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무라이(武士)의 닛뽄도(日本刀)
- 敬山 김 보경 씀 -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
이조 말 을미사변 때(1895. 10. 8 새벽)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를 시해(弑害)한 일본인 자객(刺客), 도오가쯔아키(藤勝顯)는 일본 본토에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어, 우리나라와 지근(至近) 거리에 있는, 예부터 일본 사무라이(武士)의 도시인 쿠슈우(九州)의 후꾸오까(福岡)에서 기획(企劃) 파견된 것이 분명하다.
현재 이 닛뽄도(日本刀) 칼은 칼집에, ‘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이 새겨진 체, 일본의 쿠슈우의 후구오카 시에 위치한 ‘쿠시다 신사(櫛田 神社)’에 잘 보관 중이라고 하는데, 명성황후의 목을 단번에 찌른 소위 히제도라고 불리는 예리한 닛뽄도(日本刀)이다.
이 닛뽄도는 일본인 자객이 그의 죄를 후일에 반성하면서 세상에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의뢰하였다는, 옛 에도시대(江戶時代 710~ 794)에 다다요시(忠吉)라는 명장인(名匠人)이 만든 명검(名劍)이라고 한다.
2.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칼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1592 ~98 2회 7년 동안)때, 우리나라를 침탈한 일본의 괴수(魁首)인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명검에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당시 오다노부나가의 부하였던 오사카 성(城) 무장(武將)인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도꾸가와 이에하스(德川家康) 쇼군(將軍)을 드디어 굴복시킴으로서, 약 100년에 걸친 일본 난세(亂世)의 소위 센고구시대를 수습하고, 전 일본을 통일하여 ‘천하 인(天下 人)’임을 자칭(自稱)하고, 자기의 칼집에 이러한 대망의 뜻인 ‘天下 布武’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 닛뽄도(日本刀)의 유래(由來)와 고찰(考察)
옛날부터 일본(日本)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무라이(武士) 문화이다.
소위 이 사무라이 문화가 일본 사회를 전통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핵심 요소는 바로 닛뽄도(日本刀)로 대표되는 각종 도검류(刀劍類)인 것이다.
우리는 도검류를 한마디로 표현하여, ‘칼’이라는 단어(單語)를 쓰는데, 엄밀히 말하여 한문으로 도(刀)와 검(劍)은 구별된다.
즉, 도(刀)는 대상이 되는 무엇을 베기 위해 만든 연장 무기(鍊匠 武器)로서 한쪽 면에만 날카롭게 날이 세워져 있고, 검(劍)은 찌르기 위해 만든 무기로 양쪽에 날이 세워져 있다. 이를테면 부엌이나 정육점에서 사용하는 식칼은 도(刀)이고, 검술이나 올림픽의 경기용 펜싱 같은 것들은 검(劍)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특히, 전국시대 이후에 검(劍)보다 도(刀)를 주로 써왔는데, 닛뽄도는 예부터 일본 사무라이들의 필수 무기로서 그들의 잠자리에까지 휴대하여 왔다고 한다.
일본 도검(刀劍)의 유래는 기따 규슈(北 九州)의 야요이(彌生) 유적지에서 최초로 자취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초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사실은 우리나라의 백제(百濟)의 장인(匠人)인 들이 전수(傳受)시킨 것이다.
백제의 유명한 도검 장인들이 에도시대(江戶時代 710~794)에 중심인 나라(奈良) 가까이 있는 서 혼슈(西 本州)의 효고겐(兵庫縣)의 미끼시(三木市)로 도래(渡來)하여 처음에 자리를 잡아 닛뽄도의 고장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들 도래(渡來) 장인들이 만든 닛본도는 당대의 일본 무장(武將)들에게 명검으로 널리 알려지게 됨으로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많은 쇳물을 녹여 최상급의 닛뽄도를 만들어 두들기고 달구고 또 두드려서 정성스럽게 명검만을 만들어서,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들에게 공급함으로서 그들이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명검(名劍)이 되어왔다고 한다.
일본의 전국시대에(1580년)에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군벌(軍閥)에 의하여 점령된 미끼시는, 일본에서 특히 메이지시대(明治1868~1912)에 와서도 닛본도등 무기류의 주 생산 공급처가 되어 왔으며, 세계 2차 대전(大東亞 戰爭)때에는 필요한 많은 무기들을 다량 생산하여 도처의 전장(戰場)에 조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중요한 철강 무기, 선박 등 각종 하드웨어(Hardware)제품의 중추적인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이 이러한 역사적인 바탕 위에서 나름대로 도검문화(刀劍文化)를 독자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平安)시대 이후에 사무라이 계급이 급성장하면서 부터라고 하는데, 특히 1l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는 힘이 지배하였던 약육강식의 시대로 많은 명검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오랜 역사를 가진 닛뽄도를 오늘날까지 잘 보관하여 대대로 전하여져 오거나, 혹은 최근에 만들어지는 각종 닛뽄도 들은 무기라는 차원을 넘어서 예술품으로 인정받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난 것들을 자국 뿐만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 미미즈까(耳塚)
부연컨대, 일본의 옛 수도였던 교또(京都)지방의 미미즈까(耳塚)에서는 옛날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의 소름끼치는 슬픈 역사를 지금도 엿볼 수가 있는데, 우리 선조들이 수많이 희생된 ‘귀의 무덤’인, 소위 ‘이총(耳塚)’인 것이다.
조선 제 14대 선조 때 쳐들어 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흔적으로, 일본의 조선반도 침략군들은 전과(戰果)를 실증(實證)을 가지고 보고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머리 부분을 본국으로 보내는 야만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전황이 내륙으로 점점 깊어감에 따라, 조선인들의 잘린 목의 수가 점차로 늘어남에 따라 보내야할 짐(?)의 무게도 늘어나고 힘이 들어 번거롭게 되어, 일본군은 상부의 명에 의하여 아예 귀와 코만을 잘라서 소금에 절여 간단히 처리하여 가볍게 선편으로 본국으로 보내어 도요도미 히데요시에게 헌상(獻上)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헌상한 것들이 뒷날 지금의 귀 무덤, 즉 미미즈까(耳塚)에 집중적으로 묻어두게 되었다는 바, 이들 조선인들의 귀한 목숨을 베어간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인들이 휘두른 닛본도도, 아이로니칼(Ironical)하게도 위에서 설명한 바, 옛 백제의 장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전수한 작품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도요도미의 20만 침략군들이, 그리고 근세에 와서도 일제 36년 동안에 이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사무라이의 닛뽄도(日本刀)와 총칼로서 중무장하여 일본군들이 선량한 조선인들을 향하여 무소불위(無所不爲)로 무참히 휘두른 그들의 역사적인 만행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우리들의 비참한 과거 역사를 상기하고 명심하여, 우리들은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동단결하고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끝)
첫댓글 일본인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사나 봅니다. 사무라이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무도 정신이 있어 사욕에 동요되지 않은데 비하여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은 무자비한 행동으로 남의 나라를 짖밟고 백성들을 도륙하고,,,,,지금에 와서는 독도까지 빼앗으려는 우매한 작태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나라가 참으로 어려운 이 때 온 국민 合一하여 격퇴를 해야겠습니다. 다시한 번 흐뜨러진 정신을 깨우치게 하는 글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