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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7시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한다.
- 아침식사 후에, 막고굴로 향하는 대절 빵차가 오기까지에는 시간 여유가 있어, 호텔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백마탑을 다녀오기로 한다.
- 여행기를 읽어보면, 신실한 불교신자가 아닌한, 굳이 시간을 할애하여 방문할 가치는 없어보인다고들 한다.
나는, 이 말을 확인해보자라는 심정으로 호텔을 나선다.
(*) 백마탑 :
- 장안(서안)에서 많은 불전들을 한역했던, 후진시대의 고승 구마라습의 애마인 백마가, 불경을 운반하다 병사하자,
말을 장례하고 그곳에 탑을 세운 것으로, 높이 12m, 9층으로 된 황백색 탑이다.
- 지도를 들고, 현지인들에게 몇번을 물어서, 한적한 시골길을 25분여 정도 걸어 백마탑에 도착했다.
- 입장권을 끊어 백마탑 앞에 당도하니, 중국인 청년 한 명이 사진을 찍고 있다.
서로 사진을 몇 장씩 찍어준 후에, 오던 길을 되돌아 호텔로 돌아온다.
(백마탑을 가던 중의 시골길 풍경)
(백마탑 입구)
(백마탑)
(고승 구마라습의 초상화)
- 오늘, 회원 모두가 단체로 방문할 곳은, 막고굴, 명사산과 월아천이다.
그후에는, 둔황을 출발해 유원역으로 가서, 투루판으로 가는 침대열차를 타게 된다.
- 대절한 빵차 3대가 호텔에 도착하자, 분승하여 막고굴로 출발한다.
(*) 막고굴 :
- 명사산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약 1.8km에 걸쳐 조성된 석굴군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불교 미술의 보고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음.
- 막고굴의 시초는, 전진시대 336년에 낙존스님이 이곳에 석굴을 만들면서 시작되어, 이후 14세기까지 1,000여년에
걸쳐 석굴이 조성되었다 하며, 1,900년에 한 도교승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
- 막고굴에서 무려 5만여점에 이르는 경전, 고문서, 자수, 동상 등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장경동'이라 불리는
17번 석굴에서, 신라시대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으며, 프랑스인 폴 펠리오에 의해 프랑스로 넘어갔음.
- 현재 492개의 석굴에는, 1,400여개의 불상과 45,000제곱미터에 이르는 벽화가 보존되어 있음.
- 나는 작년에 막고굴을 관람하였기 때문에, 막고굴 안으로는 입장하지 않고, 대장님과 함께 주변을 산책하다가, 근방에 있는
'둔황 연구소'를 방문한다.
(막고굴 가는 길 - 주위의 탑들은, 북송시대의 승려 사리탑이라고 한다)
(북대불전 앞에서 - 높이 34.5m의 제96호 굴인 북대불전은, 둔황 막고굴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내부에는 하나의 석굴로,
거대한 높이의 미륵불 입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북대불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이 멸망하고 난 후 생긴 국가인 오대십국 중, 북대 시절에
세워진 석굴이라고 한다)
(둔황 연구소 정문 입구)
(둔황 연구소에 전시된 조각상과 벽화들)
- 연구소 내에 전시된 벽화와 조각상들을 관람하다가, 벽에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사진을 보게 된다.
과거에 실크로드 보물을 약탈해간, 백인들(일명, 백귀자 - 백인 귀신들)과 일본인의 사진을 싣고, 그 밑에 설명을 해놓았다.
(말미에, '실크로드 보물의 약탈사'를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실크로드 보물의 약탈자들의 사진 - 영국인 오렐 스타인, 프랑스인 폴 펠리오, 독일인 르콕, 일본인 타지바나 등의 사진이 보인다.
우측 하단의 사진은, 1900년 당시 막고굴 관리자였던, 도교 승려인 왕원록이다.)
(막고굴의 벽화를 보수하고 있는 그림)
(막고굴의 불상을 보수하고 있는 사진)
(티벳 불교의 조각상 - 때마침, 둔황연구소 내에서 티벳 불교 특별전을 전시하고 있었다)
(둔황 연구소 1층 전경 - 오른 쪽 칸막이마다, 막고굴에 있는 벽화와 조각상을 재현해놓고 있다)
- 1층의 한 방에서는, 막고굴에 관련된 짤막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 막고굴 관람을 마친 후, 둔황시내로 들어와 사주시장 안에서 각자 점심식사를 한다.
- 점심식사 후에, 명사산과 월아천을 향해 출발한다.
(*) 명사산 :
- 둔황에서 남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동서로 40km, 남북으로 20km에 달하는 모래산이다.
- 미세한 입자의 황금빛 모래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산이 울고 있는 듯 하다 하여,
명사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 월아천 :
- 명사산 언저리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로, 3,000년이 넘게 한 번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물을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 명사산 입구에 못미쳐, 빵차가 정차한 지점에 있는 가게에서, 모래 위를 걸을 때 발의 화상을 방지하고자,
버선 형태의 덧신을 10위안에 빌려 신는다.
(명사산, 월아천 정문 입구)
- 명사산 안으로 입장하여, 사막 위를 걸어서 가는 사람과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별로 나뉘어진다.
나는, 생수 1명을 들고서 모래언덕 위를 걸어서 오른다.
(첫번째 모래언덕을 올라와서 - 월아천을 배경으로)
-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멋진 사막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가며, 몇 개의 모래언덕을 넘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대부분의 회원들은
정상 등반을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무런 발자국도 나있지 않은 모래바다를, 마치 헤엄을 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걸어 나아간다.
(명사산 사막 풍경들)
(첫번째 모래언덕 위에 모여있는 회원들이 보인다)
- 최영선님과 김한순님이, 저만치 뒤에서 열심히 걸어오고 계시다.
최영선님은,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평소에 체력관리를 해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여성분인 김한순님께서, 이렇게 힘든 사막 트레킹을 거뜬히 하시는 걸 보고 놀랐다.
뒤에 들으니, 며칠에 걸친 마츄피추의 잉카 트레킹도 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최영선님)
(김한순님)
- 정상까지 등반하기 위해서, 발이 푹푹 빠지는 몇개의 모래언덕을 오르다보니,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을 만큼, 모래 속으로 발이 깊이 빠져 들어가며 아래 방향으로 미끄러진다.
- 하는 수 없이 얼마남지 않은 정상 등반을 포기하고, 월아천이 있는 쪽으로 내려오다가, 모래썰매를 타는 곳에 도착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강렬한 햇빛을 온몸에 그대로 받으며, 모래썰매를 관리하고 있는 친구에게, 담배를 권하며 함께
사진을 찍어본다.
(모래썰매 타는 곳)
(모래썰매를 관리하는 친구와 함께)
- 나와 김한순님은 모래썰매를 타보기로 한다.
내가 먼저 내려가서, 김한순님이 내려오실 때 사진을 찍기로 한다.
최영선님은 모래썰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월아천 쪽으로 내려가신다.
(모래썰매를 타고 내려오시는 김한순님)
- 월아천에 있는 가게에 도착하니, 여러 회원분들이 모여 있다.
김한순님이 사 주시는 시원한 은행나무 쥬스를 마시고, 재떨이용으로 탁자 위에 놓아둔 큰 나무 파이프를 빨아본다.
(어디, 한 모금 피워볼까? 그런데 어째, 담배연기가 나지 않네, 그려..)
- 가게 옆에 있는 사막에서, 멀리뛰기 시합이 벌어졌다.
각자 돈을 걸고, 우승자 한 사람이 독식하기로 한다.
(명사산 사막에서의, '투어인케이씨배' 멀리뛰기 시합)
- 케이씨대장님이 가장 멀리 뛰었지 않나 싶었지만, 꿈나무를 키워야한다는 주위의 여론에 밀려(?), 조현우군에게로
상금이 돌아갔다.. ^^
(상금 수여식)
- 월아천 주위를 구경하다가, 전동차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후, 전동차를 타고서 입구로 돌아왔다.
(월아천 가에서)
(월아천 옆에 있는 정자)
(월아천을 걸어 나오며)
(월아천 안내 표지석)
(명사산 표지석에서)
- 오후 7시30분경에, 대절한 빵차로 유원역을 향해 출발한다.
얼마쯤 가다가, 땀과 모래에 흠뻑 젖은 몸을 씻기 위해, 동네 조그만 목욕탕에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한결 상쾌해진다.
(동네 목욕탕에서)
- 밤 10시경에 유원역에 도착했다.
유원역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투루판행 열차를 기다린다.
나는, 오늘의 침대 열차표 뽑기에서도 상층을 뽑았다..^^
(유원역사 앞에서)
(유원역 구내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 새벽 1시50분경에 기차가 유원역 구내에 들어온다.
침대 열차칸은 소등이 된 관계로 어두컴컴하다.
희미한 통로 미등에 의지하여 내 상층 침대를 찾아, 조심 조심 위로 올라가, 자리에 눕는다..
(*) 실크로드 보물의 약탈사 :
- 스웨덴의 지리학자 스벤 헤딘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1877년에 처음 사용한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의 제자)은,
19세기 말까지 세계지도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던, 신강지역과 티벳 지역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한 포부를 가지고,
신강지역을 탐사하게 된다.
탐사 도중에 그는, 이 지역에 엄청난 양의 보물들이 수백년 동안 묻혀있음을 알게 된다.
- 스벤 헤딘은 귀국 후, 이 내용을 책으로 발표하게 되고 (1899년경 ?),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 그동안 그리스와 이집트의 문화유적을 강탈해갔던 서구 열강세력들은, 이 실크로드의 보물에 눈을 돌리게 되며,
이때부터 '실크로드 보물 약탈의 국제적 경주'가 시작된다.
(이 당시 표현대로라면, '먼저 주운 놈이 임자다'라고 할 수 있다.)
- 서구 강대국들은, 국가적인 지원 아래 경쟁적으로 앞을 다투어, 실크로드지역에 명분상 탐사대라는 약탈자들을 파견하게 된다.
- 가장 먼저, 영국의 탐험가(고고학자)인 오렐 스타인이, 1907년에 둔황의 막고굴에 도착한다.
그리고, 1900년부터 막고굴의 관리자인, 도교 승려 왕원록을 온갖 협박, 감언이설 등으로 꾀어서, 단돈 130파운드를 지불하고,
둔황 석굴에 있는 고서적 보물들 7,000여권을 영국으로 약탈해 간다.
(이중에는, 868년에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인 '금강경'도 포함되어 있다.)
- 프랑스인 폴 펠리오는, 오렐 스타인보다 6개월 뒤에 둔황에 도착한다.
그 또한, 단돈 90파운드를 지불하고서, 7,000여점의 보물을 프랑스로 약탈해 간다.
(이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어 있다.)
- 독일의 그륀베델과 르콕, 바투스 등은, 투루판에 있는 베제클릭 천불동 벽화와 쿠처의 키질 벽화 등을,
칼과 톱 등으로 도려내어, 독일로 강탈해 간다.
- 이들 외에도,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백작과 타지바나, 미국인 랭던 워너, 그리고 러시아 탐사대 등, 당시의 세계 열강들은
실크로드 전역에 걸쳐서, 각종 보물들을 경쟁적으로 약탈해 가게 된다.
(*) 상기 내용은, '실크로드 견문록'에 실린 내용 중 일부를, 간략히 정리했습니다.
(저자 - 독일의 클라우스 리히터 외 2인, 역자 - 박종대, 출판사 - 도서출판 다른 우리, 2002. 1. 15일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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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세드신분들의 체력에 감탄하고 비록 꼴찌 했지만 멀리뛰기 대회는 명사산 트래킹의 한점이 되어 지워지지 않을듯 합니다
허무와 카나스간 트레킹을 할 때 고원의 초원에서 벌어졌던, 달리기 시합(발 맛사지 시켜주기)에서의
패배에 비한다면, 오늘 꼴찌는 약과지요.. ㅎㅎ
낙타를 타도 더운데 명사산 모래능선을 걸으시다니 약수터님 깡이 세다고 소문내 드립니다.
실크로드 유물이 우리나라 국박에도 소장되어 있지요.'오타니 콜렉션'이었는데 정말 내선일체였는제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고 서울에 보관하다가 해방되어 우리나라에 귀속되었어요.
네, '오타니 콜렉션'에 있는 실크로드 유물을, 중국이 돌려달라고 우리 정부와 협상중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복습하고 갑니다...
저도 빌려온사진, 내사진을 망라해서 정리한 사진을 답글로 올리겠습니다.
여행 말미에 약수터 형님께서 여행기를 정리하신다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이곳에 있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꼭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처음부터 다시 기억을 되살리며 차근차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도 틈나는 데로 읽고 있어요,,,,ㅎㅎㅎ 생생과 지식이 느껴지는 글,,,아주 좋아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