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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9-24 술 맡은 관원장이
모세는 이제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 왕 앞에 요셉을 추천한 사실과(9-13)
바로가 요셉을 불러서 자기 꿈을 해몽하라 명한 사실과 요셉의 대답과(14-16)
바로가 요셉에게 꿈을 말해주고 요셉은 그 꿈을 해몽해 가는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9-13절은
"(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10)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12)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13)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불쌍히 보셨다고는 하셨지만 그 왕이나 그 나라 때문이 아니라 요셉을 감옥에서 석방시키려 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기나긴 흉년 동안에 교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은 잔뜩 저장된 모든 곡식이 표면적으로는 애굽 왕국 기근을 해결하는 것 외에는 다른 공식적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세상을 열 개 합친 것보다 더 사랑하시는 교회를 우리 주님은 제일 염려해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로 결정하고 있던 술 맡은 관원장은 부득이 이 하나님의 일꾼 석방을 왕에게 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는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 배은망덕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자기가 감옥에 들어갔었던 이야기를 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변명을 하지 않고는 왕은 자기 신하가 스스로 부당한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의심을 품게 될까 두려워서였던 것입니다.
또한 술 맡은 자는 왕이 베풀어 주었던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서 왕이 화를 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들의 마음이 얼마나 예민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신하들도 모두 이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던 일은 정당했었다고 먼저 고합니다
그 다음에는 왕이 자기를 복직시키는 큰 은혜를 감사한다고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가 요셉의 해몽의 지혜를 체험한대로 이제 그를 바로 왕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이제 와서야 요셉의 부탁(40:14)을 이행합니다.
요셉의 부탁을 늦게 이행하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 일입니다.
바로 왕이 하나님의 섭리로 꿈을 꾸게 되고 그 해몽을 요구하게 될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에게 요셉을 생각하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고난 가운데 늘 버려 두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를 건지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용하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졸며 주무시는 이가 아니십니다(시121:4).
그분께서 일하실 때가 이르면 그분께서는 반드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건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혹시 그 당하는 환난이 길고 지루할지라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2. 본문 14절은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입니다.
여기서 유리를 통해 들여다 보는 것처럼 꿈 해몽에 대한 필요성이 오만한 왕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자세히 볼 수 있게 됩니다.
누구나 자가기 즐겁게 한창 권세를 떨치는 시절에는 진실된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도 겸손하게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낯선 외국인에게서 듣겠습니까? 그러나 곤경에 몰린 바로는 달랐습니다.
요셉을 부르러 보내기 위해서 바로 왕은 먼저 자기 오만을 눌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왕은 요셉을 자기 주인으로, 또 자기 선생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바로가 요셉을 부르게 된 것은 그가 어려운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난관에 빠뜨려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찾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난관과 역경이야말로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가장 귀한 길입니다.
이런 과정이 우리가 선택 받은 사실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육신의 교만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는 겸손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근심에 싸이게 만드는 심한 곤경에 빠질 때면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계획을 진행하고 완성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왕 앞에 나아가기 전에 요셉이 옷을 갈아입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요셉이 입고 있던 옷이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같은 과정에서 '수염을 깎고' 라는 대목도 잠시 언급해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애굽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사랑하는 문화를 지녔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은 산뜻함이나 우아한 것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고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머리도 잘 다듬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요셉이 더러운 옷을 다 벗어버리고 수염을 깎고 났을 때는 그에게 수치스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인데도 구원되는 그 날까지 더러움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이 옥중에서 얼마나 미천하게 생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수염도 깎을 수 없는 처지였었고 언제나 험한 옷을 입은 채로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에 성도들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필요하게 여기십니다.
3. 본문 15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입니다.
바로는 술 맡은 관원장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요셉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을 낮추어서 요셉에게 스스로 제자처럼 처신한 사실을 여기서 알게 됩니다.
사실 이런 태도는 어쩔 수 없어서 갖게 된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명백히 기록된 것에서 우리에게도 어떤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성령의 선물에 경건히 감사하고 주저하지 말고 그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 꿈을 곧 바로 해석해 줄 것을 거부하고 있는데 요셉의 대답에서 우리는 좀 다른 면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상습적으로 미신에 도취된 이방인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강조하고 영광을 받으실 분은 그 분이신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셉은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힘이나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그 비밀을 해석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말씨와 그 강세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의 말이 '나 없이도 하나님은 바로에게 평안의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방 군주가 주려 했던 일체의 인간적 명예를 한마디 말로 거절하고 하나님만이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행자로 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염두에 두고 일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모든 영광과 찬양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고전3:7) 라고 말합니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마음이 경건하게 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는 은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은사를 받기까지는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도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종 요셉의 이런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태도에 대해서 전혀 외면한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 신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 속에 한 방울씩 한 방울씩 신앙을 떨어뜨려 넣는 노력을 참을성 있게 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또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자기 것처럼 사칭하는 것은 얼마나 용서될 수 없는 것인가를 여기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서부터 지혜의 첫걸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찬양이나 찬사를 들을 만한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고백하는 데서부터 참 지혜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명백히 그리고 중요하게 다짐해 두고 가야 할 것은, 하늘로부터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은사를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이 진실로 정당하고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 것입니다.
4. 본문 16절은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입니다.
아직은 요셉이 하늘에서 보여주신 그 계시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저 그의 다정한 성품에서 우러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요셉이 자기 마음대로 바람직하고 즐거운 결과를 약속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예언이 아무리 슬프고 가슴아픈 내용이 될지라도 그것을 성실히 전해 주는 것이 예언자가 진 책임입니다.
그러나 반면 왕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싶은 소망과 희망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 주신 자유라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에 관해서 왕에게 요셉이 말한 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기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은 여기서 해몽하는 지혜가 자기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는 이렇게 어두운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나님만을 높였습니다.
사실상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평안한 대답"이란 말은 바로를 "평안케 해 줄 수 있는 해몽" 이라는 것입니다.
5. 본문 17-24절은
"(17)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하숫가에 서서
(18)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하숫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악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 그 파리하고 흉악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 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아니하여 여전히 흉악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 그 후에 또 세악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 그 세악한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술객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보이는 자가 없느니라" 입니다.
1) 여기서는 바로가 자기 꿈을 요셉에게 말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자기 꿈을 말할 때에 특별히 강조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곧 파리한 소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같이 흉악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과(19절), 또 흉악한 소가 살진 소를 먹어 버린 것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아니하여 여전히 흉악하더라"고 한 말들입니다(21절).
이 두 가지는 저작자가 본 장 초두(1-7)에 소개한 꿈 이야기에는 없습니다.
강조점은 요셉이 해석한 대로 애굽 땅에 임할 흉년이 극심할 것을 보여 줍니다(30-31).
이렇게 흉년이 극심하게 될 것을 강조하게 된 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흉년의 범위가 각 국에 미쳐서 가나안에 살던 요셉의 형제들도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찾아 올 것을 암시합니다(55-57).
2) 꿈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한번 더 반복할 필요는 없으리라 봅니다.
바로는 앞에서 우리가 본 꿈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윈 소들이 살찐 소를 다 잡아먹어 치웠다는 것은 흉년이 너무도 극심해서, 풍년 동안에 사람들이 모아들였던 그 풍요하던 양식이 흉년이 와서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을 때 아무 도움이 못될 정도이며 사람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리란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왕에게 그 두 꿈이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동일한 내용이 바로에게는 두 가지 모습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 이 꿈은 하나님이 왕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사실을 보여준 것이요 헛되이 지나가는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꿈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하나님께 조언을 듣고 의논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말하는 방식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무엇을 일으키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헛되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우연히 발생하는 일들을 무심하게 앉아 기다리고 계신 분이 아니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일어날 모든 일을 자기 의사대로 결정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인들이 말하는 아폴로(Apollo) 신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운명의 시간표에 기록된 대로 전달해 주는 그런 분은 아닙니다.
시인들 생각에 아폴로 신은 자기 수중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미래사를 말해주는 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스스로 하고자 하시는 일을 예언하시고 그대로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 권능으로 미래에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모든 영광은 그분에게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사45:7).
이사야는 하나님은 우상들과 같이 속임을 당하거나 속이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외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과 악의 주관자이시며 '악' 곧 역경을 이해하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참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그분이 우리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일러주실 수 있다는 것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이 힘있게 역사하고 계심도 믿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 중에 절반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이 많은 철학자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면 무슨 일이나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계신다고 믿는 것은 그들 생각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크고 깊도다"(시6:7) 라고 선포하는 것이 공허한 일인 양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자기들의 머리의 생각으로 판단하면서 플라톤이나 점성술 같은 것을 더 신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은 세상사의 필연성에 개입하시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지중에 또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그분의 영원한 목적 또 계속적인 역사(役事)에서부터 분리해 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원인, 즉 서리나 가뭄, 또는 우박이나 그 밖의 어떤 원인 때문에 땅위에 기근이 올 때 그 모든 결과만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