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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비유
마태복음 21장 28-32절 /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한글개역개정성경과 다른 한글번역성경과의 번역 차이
한글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할 것을 두 아들에게 각각 말씀해 주시는 것에 두 아들이 보인 반응이 맏아들은 처음에는 포도원에 가서 아버지가 시킨 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으나 마음을 바꿔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포도원에 가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으나 마음을 돌이켜 포도원에 가서 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성경(NIV)에서는 전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는 포도원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가 마음을 바꿔 포도원에 가서 일하였으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포도원에 가서 일하겠다고 해 놓고는 마음이 바뀌어 포도원에 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왜 그렇게 되어 있는지를 모르는 혹자는 한글성경이 번역을 잘못한 오류에 있다고 여겨 한글성경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불신하기까지 합니다.
영어성경(NIV)과 한글 개역성경을 각각 소개하여 대조해 보면 번역을 서로 다르게 하고 있는 차이를 보게 됩니다.
What do you think? :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There was a man who had two sons. :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He went to the first and said, :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Son, go and work today in the vineyard.’: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I will not,’he answered, ;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but later he changed his mind and went. :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Then the father went to the other son and said the same thing. :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He answered, ‘I will, sir,’ :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but he did not go. :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Which of the two did what his father wanted? :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The first, they answered. :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Jesus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the tax collectors and the prostitutes are entering the kingdom of God ahead of you. :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어성경 중에서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와 한글 개역성경을 놓고 비교해 보면 혼동이 될 수 있습니다. 혼동이 되면 당연히 고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잘못 번역된 것은 아닌가? 성경의 번역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염려할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성경의 사본에 대한 차이 때문에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 개역성경이 채택하고 있는 성경 사본(성경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음)은 바티칸 사본(B)과 소서 사본의 제13호가 가진 사구(寫句)입니다. 이 사본으로 번역한 영어 성경은 신미국표준역(NASB), 신미국역(NAB), 새영어역(NEB)이며, 우리 개역성경은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해서, 위 성경 사본의 사구와 이것의 역본인 영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표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으로, 결국 아버지의 지시대로 포도원에 가서 일한 아들은 둘째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표준신약전서도 바티칸 사본과 소서 사본을 따르고 있어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성경과 동일한 내용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표준신약전서는 29절의 “그러나 큰 아들은 ’예, 아버지’라고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여기에 설명을 달기를 「*어떤 사본에 “ ‘싫습니다’라고 하였으나 후에 뉘우치고 갔다”로 되어 있음」 이라고 하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30절의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더니 작은 아들은 ‘싫습니다’ 하였으나 후에 뉘우치고 갔다”라고 하면서 역시 여기에 설명을 달기를 「*어떤 사본에“‘예, 아버지’라고 하고는 가지 않았다”로 되어 있음」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상반된 내용으로의 사구인 성경 사본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성경 사본의 사구도 있습니다. 시내산 사본과 베사 사본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 사본을 번역한 영어 성경은 흠정역(AV), 개정표준역(RSV), 신국제역(NIV)인데,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가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냐? 가로되 첫째 아들이니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마음을 바꿔 순종하여 포도원에 가 일한 아들이 첫째 아들로 기록된 것은 시내산 사본과 베사 사본을 따른 영어 성경인 흠정역, 개정표준역, 신국제역의 내용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싫다고 한 둘째 아들이 결국에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포도원에 가 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바티칸 사본과 소서 사본에 의해 번역한 신미국표준역, 신미국역, 새영어역의 번역 입장을 취한 것에서입니다. 이러한 번역의 차이에 의해서 포도원에 가서 일한 아들은 둘째 아들인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 한글성경이 현재 주일 공예배의 표준성경으로 채택하고 있는 한글개역성경 및 한글개역개정성경이며, 이것 외에도 표준새번역성경과 현대인의성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번역성경, 바른성경, 쉬운성경, 우리말성경, 현대어성경, 한글킹제임스역, 킹제임스흠정역, 공동번역성경, 카톨릭성경 등인 대부분의 한글 번역성경의 경우는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다가 후에 아버지의 말씀대로 포도원에 가서 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시내산 사본과 베사 사본을 따르고 있습니다.
해서, 지금 우리가 예배용 성경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구절이 어떤 성경 사본과 그 사본의 번역을 따르고 있는 번역 성경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정보를 알고 있다면, 본문의 경우에서의 기록의 차이는 번역의 오류가 아닌 번역의 차이에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성경 사본에 차이가 있는 것인지요. 그것은 성경 원본을 필사한 필사자로 말미암은 것으로, 필사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두 아들의 비유’에 의해서 알려주시는 의미
성경 사본을 어떤 것으로 채택하고 또한 영어 역본을 어떤 것으로 따르든지 간에, 그래서 우리 말 성경을 어떤 것으로 번역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고자 하는 본의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한 아들이었는가?”하는 것을 통해서 세리들과 창녀들이 율법의 계명에서 명령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 속에 살았지만 세례 요한의 증거에 의해서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봄에 있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으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모습을 취하였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며 배척하는 완악한 자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악함은 세례 요한의 말을 끝끝내 듣지 않고 믿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악함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과연 누가 악한 자인가를 알게 해 주십니다. 세례를 베풀며 증거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세리들과 창기인지, 온갖 거룩함으로 외모를 치장하고 있으면서도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을 듣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불복하여 끝내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본 비유는 이 비유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는 문장인 세례 요한을 들어서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대제시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언급하시는 앞서의 23-27절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전후 문맥과의 연결에서 본문에서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시고 있는 의도를 잘 파악하여 그 의미를 잘 알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암시해 주시고 있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에는 유대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이 거부하여 불복종함에 있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압니다.1) 이렇게 세리들과는 창녀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능력은 십자가의 도에 의해서 행사되는데, 온 세상에 미치는 성령의 권능에 의한 복음 전파에 의해서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함에 있는 많은 사람들인 그리스도인이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한 데 모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 13:1-9에서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약하게 대하시지 않으시니, 우리 안에서 강한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지금 그분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그분과 같이 육체적으로는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따름에 있는 지금은 약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처럼 강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시늉만 하고 흉내만 내어 그렇게 보이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우리 안에 계신 것에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라는 얘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이심을 믿으며, 그분을 주로 섬기고 따르는 믿음에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줄을 우리 스스로가 알지 못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며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권능을 힘입어 능력 있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은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어떠한지요. 그 표본을 유대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을 띠며 경건의 연습을 하는 것에서입니다. 겅건의 모양은 치장으로 꾸며져 있으며 교육과 훈련으로 무거운 데, 마음에는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는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보듯이, 기독교인으로 사는데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권능으로 말미암아서 사는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주의를 주며 경고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다”는 확고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데 믿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데 믿음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요. 그리스도가 없으면 믿음 또한 없으니 그는 주께 버림받은 자이므로 그에 해당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가 계신 자는 주께서 함께 하시는 자인 까닭에 주께 가진 믿음으로 삽니다. 해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표현한 버림받은 자라는 것은 구원 받은 자가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구원받음에 있지 못한 자가 경건의 모양과 연습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무리와 하나 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계시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며,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까닭에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를 알지도 못하니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믿음의 능력을 발휘함에도 있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어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능력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힘없이 살아가며 결국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갑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아무런 힘이 없으며, 성도를 섬기며 살아감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경건의 모양으로 자신을 겉을 드러내며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만, 그는 그가 한 행위의 모두와 함께 불에 던져져 태워지듯이 헛되고 헛됨에 수치를 당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권능을 능력 있게 살아야 할 것을 수사 의문문2)을 사용해 강조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살펴서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 우리의 믿음이 있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지, 단지 그리스도인이 된 시늉만 하고 흉내만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버림받지 않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인 주님의 신실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에서 나오는 능력을 따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니고 있는 올바른 신앙에 있는 삶을 능력 있게 해 나갈 것을 권면하는 것에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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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리들과 창녀들인 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하지 않는 악한 죄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의를 입음에 있지 못하는 까닭에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세리들과 창녀들이 율법의 의에 있지 못함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에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의를 입는 자비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입음에 있게 하여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신다.
2) 문장의 형식은 의문문이나,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강한 긍정 또는 강한 부정의 수사적 효과를 가지는 의문문을 말하다. 이는 답을 알면서도 강조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의문문으로, 수사修辭) 의문문이라고 말함은 의문문의 형식으로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민다는 뜻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