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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실록비화 - 제4부
일본은 백제인이 세운 나라
제4부
부여 성충이 청년시절 때의 일이었다. 그는 지모가 뛰어나서 일찍이 낙랑(동예) 군사가 백제에 침략해 오자 고향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가 산중턱에 웅거하고 지키는데 늘 기묘한 계교로 많은 적을 죽였다. 그래서 낙랑의 장수가 사자에게 상자 하나를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나라를 위하는 그대들의 충절을 흠모하여 맛 있는 음식을 올리오?”
사람들이 상자를 열어 보려고 하자 부여 성충은 말했다.
“그 상자를 열지 마시오.”
사람들은 의아해 물었다.
“왜 열지 못하게 하옵니까?”
“그 상자는 열어서는 아니되오. 열면 큰 화를 불러 올 것이니 열지 말고 불 속에 넣어 버리시오.”
사람들이 상자를 불속에 넣자 그 속에 들었던 뱀, 굼벵이, 벌 따위가 나왔다. 이튿날 또 낙랑의 장수가 상자 하나를 보내자 사람들은 상자를 불에 넣을려고 하자 부여 성충은 말했다.
“그 상자는 불속에 넣지 말고 열어 보시오.”
하자 사람들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러자 그 속에는 화약과 염초 따위가 들어 있었다.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낙랑의 장수가 또 하나의 상자를 보내 왔는데 부여 성충은 톱으로 켜도록 하였다. 사람들이 상자를 톱으로 켜자 칼을 품은 장수가 허리가 끊어져 죽었다.
이 말이 의자왕의 귀에 들어가자 의자왕은 신하를 시켜 부여성충을 불렀다. 의자왕은 부여 성충에게
“그대의 지모는 내가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참으로 신통한 지혜를 가졌으니 앞 일에 대해 묻고자 하니 대답을 해 주구려.”
“말씀하시옵소서.”
“우리 백제의 앞 날이 어찌 되겠소?”
“폐하! 신라는 어느 나라보다 우리 백제에 원한을 많이 품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신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우리 백제를 칠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방비책을 세워야 할 줄로 아옵니다.”
부여성충의 말에 의자왕은
“신라가 침입해 오면 어디로 갈 것 같소?.”
부여 성충은 확신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선대왕께서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성엽성 남쪽지역에 있는 가잠성을 차지하시니 신라가 억울하고 원통해 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사옵니다. 하여 신라는 반드시 가잠성을 공격해 올 것이옵니다.”
“그러면 가잠성 수비를 증강시켜야 하지 않겠소?.”
“가잠성 성주 계백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장수로 비록 신라가 많은 군사로 포위하여 공격한다 하더라도 적의 혀를 찌르는 것이 병가의 상책이니 신라의 정예병이 가잠성을 공격해 오거든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군사를 출동시켜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그러면 어느 곳을 치는 것이 좋겠소?”
“신이 들은 바로는 대아성 성주 김품석이 김춘추의 딸 소량의 남편이 되어 권세를 믿고 군사와 백성을 학대하고 음탕하고 사치를 일삼아서 백성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지 이미 오래라고 하옵니다. 우리 백제에서 국상(國喪)이 있다는 말을 퍼뜨리면 신라에서 이 말을 듣고 수비가 한결 소흘해질 것이오니 이 틈을 이용하여 우리 군사가 대아성을 함락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공격하면 신라 전국이 크게 소란해 질 것이니 이때 신라를 치고 들어가 멸망시키는 것이 아주 쉬울 것이옵니다.”
“듣고 보니 그대와 같은 지략가는 고금에도 드문 일이오.”
의자왕은 부여 성충을 곧바로 상좌평에 임명하고 그의 전술에 따라 부여 성충의 아우인 장군 부여 윤충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신라의 대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장수 부여 윤충은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습작전으로 대아성을 공격하여 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의 비장(裨將) 금일을 생포한 후 금일을 이용하여 대아성 내부를 교란시켜 무너뜨리고 그 주변의 40여 성을 함께 얻었던 것이다.
그후 부여 성충은 의자왕에게 신임을 받아 의자왕의 눈과 귀와 손발이 되어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을 구사하였고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직접 만나 화친조약을 얻어낸 것이었다. 그런 충신이 간신으로 몰려 옥방에 갇힌 것이었다.
또한 부여 성충이 고구려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이해 득실을 따져 연개소문을 달래서 군사동맹의 조약이 거의 맺어지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이 갑자기 부여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했다. 부여 성충은 의심이 나서 탐지해 보니 신라의 사신으로 김춘추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동맹을 막고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신라가 총체적인 국가 위기로 몰리면서 김춘추는 개인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자체적으로 군사력이 약했던터라 김춘추는 고구려를 찾아가 원군을 요청한 것이었다. 김춘추가 온 이유를 미리 간파한 연개소문은 말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하옵컨데 우리나 그대들은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이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수도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낸다면 그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쟁에서 이긴 후에 옛 영토에 따라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仁義)로써 함께 다 나누어 다스리도록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원히 준수함을 계획함이 어떻겠소?”
연개소문은 오히려 삼국이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김춘추는 듣지 않아 애석한 일이었다고 하였다. 김춘추에게는 민족적 대업보다 백제군에 의해 비명에 죽어간 딸과 사위의 복수만이 머릿속에 담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부여 성충은 연개소문을 만나지 못하자 이렇게 글을 써 보냈다.
- 공이 당나라와 싸우지 않으면 모르지만 만일 당나라와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오. 왜냐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번번히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하였으니 수나라가 그 분명한 본보기요, 이제 백제가 만일 당나라와 연합하면 당나라는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략할 뿐 아니라 군대와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백제로 들어 와서 백제의 쌀로 밥을 해서 먹어 가며 남쪽에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니 그러면 고구려가 남쪽과 북쪽 양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인데 그 위험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당나라의 군대와 군수물자 운반의 관리가 백제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신라는 백제가 가로박고 있어 고구려를 도우려고 북쪽으로 올라오기가 어려우며 일찍이 백제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 밖 고현 안의 열 개 군을 점령한 것은 공이 잘 아는 바이니 신라가 오늘에 와서 고구려와 군사동맹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내일이라도 하루 아침에 마음을 바꾸어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땅을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증하겠습니까? -
연개소문은 이 같은 부여 성충의 글을 보고 신라의 김춘추는 방에 가두고 죽령 밖 욱리하 일대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부여 성충은 마침내 외교에 성공했다. 그런 부여 성충이 궁녀의 수를 대폭 늘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의자왕에게 올바르게 간언하다가 옥방에 갇혀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부여 성충은 죽기전에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듸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나라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무릇 전쟁에는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사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군(沈峴郡)의 길목을 가로 막아 적군이 그 안으로 절대로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백마강)의 언덕으로 들어 오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맞아야 방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면서 의자왕에게 마지막으로 충고하였다. 이때가 의자왕 재위 16년
이며(656년) 3월이었다.
이 무렵 백제의 조정은 한바탕 회오리 바람에 휩싸였다. 의자왕의 장남인 융(隆)과 차남인 효(效)는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데 그들이 외가(外家)끼리 권력 투쟁을 벌려 효(孝)의 외가가 융(隆)의 외가를 무너트리고 조정을 장악하면서 융(隆)은 폐태자(廢太子)가 되고 그 자리를 효(孝)가 차지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태자로 책봉된 융(隆)이 효(孝)로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융(隆)을 추종하던 신하들은 제거되고 효(孝)를 추종하는 신하들이 대거 등용되어 권력의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이때 상좌평 부여 성충은 이미 태자로 책봉된 융(隆)을 다시 서자(庶子)인 효(孝)로 교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 게다가 의자왕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다면서 올바른 말을 하자 결국 의자왕의 노여움은 사서 투옥 되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656년 6월 18일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중국대륙 하남성 낙양 서북쪽 황하변에 있는 협주를 거쳐 서해 바다를 건너 백마강 하구에 도착했다. 이런 가운데 백제 조정에서는 왕족 복신을 왜(倭)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제명천황(총독격)은 장군 무사라요치(武斯拏要治)으로 하여금 2만 7천명 병력과 무기를 5백여 척의 선박에 실고 백마강 하구연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전쟁의 위기에서도 의자왕은 많은 궁녀들의 치마폭 속에 묻혀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간언을 하는 부여 성충을 옥방에 가두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부여 성충은 물 한 모금 밥 알 하나 입에 넣지 않고 굶주림으로 생명이 꺼져가는 중에도 이렇듯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하였고 끝까지 올바른 말만 하였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는 부여 성충의 말을 의자왕은 듣지 않고 있다가 부여 성충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나자 은솔 의직(義直)이 말했다.
“당나라군이 백마강을 건너 올 때까지 그냥 두었다가 그들이 강을 건너 육지로 올라오면 일거에 무찌르면 승산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렇게 되면 신라군은 당나라의 원군을 믿고 경멸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즉 당나라군이 우리에게 패하는 것을 보면 겁이 나서 용기 있게 나오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당나라군과 결전하는 것이 상책인줄 아뢰옵니다.”
그러나 달솔 상영(常永)의 의견은 은솔 의직(義直)과 달랐다.
“당나라군이 강을 건너오면 그들은 속전속결로 싸우고자 할 것이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 신라는 이미 우리에게 여러 차례 패한 적이 있으므로 우리 백제군의 기세를 보면 사기가 꺾일 것인즉 우선 먼저 당나라군의 공격로를 막아 그들의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는 한편 일부의 군사들로 하여금 신라군을 공격하여 그 사기가 꺾인 뒤에 기회를 보아 전군이 합하여 총공격을 감행하면 우리 군사도 온전하고 나라도 안전하게 지킬 것이옵니다.”
이러한 상영의 말에 의자왕은 어떤 쪽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위사좌평 흥수(興首)가 태자 교체를 반대하다가 작은 마을인 고마미지(古馬彌知)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래서 의자왕은 사람을 보내어 방비책을 묻자 흥수가 말했다.
“당나라군은 병력 수가 많고 군율이 아주 엄하고 체계가 잘 잡힌 위에 전투대오가 신라와 더불어 함께 기국(埼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약 넓은 평원에서 싸운다면 승패를 예측하기가 어렵사옵니다. 기벌포(伎伐浦 : 白馬河)와 탄현군(炭俔郡 : 소부리군 인근)은 우리 백제의 중요한 길목이옵니다. 일당 백의 요새이니 용사를 뽑아 당나라군으로 하여금 기벌포를 들어서지 못하게 하며 폐하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어 그들이 군량미가 바닥이 나고 군사가 지칠 때를 기다리다가 그런 징후가 보이면 일시에 총공격을 감행하면 반드시 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흥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달솔 상영은 말했다.
“흥수가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초를 꺾었기 때문에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배신하려고 함이니 그 말을 들을 수 없사옵고 당나라 군사들이 기벌포에 들어 온다 하더라도 폭이 좁은 강에 여러 배에 나란히 하여 올 수 없을 것이니 신라군이 탄현군을 넘어 온다 하여도 지름길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여러 날이 걸려 한꺼번에 대군이 오지 못할 것이니 이 때를 노려 군사를 풀어 들이치면 적군은 독안에 든 쥐와 같이 전멸하게 될 것이옵니다.”
의자왕은 달솔 상영의 말을 받아 들여 당나라군에게 기벌포 진입을 허용하고 신라군을 탄현군 안으로 끌어 들여 일시에 공격을 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기벌포와 탄현 길이 열리자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해일처럼 밀려 들었고, 그 위세가 너무 강해 백제군은 막아설 수가 없었다. 그제야 의자왕은 좌평 흥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당황한 의자왕은 병관좌평 총상과 달솔 계백과 상영 세 장수에게 5천의 결사대를 주고 황산벌로 가서 최후의 결전으로 신라군의 공격을 막도록 명령했다. 계급상으로는 5천의 결사대를 총 지휘할 수 있는 장수는 병관좌평 총상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결사대를 이끌 장수는 계백이었다.
그런데 달솔 상영은 당나라군에게 기벌포를 열어주고 당나라군을 탄현군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는 엉터리 전술을 내놓은 터라 의자왕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5천 결사대를 이끌 장수는 계백이었다. 장수 계백은 백제의 운명을 짊어지고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결사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 살아서 신라인의 노비로 사는 치욕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비장한 각오로 황산벌에 이른 장수 계백은 세 곳에 진을 치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용감한 백제 군사들이여! 옛날 월나라 구차왕은 5천의 군사로 70만의 오나라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러자 말 위에서 창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우와! 하는 결사대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장수 계백은 더욱 목이 터져라 큰 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승리를 다짐한다!”
창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우와! 하는 결사대의 함성이 또 한번 천지를 진동했다. 장수 계백이 소리친 말은 월나라 구천왕의 5천 군대는 오나라 70만 군대와 싸워 이겼는데 백제 결사대 5천으로 신라의 5만 군대를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또한 자신은 이미 처자식을 죽이고 온 몸이라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비장한 각오와 군사들 역시 사소한 개인의 처지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라를 위해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말도 덧붙혔다. 장수 계백의 확신에 찬 말에 부하들은 사기가 높았고 그것은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천의 전투력으로 나타났다.
한편 백제를 치기 위해 신라 무열왕은 660년 1월에 상대등 금강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노심초사 당나라의 지원군 파병 소식을 기다렸다. 마침내 당나라 좌부위 대장군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삼고 당나라에 숙위하던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13만 군사를 원군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륙신라 무열왕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대륙에서 당나라군과 백제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은 660년 7월 10일에 백제 도성(소부리)을 칠 계획이었다. 신라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장수 김유신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자신은 금돌성에 머물었다.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에 도착한 것은 7월 9일(660년)이었고 이때 백제에서는 장수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대적해 맞섰다. 하지만 군사의 수가 적어 방어전으로 나섰다. 이때가 7월 9일이었다.
드디어 황산의 넓은 평원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그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한 전쟁이었다. 특히 이 전쟁은 중국 대륙에 진출해 있는 대륙 백제와 역시 대륙에 있는 대륙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벌어진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이 마치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상대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한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 사록에서도 대륙에 백제와 신라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한반도의 백마강은 중국에서는 백마하(白馬河)로 부른다. 뿐만 아니라 그외의 지명도 대륙 백제의 지명과 한반도 백제의 지명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래는 한반도 백제의 지명은 대륙 백제의 지명과는 달랐다. 예를 들면 한반도 백제 소부리의 원래 이름은 능천이다. 능천(綾川)은 백제때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이니, 죽수부리(竹樹夫里) 또는 인부리(仁夫里)라고도 한다. 신라때 능성(陵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나주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통일 신라 때 다시 능성(陵城) 고쳤다.
태종때 화순현과 합쳐서 순성(順城)이라고 일컬었으나 조금 있다가 도로 회복했다. 인조때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연주(連珠)라고도 한다. 남원은 백제때 고룡군(古龍郡)이니, 뒤에 한 나라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 남대방(南帶方)이 되었으며, 신라때 소경(小京)을 두고 남원으로 고쳤다. 태종때 화순현과 합쳐서 순성(順城)이라고 했다가 도로 회복했다. 이처럼 삼국 역사 중에 적지 않는 부분이 왜곡돼 안따깝기만 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짓거리를 했는가?
왕의 옆에 벼룩처럼 기생하는 간신(奸臣)들이 자국(自國)의 정치 정세를 최대한 미화(美化)하기 위한, 거기에다 사대사상에 젖어 중국의 것이라면 무조건 모방하는 중국맹종 관리들 때문이다. 거기에다 얄팍한 지식을 가진 ‘김부식’ ‘일연’이 역사를 기록한 것도 삼국 역사의 상당 부분을 왜곡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모르면 모른다고 기록해야지 모르면서 하는 척 했던 정황도 발견된다. 역사는 좋던 나쁘던 사실대로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렇지 못한 면이 곳곳에서 나타나 있다.
오늘날 최첨단 과학문명 시대에 살면서도 지금 일본은 과거 한반도와 만주대륙 침탈행위를 반성하기는커녕 한국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있는데 이는 일본은 배달 한민족인 백제인이 건국했다는 사실을 은폐 날조하기 위해서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과 싸운것도 중국대륙 산동반도지만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처럼 엉터리로 기록하면서 지명을 고친 것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백제의 멸망을 초대한 백제와 나.당(羅.唐) 연합군의 전쟁은 중국대륙의 산동반도에 있던 백제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다시 결전의 전투에 불이 붙었다.
“공격하라. 공격하라!”
신라군 진영에서 공격을 알리는 소라 나팔소리가 부웅 부웅! 하고 울리자 신라군의 제1진으로 선봉에 섰던 기마병은 창검을 뽑아 들고 일제히 말을 달려 백제군 진영으로 향해 돌진했다. 말발굽에서는 뽀얀 먼지가 구름처럼 일면서 황산 벌판을 하얗게 적셨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군사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창과 창이 두딪치면서 혈전이 벌어졌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장수 계백의 외치는 소리에 백제군의 사기는 다시 하늘을 찔렀고 달려드는 신라군의 목을 무차별 칼을 휘두르며 베어냈다. 전투는 양쪽 군사의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라군의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신라군은 퇴각했다. 그러나 신라군의 두 번째 공격이 다시 시작되자 계백의 결사대는 다시 대적했지만 이번에도 신라군의 사상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퇴각한 신라군은 세 번째 다시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백제군의 방어선을 뚫어내지 못하고 퇴각했다.
신라에서도 장수 김흠춘과 김품일이 말을 타고 네 번째 다시 백제군을 공격했지만 사기가 충천 한 백제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만 내고 물러서자 신라 장수 김흠춘과 김품일은 약간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신라군의 공격이 실패한 것이었다. 신라 진영으로 돌아 온 김품일은 김흠춘에게 말했다.
“장군! 백제군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매우 강합니다. 먼저 공격을 했다가는 우리가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테지. 나라의 운명이 달렸으니 목숨을 버린다는 각오로 싸울 수 밖에 없질 않는가. 그렇다고 우리도 물러설 수는...”
김흠춘은 말 위에서 김품일의 말을 받아 넘겼다. 신라군은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또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도 역시 김흠춘과 김품일이 선봉에 섰지만 이번에도 신라군은 백제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또 다시 공격을 감행했으나 역시 백제군의 방어선을 뚫는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많은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신라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신라 장수 김흠춘과 김품일은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극단적인 사기 진작책을 구사했다.
김흠춘은 아들 반굴을 적진에 뛰어 들어 죽게 하고 김품일 또한 아들 관창을 죽음의 마당으로 내몰았다. 백제의 장수 계백은 어린 소년이 말을 타고 공격해 오자 백제군 한 명이 나가 상대하여 싸워보니 칼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지만 소년은 3합을 겨우 버티다가 4합이 시작되면서 백제 군사의 칼 끝이 소년의 목을 바짝 겨누었다. 나이가 어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생포하여 계백 장수에게 끌고 가자 소년은 장수 계백 앞에 엎드렸다. 계백은 생포한 소년에게 말했다.
“나이가 몇 살이냐?”
“열 여섯입니다.”
“너희 신라에서는 너 같이 어린 소년도 전쟁터에 보내느냐?”
“보낸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제 스스로 나온 것입니다.”
“그래. 참으로 기특하구나. 이름이 뭐냐?”
“관창이라 합니다.”
“관창이라...”
“너의 아버지 이름이 뭐냐?”
“김품일 장수입니다.”
“김품일 장수라... 그럼 이 전쟁터에 나와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전쟁터에 나오다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 ................”
“비록 적이긴 하지만 어려서 죽일 수가 없구나! 살려 줄터이니 돌아 가거라. 하지만 만일 또 다시 온다면 그 때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서 돌아 가거라.”
“장군! 살려서 돌려 보내다니 안됩니다. 죽여야 합니다.”
계백의 옆에 있던 장수 총상이 죽여야 한다고 하자 계백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린 것 하나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고 우리 백제군에게 달라질 것이 무어 있겠느냐. 너무 어려 불쌍하게 생각되어 돌려 보내고자 하오. ”
하고 계백은 소년 관창에게 말했다.
“어서 돌아가거라!”
소년 관창은 살아서 말을 타고 신라군의 진영으로 되돌아 오자 아버지인 김품일은 관창에게 소리쳤다.
“이 비겁한 녀석! 적과 싸우다가 생포되었으면 스스로 자결할 것이지 치욕스럽게 살아오다니 네가 정령 신라의 화랑이더냐? 에끼 이 못난놈! 우리 신라에는 네 같은 비겁한 화랑은 없으니 다시 적진에 들어가 싸우다가 죽거라! 어서 적과 싸우다가 죽거라.”
관창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은 관창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큰 절을 두 번 올렸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두 손에 높이 받쳐들고 머리 위에 올리고는 허리를 굽혀 반배를 하였다. 이 칼로 적과 싸우다가 죽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얼굴에 묻어 있었다.
관창의 얼굴에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신라 장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적셨다. 관창은 말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버지(김품일)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이럇 ! 하며 말에 채칙을 가했다. 말은 피잉 울면서 대륙백제군의 진영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달려오는 관창을 보고 계백 장수는 단 칼에 그의 목을 베었다. 피가 계백의 옷에 튀었다. 장수 계백은 말 안장에 피가 흐르는 관창의 목을 매달아 신라 진영으로 되돌려 보냈다. 신라 장수 김품일은 죽어서 돌아온 아들 관창의 머리를 잡고 피를 닦으며 말했다.
“이제야 너는 화랑으로서 임무를 다 했구나. 내 아들 참으로 장하도다.”
관창의 죽음은 신라군의 사기를 높혔고 또한 전의를 촉발시켰다. 전의에 불타는 5만의 신라군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계백 장수의 결사대도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천혜의 요새인 숯고개(탄현)를 장악하지 못하고 이미 적군에게 넘겨준 지금, 이 황산의 최후 방어선조차 무너진다면 신라군은 일사천리로 무인지경을 가듯 소부리군으로 밀고 들어갈터였다. 드디어 산등성위로 7월의 아침 해가 눈부시게 떠오르자 대륙백제군 5천 결사대의 기치와 창칼과 투구가 마지막 아우성이라도 치듯 무섭게 햇살에 번쩍거렸다.
좌우에 부장수들을 거느린 말 위의 계백 장수가 군사들 앞에서 사자후(獅子吼)를 또 한번 토해내기 시작했다.
"백제의 자랑스런 용사들아! 우리는 이제 마지막 전쟁터에 다다랐느니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도다! 오늘 한판의 싸움에 우리 모두, 그리고 그대들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처자, 경각에 달린 우리 백제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군사들이여, 이 사실을 명심하라! 적군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은 5만 대군이라 한다. 그대들 각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다해 싸우지 않으면 물리칠 수가 없으리라. 그렇지만 백제의 용사들이여! 두려워할 것은 조금도 없도다......
.....신라 군사 따위를 겁내는 백제 군사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있을 수 없다! 옛날 옛적 춘추시대에 월왕 구천은 지금 우리와 똑같은 5천 군사로써 오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쳐부순 적도 있었느니라! 그뿐이랴, 불과 15년 전 요동전쟁 때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수십 배가 넘는 당나라군을 물리친 사실은 그대들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건대, 우리 5천 백제군이 한사람당 신라 군사 10명씩만 당해낸다면 능히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의 위기를 구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곧 우리 모두가 살 길이요, 그대들의 가족을 살리는 길이 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죽을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는 것이 우리 백제군의 전통임을 명심하고 분발 감투하라! 모두 알아들었는가?"
계백 장수의 호령에 이어 5천 결사대가 목청을 합쳐 피를 토하듯 내지르는 대답 소리가 우렁차게 넓은 항산벌판과 능선의 골자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계백장수는 부장들을 불러 모아 작전 지시를 하고 군사들을 배치했다. 장수 계백 자신은 중군을 지휘하여 산직리 산성에 머물고, 좌군은 황령산성을, 우군은 모촌리산성을 지키도록 했다.
적은 수의 군사로 열 배의 적군을 평지인 황산의 넓은 들판에서 정면으로 맞아 싸운다는 것은 병법의 병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므로 지형지물을 교묘히 이용하여 신라군이 산마루 좁은 관문을 타 넘고자 할 때 일시에 협공하여 승리를 거두려는 상승장군(常勝將軍) 계백다운 탁월한 전략이었다.
군사들이 좌, 우, 중군 3영으로 포진을 마치자 전부터 산성을 지키고 있던 수자리 진수병들이 급히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장졸들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침밥을 먹을 동안 계백 장수는 잠시나마 쉬라는 부장들의 권유도 마다하고 군막을 나서서 산성 주변을 거닐었다.
계백 장수는 장검을 짚은 채 우뚝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또한 살갗 아래 붉은 피가 뜨겁게 흐르는 인간이었으니 어찌 감회가 없었으랴. 한평생을 전쟁터로 떠돌며 숱한 전투를 치르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온 강철 같은 의지의 사나이였건만, 계백도 남들처럼 가정에서는 한 여자의 지아비였고 자식들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적어도 어제 오후까지는 그랬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도 귀여운 자식들도 모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어찌하랴! 장수 계백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치밀어 오르는 고뇌를 억누르며 오열을 삼켰다.
어제 아침, 임금(의자왕)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기 전부터 장수 계백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늦었다는 사실을...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버릴 정도로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는데 이 지경이 되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한 노릇이었다.
전세는 이미 기울어졌다고 해도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팔다리를 묶고 앉아서 적군에게 운명을 내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힘을 다해 싸워서 막아내야만 했다. 하루 종일 사군부(司軍部)의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등 무관(武官)들을 거느리고 사비성내 상(上), 하(下), 전(前), 후(後), 중(中), 5부(五部)의 5항(五巷)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가까스로 5천여 명의 병졸을 끌어모아 결사대로 꾸린 것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적군이 공격해 온다!"
"신라군이다!"
백제군의 외침 소리에 계백 장수는 두 눈을 번쩍 뜨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신라군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장수 계백은 칼자루를 더욱 힘껏 움켜잡았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진영에서 공격의 소라나팔소리가 울리면서 나당연합군의 선봉에 선 기마병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일제히 백제군 진영을 향해 구름떼처럼 달려 나가자 백제의 계백 장수도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군을 맞았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계백 장수는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군사들을 향해 칼을 힘껏 내리쳤다. 군사의 피가 솟구치면서 계백장수 몸을 붉게 물들었다. 맑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서서히 떼지어 모여 들더니 빗방울을 뿌리기 했다. 가느다란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면서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백제군은 나당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군사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희색빛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은 전사들의 피에 물들어 붉은 빗방울로 변했다. 붉은 빗방울은 죽어 쓰러진 병사들의 시체를 붉게 물들였고 병사들의 시체 사이로 붉은 핏물이 도랑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은 피차간 악귀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 전쟁에서 8천여 명의 왜(倭에 있는 나라백제군(奈良百濟軍)이 참전했다. 나라백제군을 지휘하는 장군은 무사라요치(武斯拏要治)였다. 그는 8척이나 되는 장창을 휘두르며 잘 싸웠다. 무사라요치 장군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 부여 용(勇)도 싸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사투로 전개 되었다. 피아간 국가의 존폐를 결정하는 혈전이었다. 그야말로 시산혈해를 이루는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었다. 백제군과 나라백제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의 상황을 넘어서지 못하고 계백 장수의 결사대는 물먹은 흙담처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계백 장수는 최후로 일전을 벌리면서 장열한 죽음을 맞았다.
계백의 결사대가 무너지자 부여 용(勇)은 장수 무사라요치(武斯羅要治)에게 철군을 요청하자 무사라요치는 철군을 명령했다. 어느새 궁성문 밖에는 당나라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의자왕은 이제야 최후가 다가 왔음을 알고 말했다.
“계백이 어찌 되었느냐?”
계백 장수의 결사대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던 의자왕은 계백 장수의 전황이 궁금하여 묻자 의자왕을 모시고 있는 상좌평 진후(眞厚)가 입을 열었다.
“폐하! 계백 장수가 전사했다고 하옵니다.”
“나라백제 군사들은 어찌 되었느냐?”
“나라백제 군사도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물러났다 하옵니다.”
순간 의자왕은 옆으로 빗실 넘어질려고 했다. 순간 상좌평 진후(眞厚)는 얼른 의자왕을 부축했다. 의자왕은 몸을 간신히 가누며
“충신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칠 백년 사직이 이렇게 망하다니...”
의자왕의 탄식 소리와 함께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리자 용포 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상좌평 진후가 몹시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 잠시 옥체를 피하셔야 하옵니다.”
“어디로 가면 좋소?”
“잠시 사포현으로 피하심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어느덧 궁궐 정문에는 당나라 깃발이 꽂히고 있었다. 의자왕은 황망히 태자 효(孝)를 데리고 궁궐 뒷산 부소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은 이미 깊어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도성안은 아비규환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며 이따금 비명을 지르고 죽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궁녀들도 의자왕을 모시고 가겠다며 나섰다. 궁녀들은 모두 3천 2백여 명이나 되었다.
“벌써 궁성 정문이 무너졌다고 아옵니다.”
상좌평 진후(眞厚)의 말에 의자왕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 군창에 쌓여 있는 군량미를 적에게 넘겨 주어서는 안된다. 빨리 불을 질러라!”
“이미 그리 하도록 지시를 해 놓았사옵니다.”
상좌평 진후의 말이 떨어지자 군창에서는 불꽃이 충천했다. 의자왕은 이 불빛을 이용하여 백마강을 끼고 있는 웅진성 북쪽으로 도망쳤다. 궁녀들도 뱀 꼬리처럼 뒤를 따랐으나 길은 험준하고 일시에 많은 사람이 뒤엉켜 갈팡질팡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뒤에서는 적군이 몰려 오고 있었다. 적군에게 잡히면 치욕을 당해 몸을 더럽히게 될 것을 알고 붙잡히지 않을려고 죽을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달려 갔으나 푸른 백마강의 강물이 앞을 가로 막았다.
적군에게 몸을 더럽히고 구차하게 노비로 목숨을 부지하고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궁녀들은 앞을 다투어 백마하 절벽 아래 강물로 몸을 날렸다. 아까운 꽃송이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낙화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200여 명만 강물에 몸을 던지고 나머지 궁녀들 은 의자왕을 의지하듯 길게 늘어서 뒤를 따랐다.
의자왕이 태자 효(孝)와 함께 사포현 웅암성으로 달아난 후 왕자 융(隆)은 사좌평 진후(眞厚)로 하여금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글을 보내 군사를 물려 달라고 요청하고 좋은 음식을 마련하여 보냈으나 소정방은 받지 않았다. 그러자 왕자 융(隆)은 하는 수 없이 위사좌평 해복(解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가 8월 22일이었다.
이때 신라의 세자 법민은 백제 왕자 융(隆)을 자신이 타고 온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내 누이동생을 죽여 20년 동안이나 나의 가슴에 목을 박아 고통을 주고 원한에 싸이게 하였다. 지금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다.”
백제 왕자 융(隆)은 땅에 엎드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한편 의자왕이 곰바위성으로 도망하자 의자왕의 셋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성을 굳게 지켰는데 태자 효(孝)의 아들 문사(文思)는 융(隆)에게 말했다.
“임금이 세자와 함께 도성을 비우자 숙부가 마음대로 임금이 되었는데 만약 당나라 군사들이 포위를 풀고 가버린다면 우리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좌우에 있던 신하들과 함께 성 위에서 밧줄을 붙잡고 탈출해 나오자 백성들이 모두 그렇게 하고 따랐으며 의자왕의 셋째 아들 태(泰)도 이러한 탈출을 만류하지 않았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군사들에게 성벽을 넘어 들어가 당나라 깃발을 꽂도록 지시하자 왕자 태(泰)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때 의자왕의 막내 아들 용(勇)은 끝까지 싸우다가 대패하자 무사라요치(武斯羅要治) 장수와 함께 잔병(殘兵)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왜의 나라백제(奈良百濟)로 귀환했다.
사흘 후 의자왕도 잡히어 태자 효(孝)를 거느리고 소부리성으로 들어 오게 되었고 신라 무열왕은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바로 대륙백제의 도성으로 와서 큰 잔치를 베풀어 장수들을 위로하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모든 장수들과 함께 당상에 앉혀 의자왕에게 술을 부어 올리게 하자 의자왕은 허리를 꾸부리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신라의 문무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문무왕은 의자왕에게 다가와 침을 몇 번 뱉고 나서 말했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이렇게 되기전에 항복할 것이지.”
의자왕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문무왕에게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술잔을 올리는 의자왕의 얼굴에서는 비통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려 옷깃을 적셨다. 이를 본 백제의 중신들도 망국의 한을 씹으로 모두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울었다. 의자왕은 충신 부여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옥방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한 일을 후회하며 통탄했다. 오늘의 이러한 망국의 한이 충신 성충의 진언을 어명에 반역한 신하의 불충이라고 잘못 생각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자 의자왕의 마음은 더욱 괴롭기만 하였다.
당나라군 병선이 펼친 돛이 백마강(대륙 白馬河)을 뒤덮고 연이어 도달하면서 당나라군이 공격하자 끝까지 싸우던 백제군은 무너지고 당나라군은 배로 강으로 들어가 강과 뭍에서 신라군과 협세하여 곧바로 진도성으로 20여리를 공격해 왔다.
살아있는 백제군이 다시 온힘을 기울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해 싸웠지만 패하여 성안으로 달아나고 나당연합국이 추격해 오자 백제군의 대장 니식장(禰植将)과 여러 성주가 항복하자 당나라 군사들는 이들을 체포하여 모두 당나라의 장안성으로 압송해 보냈다.
의자왕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고 슬하에 41명의 서자가 있었다. 의자왕의 장남은 부여 융(隆,) 둘째 아들은 부여 풍(豊), 셋째 아들은 효(孝)인데 효가 태자 자리에 올랐다. 태자가 부여 융(隆)에서 부여 효(孝)로 교체된 것은 두 세력간에 정치적 반란이 일어나 부여 융(隆)의 세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자왕의 넷째 아들은 부여 태(泰), 여섯째 아들은 부여 용(勇), 일곱째 아들은 부여 궁(躬), 여덟째 아들은 부여 충승(忠勝), 아홉 째 아들은 부여 충지(忠志)였다.
백제가 나당연합국과 싸우면서 잡은 포로는 신라군은 2천 8백 70여 명, 당나라군은 684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백제가 지배하고 있는 왜(倭)의 나라백제(奈良百濟)로 송치했다.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백제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백마강(중국대륙 白馬河)을 건너 도성 소부리(원지명은 중국 대륙의 尒陵夫里郡)으로 진입할려고 하자 백제 부흥군의 지휘관 복신은 군사를 집결시켜 임존성에 주둔했고 공격해 오던 나당연합군도 8천여 명의 군사를 잃은 탓에 쉽게 진격하지 못하고 일단 후퇴했다.
그런데 이무렵 신라 전역에서는 역병이 크게 돌아 병력을 지원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 기회를 틈타 백제부흥군은 두량윤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이기자 다시 유주성을 공격해 오는 신라군과 싸워 패퇴시켰다. 그러자 백제부흥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사태를 지켜보던 주변의 여러 성주들이 백제부흥군에 가세하는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렇게 되자 당나라군은 소부리군에는 일부 군대만 남기고 웅진성으로 도독부를 옮겼다. 하지만 백제부흥군은 웅진성을 거세게 공격하며 성을 포위하자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은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고립되는 상황에 놓여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백제부흥군의 지휘관 복신은 왜의 나라백제에 사람을 급파하여 왜왕에게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문제를 논의하던 왜왕 제명천황이 죽는 바람에 백제 부흥군을 도와 원군을 보내자는 장수 근강조(近江朝) 세력은 반대파에 밀려 흐지부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가 서기 661년 7월이었다.
그해 9월 신라군은 백제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 부흥군이 집결하고 있는 옹산성을 공격하자 백제부흥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자 부흥군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豊)은 장수 근강조(近江朝)를 총사령관으로 왜군 1만2천을 이끌고 왔다. 백제부흥군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1만2천6백명의 원군을 얻은 백제부흥군은 웅진성으로 진격하여 백마강의 지류인 금하 남쪽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백제부흥군 내부에서는 복신과 도침이 서로 주도권을 잡을려고 불화가 생겨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침이 살해되자 도침을 따르던 군사들은 복신에게 크게 반발하는 등 백제부흥군의 내분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이러한 백제부흥군의 내분을 알아차린 신라군은 백제부흥군을 공격해 왔다. 이 전쟁에서 백제부흥군은 크게 패했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백마강에서 나당연합군과 일전을 벌리기 위해 대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의자왕의 둘째 아들 부여 풍(豊)이 이끌고 있는 백제부흥군은 크게 패하여 일부 군사들은 고구려로 도주했고 나라백제의 장수 근강조도 출병한 군사와 함께 왜(倭)의 나라백제로 돌아갔다.
부여 풍(豊)은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을 칼로 목을 쳐 죽인 후 부흥군의 수장이 되었는데 부여 풍(豊)이 복신을 죽인 이유는 복신이 도침을 살해한 데다가 부흥군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결국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부여 풍(豊)은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임존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부흥군의 지휘관 혹치상지를 비롯하여 상여, 지수신 등 여러 장수들도 전의를 상실한 나머지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은밀히 백제 부흥군의 주둔지인 임존성에 밀사를 보내어 흑치상지와 상여, 지수신 등의 장수를 설득하여 항복을 종용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이들이 항복하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는 말로 회유하자 혹치상지와 상여는 유인궤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항복을 할려고 했으나 장수 지수신은 유인궤의 말이 거짓이라고 하면서 항복을 거부하고 고구려로 달아났고, 혹치상지와 상여는 대륙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자 3년동안 집요하게 전개되었던 백제 부흥군의 활약은 663년 막을 내렸다.
이 무렵 당나라 고종은 유인궤의 요청을 받아 들여 좌위의 장수 손인사에게 8천여 명의 군사를 내주고 신라에 가도록 하는 한편 의자왕 아들 부여 풍(豊)을 웅진도독으로 삼도록 하였다. 유인궤가 부여 풍(豊)을 웅진도독으로 삼고자 한 것은 백제 유민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한 계략이었다.
백제부흥군이 궤멸되자 신라 조정에서는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신라의 문무왕이 왕위에 오늘 무렵 당나라의 고종은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하였다. 이 문제를 당나라 조정에서 논의하던 당나라 장수 김인문과 유돈이 신라에 와서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계획을 하고 있으니 협력을 하라는 당나라 고종의 뜻을 전했고, 신라 문무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신라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신라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김유신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지원하기 위해 쌀 4천6백석과 보리 2만8천석을 2천3백대의 수레에 싣고 고구려를 향해 떠났다. 그런데 국경을 넘어 고구려 영토로 들어서자 산속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수레에 실고 가던 쌀과 보리 절반 이상이 불에 타버렸고 4백여 명의 병력이 참살되었다. 하지만 신라군은 아달혜와 수형 등 고구려 장수 여섯 명을 생포하고 6천여 명의 고구려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신라군이 고구려의 영토로 깊숙이 들어가 고구려군과 정규전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유신은 일단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되돌아 와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소실된 군량미를 보충하면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를 평정하자 의자왕의 아들 장(璋)과 종자(從子) 복신(福信) 등이 옛 왕자 부여풍(夫餘豐)을 왕으로 세웠다. 662년 유인원 등이 다시 이를 쳐부수자 풍(豐)은 달아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당나라 황제는 부여융(夫餘隆)에게 <웅진도독>의 칭호를 주고 귀국하게 하고, 신라와는 옛 감정을 풀고 남은 유민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부여융은 665년에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서 백마를 잡아 맹세를 하였다. 맹세문에는 이런 내용이었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이 신라를 침략하여 읍과 성을 치고 도륙하니 천자가 백성들이 아무 까닭없이 고통받는 것을 가엾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서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도록 명하였다. 선왕이 지형이 험준하고 거리가 먼 것을 믿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여워하여 토벌하고 그대를 세운 것이오. 전 태자 융(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모시도록 하는 것이오. 신라와는 옛 원망을 없애고 우호를 맺어 영구히 번국이 되어 신복하도록 하시오.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이 친히 맹세하는데 임석하도록 하였으니, 만약 맹세를 저버린다면 신명이 이를 감독할 것이다.”
이에 금서철권(金書鐵劵)을 만들어 신라의 종묘에 간직하였다. 당나라 유인원 등이 돌아가자 융(隆)은 무리가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또한 경사(京師)로 돌아갔다. 676 - 679년에는 <대방군왕>으로 승진시켜 번(藩)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신라가 강성하여 융(隆)은 감히 옛 백제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몸을 기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융(隆)이 죽자 무후(武后)는 그 손자 경(敬)이 왕위를 잇도록 하였으나 이미 그 땅은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해 분할되어 백제는 마침내 멸망하였다.
백제는 멸망 전에 5부가 있었다. 그 영토를 37군 200성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76만호였다. 660년에 그 땅을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로 나누었다. 666년에 이르러 그 옛 땅은 신라에 편입되었고, 점차 약해졌으며 백제 유민들 일부는 신라와 돌궐이나 말갈로 들어갔고 백제왕 부여 융은 끝내 옛 백제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는 백제의 영토까지 점령하였고, 백제의 많은 백성들은 왜지로 집단 이주했다.
(제5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