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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1. 들어가며 |
2. 명재 윤증 |
3. 명재 고택 |
4. 명재 윤증 고택에서의 하루 |
5. 마치며 |
1. 들어가며
지난 6월 11일부터 6월 12일까지 1박 2일간 ‘조선시대 생활사’ 수업을 통해 충남 논산시에 위치한 명재 고택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처음으로 역사학과 수업을 들으며 답사를 떠나는 거였기 때문에 설렘 반 또 걱정 반인 마음이었다. 시험기간 삼일 전에 떠나는 답사였기 때문에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왕이면 잠시 한 학기동안 쌓여온 스트레스도 풀고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좋은 기운을 얻는다는 기분으로 떠나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명재 고택은 상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순간적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고택의 멋에 발걸음을 멈춰 잠시 멍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뒤에는 산줄기가 고택을 감싸고 있었고, 앞에는 커다란 인공 연못을 두고 있었다. 3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후손이 거주하며 고택을 사용함으로써 한옥에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고택 체험을 통해 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조상의 지혜와 배려에 초점을 맞춰 서술하고자 한다.
2. 명재 윤증 (明齋 尹拯)
명재 윤증 (1629~1714)은 인조 7년에 태어나 숙종 40년 향년 86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그는 파평 윤씨와 청녕 성씨 가문에 태어나 대대로 뛰어난 학문과 명망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와 함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백의 정승>이라고 불리며 일생동안 조정의 벼슬 부름에 모두 사양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20125441 한나영- 충남 논산 명재 윤증 고택 답사기.hwp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를 올리고, 정치당사자들이나 학인과 교류하며 피력하였다.
윤증은 ‘회니시비 (懷尼是非)’를 통해 스승 송시열과 서로 비방하며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면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서로 대립하게 된 원인은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던 윤휴가 주자의 서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달은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술을 집필한 후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송시열과는 달리 윤선거는 윤휴를 두둔하며 서로 윤후의 학문을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윤선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묘갈명을 무성의하게 지으며 폄하하는 글을 써냄으로써 윤증은 스승이었던 송시열과 갈라서게 된다. 그 후 각각의 제자들이 이 논쟁에 동참하게 되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하게 되었다.
그림1. 명재 윤증 고택
3. 명재 윤증 고택
명재 윤증 고택은 윤증 선생의 말년인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문화재지정이 되었다. 고택은 깔끔한 설계와 실용성과 기능성을 높은 공간 배치로 유명한 곳이다. 고택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노성 향교가 있고, 동쪽에는 노성 궐리사가 있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고택 뒤에는 노성산이 자리 잡고 있고 앞에는 인공연못을 만들어 그 경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인공연못에서는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연 못 안에는 섬을 만들어 물이 순환하여 썩지 않는 원리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고택과는 달리 윤증 고택은 대문과 담이 없다. 계속해서 자신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아예 담과 대문을 없앰으로써 자신의 청렴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대신 마당 전면으로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고, 그 뒤에는 대문채, 안채, 광채, 사당 등이 자리 잡고 있다.
4. 명재 윤증 고택에서의 하루
우선 고택에 도착한 후 대문채를 통과해 안채로 들어가 대청마루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간단한 밥과 잡채, 김치, 호박무침 등으로 소박하지만 집 밥의 느낌이 물씬한 점심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그날 날씨가 꽤 무덥고 습기가 찼는데 대청마루에 앉아서 밥을 먹는 동안은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아주 기분 좋게 식사를 했었다.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답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바로 천연염색을 하는 거였는데 요즘처럼 화학용품으로 옷을 염색하지 않고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천연재료이자 현재 한약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재료를 통해 염색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날 쑥을 가지고 카키색 비슷한 초록빛으로 스카프를 염색하는 체험을 했다. 염색을 하면서 어떤 모양의 매듭을 짓고, 또 얼마나 힘을 주어 매듭을 유지시키느냐에 따라 색이 물드는 정도가 달라졌다. 이 체험을 통해 처음에는 서로 어색하고 말도 섞어보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서로 대화도 섞고 함께 작업을 하면서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2. 천연염색 스카프 만들기
천연염색 체험을 완료하고 종가음식 만들기 체험을 하러 다시 안채로 이동했다. 여기서는 우리 전통 음식인 타래과, 가지소박이, 그리고 떡전골을 만들기를 했다. 세 가지 음식 중 학생들은 각각 체험해보고 싶은 곳으로 이동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타래과라는 음식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타래과를 만드는 곳으로 가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만들기에 몰입했다. 먼저 예시를 보여주시면서 만드는 것을 가르쳐주셨지만 보는 것과는 달리 만드는데 생각보다 모양이 너무 안 예쁘게 만들어져서 당황했었다. 타래과를 만들면서 모든 것은 쉬운 일이란 없고 같은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모양새에 따라 음식의 가치고 많이 좌우된다는 것을 직접 느꼈다. 세 가지 음식이 완성된 후 각각 시식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정말 그 맛은 엄청났다. 도시 생활을 하면서 주로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각각 음식의 맛을 잘 못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 계속 먹고 싶어지고 손이 가는 맛이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간이 되어 있는 음식의 맛으로부터 음식이 본래 가지고 있는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 3. 가지소박이
그림 5. 떡전골
그림 6. 타래과
종가 음식을 만들어 본 후 명재 고택을 둘러보면서 그와 관련된 역사 해설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해설을 통해 고택이 얼마나 자연과 어우러져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을 향한 배려 등을 품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앞서 말한 것처럼 산이 고택을 감싸 안고 있는 형상을 가지고 있고, 사랑채 누마루 아래에는 작은 돌들로 금강산을 형상화한 석가산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사랑채 앞에는 조그마한 향나무 숲을 구성해 놓았는데, 향나무는 옛날부터 물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우물가에 향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또한 이러한 숲을 만들어서 여인들이 우물에서 물을 기를 때 가려주는 역할을 해주어 여을 배려해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 내부에 들어가기 전에 대문채를 보면 아랫부분에 틈을 널찍하게 만들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신발을 보고 누가 들어오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만약 고무신이나 비단신이면 높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이기에 안방마님이 나와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채 통해 안채로 들어오면 정방향에 가까운 안마당을 안채가 n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채와 광채 사이를 살펴보면 뒤로 갈수록 점점 폭이 좁아지는 형태를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이 모습을 보고 건물이 기울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이 안에서도 지혜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는 ‘베르누이’의 정리와 유사한 적용기법인데, 남쪽에서 북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원리는 바람이 좁은 구역에서 넓은 구역으로 빠져나가면서 속도가 느려지고 강도도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운 북풍이 이 길을 지나가면 세기가 줄어들고, 뜨거운 남풍이 통과하면 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재고택에서 사는 사람들은 여름과 겨울에도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굴뚝에 있어서도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굴뚝을 낮게 설치하여 해충이나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연기가 집 아래쪽으로 퍼지도록 만들었다. 또한 당시 굶주리는 백성들이 굴뚝의 연기를 보고 허기질 것을 염려해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밖으로 세어나가는 것을 방지했다.
그림 7. 굴뚝
사랑채의 경우 사랑방과, 작은 부엌, 작은 사랑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각자 방을 사용한다. 그러나 명재 윤증의 경우 찾아오는 손님이 항상 많았기 때문에 손님이 많아지면 방문을 터서 마치 강당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 그 문을 ‘안고지기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미닫이로 먼저 열고, 다시 문틀과 문짝이 맞물린 상태에서 여닫이로 열게 된다. 보통 사가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를 명재 윤증 고택 답사를 통해 볼 수 있어서 너무나 신기했다. 설명을 들으면서 바라보는 바깥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치 한편의 자연 다큐멘터리나 사진관에서 멋진 장관을 보는듯한 형상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안에서 바라보는 한옥의 모습을 확실히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멋이 느껴졌었다.
그림 8. 사랑방
그림 9. 사랑채 안에서의 경관
5. 마치며
명재 고택에서의 하루는 마치 잠시 조선시대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이동을 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한옥에서의 하룻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곳에서 하루 머물면서 고택에 대한 역사와 한욱의 구조물과 건축의 방식에 담겨져 있는 삶에 대한 배려와 조상의 지혜를 잠시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아름다운 고택이 후손들에 의해 계속해서 사용되고 가꿔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줘서 너무나도 감사한 하루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이제 다시 돌아갈 도시생활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현장은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고 다시 한번 더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다.
참고문헌:
김민수, “윤증 ”스승 송시열과 대립하다“, <한국사콘텐츠>,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3
김주형, “논산 명재고택, 지혜와 배려와 과학으로 지은 집”,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4/08/0200000000AKR20150408048400805.HTML?input=119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