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할아버지
최 화 웅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쉼없이 이어지며 변한다. 겨우네 발가벗은 가로수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행인을 응시(凝視)한다. 정녕 2020년 새봄은 오려는가? 늦게 본 외손녀 유나가 태어난 지 20개월째다. 알파벳 대소문자를 다 왼 손녀는 한글 첫걸음 목각 그림책 ‘이응이’에 빠졌다. 곧 말을 하려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온 집안을 바쁘게 뛰어다니다가도 아이패드를 안고 뒹굴고 그림책을 읽는다. 무엇을 하려는지 엄마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을 끌며 혼잣말을 지껄인다. 동영상이나 유아 프로그램을 보여 달라거나 크레용으로 스케치북에 황칠 하잔다. 요즘 들어 동요 ‘반짝 반짝 작은 별’과 영어 율동 동요 ‘머리 어깨, 무릎, 발(Head, Shoulders, Knees, and Toes)을 서서 두 손 들어 춤을 추고 머리와 발을 건둥건둥 짚어가며 노래하곤 한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이 귀엽고 놀랍다.
욕심 많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떠들어대는 세상에 코로나(COVID-19)가 기승이다. 코감기로 며칠 동안 놀이터에 나가지 못한 채 집안에 갇힌 유나는 나를 만나면 ‘할삐’라고 소리치며 반긴다. 문 여는 소리를 듣고 ‘할미 할삐’가 온줄 용케 안다. 얼마 전에는 콧물이 나오고 간간이 기침을 했다. 그래도 유나는 우리와 더불어 놀며 밥 먹고 기저귀 갈아 끼우며 그림책을 보다 낮잠을 잔다. 저녁에 샤워를 시키고 로션을 발라주며 예쁘다고 어루만지면 양손으로 할아버지의 볼을 쓰다듬는다. 밤 10시가 가까워 잠옷을 입히면 우리와 헤어진다. 우리는 매일 저녁 한 때나마 조손가정의 돌봄을 겪는다. 어쩌면 ‘베이비 그랜드’ 노릇을 하는 셈이다. 밤이 되어 헤어질 때면 현관까지 따라 나와 하이파이브에 코가 바닥에 닿도록 고개 숙여 인사하며 석별의 키스를 날린다. 지난주 유나에게 갈 때 아파트 건너편 동네빵집 ‘소원’에서 ‘몽블랑’과 식빵을 사다주었다. 그때부터 나를 보면 “할삐 빵”이라고 크게 소리친다.
빵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7세기다. 1629년 제주에 떠밀려온 화란인 박연이 “항상 마른 빵을 먹었다.”고 쓰고 1653년 효종 4년 화란동인도회사 무역선 스페로 호크호가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 산방산 기슭 용머리 해안에 표류했던 하멜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쓴 ‘하멜표류기’에 “배급 받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빵을 들고 가면 유나는 현관까지 달려 나와 ‘할삐 빵’이라 소리치며 좋아라 춤을 춘다. 빵을 담은 봉지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가 보다. 빈손이면 서운한 표정이다. 우리 동네빵집에서는 빵을 많이 굽지 않는다. 독실한 기독교인 부부가 일요일에는 가게 문을 닫아서 원하는 빵을 주말에 미리 사두어야 한다. 소원빵집의 빵을 먹어보면 담백한 맛이 아이들에게 먹일 만큼 믿음이 간다.
우리가 광안리에서 산 지 40년이 넘었다. 처음 단골빵집은 귀가 길목의 남천동 밀탑빵집이었으나 문을 닫았다. 그 뒤로 태극당과 옵스를 번갈아 간다. 동네빵집 태극당은 바케트, 옵스는 팥빵과 케이크가 일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문을 연 소원빵집은 갓 구워낸 몽블랑과 식빵이 부드럽고 특히 맛있다. 아침 일찍 젊은 아저씨가 빵을 굽기 시작하는 소원빵집은 해거름이면 거의 다 팔려 망종이 울릴 때면 가게 문을 닫는다. 빵은 몇 종류 굽지 않고 양도 적어서 늦게 가면 헛걸음을 치기 일쑤다. 외출을 하는 동네 사람들은 미리 빵을 사서 맡겨두고 볼일을 보기도 한다. 밀탑이 문을 닫은 뒤로 다양한 빵을 굽고 케이크가 좋은 남천동 옵스빵집을 새 단골로 삼았다. 아침을 바케트와 야채로 하는 우리 집의 식탁에는 빵과 커피가 떨어지지 않는다.
오랜 단골인 광안동 태극당은 대를 이은 동네빵집이고 소원빵집은 우리가 2년 전 이사한 아파트 앞의 조용한 빵집이다. 옵스 빵집은 해변시장 건너편에서 삼익제과로 출발하여 옵스(Ops)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여신이다. Ops를 ‘Our Peaceful Smile(우리 모두의 평화로운 미소)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중앙동 백구당과 창선동 B&C와 함께 부산의 3대 빵집 중 하나다. 동네빵집들은 하나같이 반죽으로부터 굽기까지 전 과정을 손으로 만든다. 어린 손녀에게 먹일 빵을 함부로 살 수 없어 망설여진다. 요즘 손녀 유나가 가족을 부르는 목소리보다 ‘빵’이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먹성만큼이나 우렁차다. 유나는 할아버지가 전해주는 빵이 맛있고 기다려지는가 보다.
나의 기억으로 내가 처음 빵을 먹은 것은 6.25가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49년이었다. 그때 나는 지금의 천주교 서울 대교구 명동성당 자리에 살트 성바오로 수녀회가 설립한 계성유치원에 다녔다. 유치원에서는 간식으로 호빵을 나누어주었다. 어느 날 받아든 호빵에서 그만 벌레가 나온 게 아닌가! 나는 그 빵을 든 채 서서 울어버렸다. 여섯 살 때 유치원 간식으로 받아먹은 빵이 내 인생 첫 기억의 빵이었다. 계성 유치원을 거쳐 계성국민학교 1학년 때 6.25가 터졌다. 당시 큰형인 원(元)이 형이 세브란스에, 둘째 명자 누나가 덕수궁 건너편 이화여고에 웅(雄)이 형이 경기중학교, 네 살 위의 철(哲)이 형은 남산국민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이면 출근길의 아버지가 충무로부터 함께 걸어 나와 막내인 나를 남산 기슭의 명동성당 구내 성모상 앞까지 데려다 준 기억을 한다. 오늘도 지나간 일들이 낡은 시네마 필름속 늘어진 믿음으로 스친다.
첫댓글 사랑하는 외손녀의 재롱을 보면서 삶의 뒤안을 되돌아보는 그리움님의 모습이 숙연하네요! 세월은 마냥 무심히 흐르는 것 같지만 생의 변곡점마다 낱낱의 기억들을 저장시키나 봅니다. 손녀에서 오버랩되는 그리움님의 유년도 오랫동안 아름답게 간직되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베드로씨! 잘 지내시죠?
세월에 기댄 채 기억의 순간들을 침묵 속에 짜집기하며 새봄을 기다립니다.
다시 오는 봄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그리고 삶만이 영원한 믿음입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갑자기 빵이 먹고 싶습니다.
국장님 외손녀 유나를 얼마나 이뻐하시는지 글 속에 꿀처럼 뚝뚝 흐릅니다.
유나 감기가 빨리 낫기를 국장님 건강도 좋아 지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시몬씨, 감사합니다.^^*
본문에서
'오늘도 지나간 일들이 낡은 시네마 필름속 믿음처럼 스친다.'
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도 나이 먹어 외손주를 캐어한지 15개월 몸은 힘들지만 사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피곤함에도 깊은 잠을 못이루고 매일처럼 지나간 일들이새록새록 낡고 늘어진 테잎을 되감는것처럼 소설을 쓰곤합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먼저 건필을 빌겠습니다.
저는 읽고 쓰며 손주와 지내는 일이 치유의 길입니다.
감사합니다.^^*
외손녀 유나에게는 훗날 빵 할아버지가 소충한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