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 283- 중국 桂林 복파산(伏波山),

계림시의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이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높지 않은 산이 바로 복파산입니다.
계림에 위치한 다른 대부분의 산이 그러하듯 복파산 또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석회암
의 특성 때문에 뾰족하고 기묘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수묵화에서나 나올법한 이런
독특한 산의 모양새는 평지에 홀로 솟아있는 모습과 어우러져 굉장히 독특하고 신비한
느낌을 줍니다.

'노익장'이란 표현을 한번 쯤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노익장은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 때 장군인 마원이 그의 지인들에게 곧 잘 했던 "대장부는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 수록
굳세어야 하고 늙을 수록 건장해야 한다(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마원은 광무제가 내린 직위인 '복파장군'으로도 유명하여 '복파장군
마원'이라 주로 불립니다. 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복파장군 마원'이란 이름을 들었
을 때, 이 사람이 누군지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바로 마등-마초 부자의 조상이 복파장군
마원입니다. 이 복파장군 마원의 흔적이 계림시 한 가운데에 남아있습니다.

뉴욕 월스트리트 1번가(Wall St. 1st St)의 증권가 황소가 있는데 그 황소의 음낭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황소의 음낭을 만지려고 줄 서있는것을 보고 복파
마원장군의 말의 음낭을 만져 말의 건강상태를 알아보려하니 말이 앞발을 높이 쳐듭니다.ㅎㅎ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복파장군 마원이 남월(베트남의 옛 이름)의 군사들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에 양측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활쏘기를 제안하여 활을 쏘아서 그 화살이 닿는
곳까지 군사를 물리기로 했다 합니다. 이 동상이 있는 자리에서 마원 장군이 화살을 겨누고
쏘자 그 화살이 인근의 천산을 뚫고 날아가 지금의 하노이 부근에 있는 낭박까지 날아가서
결국 남월의 군사들이 그곳까지 후퇴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풍원의 한의열전"책에 마원이
남월에서 율무를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ㅎㅎ

바로 옆에 용수(榕樹)나무가 오래되어 수염과 같이 땅으로 축느러진것이 땅으로 닿아
뿌리를 내려 줄기나무로 변한 오래된 용수나무. 계림은 계수나무와 용수나무를 많이 볼수가
있습니다. 특히 계수나무의 꽃 3가지로 담근 술 삼화주(三花酒)가 이곳의 명주(名酒)입니다.

福在伏波(복재복파) 즉 복파에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재호중(人在壺中) 사람이 주전자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주전자안에 있으면 복파의 복을 받으라는 뜻인것 같습니다.
건륭통보(乾隆通寶)화폐위에서 복이 넘치라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복파산 정상에 오르면 산수가 어우러져 독특하기 그지없는 계림시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계림의 대부분 산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복파산을 이루는 대부분이
석회암인 관계로, 석회암 특성상 미끄러지기가 쉬워 난간을 붙잡고 올라갔습니다.

복파 마원이 이곳에 있을 당시 남월의 영역은 구룡반도 일대와 그 서쪽지역, 즉 계림이
위치한 광서 좡족 자치지구에서 남쪽 지역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을 한나라 시기때는 '교지'라
부르고 통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쯩짝, 쯩니라는 쯩씨 자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 지역 전체가 넘어가게 됩니다. 당시 수도이자 중심지였던 낙양과 황하 유역에서 이 남월
까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4년 동안 이 지역은 쯩씨 자매의 왕국이나 다름 없었고
심지어 여왕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이에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가 마원을 복파장군에 임명하고 남월 토벌을 명합니다. 마원은
그 명을 받들어 정벌을 시작하여, 결국 쯩씨 자매의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하노이 부근인
낭박까지 진출하였다고 합니다. 전설 속에서 화살이 날아간 거리는, 바로 마원의 원정군이
진출한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정이 전설처럼 사뭇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면 좋건만 현실은 이야기보다 잔인
하였습니다. 마원은 군사들로 하여금 반 세력들의 군소 촌락까지 처들어가 촌락을 초토화
시키고 부족민들을 한나라의 본토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철저하게 세력을 흩어버림으로써 완전히 복속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정으로 인해 남월은 그 문화적 뿌리를 완전히 상실하고 이후 1000여년을 중국 왕조들의
지배 아래 지내게 되는데, 이로 인해 베트남 또한 중국 문화권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복파장군 마원의 이 원정이 이토록 큰 파급효과를 낳은 것입니다.

복파산에서 본 계림시내의 전경입니다.

복파산 밑에 천불암(千佛岩)이 있습니다. 천개의 불상 돌이 있습니다.

복파산 아래에는 환주동이라는 동굴이 있다. 환주동에는 당송 시기에 벽에 새겨진 불상들과
많은 한시들이 동굴 벽에 새겨져 있으며 이강변까지 뚫려 있기에 이 동굴에서 이강을 감상
하는 것 또한 가능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환주동에는 마원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이
있으니 바로 시검석입니다


좌측에 바닥과 닿을듯 말듯 한 기둥이 시검석입니다.
복파장군 마원이 남월 정벌에 앞서서 자신의 검으로 돌을 베어서 자신의 검과 결의를 시험
해 보았다는 것이 바로 이 시검석입니다. 시검석에는 그 전설대로 마치 칼로 베인것 마냥
얇은 틈이 존재합니다.

복파산에 마치도 공작새 모양으로 만든 정원이 있습니다.

복파산 가까운 거리의 장원랑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동네 아주머니 몇분이서 게임을 하는데
특유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골패비슷하게 큰 종이에 글자와 숫자가 있는것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공산당 창당 70주년 기념 간판에 불망초심(不忘初心) "초심을 잊지말자"
뢰기사명(牢記使命)"사명을 명심하자" 써 있습니다.

소요루(逍遙樓)입니다. 소요라는것은 아무 구속을 받지않고 자유롭게 거느는것을 말합니다.
편하게 자유롭게 거늘다가 머무는 정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소요산이 있는데..ㅎㅎ

이곳이 장원랑입니다. 계림출신 장원급제한 인물들을 추모하여 만든 회랑입니다.

장원랑에 대한 설명입니다. 계림에서 8명의 장원을 배출한것을 기념으로 회랑에 8명의
비석과 설명이 있습니다.

계림은 중국남쪽에 위치하며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은
약 4천 5백만 정도인데 장족, 한족, 묘족, 모한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명·청때 광서성으로 불리다가 1958년에 자치구로 성립되었습니다.

과거제도 1300년간 계림에서 8명의 배출한 장원을 설명합니다. 광서지역 역사상
제1위 장원한 당나라때 조관문등...

장원한 왕세측 동상입니다.
이곳에는 석회암이 절반이상을 덮고 있어 기온이 비교적 높고, 비가 많이 옵니다. 연평균
기온은 20℃ 전후이고 1월 평균기온은 6~16℃, 7월 평균기온은 25~29℃, 연강수량은
1,250~1750mm에 달합니다.

무과쪽의 장원한 이공(李珙)
또한 광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이미 유명하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봉우리처럼 솟은 수풀과
기암, 초록의 물은 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중요한 요소 입니다. 대표적으로 주도(主都)인
난닝(南寧)과 계림, 베트남과의 국경에서 가까운 화산풍경구(花山風景區)는 관광명승지로
유명합니다

과거제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당시 고시장의 풍경을 조각한것입니다.

고시 시험장의 모습

패션의 거리입니다.
계림의 산수가 천하 제일이다라는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즉 계림의 산수는
하늘과 땅에서 제일(甲)이라는 뜻입니다.

먹거리도 함께 있는 거리입니다.
계림이라는 명칭은 이곳이 옛부터 계수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계수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계림은 중국 강산에서도 보석 중의 보석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독특한 카르스트 지형과
아름다운 이강이 조화를 이루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산청(山淸/맑은 산),수수(水秀/빼어난 물),동기(洞奇/기이한 동굴), 석미(石美/아름다운
돌)"가 모두 어우러져 중국은 물론 외국에까지 뛰어난 자연풍광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계림은 매년 음력 8월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기시작하면 계수나무 꽃(桂花)이 활짝 피면서
그 향기가 사방에 퍼져 여행의 황금시기를 이룬다고 합니다. 이곳의 역사는 매우 깊어 기원전
214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후 이곳에 "계림군(桂林郡)"을 세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날씨가 찌니까 과일가게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은 과일을 주스로 만들어 주는 곳입니다.
계림의 구시가지는 당(唐) 때 구축한 석회암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안(對岸)에는
시가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계림은 다민족이 함께 거주하는 도시로 장(壯)족, 묘(苗)족,
요(瑤)족, 동(侗)족 등 소수민족들이 성내에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푸른산과 맑은 물은 그들로 하여금 순박한 정이 느껴지는 풍속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아름다운 산수는 생동감 있으면서 순박한 민속풍정에 청아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속세의
자유로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계림성곽을 둘러싸고 먹거리 관광용품 파는곳입니다.
중국인들에게도 신혼여행지로 인기 있는 곳이어서 도시 규모에 비하여 관광 관련 시설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 여행의 절정은 계림이라고도 말하며, 계림을 관광
하는 사람들은 잊지 않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이강 주변을 감상합니다.

옛 도시를 설명합니다.
늦가을과 겨울에는 강의 물이 말라 배가 뜨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수심이
얕아지면 상류의 저수지 물을 방류해 배가 뜰 만큼의 수심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시내와 교외에도 볼 만한 명소가 많으며 시가지 자체도 아름답습니다. 시즌때는 방을 구하기
어렵거나 비용을 절약해야 하는 사람은 계림 남쪽의 양삭(陽朔)에서 머문다고 합니다.

구이린은 옛날부터 월나라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고, 진나라 시황제가 정복을 하여 계림군에 편입시켰습니다. 111년 시안현이 설치되고, 후난성에 가깝기 때문에 형주 임릉군에 복속
시켰습니다. 269년 시안군이 시안현으로 바뀌자, 처음으로 현재 구이린(계림)의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어느 가게에 한 여자가 검을 들고 있길래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무림(武林)의 여검객과 함께...무림을 걷고싶어서...ㅎㅎ

옛거리입니다.
명나라 홍무제 때는 정강로에 계림부를 설치하여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청나라를 거쳐
중화민국 초기 시절인 1913년 관청이 난닝으로 이전되었다가 1936년 전쟁으로 인해 다시
구이린(桂林)으로 돌아왔습니다. 1950년에 다시 난닝으로 이전했습니다.

맛집거리이기에 맛집선전이 벽에 있습니다.

1372美食公園(미식공원)이라고 써있습니다.

이곳의 관광지로는 많은 곳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