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혁명
김형효, 2011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자기 생명과 함께 이미 또한 죽기 시작한다.
오히려 살아 있는 것만이 죽게 되어 있기에,
죽음은 하나의 삶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
죽음은 삶의 가장 높은 행위일 수 있다.
자연성은 자기 자신을 정시하면서 자기 자신을 치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이정표"에서
- 죽음은 삶의 가장 높은 행위일 수 있다
(1) 운명과 자유, p342
독서메모:
인간은 자기가 선택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인생의 양끝은 모두 자유 선택과 무관하다. 이래서 사람들은 운명을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운명의 장난으로 살지 않고, 자유스럽게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자유와 운명 사이에서 흔들의자처럼 오가는 것이라고 짐작한다.
사르트르는 사람들이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행동과 다르지 않다고 빍혔다. 그의 행동철학은 철저히 인간주의적이다.
이 말은 자연적 필연의 요소를 완전히 지우려는 사유와 통한다.
동양에서는 묵자가 철저한 비명론(非命論)을 펼쳤다. 비명은 운명이나 숙명을 부정한다는 의미다. 묵자는 인간 근육의 힘과 생산 의지와 그 의식의 생각을 매우 강조했다. 묵자는 의식과 의지의 사상가로서 인간의 삶에서 운명을 완전히 배제시켰다.
묵자와 사르트르는 인생을 너무 실천적 행동 위주로 보는 단순성으로 넘친다. 그들은 자의식의 의지를 너무 강조했다. 그러나 운명은 자유행동의 적이 아니라, 그 행동과 함께 동반하기에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리쾨르(Paul Ricoeur)는 자유의사(the voluntary)와 운명의 무의식(the voluntary)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지도 않고, 일원론적으로 통합하지도 않았다. 그가 말한 의지(will)는 저 두 가지 요소를 다 지닌 현상이지, 사르트르처럼 운명을 배제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리쾨르는 생각한다. 인간 의식은 스스로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그리지 않고, 그 의식이 뿌리박고 있는 무의식을 받아들이며 그것과 대화하는 조건에서 생활한다. 나라는 자의식은 무수히 많은 요인들(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생리적)이 나에게 주어져 생긴 현상이지, 내가 자의식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다.(*글제목: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가?) 나는 전적으로 내 것인 것만은 아니다. 내가 자유의사로 원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 것만이 아니다.
내가 자유의사로 원하는 것은 내 몸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주는 무의식과의 혼융에서 생긴 것이다. 필연의 운명은 자유의 의식적 행위가 늘 안고 있는 업(業)의 무의식적 성격과 같다. 즉 내 의식의 밑바탕에는 늘 특수한 운명의 색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의 인문학과
사회과학(*혹은 음악)은 이 점을 간과하기에 아무리 유식해도 한국학으로 등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학문들은 한국인의 공동 업장과 무관한 지식들을 화려하게 남발하기 때문이다.
리쾨르의 철학은 운명의 성격이 나의 자유로운 사유와 행위를 특수하게 제한시키는 틀과 같아서, 나의 실존적 자유가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비록 무의식이 자유의사의 밑바탕에 은닉되어 있지만, 그의 철학은 무의식을 배제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철학의 힘을 할 수 있는 한 무의식의 영역까지 확장시켜, 무의식을 의미로서 다시 정복하려는 사유다.
나는 더 이상 리쾨르의 길을 따르지 않으련다. 리쾨르의 길은 무의식이란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아의 지성적 소유의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란 제약과 성격의 업은 자아의 이성적 합리성의 읽기로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도의 고승들인 바슈반주(世親)의 유식사상과 아슈바고샤의 기신론 사상에 더 의존하고자 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는 리쾨르의 소론처럼 자의식을 확장하여 운명의 장애를 극복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의 힘을 소멸시키는 동시에 운명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바슈반두의 유식 사상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과 생각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운명이나 숙업의 영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지각과 생각이 '내가 생각한다(cogito)'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숙업과 운명인 '그것이 생각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줄곧 이 책을 통하여 주장한 사유는 선의 진군나팔을 불면 선은 반드시 악을 낳고, 사랑에 집착하면 등 뒤에 증오를 감추고, 광적으로 평화를 외치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의식은 선과 평화를 자각하고 확장하려 하지만, 무의식은 이미 그 반대의 것을 분비하고 있다. 의식은 이를 모른다. 아슈바고샤의 기신론 사상에서는 말나식에서 아(我) 중심의 분별심이 상속되고 소유로 개념화되어, 의식의 모든 활동에 장애를 일으키고 고통스럽게 한다. 모든 업의 운명과 그 성격은 다 궁극적으로 소유욕의 발동에 기인한다. 아(我) 중심의 소유욕의 발동을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화평한 자유를 맛보지 못한다.
나는 한국인들이 역사적인 공동업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본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국가가 백성과 국민이 나라를 믿지 못하게 했다. 국민이 국가를 믿지 못하므로 국민은 저마다 자기가 알아서 살길을 찾기 위해 온갖 아 중심의 이기적인 사고를 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각자가 자기의 살 길을 찾는 아 중심적 사고가 한국인이 일채감을 갖고 결집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공동업장의 제약과 고통을 덜 받고 자유롭게 날개를 활짝 펴고 날기 위하여, 우리는 아 중심으로 뿔뿔이 살길을 찾으려고 부심하는 유아심(唯我心)을 진정시켜야 한다. 이것은 당위적 도덕주의의 설교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글에서 계속된다.
자료원: https://blog.naver.com/bhuh123/221767503338
첫댓글 장유님
자료 감사합니다.
삶의 어려움에 대한 진단은 정확합니다
어떤 처방으로 나올런지 기대가 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형효선생이 쓴 마음혁명이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것들을 옮긴 것입니다.
이 글은 책의 마지막 5장의 12개 글 가운데 첫번째 글이며, 앞으로 11개가 더 게시될 것이므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전개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미 같은 제목 아래 40개의 글이 블로그에 게시되어 있으므로 더 자세한 내용을 읽고 싶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책을 구해서 읽어 보시는 쪽이 물론 더 자세한 내용을 접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