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따라 이야기 따라 영양에 취하다 .2] 문향(文鄕)의 고장 영양…조지훈·오일도·이문열…한국문학의 별 '반짝반짝'
조지훈. 그는 '승무'의 시인이다. 시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청록파의 한 사람이고,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주저함이 없는 '지조론'의 선비였다. 오일도. 그는 낭만과 애상, 우수와 비감의 서정 시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해 조선 문단의 시인들에게 작품 발표의 장을 펼쳐주고 후배들에게는 문학의 길을 열어주었던 영양문학의 맏형이었다. 이문열.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다.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흔들림 없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들의 고향은 영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이 우뚝하고 물이 유장하며 땅이 맑고 공기가 투명한 이 땅을 문향(文鄕)이라 부른다.
조지훈
1920년 일월 주실마을서 태어나
불의와 부정에 맞선 지조의 선비
1939년 '승무' 등 발표 시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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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일월면 주실마을에는 조지훈을 기리기 위한 지훈문학관이 조성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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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문학관 뒤쪽 산책길 길목에 위치한 지훈 시(詩)공원의 모습. |
◆조지훈
조지훈은 1920년 12월3일 영양 일월의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이자 한의학자인 해산(海山) 조헌영(趙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 류노미(柳魯尾)다.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그의 아호다. 지훈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한학과 역사 등을 배웠고 '피터 팬' '행복한 왕자' '파랑새' 등과 같은 동화도 읽었다. 9세 무렵부터 글을 썼으며, 시인이 되고자 했던 형 세림(世林)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시를 접했다. 11세 때에는 형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1937년 17세가 된 지훈은 형과 함께 상경해 아버지가 인사동에 설립한 동양의약사 겸 일월서방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아버지의 친구인 시인 오일도를 만났다고 한다. 그가 당시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용운을 찾아간 것도 이때다. 한용운이 김동삼의 유해를 한강에 뿌리며 서럽게 울 때, 홍안의 문학청년 바로 조지훈이 그 옆에 나란히 서서 울었다.
그해에 형 세림이 세상을 떠났다. 지훈은 원산에서 평양까지 걸어서 여행했다. 그 긴 길의 걸음걸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떨구어 내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시인 오일도와 함께 형의 유고시집인 '세림시집(世林詩集)'을 펴냈다. 조지훈은 형을 위해 더욱 습작에 열중했다. 1939년에는 혜화전문학교(동국대)에 입학했으며 오일도가 창간한 '시원'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같은 해 봄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에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 이어 12월에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 문학과 사상 전환의 강요에 한 번도 몸을 굽힌 적 없었다.
광복이 되자 그는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다. 1948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직한 그는 6·25전쟁 동안에는 종군작가로도 활동했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민간단체에서 활동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1960년 '새벽' 3월호에 실린 그의 '지조론'이다. 어느 정권하에서든 불의와 부정에 맞서는 그의 비평은 추상(秋霜)과 같았다. 그는 항상 사직서를 지니고 다녔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시대적 양심이었고 이러한 그를 세상은 '마지막 선비' 또는 '지사문인(志士文人)'이라 불렀다. 그는 1968년 5월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나 19일 세상을 떠났다. 48세였다.
오일도
낭만과 애상·우수의 서정시인
1925년 시 '한가람…'으로 등단
국내 최초 시 전문지 '시원'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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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도가 생활했던 생가. 대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글방, 오른쪽에 사랑채가 위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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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도 시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책을 펼쳐 들고 앉아있는 시인과 마주한다. |
◆오일도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 … …/ 박사(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단 5행의 시가 오래 가슴속을 저회한다. 말 줄임표가 흐르는 가운데에 서서 또 얼마나 망연하고 저릿했던지. 오일도가 1935년 8월에 발표한 시 '내 소녀'다. '꿈속같이 아득한 옛날, 오! 나의 사랑아/ 너의 유방(乳房)에서 추방된 지 내 이미 오래라./ 거친 비바람 먼 사막의 길을/ 숨 가쁘게 허덕이며 내 심장은 찢어졌다.' 오일도가 1935년 2월에 발표한 시 '노변(爐邊)의 애가(哀歌)'다. 1930년대는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이 강화된 시기다. 1935년에는 한국어 사용 금지가 시작됐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오일도의 애가와 '내 소녀'가 세상에 나왔다.
오일도는 1901년 영양읍의 남쪽 반변천 변의 감천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희병(熙秉), 일도(一島)는 아호다.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집안은 아주 넉넉했다고 한다. 그는 8세부터 14세까지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5년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이른 1918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22년에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이듬해 릿쿄대학 철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 중인 19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근화학교에서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문예동인지 '시문학'과 종합문예지인 '문예월간' 등에 서정시를 발표했다.
1935년 2월, 오일도는 사재를 들여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그는 시원 창간호 편집후기에 이렇게 썼다. "문학은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우리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 한다." 그는 '시원'을 통해 많은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시원'은 1935년 12월, 5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지만 그는 1936년 '을해명시선집' 발행, 1938년에는 '세림시집'을 발간하는 등 시대의 울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즈음 일제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자 그는 낙향해 칩거의 시간을 보냈다. 광복 후 그는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내다 1946년 세상을 떠났다. 45세였다. 당대의 문학평론가 김문집이 쓴 오일도에 대한 인상은 언제나 '내 소녀'의 말 줄임표와 동시에 떠오른다. '이 친구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시를 못 쓴다. 미제라블한 오일도.'
이문열
한국의 현대소설 대표하는 작가
고향 두들마을은 작품·삶의 뿌리
소설 발표때마다 찬사·비판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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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이 유년 시절을 보낸 석간고택. 두들마을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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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두들마을 북카페인 '두들 책사랑'에 이문열의 작품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
◆이문열
이문열은 1948년 5월18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열(李烈)로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이 지어준 이름이다. 대학교수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했다. 그해 그의 어머니는 세 살 갓난아기였던 그를 데리고 고향으로 왔다. 영양 석보면의 두들마을이다. 두들에서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의 가족에게는 늘 '빨갱이'라는 딱지가 따라다녔다. 이사와 이사가 거듭됐고 그는 유년시절 전국을 떠돌았다. 이문열의 두 번째 귀향은 열세 살 때다. 밀양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가족 모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야산을 개간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두들을 오르내리며 어머니의 회상 속에 존재하던 고향을 직접 보았다. 이문열은 '그때 처음으로 문중이란 것을 알았고, 자연과의 친화를 경험했으며, 노동과 생산을 이해하게 되었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1994)고 한다.
그는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다시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퇴하고 한동안 주먹질로 세월을 축내며 떠돌았다. 1968년에는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그만두고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의 세 번째 귀향은 이때로 여겨진다. 이문열이 고향을 세심한 눈길로 관찰하게 된 것이 이 시기이며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의 소재 대부분을 이때 얻었다고 한다. 그는 시험에 세 번 실패하고, 결혼을 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1976년 대구로 이사했다. 그리고 1977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입선,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중앙 문단에 들어섰다. 그리고 잇따라 '사람의 아들(1979)'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1979)' '그해 겨울(1979)' '황제를 위하여(1980~1982)' '영웅시대(1982~198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등을 발표했다.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문열의 작업실 겸 주거공간은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負岳文院)'이다. 2001년 그는 고향 두들에 사택이자 문학 사랑방인 '광산문학연구소'를 짓고 장서 2만여 권을 내려보냈다. '나의 뿌리는 고향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집단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의식도 강한 전통 지향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삶이 외견상 뿌리 없이 보이고 때로는 극단의 일탈을 보일 때도 나는 그것들을 언제나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으로만 받아들여 왔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고향 두들은 그의 뿌리였다. 귀향을 꿈꾸며 지은 '광산문학연구소'는 지난해 7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불탔다. 전소된 고향집 앞에 선 그의 마음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는 요즘 '영웅시대'의 개정판 출간을 위해 작업 중이라 한다.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이문열은 가장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 프랑스 등 전 세계 20여 개국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