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처럼 빨간 로즈밸리
보라색 기능성 품종 보라밸리
감자 왕국 미국 전문가들 관심
50종 중 심는 건 수미가 대부분
“태복이 맛은 끝내주는 데 꺼려”
식량 자주권에 종의 다양성 필수
1 춘천의 이청강씨가 키우는 10여 종의 감자들은 색상과 모양만큼이나 맛도 다양하다. 모두 우리가 육종한 고유품종들이다. 이씨가 키우는 감자들은 많은 양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여 있다.
춘천시를 왼쪽으로 두고 소양호 가는 길 중간. 신북면에 감자밭이 있다. 이청강(60)씨가 딸 미소(26)씨와 감자밭을 일구는 곳이다. 감자치고는 좀 특별하다. 10여 종이 넘는 다양한 감자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도 생소하다. 로즈밸리(홍감자)·보라밸리·청강·고구·구이·태복….
“국내 고유종입니다. 강원대에서 개발한 품종이구요. 제가 개발비를 주고 산 품종들입니다.”
감자는 전 세계 3000여 종이 있고, 국내에서 심고 있는 건 50여 종 미만. 문제는 대부분 수미 품종이라는 사실이다. 수미는 1978년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개발한 슈페리어 품종을 들여온 것이다. 한국 감자는 일본계와 미국계가 대세다. 특히 수미는 당대 최대의 보급종이다.
“보급종이란 나라에서 영농법도 알려주고, 많이 심도록 장려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회사의 감자칩 광고 영향으로 수미와 ‘수지’를 헷갈리기도 한다. 수미는 광고처럼 칩으로 튀기는 데는 좋지만, 쪄서 먹기에는 별로다. 명란알처럼 작은 입자로 부서지면서 파삭한 맛의 감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요즘 감자가 이상하다고 한다. 사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종자가 달라졌을 뿐이다. 옛날, 그 감자는 아마도 ‘남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미국 품종이었다가 영국으로 넘어가고, 그것을 일본의 가와다 남작(男爵)이라는 자가 조선반도에 이식했다. 그래서 품종명이 남작이다. 사람들은 이 감자를 ‘토종’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에서 남작에다가 ‘토종 강원도 감자’라고 붙여 팔기도 했다. 알다시피 감자는 외래종이니 전통적인 토종이 없다. 다만, 우리가 육종한 고유 품종은 있다. 그것이 이씨가 기르는 감자들이다.
2 이씨가 딸 미소씨와 밭에서 ‘태복’을 캐고 있다.
“수미가 병충해도 강하기도 하지만, 우선 시장에서 팔기 편합니다. 다른 품종을 시장에 내면 안 팔려요. 우리 감자 중에 태복이라는 게 있어요. 맛은 끝내주는데 수미랑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태복이라고 하면 께름칙해 합니다. 값도 3분지 2만 쳐줘요. 보급종이 아니어서 중개상들도 불안한 거예요. 안 팔리면 그들도 손해니까. 수미보다 좋은 감자인데 안 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감자는 대개 수미일 수밖에 없다. 농사는 육종-재배-소비의 3각이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감자시장은 수미만 심는 이상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수미는 일종의 화폐라고도 한다. 수미 1㎏은 얼마, 하는 식으로 늘 시장에서 실물 가치가 있다. 허나 한 가지 종이 시장을 장악한 것은 여러모로 문제다. 이씨의 표현을 빌면 ‘파근파근한 맛’의 다른 감자를 먹고 싶어도 소비자가 살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인터넷에서 ‘남작’이라고 쳐서 구매 시도를 해 보시라. 방법이 없다. 더러 경동시장 같은 데서 여름에 좌판에서 구경할 수 있을 정도다.
조금 웃기는 얘기인데, 내가 이탈리아에서 일할 때의 경험이다. 식당에서 일할 때, 감자가 필요해서 사장에게 구매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어떤 품종을 원하느냐”고 되물었다. 감자면 감자지, 품종이라니. 사장은 나를 시장에 데려갔다. 채소상 앞에서 감자를 골라 보라고 했다. 놀랐다. 10여 종이 넘는 감자가 있었다. 빨간 놈, 길쭉한 놈, 노란 놈, 굵고 큰 놈, 작고 빨간 놈, 발갛고 길쭉한 놈…. 한국에서 채소중개상에게 감자 품종이 어떤 게 있느냐고 물으면 “왕·대·중·소·조림용으로 나뉜다”는 대답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품종은 사라지고, 크기만 있다.
이씨가 기르는 감자는 ‘감자들’이다. 각기 쓰임새가 다르다. 그를 따라서 삽을 들고 감자를 캔다. 로즈밸리(홍감자)는 빨갛고 고구마처럼 생겼다. 태복은 보통 감자 모양인데 알이 아주 굵다. 구이라는 이름의 감자는 정말로 구이에 적당하다고 한다. 보라밸리라는 것도 있다. 이놈이 바로 2007년에 모스크바 감자박람회에서 1등상을 먹었다. 2009년에는 미국에 로열티 1만3000달러를 받고 종자를 수출한 놈이다. 보라색의 기능성 감자다. 미국은 감자 왕국이다. 감자 육종이나 재배, 수출, 활용에서 압도적 수준이다. 이씨의 감자는 한국에서는 몰라도 미국 전문가들이 알아준다. 이씨는 신북면의 이 감자밭 근처에서 팔자에도 없는 닭갈비집을 한다. 맛이 좋아서 돈을 제법 버는데, 모두 감자에 쏟아붓고 있다. 육종비로 큰돈을 썼고, 수확한 감자는 많은 양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서 잠잔다.
“강원대 임학태 교수에게 의뢰한 것들이에요. 감자은행도 하시는 분이고. 세계감자식량재단이라는 것도 같이 했고. 하여튼 감자가 가치보다 훨씬 제몫을 못해서 속상합니다.”
내가 이씨의 감자를 알게 된 건 필연적 계기였다. 뇨키라는 이탈리아식 감자요리를 만들어 파는데, 수미 품종으로는 맛이 안 났다. 다른 품종은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이 이씨의 홍감자를 소개했다. 달고 고소하며 개성이 강했다. ‘이게 감자 맞아’ 할 만큼 독특했다. 어떤 요리사든 독점적인 자신의 요리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 시작은 특별한 재료다. 홍감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3 닭갈비에 구이로 나오는 ‘보라밸리’는 2007년 모스크바 감자박람회에서 1등을 했으며 미국에 로열티를 받고 수출했다.
감자는 식량 자주권을 갖는 데도 아주 유용하다. 그러나 종의 다양성이 필수다. 1800년대 중반,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을 아사시키며 중세 페스트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아일랜드 대기근 사건도 종의 ‘몰빵’에서 시작됐다. 감자마름병이 퍼지자, 손을 쓸 수 없게 퍼져 나갔다. 영국 식민지로 감자에 식량의 상당수를 의존하던 구조도 문제였다.
“우리 식량에서 감자는 0.5% 정도밖에 비중이 안 됩니다. 유럽은 20% 가까이 됩니다만. 우리 식량 자급률이 쌀을 포함해도 20% 좀 넘는 수준인데, 감자를 잘 키우면 많이 좋을 텐데.”
우리는 감자 먹는 요리법이 별로 없다. 삶기에는 수미 종이 별로이고, 대개 볶거나 국에 넣어 끓이는 정도다. 종이 단순하니까 감자 값도 너무 들쑥날쑥하다. 비쌀 때는 10㎏에 10만원을 웃돈다. 그러니 감자 없는 감자탕이 나오고, ‘원래 감자탕의 감자란 돼지의 뼈를 뜻한다’는 해괴한 설이 퍼지기도 했다. 물론 낭설이다.
감자는 종을 잘 개량하고 재배하면 재미있는 일도 많이 생긴다.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지금의 위치를 차지한 건, 햄버거보다 감자튀김 덕이라는 말이 있다. 감자튀김이 훨씬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튀긴 것의 힘이다. 결정적으로 기다란 감자품종이 보급되면서 대히트를 쳤다는 설이 있다. 미국 아이다호 감자는 세로로 길다. 이것을 길게 튀겨서 포장지 밖으로 튀어나오게 보이도록 했다. 훨씬 양이 많아 보이고 먹음직스러웠다. 이런 뒷사정이 대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감자는 사실 사철 재배된다. 봄·여름·가을·겨울 감자가 다 있다. 계절적으로 11월부터 4월까지 수확량이 많이 줄 뿐이다. 우리 기후에 맞는 감자를 잘 재배하면 식량 사정도 좋아질 것이다. 길어도 100일 정도면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벼나 밀에 비해 생장기간이 짧다. 게다가 건강에도 아주 좋다. 비타민이 고루 들어 있고, 함유하고 있는 칼륨은 짜게 먹는 한국인에게 아주 좋다. 나트륨 배출을 돕는다. 고혈압과 위암 등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