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은 2003년 역작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이후 약 10년 간 ‘몸, 사랑, 돈’이라는 주제로 여러 고전을 주목하고 이를 해석한 책을 썼다. 올해 그가 천착한 분야는 ‘로드 클래식Road Classic’이다.
‘로드 클래식’이란 <열하일기> <돈키호테> <서유기> <허클베리핀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희랍인 조르바> <일리아드 오디세이> 등 위대한 여행기의 동서양 고전들이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길 자체가 주인공이자 주제인 책들 속에서 그가 찾아낼 ‘보석의 광휘’가 궁금하다. 그 여행은 자유를 지향하며, 또한 자유의 의미를 구체적인 삶과의 연관 속에서 깨달아가는 여정이다. 독자의 열렬한 편승을 기대한다. <편집자>
모든 기억은 원천적으로 날조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이요 판타지다. 사건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나의 시선은 한곳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건들이 흘러가버렸음을 깨닫고 소위 ‘진실’을 뒤쫓지만 늘 뒷북이요 변죽이다. 아, 그렇다고 절망할 것까진 없다.
이런 식의 날조와 뒷북이야말로 삶의 대가(代價)이자 인간의 숙명이므로. 어쩌면 인간이란 사건과 기억, 주술과 진실 사이의 ‘밀당’을 즐기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밀당 속에서 문득 예기치 않은 ‘길’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도 그렇게 출현한 ‘길’들 중 하나다.
나의 기억으론 2008년 가을이었다. 우리에게 아주 낯선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아 우리가 정녕 21세기에 살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된 것은. 그즈음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를 추동했던 동력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동산, 주식, 벤처 등으로 대박을 꿈꾸던 시절이 끝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누려온 풍요가 대부분 채무경제였다는 것. 말하자면 우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빚더미 위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바로 이런 것인가?
하지만 그해 가을 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최진실의 죽음이 그것이다. 금융위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고?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다지 열성적인 팬도 아니었지만 한 3일 정도는 ‘멘붕’을 겪어야 했으니까. 사건의 임팩트란 스케일이 아니라 마주침의 조건이 결정하는 법. 동시대를 살아도 전혀 다른 역사를 체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진실, 그것은 한 배우의 이름이 아니라 1990년대 성공신화의 상징이자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다. 10년 이상을 우리는 그녀와 함께 웃고 울었다. 최고의 톱스타이자 전 세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국민배우. 요정 같은 신비로움과 똑순이의 친근함을 동시에 지닌 ‘천의 얼굴’의 소유자. 앞으로 어떤 배우도 최진실 같은 위상을 확보하지는 못하리라.
성공(행복) 신화의 몰락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체 왜? 표면적인 이유는 ‘악플’과 우울증이라지만 그 어떤 것도 납득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엄마와 동생이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것을 누렸는데 그녀는 왜 우울했을까? 고약한 안티팬들이 있었기로 그녀가 받은 사랑에 비하면 ‘쨉’도 안될텐데…. 하긴 이런 식의 추론 자체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삶이란 그런 식의 양적 원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이후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은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다(그녀의 남동생이었던 배우 최진영과 전남편이자 야구선수였던 조성민도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쳤다). 그러면서 대중들은 점차 익숙해져갔다. 인기와 부를 누렸던 존재들의 허망한 소멸에 대하여. 더 놀라운 건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저 ‘또 한 점의 꽃잎이 스러졌구나’ 하고 생각할 뿐.
나는 생각한다. 단언컨대, 최진실의 죽음은 성공(행복)신화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문명 전체에 대해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충만감 사이엔 지독한 장벽이 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너무 쉽게 전자를 통해 후자로 약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간주해왔다. 성공을 곧바로 행복으로 등치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성공의 정점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우울증 아니면 자살충동이라는 참으로 지독한 역설이었다.
그때부터인가? 한국 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지역공부방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인문학이 전 사회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뜬금없는 현상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스펙 문화가 확산되면서 인문학은 멸시천대를 받아왔다. 심지어 인문학의 산실인 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을 추방하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왜?
솔직히 아무도 모른다.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외친 스티브 잡스 때문이라는 ‘썰’도 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썰도 있고, 그저 힐링의 대체물이라는 썰도 있고. 물론 그 무엇도 답은 아니다. 분명한 건 사람들이 이전과는 아주 다른 시선,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 영화 <설국열차>식으로 말하면, 문은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셈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프레임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은 신체와 근육을 해방시킨 만큼 영혼과 삶을 잠식하고 있다.
소외와 단절의 시대, 어떻게 극복할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서양(근대)의 도래와 함께 조선인의 일상에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일본에 의해 ‘번역된 근대’이긴 했지만 느닷없이 서양식 주택에 살면서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식 사고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천지가 뒤집힌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 뒤 또다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100년 전의 격변이 철도와 공장 같은 거대한 기계문명과 함께 도래했다면, 지금 이 혁신의 주역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이다. 전자가 터프하고 엄숙하다면, 후자는 귀엽고 섹시하기까지 하다.
전자가 손과 도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면, 후자는 영혼과 사이버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어디까지가 내 마음(혹은 욕망)이고 어디서부터 사이버 공간의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인식론적 경계가 모호해진 것. 그와 동시에 정보와 이미지가 생산력의 원천이 되었다. 덕분에 인간은 육체적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터치’만으로 모든 정보를 모으고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터치’는 인류역사상 가장 비물질(육체)적 노동이다. 노동이라고 명명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세 살짜리 꼬마도, 임종 직전의 노인도 가능한 수준이다. 육체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비로소 실현된 셈이다. 그럼 이제 인류는 구원된 셈인가? 노동에 필요한 시간과 근육량이 대폭 줄었으니 이제 삶의 여유를 맘껏 누리면서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나아가 인생과 자연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해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더더욱 바빠졌고 일상은 한없이 분주해졌다. 거리의 모든 이가 스마트폰의 화면에 코를 박고 지나간다. 기차와 항공기, 지하철과 카페, 그 어디서도 사람들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을 만나서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심지어 연인끼리 부둥켜 안고 있으면서 각자 카톡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명절날 전을 부치면서도, TV화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고스톱을 치면서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보고 또 보고….
정보의 홍수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이다. 이 정도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도구인지를 식별하기도 난감하다. 즉, 내가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마트폰이 나를 이용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가는 것인지. 결국 여기서도 문명의 역설은 예외가 없다. 인간은 삶을 위해 문명을 발전시키지만 문명은 늘 삶을 압도해버린다는 그 불변의 법칙! 요컨대, 스마트폰은 신체와 근육을 해방시킨 만큼 영혼과 삶을 잠식해버렸다. 이것은 과연 천국일까? 지옥일까?
좌우지간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는 신체적 변형을 급속하게 체험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빛의 폭주로 인해 시각은 도무지 안식처가 없다. 거리곳곳에선 휘황찬란한 전광판이 번쩍거리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스마트폰이 쏘아대는 대형 화면으로 넘쳐난다. 시력의 손상도 손상이지만 더 무서운건 스펙타클이 아닌 것, 곧 일상의 평범한 장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화려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무관심 혹은 맹목.
시각 다음으로 위험한 것이 바로 청각이다. 거의 모든 이들이 이어폰을 끼고 살아간다. 이어폰은 이제 신체의 연장이 되었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소리는 대체로 주파수가 높다. 거기에 접속하려면 청각의 손실을 감내해야만 한다. 청각이 약해지면 경청의 능력도 사라진다. 경청하지 않는데 어떻게 소통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울러 동의보감에 따르면 청력의 과도한 사용은 신장의 ‘정(精)’을 고갈시킨다.
▎허준의 <동의보감>. ‘몸의 우주학’에 집중한 <동의보감>은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을 넘어 소통과 융합의 에콜로지를 설파한다.
‘정’은 정력 혹은 생식력의 원천이다. 즉, 청력이 떨어진다는 건 내공의 결핍으로 이어질 것이다. 요컨대, 스마트폰은 세상 모두를 연결했지만 사람들은 더한층 깊은 소외와 단절을 경험하게 된 것. 결국 이 우주에 공짜점심은 없다. 천국의 문이 열리는 그만큼 지옥의 묵시록도 동시에 울려 퍼진다. 자, 이 천국과 지옥 ‘사이’를 제대로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의 몸은 생명과 우주의 교차점
물론 오리무중이다. 소위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 조차 이 낯선 매트릭스 앞에서 예측불가능성만을 강조하고 있고, 심지어 첨단과학의 대세도 ‘불확정성의 원리’다. 그렇다면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여기서 아주 오래된 진리 하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대는 복되도다!’는 루카치의 계시가 그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이전 인간은 땅 위의 지도를 찾기 위해 별의 운행을 관찰했다. 그 지도를 바탕으로 삶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것을 ‘대칭성’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인간과 자연의 이 대칭적 연결고리는 깨지고 말았다. 인간은 자연을 오직 극복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간주했기 때문이다. 문명의 비약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숱한 질병과 번뇌를 겪어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근대적 이분법이 해체되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지혜는 다름아닌 자연과의 소통이다.
인간이란 결국 자연에서 왔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 아니던가. 물론 우리는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혜안과 땅의 지도를 읽어내는 투시력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대신 그 별이 투사되는 삶의 현장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의 몸이 바로 그것이다. 몸이 곧 별이고 대지다. 별과 대지와 몸, 그 삼중주를 다루는 학문이 동양의 역학이다.
의역학의 핵심코드는 음양오행이고, 그 운동의 원리는 상생과 상극이다. 즉, 음양오행론은 해와 달, 그리고 목화토금수 다섯 개 별의 운행, 그 생극의 이치를 탐구한다. 그것은 저 멀리 우주를 떠도는 천체의 신비로서가 아니라 내 몸 안에서 고스란히 작용한다.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극(六極)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고, 하늘에 팔풍(八風)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팔절(八節)이 있다. 하늘에 구성(九星)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구규(九竅)가 있고, 하늘에 십이시(十二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십이경맥이 있다.
하늘에 이십사기(二十四氣)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있고, 하늘에 369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 희로(喜怒)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액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 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형(形)을 빚어 놓은 것이다.”(손진인, <동의보감> 내경편)
요컨대, 생리와 심리, 그리고 물리는 서로 상응한다. 이걸 지도 삼아 삶의 윤리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양생술이자 ‘도(道)’다. 이런 오래된 지혜가 우리 시대 인문학과 만나면 새로운 에콜로지가 된다.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소통과 융합의 기예로서의 에콜로지!
하여 21세기의 화두는 단언컨대, 몸이다. 몸은 수많은 이분법적 대쌍의 교차지대다. 거시와 미시, 정신과 물질, 개인과 사회, 보편과 개별, 남성과 여성 등. 한마디로 생명과 우주의 모든 양상이 ‘크로스’되는 실존의 현장이다. 고로, 몸을 통해 세계의 흐름을 알게 되고, 우주의 이치를 알면 내 존재의 심연을 탐사할 수 있다. 몸과 우주, 그 대칭성의 눈부신 향연!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시리아·이란·아프리카 북부에 흩어져 생활을 하고 노마드족 베두인의 유목 캠프. 돌아가야 할 고향이나 종착지가 없는 유목민은 시공간의 성격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있다.
통즉불통―통하면 아프지 않다
요즘 TV의 대세는 예능이다. 연말에 예능대상이 따로 있을 정도로 온갖 유형의 예능들이 ‘판치고’ 있다. 예능의 주요 컨셉트는 잡담과 수다, 그리고 일상의 희로애락이다. 이 화려한 스펙타클의 시대와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그만큼 일상을 나눌 이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다 떨 대상이 없으니 남들이 수다 떠는 걸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산다는 건 결국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희로애락을 체험하는 것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또 다른 컨셉트는 야생체험이다. 정글탐험을 비롯하여 강도 높은 스포츠, 심지어 군입대까지 ‘생고생’을 자처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광고에선 스마트폰이 다 해결해줄 테니 그냥 즐기기만 하라고 유혹하는 시대에 왜 이렇게 ‘날것의 고행’을 보고 즐기는 것일까? 아주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그게 곧 몸의 원리다. 몸의 존재 이유는 운동성에 있다. 간접적으로 나마 그걸 느끼고 싶은 것일 게다.
기계 문명이 발달할수록 몸은 편안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의 소외는 심화된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지만 몸의 기운은 오히려 적체되었고, 카톡으로 열나게 떠들었지만 목소리는 안에서 맴돌고 있다. 자가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직접 목격한 건 내비게이션과 신호등뿐이다. 말하자면, 정신 없이 분주했건만 몸의 정기는 하나도 순환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잠이 잘 들 리 없다. 결국 ‘주·색·잡기’로 불을 질러야 간신히 누울 수 있다. 낮의 활동에선 웅덩이처럼 고이고, 밤의 유흥에선 불나방처럼 타오른다. 정체와 과열, 불통의 대표적 양상이다. 이런 상태로 자존감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존감이란 발산과 수렴의 매끄러운 리듬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몸은 움직여야 한다. 동의보감이 제시하는 양생의 원리는 간단하다. 통즉불통(通則不痛/痛則不通, 통하면 아프지 않다, 혹은 아프면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통한다’는 건 단순히 생리적 소통을 뜻하지 않는다. 안과 바깥이, 나와 타자가, 생각과 말이, 말과 행동이 서로 ‘통해야’ 한다.
앞서 밝혔듯이 몸과 우주는 대칭적 관계다. 그 대칭성의 기저를 이루는 키워드가 음양오행이다. 음양오행이 오장육부로, 오장육부가 다시 ‘칠정’(七情, 희노우사비경공)으로 이어지면서 물리와 생리, 그리고 심리의 ‘삼중주’가 일어난다. 이 삼중주의 리듬이 깨지는 것이 질병과 번뇌이고, 그 균열을 회복하여 삶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 치유이자 해방이다. 하여, 건강과 윤리, 양생과 지혜는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벡터는 정확히 그 반대다. 20세기 내내 숱한 개혁과 혁명을 겪었지만 정치경제학의 대전제는 소유와 증식이다. 다다익선!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담음이요, 비만인 것. 그 결과가 우리가 앓는 수많은 질병이다. 예컨대, 암은 소유욕의 극치를 보여주는 질병이다.
암세포는 외부에서 침투한 세균이 아니라 느닷없이 불멸을 선언하면서 이웃세포들을 먹어 치우는 돌연변이다. 항암제가 투여되면 몰래 정상세포에 숨어서 다른 장기로 이동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먹튀’인 것이다. 자본의 흐름과 참으로 닮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젠 암도 평범한 질환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암 완치율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암보다 더 무서운 병들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우울증과 강박증, 분열증과 자살충동 등. 하나같이 단절과 소외를 특징으로 한다.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바로 치매다.
노인성 치매야 장수병이라 치더라도 진정 두려운 건 모든 세대가 치매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의학적으로는 원인도 치료법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이 병에 걸리면 언어와 기억을 잃고 완벽하게 자기 안에 갇혀버린다는 것이다. 소유와 증식의 배치가 낳은 문명적 대가인 셈이다.
하여, 이젠 정말 생명 차원의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론 자신 안에 잠재한 야생성을 일깨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노동과 화폐가 부여한 배치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는 일이다. 즉, 야생적 신체성을 동력삼아 삶 전체가 우주적 순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핵가족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성공신화의 핵심기제는 핵가족(혹은 스위트홈)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도,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해야 하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이룬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핵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주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엔 더 가열차게 달려야 한다. 요컨대, 가족이 소유와 증식의 온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족 사이가 가장 위태로운 관계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유동하는 신체, 노마드의 삶과 정신
그런 점에서 ‘스위트홈’은 더 이상 삶의 윤리적 척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젠 혈연과 가족을 넘어선 생명과 우정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소유를 향한 진격을 멈추고 생명의 대순환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그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자꾸만 야생을 찾아 떠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 바야흐로 집의 시대가 ‘거(去)하고’ 길의 시대가 ‘래(來)하고’ 있다. 정주에서 유목으로! 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정주민에겐 모든 것이 고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소유와 증식, 서열 및 위계가 공고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선 반대다. 모든 것이 유동한다.
국경·세대·성(性) 정체성·노동과 화폐 등등 그 어떤 것도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가치의 고정성은 물론 척도의 절대성도 사라진다. 상이한 방향의 힘이 각축하고 서로 다른 윤리가 좌충우돌하는 것,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고 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유목이다.
유목은 유랑이나 편력이 아니다. 관광이나 레저는 더더욱 아니다. 어디에 있건 그 시공간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유목민에겐 돌아갈 고향도, 도달해야 할 종착지도 없다. 오직 자신이 서 있는 그 시공간이 삶의 전부다. 하여 온전히 누리고 즐기되 시절이 바뀌면 훌훌 털고 떠나간다. 비움과 채움, 머묾과 떠남의 이중주! 따라서 유목을 위해 반드시 초원이나 야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시대의 유목은 도심 한가운데가 더 적당하다.
▎현대 중국 문학의 거성 루쉰(魯迅 1881∼1936). 그는 “누군가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는 의미심장한 아포리즘을 남겼다.
디지털세대엔 국경이 없다
앞서 밝혔듯이 21세기는 인간과 자연의 대칭성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대칭적 네트워크는 문명의 한가운데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문명적 대안이 될 수 있으므로. 문명 안에서 ‘문명의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길, 그것이 곧 유목이다.
따지고 보면 디지털 문명은 그 자체로 유동하는 신체다. 인터넷 안에선 모든 경계가 흔들리지 않는가. 또 SNS에선 중심도 방향도 없다. 접속과 변용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디지털이야말로 유목적 신체 아닌가. 문명의 첨단인 디지털과 야생적 신체인 노마드(유목민)가 운명적으로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예전에는 길을 떠난다는 건 문명의 변방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했다. 문명과 자연의 이분법적 배치 하에서 움직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디지털은 가볍고 경쾌하다. 결코 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스마트폰은 밀실에서 폐쇄적으로 쓰는 도구가 아니다. 밀실에서 쓰면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길 위에선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무엇보다 낯선 시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수많은 경로를 알려준다. 또 길 위에서 마주친 모든 경험을 곧바로 작품으로 바꾸어준다. 메모하고 찍고 편집하고…. 이전에는 장인의 손을 거쳐야 가능했던 모든 일이 단숨에 이뤄진다. 전혀 다른 삶의 형식이 창조된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이것을 직접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2013년(계사년)은 내게 역마살의 해였다. 10년 전 미국에 다녀온 이후 나는 해외여행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미국·일본·중국을 수시로 드나들 기회가 생겼다. 그때마다 나는 공동체(감이당&남산강학원) 후배들과 함께 떠났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소위 ‘디지털 세대’들의 신체가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게으르지도 않았고 무기력하지도 않았다. 낯선 공간에서도 전혀 겁먹지 않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장애에 부딪히면 스마트폰을 적극 활용했다. 물론 스마트폰이 늘 ‘스마트한’ 건 아니다.
틀리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좌충우돌 속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여행의 경로는 수시로 변경됐다. 동시에 그들의 신체 또한 끊임없이 유동했다. 집에선 잠시도 걸으려 하지 않던 그들이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먹고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전혀 새로운 일상과 관계들이 펼쳐진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디지털 세대에겐 국경이 없다는 것. 그들에게 집을 떠난다는 건 국경을 넘는, 곧 ‘월경(越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그때부터 신체는 전혀 다른 리듬과 강밀도를 지니게 된다는 것. 이를테면, 디지털과 신체, 문명과 야생, 주체와 타자 등 아주 낯선 항목들이 융합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1 2003년 발간돼 대중의 ‘고전 읽기’ 붐에 일조한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 중국의 고전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 <서유기>는 구법과 모험, 영성과 세속이 질펀하게 융합된 판타지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문호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구절이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것이 곧 길’이라는 의미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늘 길 위에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저기로, 청년에서 중년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천지만물이 생성소멸을 멈추지 않는 한, 사계절이 끊임없이 돌아오는 한 인간은 늘 길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은 이미 정해진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길을 열어갈 것인가에 있을 뿐이다. 즉, 길 위에서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로드 클래식’에 담긴 인문학 탐구
길을 떠나려면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선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별은 바로 ‘고전’이다.
<열하일기> <돈키호테> <서유기> <허클베리핀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희랍인 조르바>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인생과 우주의 지혜를 담은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면, 고전 자체가 ‘길’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짜 여행을 다룬 책들이 있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길 자체가 주인공이자 주제인 그런 책들. 이름하여 ‘로드 클래식’(여행기 고전)! 위의 작품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작품들은 각 문명권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그야말로 ‘별 중의 별’이다.
<열하일기>는 한문으로 쓰여진 문장 가운데 최고의 경지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내 인생을 바꿔준 책이다. 2003년 열하일기를 리라이팅하면서 나는 고전평론가로 거듭났다. <임꺽정>과 <동의보감> 같은 원대한 고전을 만난 것도, 이 ‘로드 클래식’의 세계와 접속하게 된 것도 다 열하일기 덕분이다. <돈키호테>는 셰익스피어를 능가하는 유럽문학의 진수이자 푸코와 보르헤스 같은 20세기 사상가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서유기>는 구법과 모험, 영성과 세속이 질펀하게 융합된 판타지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수없이 변주될 정도로 지금까지도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한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다소 낯설 수 있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저자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대학 1학년 시절,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경이와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로드 클래식’을 기획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그때의 감격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걸 보고 내 자신이 깜짝 놀랐다. <걸리버 여행기> <희랍인 조르바>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에 담긴 스릴과 서스펜스에 대해선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만약 이 ‘로드 클래식’의 주인공들과 여행을 한다면? 아마 오대양 육대주를 다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 돈키호테, 삼장법사와 그 제자들, 허클베리핀과 조르바, 걸리버와 오딧세우스 등, 이들은 대체 길 위에서 어떤 삶, 어떤 운명과 마주친 것일까? 그 지도를 탐사하는 것이 이 연재의 기본 컨셉트다.
첫 장은 열하일기가 열게 될 것이다. 열하일기는 길에 관한 모든 노하우와 그 길이 어떻게 글로 변주되는지를 보여주는 고전이다. 마주칠 때마다 다른 텍스트로 변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장면들과 조우하게 될 것인가? 나 역시 몹시 설레는 여행이다.
갑오년이 시작됐다. 한 해의 출발이기도 하지만 간지력에서 ‘갑(甲)’이란 앞으로 10년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하다. 게다가 갑오는 말 중에서도 청마다. 푸른 색은 오행 중에서 목(木)을 뜻하는 것으로, 봄과 바람을 몰고 오는 기운이다. 봄바람을 타고 솟구치는 청마의 기상! 그러니 갑오년은 실로 역동성이 넘치는 해가 될 것이다.
앞으로 10년의 새로운 시공간을 살아내려면 무엇보다 묵은 10년을 흘려보내야 한다. 버블경제와 성공신화, 스위트홈의 망상 등은 말끔히 잊으시라. 비우는 만큼 길이 열릴 것이니. 이 ‘로드 클래식’과 더불어 그 길을 탐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유에서 자유로, 증식에서 순환으로 이어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삶’을!
첫댓글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믿음과 앎의 차이라고 어디선가 본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믿는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믿음꺼리를 찾아야 하지만 한 번 알아버리게 된 앎은 기억이 존재하는 한 없앨수가 없다고요.. 불교적 앎을 알아갈수록 지금껏 경험했던 세상의 모든 경험들이 새롭고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참 재미있게 읽었던 고미숙님의 인문학책들이 불교적으로 해석해서 다시 보면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첫댓글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믿음과 앎의 차이라고 어디선가 본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믿는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믿음꺼리를 찾아야 하지만 한 번 알아버리게 된 앎은 기억이 존재하는 한 없앨수가 없다고요.. 불교적 앎을 알아갈수록 지금껏 경험했던 세상의 모든 경험들이 새롭고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참 재미있게 읽었던 고미숙님의 인문학책들이 불교적으로 해석해서 다시 보면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골절이 365개라는 것이 경이롭네요...우리는 365일을 살아가는데 골절 수와 같다니...다른 오행과 오장...다 연결시켜 놓은 부분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몸은 곧 자연이요..자연이 곧 몸이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