?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라." 바로 그것이 나중에라도 구양봉으로 하여금 좋아하는 곳으로, 좋아하는 이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게 만드는 자폐증적 정언명령(定言命令)인 셈이다.
그처럼 절대적으로 닫힌 자폐적 아이는 또한 구양봉의 형수이자 연인인, 혹은 아이의 어머니인 한 여인의 분신이기도 하다. 아이도 크면 떠날 것이기에, 사랑이란 말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말 것이기에, 소중한 것의 목록에서 자신의 아이를 지우면서, "모든 게 허망하다"고 말하는 그 여인의 허무주의에서 또다시 우리는 외부세계에 대한 동일한 극단적 불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또 "영원한 사랑"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그러한 불신이 기실은 모든 것을 '영원성'의 이름 아래 멈추게 하고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소유로 하려는 욕망이고 집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원성, 영속성은 그런 점에서 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유지될 수 없는 욕망의 형식이고, 어떤 것을 자신의 완전한 소유와 지배 아래 두려는 야심의 형식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영원한 사랑' 내지 불변성의 환상 속을 배회하게 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랑과 무상하게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거부하고 부정하게 한다. 전자가 현실 속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현실의 저편에 있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절대화하는 '부정적 허무주의'의 일종이라면, 후자는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모든 능동적 능력을 극소화하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조차 부정하게 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일종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버린 이 여인은 떠날 사랑(혹은 떠났던 사랑)이 싫어서, 변하고 말 사랑의 거절이 싫어서 자기가 먼저 그 사람을 거절한 것이다. 자신의 아이마저도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라"는 구양봉뿐만 아니라, 그를 버린 이 여인의 닫힌 욕망의 정언명령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래서 이 세 사람 모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 아니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구양봉도 그 여인에게 달려가지 못하고, 모든 이에게 마음을 닫은 채 산다. 그 여인 또한 구양봉도, 자기의 아이도, 그리고 황약사도 사랑하지 못한다. 그 여인에 대한 황약사의 사랑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여인은 그럼으로써 자신이 세상에 대해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다가온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졌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것을 잊게 해준다는 술(酒) '취생몽사'는 그 깨달음의 선물이다. 그것은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선 과거의 아픈 기억을, 먼저 거절하게 하고 먼저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상처를 잊어야 한다는 깨달음의 선물이고, 그런 만큼 이제 새로이 시작하고 싶다는 변화된 욕망의 선물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희망에 눈뜬 것이고, 그렇기에 자폐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다. 황약사가 '성공'하지 못한 사랑에서 얻었던 것은 바로 이런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황약사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은, 그리하여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모호한 기억만을 남겨둔 채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사랑할 수 없었던, 그러나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 여인이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이었던 셈이다. 죽음 앞에서 죽음과도 같은 자폐증을 넘어서면서 그에게 남겨 준 저 여인의 희망과도 같은 새로운 욕망에 축복을!
4. 머묾과 떠남
이 영화는 머묾과 떠남이 뒤섞이고 교차하는 공간에서 머물고 떠나는 사람들을, 머묾과 떠남 자체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극한적 장소와 극한적 인물을 통해, 그런 극한적이고 특별한 장소를 벗어나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는 머묾과 떠남을 다루고 있다. 모든 인연과 연기의 선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중심인 구양봉의 집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일차적으로 떠남과 탈주, 유목의 공간이지만, 기억과 집착, 자폐적 욕망으로 인해 머묾과 고착의 공간이 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 자신의 말대로, 그는 거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으면서 사막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돈과 계산은, 그것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구양봉 자신을 머물게 하고, 다른 탈주자들을 멈추게 한다. 아니 특정한 방향으로 패인 홈을 따라 흐르게 한다.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은 이제 '홈패인 공간(espace strie)'으로 변환되고, 탈주의 공간은 탈주의 외양 속에 고착의 벡터를 작동시키는 공간에 의해 점령당한다.
반대의 극은 백타산이다. 내가 살던 곳, 그리고 연인이 있는 곳, 그곳은 닫힌 마음이 언제나 향하고 있는 곳이며, 언제나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고, 언제나 되돌아가는 고향이다. 머묾의 공간. 그리고 거기에는 자기 자신에 머문 채 닳아지는 신체, 자기 자신에 사로잡힌 욕망으로 인해 죽어 가는 신체가 있다. 그러나 그 신체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 앞에서, 자신의 거울상과도 같은 닫힌 아이의 닫힌 마음 앞에서 자신의 닫힘과 멈춤을 깨닫는다. 그리고 새로운 선을 긋고자 한다. 그것은 매인 어떤 사람을 풀어 준다. 그는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기억만을 남겨두고 모든 것을 잊는다. 새로운 시작. 그가 매년 되돌아가던 그곳은 이제 새로 떠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욕망의 한 쪽을 못박아 두었던 공간이었던 백타산은 이제 반대로 새로운 떠남의 공간, 새로운 시작의 공간, 탈주의 공간이 된다.
가장 유목적인 양상의 공간이 가장 고착적인 양상의 공간으로 변환되고, 고착적인 공간이 반대의 공간으로 변환되는 이 단일한-이중의 역설을 통해 이 영화는 두 극단 사이에 있는 모든 공간을 유목과 고착에 관한 법칙에 복속시킨다. 그것은 머묾과 떠남의 공간의 속성도, 사람의 속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떠돌아다니는 자들도 멈추어 있는 자들일 수 있고, 반대로 멈추어 있는 자도 떠돌아다니는 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앉아서 하는 유목, 떠돌며 하는 정착. 떠남과 머묾은 공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지 새로이 시작할 수 있고, 어디서든지 변이할 수 있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를 위해 현재와 미래를 사로잡는 고착된 인연의 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 끈을 풀어서 새로운 삶의 자원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옛날에는 산을 보면 그 너머엔 뭐가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것은 '너머'를 향한 의지를 잃어버린,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한 꿈을 상실한 구양봉의 삶을 적확하게 요약하는 독백이다. 반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아직 잃지 않은, 아니 그걸 되찾은 홍칠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해서 떠난다. 바람을 거스르며, 웃음을 지으며,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얻은' 아내와 함께. '함께 떠남'과 '혼자 머묾'이 여기서 다시 대비된다. 떠남은, 심지어 혼자 떠나는 경우에조차도 혼자 하는 외로운 방랑이 아니라, 반대로 함께 갈 사람을 찾는 것이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방식으로 '함께' 하는 것이며, 그런 식으로 다른 이들을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인 만큼 다른 사람을 향해, 부재하는 그들이 '도래하는' 것을 바라며 떠나는 것이다. 반면 구양봉처럼 떠돌아도 붙박혀 있는 사람, 어떤 떠남과도 동행할 수 없고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혹은 자기 자신에게 다가와 자기를 긁고 간 모든 상처에, 그 과거의 기억에, 혹은 현재의 삶의 방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냉정의 양상으로, 계산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그의 '고독'은 그가 그런 자기 자신에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 뿐이다.
하이데거나 실존주의자들 말대로 죽음은 인간 내지 현존재(Daesin)를 고독한 단독자의 특이성이 드러나는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상황으로, 그 불안하고 고독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혼자 떠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서 결코 떠난 적이 없는 저 고독한 방랑자는 결국 '죽음'으로, 혹은 '자폐증'이라고 불리는 살아 있는 죽음으로 떠밀려 가리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우리가 언제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보는 결단을 강조하는 저 '불안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대로 함께 하고, 함께 만들며, 함께 떠나고, 그리하여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함께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은 '희망의 철학'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희망이 없다면, 막연하게 시작되며 새로이 주어지는 것을 긍정하며, 그러한 긍정에 희망을 걸수 없다면, 함께 구성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것으로 변이하는 가변성의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희망'의 철학은 언제나 '나'라는 주어를 '우리'라는 주어로 바꿔 놓는다(블로흐, 미래의 철학). 그 '우리'가 아직 부재하는, 그러나 언젠가 도래할 사람들을 표시하는 이름이라고 해도 말이다. 불안은 고독한 것이고, 몽상은 혼자 하는 것이지만, 희망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고유한 표현의 요소들
1) 액체적 지각, 액체적 세계
바꿀 수 없는 강한 것으로 나타나는 그 복잡한 관계 내지 인연이 반대로 가변적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는 내용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경우에도 흐름을 시각화하는 표현적 이미지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가령 시작하면서 곧 등장하고, 중간에도, 그리고 끝날 때 즈음에도 등장하는 바닷물이 단적인 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바다와는 너무도 관계가 먼 사막에서, 사막과 산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화의 선을 그리고 있다. 즉 바닷물이 등장할 여지는 적어도 내용상 전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등장하는 바다 내지 파도의 이미지는 사건을, 사건 속의 인물들이나 관계의 양상을, 혹은 그 관계들 아래 자리하고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액체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관계나 인연이란 저렇게 가변적인 액체적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아니면 인연을 다루는 불전(佛典)들이 사용하는 은유를 따라 바다물의 표면에 이는 숱한 물결들을 번뇌와도 같은 마음의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것일까? 알다시피 들뢰즈는 이를 '액체적 지각'이라는 개념으로 표시한 바 있다(들뢰즈, 영화 1 : 운동-이미지, 5장).
이 영화에서 이른바 '액체적인 이미지'를 빈번히 등장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사막 한가운데, 아마도 빗물이 고인 것인 듯한 웅덩이를, 그리고 하늘과 산, 그리고 등성이를 걸어가는 검객의 모습이 비친 그 웅덩이의 액체적 상을 여러 번 보여준다. 바람이 일고 잔물결이 일면서 그 정형화된 상(相)들은 흔들리고 조용한 파문을 따라 갈라지고 흩어진다. 복사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눈먼 검객의 아내를 찾아간 구양봉, 그의 아내는 말 위에서 말을 쓰다듬고, 그 말은 맑은 냇물 속에 서 있다. 말의 배 아래서, 빛의 입자들을 되비치며 흔들리는 냇물은 구양봉의 손에서 남편의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그의 죽음에 우는 여인의 마음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그 흔들리던 마음은 바람만 자면 그대로 잔잔해지는 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남편의 친한 친구와 정을 통해 남편을 떠나보내고 결국은 죽음에 잇닿게 한 여인의 흔들리는 마음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그런 인연적 관계 자체의 흔들림을, 그런 가변성을 가시화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단지 액체적 형상에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거친 발 아래서 뭉개지고 변형되는 사막의 모래를 통해서, 가변적인 고체의 이미지로 땅을 묘사한다. 여기선 고체조차도 액체화되어 표현된다. 이들이 발 딛고 선 대지가 이처럼 무르고 가변적임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자주 등장하는 하늘과 구름의 이미지는, 액체보다 훨씬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역시 무언가가 흐르고 있는 세계를 상기시킨다. 더불어 그렇듯 흐르는 인연을 쫓으며 우리의 시선도 흐르고 있는 공간을 가시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액체화된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확실히 과장이겠지만, 기체적 세계를 묘사하는 이런 방법은 웅덩이에 비춤으로써 하늘을 움직이고 흐르게 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액체화하려던 시도와 아주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기체나 공간조차 '액체화'하려는 이런 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불의 이미지를 이용한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형수가 된 연인이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구양봉은 머물던 거처에 불을 지르고 떠난다. 마치 자신을 붙박았던 못이라도 빠진 것처럼. 그의 발 밑으로 사막의 흙이 뭉개져 흘러내리고……. 그러나 그는 그렇게 떠나면서도 어떤 자유도 얻지 못했다. "살다 보면 원수진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라면서 '해결'을 유혹하는 모두(冒頭)의 장면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취생몽사는 "잊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되리라"는 것을 뜻하는, 과거에 그 여인이 남긴 농담을 상기시킬 뿐이다. 그는 기억을 지우려는 듯 자신의 거처를 태우지만 기억을 지우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집착하고 고착시키려는 의지나 욕망도, 사실은 끊임없이 신체를 파고드는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저지할 순 없는 일이다.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불의 이미지는 고체를 태우며 하늘로 올라가는, 열에 단 기체의 움직임을 '액체화'한다. 액체화된 세계, 혹은 무상(無常)의 이미지.
2) 촉감화된 운동
왕가위의 상표처럼 간주되는 스텝 프린팅은 이 영화에서도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특히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은 어김없이 이런 방식으로 가공되어 있다. 이럼으로써 무협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격투장면의 자연발생적 특권화를 저지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시선의 쏠림을 흩어서 평평하게 만든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때리고 찌르며 승부가 어떻게 나는가 하는, 동일시로 이끄는 동작들을 뭉개서 뒤섞어 버리곤, 다만 무언가가 격하게 움직이고 싸우고 있다는 운동-이미지만 남겨둔다. 여기서 형태와 운동에 의해 시선을 잡아끌던 동작들의 명료한 시각적 이미지는, 순수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거친 질감의 촉감적인 이미지로 변형된다. 화면은 망막에 들어와 꽂히는 대신, 눈의 표면이 만질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아마도 들뢰즈 / 가타리라면 여기서 원거리상의 광학적 형상을 담는 '홈 패인 공간'과 대비되는 근거리의 촉감적인 질감을 갖는 '매끄러운 공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3) 입체파적 서사-공간
이 영화는 화법에서도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별도로 서술자를 사용하는 것이야 흔한 일인데, 그 경우 영화는 대부분 그 인물 중 한 사람, 혹은 중요한 인물의 주변에 있다고 간주되는 어떤 인물이 일인칭 전달자 형식을 취하여 진행된다. 반면 이 영화에서는 대사에 비해 서술자의 역할이 큰 편인데, 그 서술자를 여러 명의 인물들로 복수화(複數化)하여 하나의 사실을 복수의 주어들에 의해 상이하게 사건화하며, 이로써 복수의 상황을 교차시킨다. 복수의 기억들, 복수의 행동들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양상이 이로써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그 상이한 것 사이의 대비를 통해서 동일한 상황이 상이한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상이하게 사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복수의 등장인물들을 동일시키는 하나의 단일한 중심을 통해 사태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것을 최대한 단일한 시점, 단일한 시각, 단일한 관점에서 통일시키려는 통상적인 방식(이는 투시법적 시각공간과 대응한다)과 반대로,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시각과 생각들, 삶의 방식들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면서 그것을 때론 대비하고 때론 유비하면서 교직한다. 이로써 단순한 상대주의의 병렬과 달리 그런 상이한 태도들의 유비와 대비를 통해, 매인 자와 자유로운 자, 멈춘 자와 떠나는 자, 고착된 자와 움직이는 자의 삶을 잔인할 정도의 냉정함을 갖고 대조하며 보여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 상이하고 대조적인 삶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능력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는 그 상이한 시각과 시점, 사건화 방식을 통해 하나의 시점이나 척도로 다른 것들을 환원하거나 하나의 시점으로 통일성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물이나 서술자들을 통합하는 특권적 서술자는 없다. 이로 인해 일점 투시법이 만드는 통일적 공간이 깨지고, 상이한 서술자들의 상이한 사건화 공간이 마치 입체파의 그림처럼 인접하여 병치되는 새로운 서사-공간이 만들어진다. 하나의 척도, 일자(一者)적 중심으로 귀착되지 않는 그런 서사-공간. 이를 들뢰즈 / 가타리의 개념을 빌어 '연속적 다양체', '리좀적 다양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4) 구성의 도식들
영화에 관한 책에서 들뢰즈는 행동-이미지들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두 가지 형식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영화 1, 9장 및 10장). 하나는 상황(situation)에서 행동(action)으로, 그리고 다시 변화된 상황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S-A-S'로 표시되며, 영화 전체에 걸쳐 있기 때문에 '큰 형식'이라고 부른다. 가령 미국의 서부극이나 중국의 무협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통 악한들에 의해 조장된 어떤 상황 S로 시작된다. 외부에서 온 악당에 의해 마을 전체가 공포와 위협에 빠지고 주인공의 부모나 형제가 죽는 상황이 펼쳐지거나, 이른바 사술(邪術)을 쓰는 사파(邪派) 계열의 악한들에 의해 정파(正派)의 도장이 깨지고 사부가 죽는 것으로 만들어진 어떤 상황(S)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악한들의 악행이 거듭되어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그에 대한 공분(公憤)은 확장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주인공은 그것을 극복할 힘을 아직 갖지 못했다. 산에 들어가 어떤 고수(高手)를 만나 무적의 강력한 비기(秘技)를 익히거나, 혹은 악당과 대적할 조력자를 찾던가 하는 식의 사태가 끼어 들고, 이전 상황에 없던 행동(A)이 관여한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 사파의 세력을 박살내거나 그들의 굴복을 받아냄으로써 상황은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고(S'), 세상은 다시 평정을 찾게 된다. 대부분의 무협영화가 이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굳이 예를 들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작은 형식이라고 말한 것은 A-S-A'으로 표시될 수 있는데, 어떤 하나의 행동이 어떤 상황의 개입에 의해 전혀 다른 행동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 전체에 걸쳐 사용되기보다는 국지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작은'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채플린이 능숙하게 잘 이용하듯이 하나의 동일한 행동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다른 행동으로 변환되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어떤 상황의 영향 아래 어떤 인물의 행동이 다른 것으로 변환되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가령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이 두 가지 사례를 다 보여준다. 첫째 경우로는, 병원에서 나온 채플린이 철근을 싣고 가는 트럭에서 흘린 빨간 깃발을 흔들며 쫓아가는 행동(A)이, 파업대의 시위라는 상황(S), 즉 골목을 돌아 나오는 시위대의 대열이 채플린의 꽁무니와 연결되면서 만들어진 상황으로 인해 '공산주의 주동자'의 행동(A')으로 간주되어 경찰에 체포되는 유명한 장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둘째 경우로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나사를 조이는 채플린의 동작(A)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거듭 증가시키는 상황(S)으로 인해 둥근 것이면 아무 거나 돌리려고 덤벼드는 미친 행동(A')으로 변환되는, 역시 유명한 장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념에 비추어 본다면, 이 두 가지 구성형식이 배타적인 택일의 선택지를 벗어나 있디고는 하더라도, <동사서독>은 통상적인 대부분의 무협영화와 달리 S-A-S'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때론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때론 누구와 누구가 공유하거나 엇갈리며 교차하는 상황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하나의 상황은 아예 없으며, 따라서 무림의 고수인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새로이 만들어진 다른 어떤 공통의 상황도 없다. 다만 각자는 자신의 선, 자신의 길을 따라 갈 뿐이며, 상황들이란 그 선의 교차점을 뜻할 뿐이다. 반면 그 교차점인 어떤 상황을 통해서 사람들은 다른 행동, 다른 삶을 산다.
성공하지 못한 사랑과 취생몽사로 인해 황약사는 과거 전체를 지우고 다른 생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A-S-A'). 황약사와의 사랑에 실패한 모용언은 그곳을 떠나 다른 곳을 떠돌며 독고구패가 된다(A-S-A'). 달걀 몇 개로 목숨을 건 복수를 해준 홍칠은 돈이 아닌 대의를 위해 사는 길로 다시 들어가며, 혼자 떠돌던 행동은 아내와 함께 떠나는 것으로 바뀐다(A-S-A'). 복수심으로 구양봉의 집 앞에 붙박혔던 처녀는, 생사의 경계를 넘는 은인 홍칠로 인해 그곳을 벗어나 떠날 수 있게 된다(A-S-A').
구양봉 역시 표면적으론 다르지 않다. 산과 사막 사이의 공간에 머물던 해결사는 형수였던 애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곳을 떠난다(A-S-A'). 그러나 이 영화는 각자 나름대로 밟아 가는 A-S-A'이라는 이 동일한 도식이, 실상 매우 다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상이한 사람들의 삶, 상이한 삶의 방식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중심적인 위치를 갖는 인물인 구양봉의 경로는 표면적으로는 어떤 행동이 변화된 상황으로 인해 다른 행동으로 변환되는 것이란 점에서는 다른 경우와 동일하지만, 표면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처와 기억, 멈춤과 닫힘이라는 요소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A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고("누구나 살다 보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일이 있게 마련이고……"하며 '해결'을 권유하는 장면이 처음과 끝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이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거쳐가는 경로와 대비된다. 이런 의미에서 왕가위는 이러한 수많은 '작은 형식'의 교차와 병진, 대조와 유비에서, 상처와 인연, 고착과 유목, 열림과 닫힘이 대비되는 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상응하는 적절한 표현의 형식을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첫댓글 왕가위의 말에 따르면 한국 개봉 버전은 무협이 적다는 이유로 한국 배급사가 임의로 편집한 버전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왕가위에게 일종의 미완성의 의미로 남았는지, 왕가위는 〈동사서독〉의 재편집본이라고 할 만한 〈동사서독 리덕스〉를 다시 내놓게 됐고 2008년 칸영화제에서 첫 상영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사서독 [東邪西毒] (세계영화작품사전 : 무협 영화, 씨네21)
<동사서독>이 해독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을 정도로 인물들의 관계 및 사건이 모호했던 것에 비하여 <동사서독 리덕스>는 보다 일목요연해진 면이 있는데,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를 두고 “<동사서독>은 시와 같은데 <동사서독 리덕스>는 산문과 같다”고 감상을 말한 바 있다. <동사서독 리덕스>는 전체적인 편집을 다시 하고 음악을 손보고 배우들의 출연 분량 중 특히 장국영의 분량을 늘리는 등의 수정을 가한 작품이라고 왕가위는 밝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사서독 [東邪西毒] (세계영화작품사전 : 무협 영화,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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