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에 공녀로간 기황후
몽골은 1206년 징기스칸이 나라를 세우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칸때는 영토가 러시아, 동아시아, 중동, 동유럽등 14개의 나라를 점령 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의 2배,나폴레옹의6배 로마의 4배인 영토로 지금도 이런 큰 영토를 갖은 나라가 없다고 한다.
몽골은 고려 23대 고종때 7차례나 침략을 한다.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기기도 한다. 24대 원종은 몽골의 침략에 견디기 힘들어 몽골에 가서 항복문서를 주려고 갔다. 그당시 몽골은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그부페 형제간에 왕위권으로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쿠빌라이편을 도와주게 되어 고마움으로? 딸을 충렬왕의 왕비로 보내게 된다. 그후 우리나라는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몽골 여자가 왕비가 된다.부마국이 된다.
몽골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는 동쪽 끝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보잘 것 없는 나라였으며, 영토를 확보 하기에는 별 이득이 없는 나라였다.
몽골은 고려에게 곡물과 공녀,환관을 요구한다. 농사를 짓기에는 토양이 안좋고해서 쌀,보리,인삼등을 요구하고, 처녀13세-16세를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유목민으로 가축을 키울려면 손이 부족하고 여자도 부족한 상태였다.
공녀란 과부추녀별감을 통해서 원나라로 간 여자를 말한다.
1232년 고종때500명, 원종때140명을 요구한적도 있다. 충렬왕때10명을 보낸 것을
계기로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80년간 50회 1700명이?이 원나라로 갔다고 한다.
기황후: 아버지 기자오는 행주기씨로서 아들 기철등 8남매가 있는데 그중 막내딸이 기승냥이다.
1333년 충숙왕때 원의 휘정원에 있던 고려인 환관 고염보의추천으로 공녀가 되었다.
고염보는 공녀 기씨를 황후의 차심부름을 하는 시녀로 앉혀 황제의 눈에 띄게 한다.
몽골의 14대황제인 영종이 재위48일만에 급사하자,영종의 형이자 명종 쿠실 라의 장남 토큰
티므로(순제)가 15대 왕이 된다.
엔티므르(연철)승상에게 아버지를 잃은 순제는 권력투쟁에 의해 티벳, 광서성
일대,고려대청도에서 1년간 산경험이 있어 훗날 기씨에게 호감을 가진 것이
라고 생각 된다.. 순제재위기간은 1330-1370
엔티므르는 순제(혜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기위해 자기딸 타나시리를 정략결혼을 시키고,
실권을 장악하려하지만, 실패로 모두 처형 당한다.
혜종(순제)은 기씨를 왕후로 하고싶지만, 몽골의 왕비는 몽골인이 되어야한다는 전통때문에
바얀등의 반대로 이루워지지않고 옹기라토부족 바얀후트그가 왕후가 된다.
1340년 피나는 투쟁끝에 바안을 몰아내고 공녀로 간 기승냥은 순제의 제2황후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아이유시라다가를 제16대 칸으로 만들고 (소종) 37년섭정을 한다,
그당시 고려 풍속과 언어가 몽골에 유행하여 이를 고려양이라하고, 몽골풍습과언어가 고려에와서 몽골풍이
유행하였다.
기황후는 공녀제도를 없앨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고, 제주도에 원당봉이란 절도 세웠다
그녀에 대한 그후 자취에 대해서는 남은것이 없고, 무덤이 연천에 있다는 설도 있다.
한족의 반란으로 원나라가 쇄약해진 틈을 타 31대공민왕는 반원정책을 편다.
친원파인 기철은 충선왕의 3째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이성계가 끄는 고려군에 의해 패배 하게 된다.
이후 명나라에 대한 공녀는 고려 공민왕때부터 사작되어 조선에 계승 되었다
.
명나라는 1408년태종8부터 1521년 중종16년 까지 거의 10여차례 환관과 함께 공녀를 요구하였다. 세조때
계유정란에 일등공신인 한확의 누이 둘이 명나라 공녀로 가서 누이 한규란은 명성조의 후비가 되었고 성조가 죽자
그녀도 자결 ?또는 생매장?을 하였다한다. 다음왕인 선종의 후비로 동생 한계란이 되었다.
한확의 딸인 인수대비도 고모처럼, 미모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공녀의 요구는 사라졌다.
첫댓글 박제순 선생님, 몽골 얘기 재미있네요. 기황후 드라마에 맞춘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