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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독바위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두들 고향에 대한 추억과 향수, 부모와 친지 등에 대한 그리움에 들떠있다.
하지만 섬진강댐 수몰민들은 올 추석이 더 씁쓸하기만 하다.
삶의 터전을 한번 잃은 것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강제 이주당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섬진강댐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26년 운암제가 막아진 뒤 1930년대부터 진안
용담댐과 함께 본격 건립사업이 추진됐지만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면서
중단됐다.
그러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재추진돼
1965년 완공됐다.
당시 경제개발을 표방한 군사정권이 출범한 뒤 첫 대규모 SOC개발 프로젝트
이었던 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탱크를 타고 섬진강댐 준공식장에 참석했
다는 게 임실 주민들의 기억이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첫 치적 뒤에는 임실지역 수몰민들의 한 맺힌 애환이 서려
있었다.
5년만에 댐을 완공하기 위해 공사를 서둘러 강행하면서 가배수로를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댐이 완공되기도 전에 여름철 장마로 인해 댐 예정지역이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던 것.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자 당황한 정부와 전북도는 부랴부랴 현재의
운암면 소재지에다 집단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수몰민들을 긴급히 이주시켰다.
하지만 정부의 잘못된 판단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1969년 큰 홍수가 나자 댐 만수위선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집단 이주지역까지
물에 잠기는 사태가 빚어졌다.
당시 350여 세대가 침수피해를 당하자 당국은 뒤늦게 섬진강댐 재 측량에 나섰고,
결국 댐 홍수위선 안에다 집단 이주단지를 잘못 조성한 것이 확인됐다.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섬진강댐 수위를 정상수위 196.5m보다 5m를 낮춰
191.5m로 40년 가까이 운영해오다 지난 2003년부터 섬진강댐 재개발이란
명분을 내세워 댐 운영 정상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섬진강댐 재개발사업은 임실 운암소재지 253세대 주민들에게 또다시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수몰의 아픔을 딛고 어렵사리 재정착했지만 당국의 어처구니
없는 이주대책으로 다시 삶의 터전을 내놓아야 하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주대책과 보상에 있다. 두 번씩이나 고향을 등져야
하는 아픔을 겪는데도 지금까지 제대로 보상다운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 임실 수몰민들의 현실이다.
처음 댐 공사를 추진했던 일제는 (주)남선전기를 통해 헐값에 수몰용지만
매수했고 태평양전쟁 발발과 6·25 전쟁으로 보상업무가 중단되었다가
1962년에서야 주택이전과 이사비 이농비 등 명목으로 당시 세대당 고작
7만5000원을 지급했다는 것.
그것도 10년동안 모두 8차례에 걸쳐 나눠 지급함에 따라
그야말로 푼돈 수준에 그쳤다.
게다가 이주대책으로 추진한 경기도 안산 반월 폐염전 간척지와 부안 계화도
간척지는 현지 주민들의 반발과 텃세, 경작 불능 등으로 2000여 세대중
300여 세대만 정착한 채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섬진강댐 재개발사업과 관련, 수몰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이다.
수몰용지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데다 엉터리 행정으로 수몰선 내에다
이주시켜놓고 다시 쥐꼬리 보상을 내세워 삶터를 떠나라는 처사 때문이다.
더욱이 순창 적성댐 건립이 무산되면서 전남 광양시의 3단계 광역상수도
수원 확보를 위한 대안으로 섬진강댐 재개발사업을 추진하는데 따른 반감
또한 크지 않을 수 없다.
"힘없는 농민이라해서 생계대책도 없이 이렇게 두번씩이나
내쫓을 수가 있습니까" 임실 수몰민들의 한맺힌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권순택(정치부장)
첫댓글 산골짜기 근근함에 쓰디쓴 소나기만 내려 사는자의 마음은 황폐함뿐이네. 형상이 아름다워 눈을 감지만 운암강가의 이미 눈감은 선열들은 피눈물이 그치지 않네. 눌러대며 도장받아 종이 몇장 까짓거리에 목을 매고 죽을 일 -- 우리 더 이겨나갈 힘도 없는데 어려워만 가는 세상사에 탁한 한 숨 절로 나네 우린 잡초 재껴 괭이질하던 기술자의 아들과 딸.... 그리고 이곳이 나머지 행복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