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조절(Pain Control)과 양적완화
[분석] 미국 연준의 3차 양적완화, 진단과 처방의 불일치
최근 미국의 3차 양적완화 조치에 대한 분석과 미국 경제의 구조적 약점에 대한 기고글을 중앙대 교양학부 강사인 유성재씨가 보내왔다. 그런데 사실 내용은 최근 게재된 뉴욕의 신희영씨 글(헬리콥터 버냉키, 돈을 뿌리다)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미국의 경제상황은 비슷한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 경제의 파급력과 중요성 때문에 유사한 내용이지만 유성재의 기고 글을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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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pain)’은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것인가? 의학에서 ‘통증’이란 ‘조직의 손상 혹은 손상의 가능성과 관련된 불쾌한 감각이나 감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의사들은 통증의 위치, 양상, 강도, 악화인자와 완화인자, 관련된 증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병을 진단한다.
통증은 진단을 하는데 중요한 ‘신호’이므로 진통제를 사용하여 이 신호를 교란하면 진단에 방해가 되므로 진통제의 사용을 꺼린다. 혹은 ‘통증’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 방치하거나 환자의 불만만을 잠재울 약간의 진통제만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눈부시게 발전해온 의학 기술과 약물의 개발로 인해 ‘통증’은 질병을 진단하는 ‘신호’로서의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맹장염을 수술할 것인가의 결정이 예전에는 오로지 통증의 위치와 양상으로 결정되었다면 요즘에는 컴퓨터 단층촬영(CT)을 찍어 결정한다. 그러한 까닭에 수술이 결정될 때까지 더 이상 환자가 ‘통증’을 참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통증은 몸에서도, 사회에서도 확인된다. 문제는 처방이다
지금 미국경제는 사방에서 고통과 아픔을 호소하는 비명소리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집을 차압당해 길거리로 내 몰리고 있다. 기업은 상품이 안 팔린다고 아우성, 비정한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같은 금융기관들은 ‘부실’을 정리하느라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경제전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부채’에 이자를 갚느라 투자는 고사하고 소비마저 줄이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13일 이들 ‘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은행(FRB)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통해 마약성 진통제 몰핀과 같은 강력한 진통제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는 매달 400억 달러 규모의 주택저당증권(MBS)을 사들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3차 양적 완화(QE3)’를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양적완화란 윤전기를 돌려 달러를 찍어내는 것을 말하는데, 이 발행된 달러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야기했던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부실채권(MBS)를 매입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준금리를 0~0.25%로 유지하는 ‘제로 금리’ 기조를 당초 목표연도인 2014년 말에서 오는 2015년 중반까지 6개월 이상 연장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결정에서 눈여겨 볼 것은 실업률이 하락하지 않고, 소비가 증대되지 않는 등 실물경제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을 경우,시한을 정하지 않고 주택저장증권 등 자산매입을 계속 하겠다는 것이다.
앞선 두 번의 양적완화는 금융기관에 막대한 유동성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금융기관이 부실을 이유로 가계에 대출해 준 ‘빚’을 급격히 회수할 경우, 추가적인 부실이 대량 발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금융기관을 ‘통제’함으로써 ‘빚’을 갚지 못하는 가계와 기업의 연쇄 파산하는 것을 막아 경제전체가 급격하게 악화되는 악순환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주택구입자의 막대한 대출금 이자를 경감시키고, 남는 돈으로 원금상환과 소비지출를 확대 하라고 한 것이다. 기업들에게는 투자를 하라는 일종의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2008년 이후 천문학적인 신용팽창(양적완화, 저금리 정책) 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띠는 경기회복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업률은 여전히 8%대에서 더 이상 하락하지 않았고, 소비증가 역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금융기관 구제를 통한 경기부양에 실패한 것이다.
이는 케인즈가 말한 미래의 불확실성이 클 경우, 정부가 통화량을 증대시킨다 하더라도 화폐보유 동기를 커져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유동성 함정에 미국경제가 빠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만약 경제가 유동성함정에서 빠져 있다면 통화량증가는 투기적 화폐수요만 증가시킬 뿐 어떤 변수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어 금융정책이 실효성을 거둘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연방준비은행 의장 버냉키는 극단적인 이번 처방을 내놓은 것이다. ‘시한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에게 (가까운 미래에) 이자율이 올라갈 불안, 금융기관이 ‘대출’을 회수할 염려 때문에 ‘소비’와 ‘투자’ 확대를 주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통증조절(Pain Control)의 원칙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진통제를 처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통증이 악화되기 전에 초기에 강력한 통증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효과가 낮은 진통제를 적은 용량으로 반복하여 사용하는 것은 결국 환자에게 적절한 진통도 제공해 줄 수 없고 오히려 총 투여되는 진통제의 양은 더 많아지게 된다. 예를 들어 두통이 왔을 때 약을 많이 먹는 게 두려워 조금씩만 복용하게 되면, 두통도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반복해서 먹다 보면 더 많은 약을 복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버냉키의 조치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통화 확대정책이 실물경제로 확대될 가능성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미국정부가 직접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기반을 확충과 효율성을 높이는 재정정책이 함께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이는 미국정부가 이른바 재정절벽(미국 연방정부의 국채 발행 한도가 모두 소진되어 더 이상 재정지출 확대가 어려운 상황)에 막혀 재정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번 통증조절이 내실 있는 경제의 회복으로 나아가기에는 불완전한 반쪽 정책에 불과하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통증조절의 부작용이다. 의사들은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지 않으니 병의 증세, 진행경과를 오판하기 쉽고, 더 심각하게는 통증이 없는 환자들이 병원에 내원하지 않거나,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생활습관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병은 회복되지 않거나 도저히 손쓰지 못할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통증조절의 전제는 통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의 진행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하며, 통증의 근원을 분명하게 제거할 계획과 처치가 존재할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버냉키의 처방에는 세계 경제위기를 불러온 원인에 대한 분명한 ‘진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의 고통과 통증을 초래했던 경제시스템에 대한 ‘수술’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만약 통증이 완화되고 나면 경제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금융시장 및 소득양극화를 초래하는 분배체제 등의 개혁과제는 곧 망각의 강으로 사라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