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잘하는 신문기자가 남의 비서로 간다는 것은 궁합상 맞지않는다. 나긋나긋한 비서란 이미지와 기자 이미지는 상극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10년 지난 처지에 어디 시험쳐서 새로 갈 곳이 없었다.
어쨌던 이참에,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재벌이란 사람이 사는 모습이나 옆에서 구경하자. 그분도 한국 경제 발전의 한 축이니, 그 분 자서전이나 한번 써보자. 이런 요량으로 갔다.
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그 양반 비자금 조사였다. 어디다 썼을까, 누가 받았을까가 궁금했다. 그래 파일 정돈이라는 명목으로 서신들을 일주일간 전부 검토하였다. 비밀 금고 안에는 대통령과 고급 관료, 은행장, 법조계 인사에게 보낸 서신들이 있었다. 선물 받는 사람들 명단과 주소, 연락처, 선물 내역이 있었다.
그걸 검토하면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으로 청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간에선 박통이 내가 들어간 그 회사를 봐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회사에 투자 지분이 있다는 루머도 있었다. 말짱 할일 없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그 회사 앨범에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던 근혜씨가 단발머리 하고 와서 라인 투어 하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근혜씨 서강대 은사인 임태순 교수와 두어번 오고 간 편지도 있었다. 친한 건 사실이었다. 박통이 반도체에 관심은 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국가 장래를 위한 첨담산업에 대한 관심이었다.
박통에게 보낸 편지를 전부 읽었지만, 어디에도 뇌물 바친 흔적은 없었다. 박통은 철저히 우리 회사를 밀어줬지만, 단 돈 10원 한장 받은 적 없었다. 이런 깨끗한 분이 다 있나 싶었다, 나는 그 후 박통을 철저히 믿게 되었다.
박통 밑에서 오랜 재무장관을 한 김용환씨와 우리 회장이 잘 알던 분이다. 간혹 인사동 <장원>이란 요정에서 식사를 했다. 그 옆에 앉아 나는 박통의 면모를 직접 들었다. 김장관은 녹번동인가에 집이 있었는데, 나는 그분 부인에게서 장관이 12시 이전에 집에 오는 적이 없다는 이야기, 공휴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Workaholic(일 中毒)이라는 말이 있지만, 박통 밑 각료는 사생활이 없었다. 물론 박통 역시 사생활이 없었다. 어떤 때는 새벽 2시에 박통한테서 전화가 온다고 한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월남 파병 등 굵직한 일을 처리할 때는 혼자 잠못들고 청와대 뜰을 거닌다고 했다. 여론과 국민에게 시달리던 대통령이 시바스리갈이나 폭탄주 마신 심정 이해되었다. 독재한다고 야당이 사사껀껀 쌍지팡이 들고 반대했지만, 그들은 지금 경부고속도로만 잘 타고 다닌다. 나는 박통에게 보낼 서신을 만들 때, 이 시대의 영웅을 대하는 기분으로 편지를 썼다.
나는 직접 박통 옆에 가본 적은 거의 없다. 정신적으로만 존경했고 가까웠다. 단 세종문화회관서 열리는 무슨 리셥센 자리에서는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매번 초청장이 오면, 모시던 회장은 연세를 핑계로 빠지는데, 그때 내가 가서 방명록에 대필서명 해놓고 왔다. 그 자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자리고, 한국 재계 거물들만 가는 곳이다. 들어가면 칵테일 잔 들고 박통 근처 갈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새끼 재벌들은 대통령 경호실과 안기부 눈치 보느라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이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정주영 회장이다. 정회장은 인품이 서글서글해서, 누군지 모르지만, 거기 들어온 이상 모두 중요한 사람이겠지 하는 생각에 장내를 흽쓸고 다니며 모두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덕에 나도 한국 최고 재벌 손은 몇번 만져보았다.
박통은 결국 10,26 사태로 서거하셨지만, 그 분 서거 한 달 전에 우리 회장이 경옥고 한 단지를 보냈다. 경옥고는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며, 말처럼 뛰어다니게 해준다는 명약이다. 그걸 드시고 국정에 더욱 박차 가해 달라고 첨부한 서신에 적었다. 경옥고 제작은 회장 한약 심부럼 전담이던 내가 했다. 재료는 꿀 인삼 생지황 백복령인데, 내가 경동시장에 나가서 재료를 사오고, 충북 영동에 차를 끌고가서 마른 뽕나무 뿌리를 구해와서 약을 다렸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동의보감 처방 때문에, 근무는 않고 용인 연수원에 조수 하나 데리고 가서 한 사나흘 잘 놀았다. 그 약을 청와대 김도룡 총무 비서관에게 전달했는데, 김비서관은 우리 회장의 깐깐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올려드리겠다며 반겨주었다. 대통령은 서거 전 며칠 전 이 경옥고를 드시었을 것이다.
박근혜씨는( 당시 근혜씨는 우리보다 나이가 어려, 우리 비서실에서는 그를 근혜양이라고 호칭했다.) 아버지가 서거하신 후, 우리 회사 옆인 화양동 어린이 공원 안 육영재단을 찾아가 만났다. 세상 인심이 고약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때라, 설 추석에 금일봉 들고 찾아간 내가 무척 고맙고 반가웠을 것이다. 그는 어려운 자기 근황을 소개하고 회장님께 안부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곤했다. 돈이 없어 난방비도 줄인다는 이야기가 기억 난다. 박통이 거액의 돈을 감춰두었단 세상 루머는 철없는 사람들 이야기다.
나는 10, 26 당시 신당동 대통령 빈소에 재벌 중 우리 회사만 찾아간 이야기, 매번 기일에 중역을 대동하여 국립묘지를 참배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며 근혜씨를 위로했다. 날씨가 추워야 송백의 절개를 안다하지 않던가. 대화를 해보면, 근혜씨는 얼음공주처럼 차그운 인상이었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지금은 여성다운 면모가 살아나 있어 볼 때마다 이쁘다. 근혜씨는 육영수 여사 타계 후 퍼스트레이디를 한 경험 때문인지, 대화에서 말 한마듸 한마듸가 바늘 틈 꽂을 틈 없이 조용하고 빈틈없고 치밀하였다. 신중하여 결코 누구를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대통령에 당선 되신 후, 패션에도 신경 쓰고, 침착함과 신의로 국정을 다스리고, 유창한 외국어로 우방과의 관계를 다져가고 있어, 참 반갑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때 좀 더 자주 찾아가서. 외로운 아가씨를 워커힐 식사라도 초대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끝)
첫댓글 역사책 한 페이지 읽는 기분....잘 읽었습니다.
역사라기엔 아니고...그냥 노인네 심심풀이 땅콩으로 써본 것입니다.
두 기자님들 통하는데가 있는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