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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삶의 갈림길에서 세월이 익어간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퍼석한 머리와 빛을 잃은 눈동자
배겟잇 위로 사정없이 빠지기 시작하는 머리카락과 턱 밑으로 하얀 수염이 "나"임을 알린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 한번 지나간 지난 시간도 되돌릴 수 없고
그렇다, 자꾸 뒤돌아 볼 수 없고,언제까지 흑싸리 껍데기가 아니기에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하나 더 남기려 보따리를 싼다.
이번 걸음은 조선 9대 간선도로 중에서 신(神)이 인간(人間)의 형상으로 태어난 곳을 지나는데
이런 길을 걷는다는 건 영광이며 걷는 내내 숙연할 수밖에 없는 걸음의 연속이다
18세기 무렵의 조선 10대간선도로
1로 의주대로 의주에서-평양-개경- 한양
2로 경흥대로 경흥-서수라-경흥-회령-경성-북청-원산-회양- 한양
3로 평해대로는 동해안으로 오는 평해-울진-강릉-진부-원주- 한양
4로 영남대로(좌로)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새재-충주-음성-용인-한양☆
5로 영남(통영)대로( 우로) 통영-고성-함안-현풍-성주-김천-상주-영남대로와 동일☆
6로 통영대로 통영-고성-함양-운봉-전주-삼례-공주-차령-천안-수원-과천-동작나루-한양☆
7로. 삼남대로의 삼남대로 제주-해남-나주-장성-노령-정읍-전주-삼례-익산-논산-이후는 통영대로와 동일☆
8로 수영별로 충남 보령 오천항- 홍성-예산(신례원)-아산-평택-한양☆
9로 봉화대로 울진-봉화-영주-죽령-단양-충주 주덕
10로 강화대로는 강화도에서 김포를 지나 한양이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인데 조선초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전국 주요 도로망이 한양을 중심으로 X자로 이루어진다.
영남대로. 삼남대로. 통영대로. 의주대로. 경흥대로는 거의 천리길이며 나머지는 거리가 조금 짧고
그 외 29개의 주요 지선도로가 있다
이른 아침 첫 기차로 대전역에 도착해서 곧바로 택시로 갈아타고 대전 복합터미널로 간다.
복합터미널에 도착하니 충남 보령으로 가는 버스는 08시에 있어 대합실 의자에 앉아 이틀간 걸어갈 지도와 인근 지명을 다시 한번 더 숙지한다
텅빈 버스는 1시간 30분 정도 걸려 보령에 도착하고, 다시 택시로 오천항에 도착하니 "어서 오라"며 하얀 함박눈을 내려준다
눈을 기대하고 왔으니 눈이 얼마나 반가운지 시골 똥강아지도 이보다 더 반가울까
보령시 오천면 모습
오천면에는 16개의 유인도와 67개의 무인도가 있으며 삼국 시대 때는 '회이포"로 불렀던 곳이다
항구의 남자보다 더 터프한 바다에서 전해지는 비릿한 향을 느껴 보지 못했으나
지난날 걸었던 그 길에 토정선생도 생각난다.
보령 충청수영성(城)의 서문(西門)
조선 초기에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수군 절도사 수영이 있던곳
경상도 낙동강으로 이어져 장흥, 법성포, 안흥창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운선 보호와 왜적을 감시하며
침입을 막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다
그리고 충청도 수군은 임진왜란 때 남해 바다를 지킨 삼도수군(三道水軍) 통제사 이순신장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삼도수영은 여수의 전라수영, 충무의 경상수영, 그리고 충청 수영이 있으며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를 하셨던 이순신장군께서는 한산도에 계셨다
충청 수영의 영보정
눈 오는 날 아침에 영보정 청소하고 나오시는 동네 할머니들 잠시 오천항 이야기 좀 듣다가
바람은 불고 눈은 오고 더 이야기 하고 싶어도 그럴수 없어 건강하시라며 말씀 드리고 먼저 일어난다.
영원히 보존한다는 뜻의 영보정(1504)
오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하는 영보정은 충청 수영(1896년)이 폐지되면서 없어졌다가
2015년에 다시 복원한 건물인데 조선시대 때 다산 정약용 선생이나 백사 이항복 같은 분들이 이곳 영보정을 조선 최고의 정자라 칭했다고 하셨던 곳이다.
오천항 모습
조선시대 때 태안의 안면도와 천수만 입구로 오고 가는 조운선의 안전을 지키던 곳이며
당나라와의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오천항
한때는 서해안을 지키는 충청도 조선 수군함대 사령부가 있었으니 군선 140척 군사는(요즘 군대의 사단 병력으로 보면 될듯한 규모) 8천400명이 주둔했던 곳이다.
보령 방조제와 이어지는 해안 사구 모습이 보이고
충청 수영성 옆으로 토성벽길이 이어졌지만 오늘 갈길이 멀고 하니 생략하고
이틀간 걸어간 길은 보령-청소면-김좌진 장군 묘-광천읍-홍성군-성삼문 유허지-예산군 응봉면-예산읍
신례원역-신창향교-아산-현충사-음봉면-이순신장군 묘-둔포면-팽성군-안성천-평택역 112km
평택 이후길은 통영에서 올라오는 길과 땅끝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 경복궁까지 79km가 이어진다.
결론은 이곳 충청수영에서 한양 경복궁까지 190km 옛 조상님들께서 6일을 걸으면 한양에 도착할거리로 보인다
눈 내리는 날
이런 날은 옛 생각도 나고 그저 즐거운 마음인데...
충청의 수군 제독께서도 이와 같은 눈 내리는 날
한양으로 걸음 하셨을까
과거객들이나 봇짐장수나 등짐장수들의 고달픈 걸음에 있어서
질퍽한 흙 길에 덧버선이 얼마나 버텨줬을지
그 모든 건 상상 이상이었으며 극한의 생존이라 생각 든다
비 오면 짚으로 만든 도롱이 한벌을 어깨에 걸치고 올랐던 한양길에
배고픔, 풍찬노숙, 한겨울 강 건너기, 부싯돌로 불 붙이기, 산짐승, 산도적과 맞짱 떠가며
하루 평균 70리에서 80리를 걸음 하는 동안 극한의 생존길이었던 반면
비 오면 장화 신고 우의나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는 한양길에 산짐승이라고는 토깽이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곳곳에 주막이 있으나 그마저도 귀찮아 지날 때가 많다.
간혹 걷다가 새벽녘에 백여우라도 팔닥팔닥 재주넘으며 나타나주길 바랄 때도 있지만 그럴 리 만무하다
걸음에도 품격이 있었다면 옛 조상님들의 살고자 했던 길이 더 카리스마 있고 품격이 있었을 것이라 보이는데
최첨단의 장비와 자동차를 두고 평택으로 걸어서 올라가겠다는 정신 나간 나그네는 한겨울 북풍한설 앞에
호환마마(虎患媽媽) 보다 더 무섭다는 발바닥에 생길 물집이 더 걱정스럽게 느껴진다.
돌아가는 길보다 잠시 산 하나 넘어가는 짧은 고개를 지나는데 소구루지길 고갯마루에 나주 김공묘를 지난다
멀리 보령과 홍성의 진산인 오서산이 여기는 신성한 곳이니 잡인은 출입하지 말라며 서있는 홍살문처럼 보이는데
잡인은 아니기에 고개를 숙일 수 없고 "이리 오너라'며 한소리 하고 싶어도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오서산은 신라시대 때 어느 왕자가 수도를 했다는데 그건 옛이야기로만 떠도는 이야기
멀리서도 기(氣)가 느껴지는 오서산
그 산자락이 품은 홍성땅은 실제로 애국자나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청소면을 지나며
다른 지방의 면(面)과 다르게 4층 건물 2채와 2층 건물 몇 채 있고 대부분 단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인데
매점이나 가게는 문을 닫아놓은 곳이 많다.
청소역이 저짜 보이고
바쁘게 움직여야 할 주민분들은 모두 어디 가셨는지 마을전체가 텅 비어 있어 조용하기만 하다
축축한 아스팔트길위에서 보부상이나 과거길은 21번 국도길을 따라야 하지만
청소면에 왔으니 꼭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할 분이 있기에
오서산 방향으로 걸음한다.
장항선이 지나는 진즉 건널목을 건너서
어디서 보던 당찬 기운이 느껴지는 한국의 100대 명산인 오서산(790M)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분기하는 한남, 금북 정맥길 속리산 이후에 이어지는 한남정맥, 금북정맥길에서 분기되는
모든 산줄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서해바다를 굽어보는 산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오서산이다.
북쪽으로는 경기도청을 지나 한강 아래까지 250리
동쪽으로 청양, 공주 부여를 지나 계룡까지 100리
남쪽으로 보령, 익산 김제 모악산까지 200리를 굽어 살피는 산이며
서해 바다를 지나는 뱃사람들에게 등대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산이다.
또, 산이 높으니 사람을 살리는 물의 흐름도 있게 마련이니 북쪽으로는 69km의 삽교천, 서쪽으로는 25km의 광천.
동쪽에는 19km의 황룡천을 거느린다.
대한독립군 총대장 김좌진 장군묘 방향으로
청소면 재정리 마을의 500년 된 느티나무가 서있고
마을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면
오서산 자락에 자리 잡은 김좌진 장군 묘
주차장과 안내판이 보이고 그 위에 태극 삼문(三聞)과 장군의 사당이 있는데 묘는 전체 규모가 단아하고 커 보인다.
장군께서는 1930년 공산당원이던 박상실이 쏜 총에 맞고 41살의 나이로 타계하셨는데 어떤 연유로 공산당의 손에
돌아가셨는지...
유해는 멀리 만주땅에 매장되어 있었으나 1933년에 부인 오숙근님께서 일제의 눈을 피해 국내로 옮겨와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했고 부인이 돌아가신 후 아들 김두환?이 지금의 자리에 합장하셨다.
내용은 읽어 보시고
작년인가 언제던가 홍범도 장군에 이어
어느 국회의원 대변인이란 분이 김좌진 장군도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 해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안내글
읽어보시고
충의문이라 쓰인 태극 삼문(三門)이 있는데 우측의 문만 활짝 열어두었다
평소대로 한다면 쪼르르 뛰어 올라갔겠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영웅을 바로 옆에서 뵐 수 있다는 마음에
마음은 묵직해지고 숙연해지니 그 느낌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걸음이다
내용은 읽어 보시고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묘와 그 뒤에 아버지이신 김형규의 묘소인데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2일 북로군정서(김좌진), 대한독립군(홍범도), 신민단 독립군 이와 같이
독립군 연합부대가 간도에서 출병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전투로
일본군 1,300명 사살하였고 부상자도 많이 발생, 독립군은 100명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정확성은 떨어진다.
참고로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청산리 전투 1920년 10월이다
장군의 묘소를 지키는 비석의 글 중에서 "대한독립군총사령관" 글에서 "한스 짐머"의 웅장한 영화음악 "글레디에이터"가 생각나는데 왜 그럴까
장군께서 부인을 두고 "오늘 나가면 돌아오지 못하오"라며 비장한 각오로 청산리로 떠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고마운 마음 잊지 않게노라"며 장군께 깍듯이 예의를 다해 절하고 일어난다
광천으로 가는 길에
젓갈의 대명사인 논산의 강경 젓갈과 비교할 수 있을까?
광천 젓갈 그리고 부안의 곰소 젓갈도 유명한데 전국 3대 젓갈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 광천은 토굴 새우젓으로 유명하며 보령 방조제가 없던 시절 서해바다로 떠나는 포구가 있던 마을로
광천에는 100개의 새우젓 제조 판매 업체와 40개의 새우젓토굴이 전통사업으로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돼지 국밥에 잘 익은 새우젓갈이 빠질 수 없는데 이곳에 국밥집 하나 있으면 들어가 볼까 했으나... 없다
읽어 보시고
보부상(봇짐장수와 등짐장수) 유품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충청수영길은 서해바다를 접하고 있는 서천, 보령, 홍성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한양으로 옮겨가던 길이니
보부상들이 아주 많았을 것 같다.
안내글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보부상들이 있었다고 적었는데 물론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국적인 규모로 활동하던 백달원이란 인물이 보부상의 시초다
백달원이란 인물은 고려말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채 쫓기고 있을 무렵
인근에서 패랭이 모자를 쓰고 지게를 지고 가던 백달원이 이를 보고 이성계를 지게에 싣고 위기를 벗어나
부상을 치료해 줬던 인물이다.
보부상 유품 안내글 옆에 "증(贈) 군무참의 김 공 병돈 유공지비"
동학농민을 토벌하던 대장급이던 김병돈의 공적비가 서있다.
광산김 씨 문중에서 세운듯한데 증(贈)이란 죽고 난 다음에 유공지비를 세웠다는 뜻이고
정부입장에서는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관작리 전투에서 5만의 동학농민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오늘 저녁 무렵에 관작리 도로길옆에 자리하는 동학농민 공원을 지나는데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광산 새우젓갈 토굴
반들 반들한 장독 안에서 숙성과 발효된 새우젓이 익어가는 모습이건만
새우 젓갈에 밥한술 뜰 시간도 없으니
지나온 오서산 구간
오서산 북쪽 계곡에서 흘러온 빛 좋은 광천이건만 물색을 보아하니
된장과 간장을 적당히 섞은듯한 모습이다.
어디서부터 이런 모습인지 강원도 깊은 산골짝 응달에 눈이 모두 녹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오서산에서 발원하는 광천과 황룡천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광천읍에 도착
광천읍 행정 복지 센터
광천을 지나 금북정맥 마루금인 마암고개로 가는 길에
21번 국도 갓길로
갑자기 눈이 내린다.
입춘이 지나고 낯선 땅에서 눈 내리니 생각이 많아진다.
하염없이 내렸으면...
그리고 온 대지위에 맑고 깨끗한 풍경을 보여 줬으면 얼마나 좋을지
눈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스르르 스며들고
하루해는 한 여름에 비해 서너 발이나 짧은 것도 문제지만, 첫걸음을 10시 무렵에 시작해 하루동안 150리를 갈지...
내일 평택까지 걸어야 한다며 편안한 집을 두고 밖으로 나왔지만 아직까지 엄동설한 속 허허벌판에서 겨울바람을 쐬고 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광천 어느 주막에 들러 새우젓에 국밥 한 그릇 말아먹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나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늘도 길 떠나는 사람 시험해 보는 건지 심술 난 눈보라가 치는데 앞을 볼 수가 없고
걷는 내내 가끔 차만 한두 대 다닐 뿐 개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는다.
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어 뒤돌아 본모습
이 눈이 그치고 나면 봄이 쉽게 찾아오려나...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는 분명 금북 정맥의 산들이 보이겠으나 뿌연 눈발이 앞을 막아 주변의 산의 기운을 읽을 수가 없다.
이곳 홍성에는 애국자나 독립투사가 많고, 높은 산보다 낮은 산들이 많아 전국 최고의 양돈농가(돼지 키우는 곳)가 있는데
금북정맥을 걷다 보면 양돈농가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피할 수가 없고, 역겨운 냄새만큼 알짜배기 부자도 많으리라 생각이다.
백두대간 속리산 정상에서 분기되어 탁주봉-좌구산-보현산-칠장산에서 다시 남, 서진해 성거산-봉수산-백운산으로 이어온 금북정맥길의 마온고개
산줄기는 다시 서진해서 남산-수덕산-가야산-금강산-지령산이 자리하는 태안군 근흥면에서 맥을 다하는 금북 정맥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예당평야가 자리하는 삽교천(무한천)으로 흘러들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상지천(광천천)이 부령 방조제를 지나 보령 오천항에서 서해로 흘러가는 물이다.
홍성성 남문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에 쌓은 성으로 조선초기부터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며
목사(牧使)들이 사형수들의 사형을 지켜보던 북문인 망화문은 동학농민(1894년)을 처형하던곳인데
아깝게도 일본인들에 의해 북문과 서문은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북문 망화문과 이곳 남문(南門)인 홍화문을 새로 복원했다
참고로 목사(牧使)란 조선시대 지방 행정단위의 목을 다스리시던 정삼품 외직벼슬
조선 백성이 살아가는 읍성
15세기에는 전국에 96개의 읍성이 있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가 가장 많았고 (세종실록지리지)
16세기 무렵인 1501년-1600년대에 160개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 가장 많았고(신 증동국여지승람)
18세기에는 107개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가장 많았으나 임란이나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이 줄어든 경향이 있다 (여지도)
경상도와 전라도에 읍성이 많았던 건 왜구들의 영향이라 보면 되겠다.
전국의 많은 읍성은 일제 강점기, 6,25 전쟁, 산업화 발달(먹고사는 문제)로 대부분 훼철되어 지금은 많이 없어져 아쉬움이 드는 게 현실이다.
홍주성 수성비
성의 축조 과정을 적어 놓은 비
비문에는 성 쌓기를 주도한 사람과 감독한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적혀있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홍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고려 때 최영장군, 조선최고의 충신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성삼문, 대한독립군 총대장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선생까지
모두 걸출한 인물들이다.
홍화문 모습
홍성 읍성 비석 군
조선 중, 후기 때 이곳 홍주 목사를 지냈던 5명이 선정비로
우측부터
경섬: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1300여 명을 데리고 오셨던 분이고
김희신:윤동원,
유의:청렴하고 검소한 분으로 다산선생께서 목민심서에 기록했던 인물
변사익까지 나란히 서있다.
홍성 관아가 있던 자리에 홍성군청이 있는데 홍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충청 4대 도시중 하나다
정삼품 외관직이던 목사가 근무하던 홍주(洪州) 안회당의 외삼문(外三門)인 홍주아문(洪州衙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삼문(內三門)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내삼문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아 건물을 일제 강점기 때 헐어 버린 모양이다.
홍주관아는 충남 서해안을 중심으로 19개의 군현을 관활하던 곳인 만큼 규모도 컸을 텐데 옛 지도로만 확인이 가능하니
지금의 외삼문은 고종 때 지은 건물이며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했는데 6,25 전쟁 때 사라지고
다른 이의 현판이 대신한다.
삼문(三門)은 다른 곳의 삼문과 다르게 모두 5칸이며 예전 사진에는 가운데 문은 사람이 출입하는 문으로 되어있고
양쪽의 각각의 두 칸에는 창고 내지 문간방으로 되어있는 걸 볼 수 있다.
군청 안으로 들어오면 만나는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고려 공민왕 7년에 백월산 해풍현(구항면) 관아에 있던걸 이곳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옛 관아와 현재 홍성군청이 함께 쓰는 이곳 홍성군청에 지역 최고의 산꾼이신 오서산님께서 근무하시는데
잘 계시는지 ...
이곳 홍성에 대해서 좀 더 알고 가면 좋은데 갈 길이 급하니 훗날로 기약하며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홍주성 전투
1906년 병오년에 평지에 쌓은 홍주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동문이 뚫리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와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참고로 의병으로는 경상도에 신돌석, 전라도 최익현, 충청도에 민종식장군이 계셨는데
의병장들 중 유일하게 경상도 신돌석 의병장은 평민 출신이셨는데 앙심 품은 부하에게 살해 당하셨고
예전 고지도속의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 앞에서 찍은 사진
묵직하게 보이는 조양문
1870년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수리할 때 지은 문루다
새로 복원한 북문방향으로 옮겨가다 홍주 향교와 홍주 의사총에 5시면 문 닫을 시간이라 북문은 생략하고
이제 발걸음을 홍성 향교로 옮겨간다
홍성향교에 들러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잡인은 출입금지임을 알리는 붉은 홍살문이 반기고
그 옆에 하마비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맞배지붕의 홍주향교 모습
언제 지어진 건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태종과 세종 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5시 되려면 조금 남았는데 관리하시는 분이 일찍 출타하셨나 문은 굳게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한다
외삼문 옆에서 까치발로 서서 사진을 담으니 한쌍의 은행나무사이에 맞배지붕의 명륜당이 보이고
그 옆에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보인다.
그 뒤로는 내삼문과 내삼문을 들어가면 동무와 서무가 있겠고 그 정점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구경은 대충 하고 향교에서 홍주의사총 방향으로 이동하며
홍주의사총
붉은 기둥과 붉은 문 가운데 태극 삼문은 열려 있었으나 정작 출입은 오후 5시까지다.(5시 05분 도착)
5분 늦게 왔더니 스텐 철문이 닫혀있고
관리하시는 누군가 있다면 불쌍한 눈빛으로 애걸복걸 이라도 해볼텐데....
소나무 사이에 홍주의사총 보이시나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항일구국운동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치열하게
항전을 벌였던 홍주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900 의사의 위패를 모셔 봉안한 곳
홍주목사 이승우가 함께 동참해 주기로 했지만 변심해 결국 이조 참판을 지낸 민종식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은 홍주읍성을
공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5월 20일 홍주읍성을 탈환한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동문은 함락되고 많은 의병과 민간인 사상자를 냈는데 이때 희생된 전사자는 최대 수백 명에 달했는데 홍성천변(川邊)과 금북정맥의 남산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지금의 의사총에 모셨다
또, 의사총 앞에는 생매장(生埋葬)터가 홍성천변에 있는데 홍주전투에서 총에 맞아 신음하고 있던 부상병(90-100명)을 살아있음에도 땅을 파고 묻은 장소가 있다.
삽교천을 건너면서
이제 21번 국도 따라가면 예산읍에 도착하겠지만
신(神)이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신 조선 최고의 충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성삼문 선생 유허지를 찾아가 본다.
21번 국도옆에 자리하는 900년 된 은행나무가 고단한 삶을 사는 듯 여기저기 지주대를 세워 놓았다
오늘 점심 무렵에 보령 오천항에서 출발하여 걷기는 걷는다마는 하룻동안 잔치 국수 한그릇 비우고 걷는데
저녁에 예산(50KM 지점)까지 걸어가지 않으면 어느 길가나 다리밑에서 풍찬노숙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느 인심 좋은 주막집에 잠을 재워 줄리도 없을 테고
부지런히 걸었음에도 노루 꼬리같이 짧은 해는 서산으로 넘어갈듯하다.
첫댓글 J~3클럽 입문 한지 10년 세윌 이 지나가고 방장님 과 초면때는 검은 머리 였는데 지금은 세월이 흘러 힌머리 카락 이 미운정 고운정 들다보니 우리 방장님 은 잘지네는지 까페 글도 찾아보고 클럽 회윈 님들은 무탈 하게잘지네는지 들러보고 항상건강 하시고요 올 해도 자주 만나길 바라며 글 잘보고 갑니다
지금 제가 있는
충주가 조선시대 10로중
4.5.9로 충주땅을 발지 않으면 한양을 갈수 없는
교통의 요지 충북에 도읍지
충주 중원경이 있고 현재는 청주가 도읍지
걸음하시느랴 수고하셨습니다
9로 걸음할때 잠시라도
함께
만능 소년으로 살아갈것같은님도 세월의 익어감을
몸소 느낀다니...
그보다 더익어 홍시가된감은 어떨까요~
하루라도 넊놓으면 마중물빠진 펌프처럼 발동이 안걸리고 여기저기 쑤시고~
그래서 정신차리고 잔챙이걸음이라도 걷곤한답니다
방장님이야~
영원한 철인으로 남을것 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저는 늘어나는 탈모 흰머리 주름 확인할 때마도 서글퍼집니다.
방장님은 전국 지리와 역사 특색에 박식하셔서 만나는 분들과의 얘깃거리도 많고 재밌게 경청하게 만들 듯 합니다.
조선시대 10대간선도로라는 것이 있었군요.
그 옛길을 찾아 걷는 것 의미도 있고 재밌을 듯 합니다^^
날짜를 골라도 어찌
눈이 이렇게 많이도 내리는 날 걷기 시작하셨대요?!
충청수영의 눈내리는 운치있는 모습에
잠시 해안길 걸음의 그 옛 추억을 꺼내보며...
오천항이 내려다보였던 조망 좋았던 영보정이며...
방장님의 10대 간선도로 후기 속
오천항 모습이 그때와는 또다르게 보여집니다.
애국지사들이 유독 많은 홍성땅
언젠가 한번 찾아보며 인사 한번 드리고 싶어지는
후기글 잘 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가로림만 세계유산 등재 신청 뉴스가
나오던데... 바위 위의 물범 모습이 궁금해서 가보고 싶어지더라구요.
세월의 흔적으로
"나" 임을 새삼 알게하는 그 기분
최근에 더 드는 기분입니다.
눈발이 흩 날리는데
백여우가 나타나지 않아 서운 하셨군요 😃
읽는 내내 독립기념관 다녀온 기분입니다
홀로 아리랑
수고많으셨습니다 ~♡
뜻이 있는곳에 길이 있다고
나는 가는곳마다 유명한 산이나
조망좋은 풍경을 찾는데
방장님은 역사 깊은 유적지나
세월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택을 찾아 다니는것 같습니다.
눈 오는 오천항 풍경 최고였구요
남은 길 무탈한 발걸음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