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교보문고
런던에서 들른 여러 서점 가운데서도 '던트 서점(DAUNT BOOKS)'은 가장 인상적이었다. 독자 입장에서 지닌 서점에 대한 로망, 서점이라는 이름의 판타지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공간이랄까. 라이너 모리츠가 쓴『유럽의 명문 서점』을 읽다가 우연히 알게된 곳으로 꼭 직접 가보고 싶었다.
실제 던트 서점의 첫 인상은 수수했다. 전형적인 영국식 건물의 외관이었다. 그런데 웬걸, 나무문 사이로 들어가니 실내가 채 다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런던 말리본 하이 스트리트에 자리한 던트 서점 본점의 규모는 예상보다 크고, 깊다. 그리고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난다. 모든 장식과 인테리어가 전통이 느껴지는 갈색 떡갈나무로 이뤄져 있어서다. 덕분에 고풍스럽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천장은 유리로 덮여서 은은한 자연광이 실내를 감싼다. 그게 참 운치있다. 마치 책으로 치장한 떡갈나무숲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분. 이 곳에선 영국이 낳은 해리 포터가 망토를 입고 지팡이를 휘둘러댄대도 하나 어색하지 않을 것만 같다. 시간이 숨을 멈춤 듯 마음이 느긋해진다. 던트 서점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반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original Edwardian bookshop with long oak galleries)’이다. 과연 <론니 플래닛> 2011년판이 선정한 ‘세계 10대 서점’이자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리그래프>가 선정한 ‘여행자들을 위해 디자인된,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답다.
단순한 천가방이 아니야, 쇼핑백으로 일군 성공
영국에 무려 100년이나 된 고서점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던트 서점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1990년, 은행원이던 제임스 던트가 사표를 내고 이곳 말리본 하이 스트리트에 위치한 건물을 임대해 서점을 연 것이 시작이었으니 올해로 21살인 셈이다. 그 사이 던트 서점은 세를 넓혀 본점 이외에도 첼시, 햄스테드, 홀란드 파크, 벨사이즈 파크, 칩사이드 등 5군데 지점을 더 냈다.
발에 채일 정도로 서점이 많은 런던에서, 대형서점 체인도 아닌 여행서 전문 서점인 던트 서점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있었다. 바로 던트 서점에서 8파운트 안팎으로 구입할 수 있는 캔버스 가방. 지난 2008년 벨기에 출신 스타 모델 아눅 르페르가 파파라치에게 사진을 찍혔는데 명품백이 아닌 녹색과 흰색으로 디자인된 던트 서점 캔버스 가방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 평범한 가방이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이 됐다. 사람들은 이 가방을 구입해 세계 곳곳에서 들고 다녔다. 뜻하지 않게 던트 서점은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비닐봉투 대신 환경도 보호할 수 있고, 서점 홍보도 확실하게 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장사였다. 덕분에 던트 서점은 전세계 여행자들의 ‘잇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1990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이곳의 이름은 ‘여행자를 위한 던트 서점’이었다. 시간이 흘러 공간을 넓히면서 정문이 위치한 거리 쪽에는 신간을, 뒤 쪽 넓은 서가에는 여행서들을 배치하면서 이름이 짧아졌다. 하나 ‘여행자를 위한 서점’이라는 모토는 변함없다. 여행 관련 물품이나 선물용품은 배제하고 오로지 깔끔하게 책으로 승부를 건다. 그런 점이 비유하자면, 꼭 영국 신사다워서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던트 서점은 독창적인 도서 진열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핵심 도서 배치 정책은 장르별이 아니라 나라별로 구분하는 것. 규모가 꽤 큰 서점치고 파격적인 발상이지만, 여행자를 위한 서점다운 정책이기도 하다. 나라별로 여행서뿐 아니라 논픽션, 전기, 문학, 역사서, 미술서 등이 줄줄이 엮여 놓여있다. 가령 스페인 섹션에는 순례탐방 가이드북과 기독교 역사서,『돈키호테』가 나란히 얼굴을 내미는 식이다.
꼭 누가 잠깐 책을 창가에 놔 둔 것 같지만, 엄연한 인테리어다
1층은 유럽 관련 도서를 위한 공간이다. 2층엔 테라스 형식의 벽면 서가가 자리잡고 있는데 영국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관련 여행서가 빽빽하게 꽂혀있다. 나무 난관을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참 좋다. 헌책이라고 표현하기 미안한, 절판된 고서가 2층에선 많이 눈에 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공간에는 역시 나무 재질의 원형 진열대를 배치해 한결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긴 계단을 따라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카페트가 깔린 광활한 공간이 나온다. 미국, 아프리카,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관련 도서가 진열돼 있다. 그러니까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는 다 여기에 모여있다. 지하인데도 천장의 일부가 유리로 덮여 역시 자연광을 느끼며 책을 고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나무 의자나 푹신한 쇼파에 앉아 얇은 책 한 권쯤 돌파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눈을 뜨자 세상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으로 들어가 즐겨 찾는 코너로 향한다. 신간 진열대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며 나는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책을 싸들고는 집으로 돌아온다.”
(세스 노터봄 에세이집 『책이 투덜대고 징징거리며 꿈을 꾸는 곳』 중에서)
던트서점 본점
위치 83 Marylebone High Street, London W1U 4QW.
전화 020 7224 2295
운영시간 오전 9시 ~ 오후 7시 30분(월~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