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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운문사사리암 원문보기 글쓴이: 각현(화봉)
소통과 배려
講師:全弘杰
多言數窮 不如守中-老子 道德經
音聲未語傳의 소식
虛空一點眞消息
宇宙空間幾得知
目擊道存
子曰 二三者는 以我爲隱乎아 吾無隱乎爾로다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니라(論語)
회당선사 일화
音聲敎體
대관령을 내려오며 푸른 산을 껴안고 있는 자욱한 안개를 보는 순간 무심코 한 생각이 퍼득 떠올랐습니다
산의 덕성은 안개까지도 거둘 수 있는 여유가 있기에 무척 든든해 보였습니다
자연은 그대로가 산하대지의 교과서입니다
문득 시 한구를 지었습니다
雖誇雲霧千萬變
屹立關嶺元不動
비록 구름과 안개가 수 많은 변화를 자랑하지만
우뚝 솟은 대관령은 원래가 움직임이 없더라
산의 본체가 眞如(진여)라면 구름과 안개는 번뇌자리. 망상. 無明(무명)의 자리라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퍼뜩 무명을 제거하려만 하지만 말고 무명의 실체는 본래로 없기에 더불어 즐기면 된다는 것을 . 거기에 매이지만 않으면 되는 데 그 안개와 구름을 제거할려고만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였습니까?
지난 몇 년간은 깊은 생각을 하게하는 힘들고도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피상적이고 허상적인 것을 쫓아다니던 공부 세계를 다시금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있어 인간 실존의 苦는 무엇인가?
하나는 나로 말미암은 것
둘째는 외부로부터 말미암은 것
으로 나눈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동업중생의 세계이기에 어찌 보면 상호의존성의 연기적 법칙성에 의해 어울러진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근대 과학에서 말하는 the butterfly effect 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곳에서 치는 나비날개의 움직임이 태평양의 파도에 큰 물결을 일으킨다는 것을....
개체 개체는 외로움의 존재이지만 서로 더불어 살아감으로써 상호공존성과 튼튼하게 매듭져 있는 굵은 동체성을..
예를 들어 산을 오르다 보면 나무 나무는 개체이지만 산을 내려와서 뒤를 돌아보면 산은 항상 원형의 숲을 이룬다는 것을......
이것이 확장되면
나 +사회의 관계성으로 번지게 될 것입니다
(상호 유기적 관계성)
저는 대학 시절 고민이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자학과 미친듯한 광기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시대의 어려움과 개인사의 고민이 많을 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을
첫째는 사회의 잘못된 현실을 직접 부셔져 가는 법
둘째는 나의 개체를 맑게 정화해서 그것의 확장으로 사회를 정화하는 법
두 번째의 방법이 늦기는 해도 결국은 이 작업이 세상을 바꾸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바깥으로부터 들어와도 자신의 정화작업이 항상 근본적으로 걸린다는 것을
그러자면 우선 첫째로 자기 修身의 작업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맹자에도 이르듯이
吾未聞 枉己而正人者로소이니 況 辱己而正天下者乎아 聖人之行이 不同也라 或遠或近하며 或去或不去나 歸는 潔其身而已니라
내 일찍이 듣지 못했다. 자기를 굽혀 가면서 남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하물며 자기를 욕되게 하면서 어찌 천하를 바르게 할 생각을 하겠는가
성인의 행동이 같지 않을 수가 있다 .임금의 곁에서 충고하는 이도 있고. 임금의 곁을 떠나서 홀로 자신을 지키는 이도 있지만 돌아가고자 하는 바는 결국 그 몸을 깨끗이 하고자 함에 있다
어부사의 굴원과 어부의 비유
자기자신의 정화작업이 사회를 맑게하는 근본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회정화는 바른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잘 가르쳐야합니다
의사 학자 교육자 성직자는 사회 지식인은 거짓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열자에 나오는 欺心의 비유가 생각날 것입니다
갈매기 비유
한아이가 바다에 나가면 아이의 주변으로 갈매기 날라와 어깨에 안곤 하자 동네 사람들이 아이의 신기로움을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야기하였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너 이런 일이 있다는 데 사실이냐? 고 묻자 아이가 대답하길 그러하다고 하자 아버지가 너 내일 바닷가에 나가면 갈매기가 앉거든 잡아 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바닷가에 가자 갈매기가 공중에서 맴돌 뿐 곁으로 오지 않더라는 이야기이다
세상법은 미묘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자. 남을 속이려는 자들은 깊이 명심할일이다
공부는 첫째로 자기를 속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위에서 전개하던
고(苦)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업의 소산
과거+현재(자기가 만든 것)
문제 해결방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지난 날의 참회(모든 것을 자기 반성으로 돌릴 것)
둘째 순간 순간 밝음을 지켜가면 언젠가는 그 밝음의 확산으로 어둠이 끼어들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귀신 굴을 만들지 말것)
셋째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자
넷째 순간 순간 깨어 있는 마음(생활 禪)
다섯째 허공성으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살자
과거없는 현재없고 현재없는 미래가 없는 법
현재의 밝음을 지속해가면 미래는 明若觀火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봄빛이 온누리에 그윽히 밀려와 있습니다
자기 無盡藏의 보배를 잘 간직하시길 바라며
자기 것이 든든한 이는 결코 남의 보배를 탐내지 않는 법입니다
항상 자기 노력을 하지 않는 이들이 남의 것을 견주고 탐내는 법입니다
당 장유한
白玉堂前一樹梅
今朝忽見數花開
我家門戶重重閉
春色緣何入得來
백옥당 앞에 매화 한그루가 있는 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몇 송이가 피었네
우리 집 대문은 겹겹이 닫혔는 데
아! 어디로 봄빛이 타고 들어 왔는가
열린 마음에서만 밝은 빛이 들어온다는 것을.........
열린 마음에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글은 조화를 이루는 글입니다
조화는 배려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배려는 자기하심(下心)을 통해 남을 이해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淸江淸兮白鷗邊
白鷗白兮淸江邊
淸江不厭白鷗白
白鷗長在淸江邊 -李土亭선생
맑은 강의 맑음이여! 흰 갈매기의 곁에 있네
흰 갈매기의 흼이여! 맑은 강가에서 노니네
맑은 강은 흰 갈매기의 흼을 싫어하지 아니하여
흰 갈매기는 오래도록 맑은 강가에서 노니네
다음 글은 세상을 살면서 고민스러울 때 보는 글입니다
彩筆描空空不染
利刀割水水無痕
人心安靜如空水
與物自然無怨恩
물감을 허공에 칠한들 허공이 물들며
칼로 물을 끊은 들 물이 끊기랴
사람 마음 안정됨이 물과 허공같으면
무슨 물건 대한들 밉고 고움이 있으랴
江湖雖無碍人之心
時人渡不得故
江湖碍人去
聖人雖無瞞人之心
時人渡不得故
聖人瞞人去 海眼禪師(海眼集)
강과 호수가 비록 사람에게 장애를 주려는 마음이 없으나
시인들이 강과 호수를 건너가지 못하기 때문에
강호가 사람을 막는 것 같고
성인이 비록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 없지마는
시인들이 성인이 말씀한 도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을 속인 것 같이 된다
한계선상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생각 관념이 한계선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나온 세월 돌아다보니
인간은 이 세상 어느 것이고 영원한 것이 없는 데 무상한 것을 영원으로 착각하며 살다가 세파에 시달리며 이제사 깊은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현상계의 모든 것도 찰나 찰나 변하는 데 인간이 가진 사고 감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는 깊은 차이가 있어 한 순간 한 순간 자기를 점검하지 않으면 깊은 공부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국 천하 문장가인소동파가 鎭江(진강)(금산사가 있는 고을 이름)에 있을 때 하루는 讚佛偈(찬불게) 한 수를 지었는 데
聖主天中天(성주천중천)
毫光照大千(호광조대천)
八風吹不動(팔풍취부동)
端坐紫金蓮(단좌자금련)
부처님께서는 하늘 가운데 하늘이어서
백호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네
팔풍의 모진 바람 불어와도 움직이지 않으시니
자금색 연꽃 위에 단정히 앉아 계시네
이런 게송을 지어 놓고 금산사에 보내어 불인(佛印) 선사에게 인증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스님이 다보고 나서 시의 뒷 편에 "방귀를 뀌었구나. 방귀를 뀌었구나(放屁 放屁) 하는 네 자의 평을 적어서 소동파에게 보냈다. 소동파가 받아보고는 그 즉시 강을 건너 금산으로 와서 불인선사에게 물었다. "제 시가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불인선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팔풍의 모진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해놓고, 결국 이 방귀 두 글자에 매여서 강을 건너 오셨군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은 하기 쉬워도 행을 할 수 없다면 소동파와 똑 같은 입장일겁니다
한 가지 일에도 화를 내면서 무슨 "八風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여러분 뿐만 아니라 지금 제 자신에게 사무치게 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부의 점검은 깊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연마하는 제련소와 같은 곳이 불교의 선불장(選佛場)입니다
여러분들 같이 한번 따라해 보세요
보살은 다른 일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 마음을 깨닫는 것일 뿐이다
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온갖 중생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까닭이다
만약 제 마음이 청정하면 온갖 중생의 마음도 청정해진다.
제 마음의 體性은 곧 일체중생의 體性이니
제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하면
온갖 중생의 더러움을 제거함이 된다.
또한 제 마음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하면
온갖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함이 된다.
상대를 보지 말고 다만 자기 자신을 보라
상대의 허물을 탓하지 말고
다만 자신의 허물을 탓하라.
온갖 중생의 마음을 깨닫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자신의 마음을 깨달으라.
상대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말고
다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라.
내 마음에 탐심이 있기 때문에
탐욕에 찬 사람을 만나게 되고
네 마음에 성냄이 있기 때문에
상대의 화를 받게 된다.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경계는 내 마음의 나툼이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온통 부처만 보이지만
어리석은 중생의 눈에는 온통 고통받는 중생 뿐이다.
문제는 상대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어리석은 이는 상대를 바꾸려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나를 바꾼다.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뀌는 까닭이다.
이 세상 또한 내마음의 다툼이다.
부처 또한 내 마음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청정하면 세계가 청정하고
내 마음을 깨달으면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된다.
다만 내 자신을 보고
다만 내 마음을 깨달으라.
대장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복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복을 지어갈 뿐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 남을 위한 보살도를 행하고 탐진치 삼독의 거센 불길을 스스로 다스려 간다면 세상이야말로 자신을 연마하는 실전의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평탄한 곳에서는 음심(淫心) 일어나지만 옛글에도 "飢寒에 發道心"이라 라고
배고프고 추울때 道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길래 維摩經에서도
高原陸地에 不生蓮花하고(고원육지에 불생연화하고)
卑濕汚泥에 乃生此花라(비습오니에 내생차화라)
높은 동산 좋은 땅에 연꽃이 피지 않고
낮고 젖은 더러운 진흙에 연꽃이 핀다라 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돌아올 수 없는 이 기간을 자기의 멋진 미래의 터전으로 만드십시오
古人의 글에
盡日尋春不見春(진일심춘불견춘)
芒鞋踏破隴頭雲(망혜답파롱두운)
歸來遇過梅花下(귀래우과매화하)
春在枝頭已十方(춘재지두이시방)
온 종일 봄을 찾아 헤메었어요
짚 신이 다 닳도록 헤매었어요
돌아와 뒷 뜰의 매화가지를 움켜 잡으니
봄은 이미 매화가지에 무르 익었더라.
이 글은 마음을 찾으러 온갖 곳을 헤매었지마는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 있더라는 비유입니다.
현대인은 깊은 마음병을 앓고 있습니다.
육체의 병은 의사가 고쳐주면 되지만 마음 병은 누구가 고쳐주질 못합니다
부처님은 심의(心醫)와 같은 분이십니다.
불법은 산하대지 모든 경계가 다 내 마음이 지은 바라고 합니다(一切唯心造)
그러기에
우인은 제경불망심이어든(愚人은 除境不忘心이어든)
지자는 망심부제경이라(智者는 忘心不除境이라)하시니
어일체처에 무심즉(於一切處에 無心則)
종종차별경계가 자무의라(種種差別境界가 自無矣)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는 제거하지만 마음을 잊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는 마음은 잊는 데 경계를 잊지 못한다.
일체처에 무심하면 갖가지 차별 경계가 자연히 없어지리라.
중국의 방거사는
但自無心於萬物(단자무심어만물)
何妨萬物常圍繞(하방만물상위요)
鐵牛不怕獅子吼(철우불파사자후)
恰似木人見花鳥(흡사목인견화조)
木人本體自無情(목인본체자무정)
花鳥逢人亦不驚(화조봉인역불경)
心境如如只遮是(심경여여지차시)
何慮菩提道不成(하려보리도불성)
다만 스스로 만물에 마음이 없으면
만물이 항상 둘러싼들 무슨 방해가 될 것인가?
철로 된 소는 사자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흡사 나무로 된 사람이 꽃과 새를 보듯
나무로 된 사람은 본래 몸 자체가 정이 없어서
꽃과 새가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 않는다
마음과 경계가 여여하여 이러하거든
어찌 보리도를 이루지 못함을 걱정하겠는가?
이 마음을 찾는 법을 맹자에서도 사람이 개 돼지를 기르는데 잃어 버리면 찾을 줄는 아는 데 마음을 잃어버리면 찾을 줄을 모르니 이야말로 불쌍한 일이 아닐 수가 없구나!
성경에서도
내가 돌이켜 동자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날 수가 없다.
동자가 된다는 것은 천진한 그 마음자리를 비유한 말이리라.
佛經에서도
도망간 여인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것이 어느 것이 나은가?
이렇게 마음을 찾는 법을 다양하게 이야기했지만, 마음이란 구녘을 어떻게 확연히 찾아가는 법을 설한 것이 능엄경에 있습니다.
불교의 능엄경에 보면 아란이 도력이 약해 마등가녀의 환술에 빠져 파계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의 타심통으로 끌려나와 마음의 실체를 묻는 대화가 나옵니다.
만일 마음이 몸 안에 있다면 창자가 자라고 피가 흐르고 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데 보지 못한다. 마치 등불이 방안을 비추고 밖을 비추듯이....
마음이 몸 밖에 있다면 몸은 몸이요 마음이 따로 돌아 다녀야 할 것이다.
내가 배가 고픈 데 남이 나를 대신해서 밥을 먹은들 배가 부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도대체 마음의 본체가 어느 곳에 있겠는가?
본래부터 모든 중생들이 처음부터 알 수 없는 업의 흐름 속에 얽혀져 어리석고 망령되게 거듭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첫째는 나고 죽음의 근본인 어둡고 어리석음의 마음을 자기의 본래의 마음 바탕인줄 알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깨달음이 본체인 청정한 본래의 마음이 자기 위에 갖추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 보이면 눈은 이것을 보고 마음은 이것을 안다. 그러나 그 아는 마음은 본래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요. 분별망상의 생각에서 헤아리는 마음이다.
이 헤아리는 마음은 물욕으로 부터 일어나 자기에게 편리한 것을 헤아리는 마음이요 인연에 따라서 일어난 마음이요 경계에 부딪쳐서 일어난 마음이라 참모습의 바탕이 없고 모양이 없고 변하여 흘러가는 마음이다 . 이 마음을 실체가 있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어리석고 어두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맑고 깨끗한 본래의 마음이 있다. 그것이 밖에 있는 인연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번뇌의 티끌 때문에 덮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번뇌는 손님이요 주인이 아니다. 하늘 가운데 떠 있는 달은 잠깐 구름에 덮혀 있으나, 구름에서 더럽힘도 없고 또한 움직여지는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움직이는 바깥 티끌의(客塵)의 번뇌를 자기의 본성인 줄로 생각하면 안된다.
손님인 客이 갔다고 해서 여관까지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인연에 의지해서 생겼다가 없어지는 분별심과 헤아리는 마음이 없어졌다고 해서 자기의 본심까지 없어졌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밖의 인연에 의하여 변천하고 헤아리는 마음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다
이곳에 강당이 있는 데 태양이 나와서 비추면 밝아지고 태양이 지나서 넘어가면 어둡게 된다고 하자. 밝은 것은 태양에게로 돌려 보내고, 어두운 것은 밤으로 돌려 보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밝음과 어두움을 아는 것은 어는 곳으로 돌려 보낼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은 마음의 본성인 본체로 돌려 보낼 수 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태양이 나타나서 밝다고 보는 것도 한 때의 마음이요, 저녁이 되어 태양이 넘어가고 어둡다고 보는 것도 한 때의 마음이다. 이와 같이 밝고 어두움인 밖의 인연에 끌려서 밝고 어두운 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마는 밝고 어두움을 아는 마음은 일시적인 마음이요. 마음의 본체는 아니다. 그 밝고 어두움을 아는 근본이 마음의 본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밖의 인연에 끌려서 생겼다 없어지는 착하고, 악하고, 사랑스럽고, 미워하는 생각은 일시적인 마음이요, 밖의 티끌이요, 밖의 티끌에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마음이 본래 청정한 마음이다.
이렇게 불교는 자기를 찾는 종교입니다.
이런 비유를 옛 스님들은
此道人人分上事(차도인인분상사)
如何擲地不回顧(여하척지불회고)
飮飡困眠非他物(음손곤면비타물)
可笑騎牛更覓牛(가소기우갱멱우)
이 공부는 사람마다 자기 일인데
어찌하여 버려두고 돌아보지 않는고?
배고프면 밥먹고 곤하면 잠자면서
우습구나 소를 타고 소를 찾네
위의 마음자리를 찾는 법을 선사들은 단박에 풀어줍니다
어떤 스님이 석두 희천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선사가 대답하기를
"누가 너를 묶었느냐?'
어떤 것이 정토(淨土)입니까?
"누가 너를 더럽혔느냐?"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누가 너에게 생사를 주었느냐"
이런 법문을 들으면
불법은 세간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마음의 당처를 확연히 안다면 그야말로 이 자리가 바로 불국토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이와 같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정진합시다.
끝으로 황벽선사의 게송 한 수를 읊겠습니다.
塵勞永脫事非常(진로영탈사비상)
緊把繩頭做一場(긴파승두주일장)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띠끌같은 수고로움 영원히 벗어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니
한바탕 고삐 잡고 노력할지어다.
한 번의 차가로움이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창 앞에 풀을 베지 않은 이유
찌는 듯한 더위, 느티나무아래서 사납게 쏟아지는 매미울음 소리를 벗삼아 朱子의 性理大典을 읽다가 마음에 너무나 흡족히 다가오는 구절이 있어 번역을 하고 마음에 평생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다.
人在天地之間에 與萬物로 同流하나니 天이 幾時에 分別出是人是物인가
朱子는 窓前草를 不除去하니 卽是謂生意與自家一般이니라
(인재천지간에 여만물로 동류하나니 천이 기시에 분별출시인시물인가
주자는 창전초를 부제거하니 즉시위생의여자가일반이니라)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과 더불어 흐르나니, 하늘이 어느 때 사람과 만물을 분별해 냈는가(이는 마치 張橫渠(장횡거)의 天地與我同根이요 萬物與我一體라(천지여아동근이요 만물여아일체라)사상을 보는 듯하다.
주자는 창 앞의 풀을 제거하지 않았으니 곧 이것은 生意(한 생각을 내는 것, 불교에서 이르는 무명.망상.번뇌)와 자기 집이 일반(같음)임을 이르는 것이다(다시말해 바깥의 풀을 벤들 마음 속에 번뇌의 찌거기가 남아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기 때문에 풀을 베지 않은 것이다)
요사이와 같이 겉을 너무 꾸미는 포장사회의 모습을 볼 때 내 자신을 갈고 닦을 수있는 좋은 경구가 되는 것 같아 마음에 흡족하다.
그러나 心法의 공부가 進一步(진일보)하면 無明實性卽佛性이요 幻化空身卽法身이라(무명실성즉불성이요 환화공신즉법신이라)(무명의 거친 번뇌 덩어리가 바로 불성자리요. 헛된 몸 이것이 바로 부처의 법신자리이다)의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스승
"스승이란 무엇입니까?"
"스승이란 제자의 인생을 내다보고, 그 제자가 바른 길을
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天公吹雪綠葉白
縱橫下雪變山川
東奔西走驛馬煞
何時定着得安樂 - 왕산중학교로 가는 도중 차안에서
하느님은 눈을 불어 푸른 잎을 희게 만드는 데
종횡으로 쏟아지는 눈은 산천을 변모시키네.
동쪽으로 달아나고 서쪽으로 달리는 역마살인생
어느 때나 정착을 하여 마음의 안락국을 얻을까?
3ㅇ여 년전 강릉 동인병원에 누워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보며
無香雪花虛空發
凝雪松枝噴寒氣
향기없는 눈꽃이 허공에서 피어나는 데
눈에 엉긴 솔가지 찬 기운 뽑아내네
감회가 새롭습니다.
오늘 학생들 수업은 병원시절 병원탈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하였습니다.
병원에서 탈출시 침대 속에 베게를 주위에서 빌려 사람이 자는 것처럼 만들어 놓고 탈출을 하자 제가 없을 시 병원과장님과 간호사 회진시 일이 벌어졌습니다.
깨우자 뭔가 감각이 이상하자 문제가 생긴 것인 줄 알고 간호원들이 저를 흔들자 딱딱한 느낌이 들어 환자가 이상이 생긴 줄 알고 흔들자 베게가 쏟아지자 주위의 환자분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다음에 또 탈출을 하여 목발을 집고 환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다음날 과장님이 저를 보고 회진시 저는 영문도 모르는 데 '전홍걸씨! 아픈 다리를 이끌고 동인병원을 선전하러 다니시느라 얼마나 수고롭겠습니까? 하는 이 유우머 한 마디에 제가 다음 날부터 탈출을 못하겠습디다.
10시에 간호사들이 돌고 붕대를 수시로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얻어 놓았다가 줄을 묶어 면회객들이 가져온 사과바구니를 엮어 후배들을 시켜 술을 공수하여 먹던 시절 하여간 저는 말썽도 많고 장난도 심하였습니다.
어릴 적 모자로 박쥐잡는 이야기부터 뱀잡는 이야기 산. 바다. 강을 보고 자라온 저는 답습적인 교과서 수업을 하지 않고 어릴 적 자연으로부터 배운 온갖 소재를 쓰니 학생들이 너무 좋아합니다.
이렇게 장난이 심하였으니 공부를 잘하였을까 하니? 아이들 답변이 즉시 아니오 합니다.
의사소통이 된 셈이죠.
그러면서 인생은 모른다.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 줄 모른다.
그러니 글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음의 德性과 항상 깨어있는 의식의 覺醒을 잊지 말라고 비유를 많이 들어줍니다
공부를 잘하는 이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지라 저는 집을 짓는데도 모든 돌 둥근 돌 세모돌이 필요하듯이 여러분 스스로 각자가 소중한 존재이고 서로 돕고 사는 상생의 법칙을 인식하라합니다.
방과후 수업에는 오언추구를 독송하자 한 시간에 40자의 글과 문장이 그대로 암송되는 것을 보고 글자교육보다는 문장교육을 시켜야한다는 것을 저는 강조합니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가다가 자연에서 배우고 내 마음의 탁한 기운을 자연과 아이들을 통해 정화를 시켜갈 것입니다.
군자의 교육방법 <맹자(孟子), 진심(盡心) 上30>
君子之所以教者五 군자는 교육방법이 다섯 가지다.
有如時雨化之者 ① 적시에 내리는 비처럼 교화시키는 방법
有成德者 ② 덕을 이루어주는 방법
有達財者 ③ 재능을 달통하게 해주는 방법
有答問者 ④ 질문에 대답해주는 방법
有私淑艾者 ⑤ 사적으로 착하게 다스리는 방법.
此五者 이 다섯 가지는
君子之所以教也 군자가 가르치는 방법이다.
재능이 극상(極上)이면 ①의 영재교육(英才敎育)
재능이 상위권이면 ②의 덕육(德育)
중상(中上)이면 ③의 문답(問答)방법
▲ 고소소명 고대대명(叩小小鳴 叩大大鳴) <예기(禮記), 학기(學記)>
선대문자여당종(善待問者如撞鐘) 질문-대답은 타종(打鐘)과 같다
고지이소자즉소명(叩之以小者則小鳴)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리고
고지이대자즉대명(叩之以大者則大鳴)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린다.
특별한 재주가 없다면 ④ 보통(普通)교육
하위권이라면 ⑤의 하우불이(下愚不移)교육 <논어 양화(陽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