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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봉산 강선봉 명품소나무
검봉산 검봉에서(2012.7.20 . 금요일 13시 09분)
그제(2012.7.20. 금요일)는 石友 현송과 검봉산을 다녀왔습니다.
아침 9시쯤 강촌역에 내려 걸어서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을 구경하고 검봉산 정상을 받고 강선봉을 거쳐 강선사 로 내렸습니다.
놀며 쉬며 올라 내리니 오후 5시가 넘었습니다.
강촌역에서 건너다 보이는 검봉산 강선봉
경춘선 간이역인 江村驛에 내리면 바위산이 앞에 펼쳐지는데 바로 그 산이 劍峰山 강선봉 입니다.
검봉산의 유래는 칼 을 세워 놓은 것 같다 하여 칼봉 또는 검봉이라 하여 劍峰山이라 합니다.
검봉산은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 있으며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조망권이 좋고
암벽사이의 멋진 명품 老松들이 시선을 끌며 주위의 볼거리로 구곡폭포와 문배마을 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특히 강선봉 왼쪽 아래로 펼쳐진 북한강 경관은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니다.
50m높이에서 쏟아 붓는 九曲瀑布의 웅장함과 시원함을 보너스로 보고 즐길 수 있어 더욱 좋은 곳입니다.
어느 산이고 산행코스가 두서너 개는 다 있습니다.
산행시 시초부터 코스를 잘못 들면 힘이 배로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검봉산 산행은 대부분 사람들이 강선사 쪽에서 오르나 그 쪽은 암벽에다 계속 가파른 깔딱 고개로 밧줄을 잡고 오르는 곳이 많아
힘이 무척 듭니다.
볼거리도 즐기며 제일 무난한 코스로는 구곡폭포 쪽으로 오르며 폭포 구경을 하면서 문배마을도 보고 검봉산을 갈 수 있어 훨씬 힘이 덜
듭니다.
코스를 정리하면
강촌역 출발- 구곡폭포 구경-문배마을 구경 - 검봉산 정상- 강선봉-강선사-강촌역 도착 입니다.
아래 등산 안내도를 보시면 이해가 더 잘 될 것입니다.
강촌역에서 구곡폭포로 가는 길 옆 음식점 정원에 멋진 산경그림돌이 있어 현송님이 담고있습니다.
구곡포포로 가는 길 입니다.
강촌역에서 구곡폭포까지 다니는 버스가 있으나 우리는 걸어서 갔습니다. 강촌역에서 3.5km입니다.
구곡폭포로 드는 입구입니다.입장료는 1.600원 입니다.
구곡폭포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입니다. 지난 번 비로 물이 꽤 많습니다.
나무 표피에 이렇게 잘잔한 버섯이 돋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나는 검버섯 인가? 나이가 들면 사람이나 나무나 다 .....
현송 뭘 내다 보시려 하오. 그쪽 세상이 더 좋은 데.
구곡폭포가 웅장하며 시원하게 물을 쏟아냅니다.
한참을 이렇게 넉 놓고 보았습니다.
현송도 나같이...............
구비 구비 문배마을로 오르는 길 입니다.
문배마을로 오르는 현송님의 뒷 모습입니다.
현송 올라가면 다시 내려와야 될 걸 뭐 그리 힘들게 오르시오.
문배마을 입구가 보입니다.
문배마을 입구에는 이렇게 여러가지 안내표지가 있습니다. 문배마을 의 유래. 문배마을 안내도 등
문배마을로 드는 황토 길 입니다.
문배마을 전경 입니다. 문배마을에는 총 10가구가 살고 있으며 대부분 음식업을 함니다.
문배마을 드는 입구에서 첫번째 통나무집 입니다.
문배마을에서 검봉산으로 가는 능선길 입니다. 나무 뿌리가 얼기설기 흙을 감싸고 있습니다. 어느분 다리에 부정맥 같이 보입니다.
여기서 1.65km를 가야 검봉산 정상에 섭니다.
듬직한 큰 소나무가 멋스럽습니다.
흰 파라솔을 펴 놓았습니다.보기 예뿐것은 독버섯이라 합니다.
시스듬히 서있는 이놈도 멋스럽습니다.
정상은 높지않은 산도 언제나 그냥 호락 호락 내 주지 않습니다. 정상 바로아래 입니다. 숨이 찹니다. 저 아래 현송님이 보이네요.
점봉상 정상 바로 아래 헬기장 입니다. 조망되는 산들이 소개 돼 있습니다. 좌측으로 부터 명지산. 국망봉. 화악산. 삿갓봉. 용화봉. 삼악산이 보입니다. 그림을 보며 조망하니 볼만 합니다.
위 사진은 헬기장에서 빙 둘러 담았습니다. 무슨 산 인지는 잘 봐야 ..............
장마철이면 주로 참나무 고목에 나는 식용 버섯으로 흐르레기 버섯입니다.
오후 1시가 못돼 드디어 검봉산 정상에 섰습니다. 함께 찍어 줄 사람이 없어 이렇게 따로따로 번갈아 인증 샷을 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을 내려다보며 정상 주를 마셨습니다. 현송님이 싸온 도시락도 맛나게 먹고요.
어기서 부터는 하산 길에 접어듭니다.
강선봉 가는 중간 중간에는 멋진 명품 노송이 많이 있어 소나무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노송 사이사이로 북한강 줄기가 힐끈 힐끈 내려다보입니다.
잠시 소나무 구경을 해 보세요. 사실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멋있습니다. 제 사진 실력이 아쉽습니다.
너무 멋진 노송 이기에 잠시 쉬어 갔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바라다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느 새 검봉산 봉우리(정상)가 저렇게 멀리 보입니다. 강선봉에서 바라본 검봉산 봉우리.
현송님 카메라에 불이 났습니다. 여기도 저기도 그래도 다 담지는 못했을 겁니다.
검봉산 마지막 봉우리 해발485m의 강선봉 입니다. 여기서도 어쩔 수 없이 따로 따로 인증 샷을 했습니다.
강선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입니다.
강선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입니다.
강선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입니다.
암벽에 이렇게 소나무가 많습니다.
아마 검봉산 소나무중 제일 멋있는 소나무 같습니다. 그래서 요리 조리 여러 번 담았습니다.
강선봉에서 강선사로 내리며 바라 본 북한강 줄기입니다. 멋지죠.
강 옆으로 두 길 이 만나는 끝쯤에 등선폭포가 있습니다. 요즘 비가 와서 삼악산 등선폭포가 볼만할 겁니다.
하산 후 등선폭포를 구경하고 가려 했으나 하산을 너무 늦게 하는 바람에 시간이 촉박해 그냥 왔습니다.
너무 멋이 있어 명품 소나무와 현송님 인증샷을 담았습니다.
이런 바위도 있습니다.
멋집니다.
강촌역이 바로 내려다 보입니다.
멋집니다.
강촌역을 뒤로하고 포즈를 취했습니다.
멋집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강촌역과 강촌리 마을이 더 가까이 보입니다.
저 건너 삼악산이 잘 보입니다.
삼악산을 감고 도는 북한강이 멋스럽습니다.
강선사
16시 48분 강선사 도착 하산 완료.
강선사 근처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머리도 감고 세수를 했습니다.
강선사 아랫마을에서 닭갈비 안주에 막걸리 3병을 신나게 비우고 6시가 넘어서야 강촌 발 상봉 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풍광을 즐기다보니 어느새 상봉역에 닫았습니다.
이번 산행을 주선하고 푸짐한 안주에 하산 주를 내 주신 현송님께 감사드립니다.
잊을 수 없는 사람 / 법정 스님
수연(水然) 스님 ! 그는 정다운 도반이요, 선지식이었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입으로 말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그런 사람이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있는 이름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그는 사소한 일로써 나를 감동케 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를 1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 얼굴(象) 이다.
준비래야 삼동(三冬) 안거 중에 먹을 식량과 땔나무, 그리고 약간의 김장이었다 같이 있던 은사 효봉선사가 그 해 겨울 네팔에서 열리는 세계 불교도 대회에 참석차 떠나셨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력 시월 초순 하동(河東) 악양(岳陽)이라는 농가에 가서 탁발을 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암자에 저녁 연기가 피오 오르고 있었다. 나그네 스님은 누덕 누덕 기운 옷에 해맑은 얼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합장을 했다 그때 그와 나는 결연(結緣)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맺어 질수 있는 모양이다 피차가 출가한 사문(沙門)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자유로울 것 가지만, 정진하는 데는 장애가 많다.더구나 출가가 연천(年淺)한 그 때의 나로서는 혼자 지내 다가는 잘못 게을러 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월 보름 동안거(冬安居)에 접어드는 결제일(結制日)에 우리는 몇 가지 일을 두고 합의를 해야만 했었다. 그는 모든 일을 내 뜻에 따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진하는데는 주객이 있을 수 없다. 단둘이 지내는 생활일지라도 둘의 뜻이 하나로 묶어야만 원만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나보다 한 살 모자랐지만, 출가는 그가 한 해 더 빨랐다. 그는 학교 교육은 많이 받은 것 같지 않았으나 천성이 차분한 인품이었다. 고향이 어디이며 어째서 출가 했는지 서로가 묻지 않는 것이 승가(僧家)의 예절임을 아는 우리들은 지나온 자취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언행이나 억양으로 미루어 고향과 출신지를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나처럼 호남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소화 기능이 안 좋은 것 같았다.
국을 끓이고 찬을 만드는 그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시원치 않은 감일지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감로미(甘露味)가 되었다. 나는 법당과 정랑의 청소를 하고 그는 큰방과 부엌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한 끼만 먹고 참선만을 하기로 했었다. 그 때 우리는 초발심한 풋내기 사문들이라 계율에 대해서는 시퍼랬고 바깥 일에 팔림이 없이정진만을 열심히 하려고 했다. 순일 하게 안거를 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듬해 정월 보름은 안거가 끝나는 해제일(解制日). 해제가 되면 함께 행각을 떠나 여기저기 절 구경을 다니자고 우리는 그 해제일을 앞두고 마냥 부풀어 있었다 , 그런데 해제 전날부터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찬물로 목욕한 여독인가 했더니, 열이 오르고 구미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자꾸만 오한이 드는 것이었다. 해제는 되었어도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산에서 앓으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사문은 성할 때도 늘 혼자지만 앓게 되면 그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감촉된다.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의료기관도 없다 그 저 앓을 만큼 앓다가 낫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철저하게 무소유였다 밤이면 헛소리를 친다는 내 머리 맡에서 그는 줄곧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끓여 오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 주느라고 자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쑤어 둔 죽을 저녁까지 먹었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밤 열 시 가까이 되어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 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의 손에는 약사발이 들려 있었다.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약을 마시라는 것이다.
그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암자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래야 40 여 리 밖에 있는 구례 읍이다. 그 무렵의 교통수단 이라고는 구례 장날에만 장꾼을 싣고 다니는 트럭이 있었을 뿐 . 그러니까 그날은 장날도 아니었다.
그는 구례까지 걸어가 탁발을 하였으리라. 그 돈으로 약을 지어온 것이다 머나먼 밤길을 걸어와 약을 달였던 것이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나는 평생 온 심신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반의 정(情)이 어떤 것인지도 비로소 체험 할수 있었던 것이다 . 그토록 간절한 정성에 낫지 않을 병이 어디 있을까. 다리가 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 다음날 로 나는 기동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거처하던 암자에서 5 리 남짓 깊숙이 올라가면 폭포 곁에 토굴을 짓고 참선하는 노장(老長) 스님 한 분이 계셨다. 노장님이 무슨 볼일로 동구 밖에 다녀올라치면 으레 우리들 처소에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노장스님이 메고 온 걸망은 노장님보다 먼저 토굴에 가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져다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듯 무슨 일이고 그가 할 만한 일이면 말없이선뜻 해버리는 것이었다. 한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한 채 각기 운수(雲水)의 길을 걸었었다. 서신 왕래마저 없으니 어디서 지내는지 서로가 알 길이 없었다. 운수들 사이는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통했다.
세상에서 보면 어떻게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서로가 공부하는 데 방해를 끼치지 않도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고(苦)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 苦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는 것이다. 물건에 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대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긴 것이다. 출가는 그러한 집착의 집에서 떠남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사문들은 어느 모로 보면 비정 하리만큼 금속성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냉기는 어디까지나 긍정의 열기로 향하는 부정의 기류다. 긍정의 지평(地平)에 선보살의 자비는 봄볕처럼 따사로운 것이다. 오대산 (五臺山) 상원사(上院寺)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여름 살림이 끝나면 그를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더니, 그가 먼저 나를 찾아 왔었다. 지리산에서 헤어진 뒤 다시 만나게 된 우리는 서로 반기었다. 그는 예(例)의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내 손을 꼬옥 쥐었다 함께 있을 때보다 안색이 못했다. 앓았느냐고 물으니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약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가 퇴설당에 온 후로 섬돌 위에는 전에 없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여남은 켤레 되는 고무신이 한결같이 하얗게 닦이어 가지런히 놓여 있곤 했었다 가사 장삼도 말끔히 빨아 풀먹여 다려놓는 것이었다.
물론 이제는 우리도 삼시 세 끼를 스님들과 함께 먹고 지냈었다 한 날 나는 사무실에 말하고 그를 데리고 억지로 대구로 나갔었다. 아무래도 그의 소화기가 심상치 않았다. 진찰을 받고 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였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주머니 칼을 꺼내더니 창틀에서 빠지려는 나사 두 개를 죄어놓았다. 무심히 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감동했다. 그는 이렇듯 사소한 일로 나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는 내 것이네 남의 것이네 하는 분별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도 자기 소유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실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 해 겨울 우리는 해인사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한 스님들은 그를 자유롭게 지내도록 딴 방을 쓰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과 똑같이 큰방에서 정진하고 울력(작업)에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반 살림(안거 기간의 절반)이 지날 무렵 해서 그는 더 버틸 수가 없도록 약해졌다. 치료를 위해서는 산중보다 시처가 편리하다. 진주(晋州)에 있는 포교당으로 그를 데리고 갔었다 거기에 묵으면서 치료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나더러 살림중(安居中)이니 어서 돌아가라고 했다. 그의 병세가 많이 회복된 것을 보고 친분이 있는 포교당 주지 스님과 신도 한 분에게 간호를 부탁했다. 그가 하도 나를 걱정하는 바람에 나는 일주일 만에 귀사(歸寺)하고 말았다. 두고 온 그가 마음에 걸렸었다. 전해오는 소식에는 많은 차도가 있다고 했지만. 그 겨울 가야산 에 눈이 많이 내렸었다. 한 주일 남짓 교통이 두절될 만큼 내려 쌓였었다. 밤이면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눈에 꺾인 것이다 그 고집스럽고 정정한 소나무들이 한 송이 두 송이 쌓이는 눈의 무게에 못 이겨 꺾이고 마는 것이다. 꺾여진 나무를 져 들이다가 나는 비로소 손목을 삐고 말았다. 한동안 침을 맞는 둥 애를 먹었었다. 한 날 나는 조그마한 소포를 하나 받았었다. 펼쳐보니 파스가 들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사 보낸 것이다. 말이 없는 그는 사연도 띄우지 않은 채였다
나는 슬픈 그의 최후를 되새기고 싶지 않다. 그가 떠난 뒤 분명히 그는 나의 한 분신(分身) 이었음을 알 것 같았다. 함께 있던 날짜는 일년도 못 되지만 그는 많은 가르침을 남겨주고 갔다. 그 어떤 선사보다도, 다문(多聞)의 경사(經師)보다도 내게는 진정한 도반이요, 밝은 선지식이었다 구도의 길에서 '안다' 는 것은 '행(行)'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나 아님을 그는 깨우쳐 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인 것이다. 행동으로 보였다. 그가 성내는 일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한 말로 해서 자비의 화신 (化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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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연 스님이 참 대단한 분이네요. 언제 검봉산 한 번 같이 오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