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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여(缺如) / 문덕수
나는 겨우 몇 발짝 뗄 수 있는 내 앞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 앞도 시력이 끝나는 지평 밖은 암흑이다. 뒤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야 하는데, 그때는 조금 전의 그 앞이 새로운 뒤로 바뀐다. 사람은 그 뒤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 뒤는 암흑 세계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도 돌릴 수 있으나, 그래도 좌우는 언제나 남아서 암흑 세계다. 이런 암흑 속에서도 나는 무사하다.// 나는 삼수 끝에 겨우 운전 면허증을 땄다. 운전대에 앉기만 하면 손이 떨린다. 앞차의 꽁무니만 보고 열심히 따라간다. 후면과 좌우는 암흑이다. 좌우로는 살벌한 차량들이 엇갈리고, 뒤로는 덤프, 택시, 버스들이 덮칠 듯이 바싹 붙어서 밀려온다. 그래도 나는 용하게 살아남아서 달린다. 누가 이 암흑, 이 결여(缺如)를 보충해주고 있는 것일까.//
의문 / 문덕수
풀이라곤 다 말라죽은 불모의 들판에 피골이 상접한/ 한 흑인 여인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숯덩이 같은/ 두 아이를 치맛자락으로 더 이상 감쌀 힘이 없다/ 그 자리에 그대로 픽 쓰러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멍하니 서 있는 세 모녀의 몰골은/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오늘의 거울이다/ 그 곁의 금방 딴 능금을 가득히 담은 함지를 인 여인이/ 저고리 섶 밑을 밀고 풍만한 乳房이 삐죽이 내민 채/ 등에는 토실토실한 갓난 애기를 업고/ 좌우에는 연신 재잘거리는 오뉘를 거느리고 있다/ 나는 이 두 그림 사이의 거리를 끝내 알 수 없다//
공간 / 문덕수
꽃망울이 트이듯/ 한동안의, 그 바람의 몸부림 만큼의/ 내 곁의 빈 空間./ 鍾路 二街쯤을 걸어왔을까/ 문득 에워싸는, 나의 앞뒤의/ 내 키 만큼한 숱한 空間들./ 그 空間 속의 부릅뜬 눈망울,/ 웃음과 손짓, 굽이치는 江물의 얼굴,/ 그러다간 자라나는 나무/ 아아, 한 그루의 暗黑./ 순간 순간 죽어가는/ 나의 存在 만큼의/ 餘白이 눈을 뜨듯 뚫리는,/ 끝내 내가 묻힐/ 한 동안의, 성난 鳳凰의 몸부림 만큼의/ 그냥 남아 있는 빈 空間.//
공간 / 문덕수
앞차가 서면 나도 서야 한다. 내 뒷차도 따라 설 것이다. 그리고 그 뒷차도 그 뒷차의 뒷차도―차례로 서는 동작이 한동안 아니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앞차와 내 차 사이에 범할 수 없는 공간이 생긴다. 내 뒷차와의 사이에도, 그리고 그 뒷차와 뒷차 사이에도―그리하여 빈 상자(箱子)와 같은 공간이 열을 지을 것이다. 그것은 안전을 지켜주는, 구슬을 꿴 줄같이 아름답다.// 앞차가 떠나면 나도 뒤따라 떠난다. 내 뒷차도 나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뒷차도, 그 뒷차의 뒷차도―그리하여 좁혔다 넓혔다 하는 공간이 일렬로 늘어서서 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들 중에서 어느 한 공간이 죽을 때, 오, 그 순간의 충돌, 비명, 유혈……, 그러나 다만 한동안의 파문(波紋)일 뿐, 그 공간들은 여전히 일렬로 늘어서서 달릴 것이다. 영원히.//
한 뼘만큼의 공간 / 문덕수
두 개의 손바닥이 이렇게 가까이/ 두 개의 잎사귀가 이렇게 가까이/ 한 뼘만큼의 공간을 두고 가까이 왔다./ 한쪽이 한 치쯤 다가서면/ 한쪽은 또 그만큼 물러서고/ 그렇게 서로 영원히 마주보면서/ 한 뼘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한 삶인 것처럼./ 한 나무를 떠난 천 년 뒤의 해후,/ 한 영혼을 떠난 만 년 후의 대면,/ 헤매다가 헤매다가 마침내 찾았으나/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더 이상 붙을 수도 없는/ 한 뼘만큼의 절대한 공간.//
빌딩에 관한 소문 / 문덕수
빌딩이/ 빌딩을 막아선다./ 일언반구의 이유도 없다.// 앞뒤 죄우로 하나같이 꼭 같은 규격/ 비슷한 각도로 바싹바싹 다가와 붙기도 하고/ 내려 누를 듯이 치솟기도 하고/ 조금씩 밀어내기도 한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방향을 잃고/ 논란 바람이/ 근대화의 낯선 거리를 헤맨다.// 비둘기들이/ 잔인한/ 삭막한/ 새 도시에 길들기 위해/ 빌딩들의 높낮이를 점검하며 비상을/ 시험하고 있다.//
빌딩에 관한 소문 1 / 문덕수
눈 한 번 끔벅 하면/ 빌딩이 선다.// 손 한 번 들면/ 35층이다.// 종일 모가지를 빼고/ 눈이 통방울로 튀어나온 채/ 몇 층 몇 동 계단 복도 엘리베이터 캐비넷 금고를/ 염탐하면서 돈다.// 찌그덕 찍 찌익 찌잉 균열이 울고/ 우르릉 우르릉 몰려다니면서 서로 부딪치고/ 쿵쿵 밟으며 츠으층을 오르내리는/ 밤의 불길한 굉음,// 때로는 왈칵 의심이 나서/ 꼭데기에서 밤을 새고/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벽을 더듬어/ 내려가서는/ 성냥갑처럼 쭈그러뜨려/ 냉큼 떼어 호주머니에 넣는다//
계단 / 문덕수
계단으로 굴러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 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 계단으로 굴러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난다./ 돌들이 굴러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스치고 부딪칠 때마다 발을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사나이도/ 인제는 돌이 되어 올라간다.//
벽(壁) 1 / 문덕수
벽을 타고 올라가는 한 사나이/ 쇳덩이처럼 찰싹 붙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딛고 오를수록/ 벽도 그만큼 높아만 가고/ 짙푸른 하늘도 그만큼 높아만 가고,/ 한 번 숨을 크게 몰아쉬고서는/ 메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뛸 듯이/ 그렇게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온몸은 찢겨 떨어지는 살점./ 햇빛이 찌르는 한낮, 눈 닦고 보니/ 벽을 붙어 올라가는 수천의 사나이/ 짐승처럼 찰싹 달라 붙은 수 천의 사나이/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은 고여서/ 마침내 냇물을 이루리라.//
소묘 / 문덕수
도시는 빌딩의 숲이다 빌딩의 계곡이다 치솟는 빌딩은 탑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올린 콘크리트의 서랍이다 성냥갑처럼 차곡차곡 포개 올린 서랍이다 사람들은 표본상자 속의 벌레, 그 서랍 속에서 눈을 뜬다 날이 새면 서랍 속을 빠져나오나 이내 다른 서랍에 갇힌다 지붕도 땅도 없이 대낮은 더욱 어둡고, 천장은 그 위층의 영원한 어둠의 밑바닥이다 지옥으로 가는 골목처럼 복도는 빠끔히 트이나 만나는 눈초리는 언제나 낯이 설다 엘리베이터는 조그만 죽음의 곳간, 분주히 오르내리면서 순간마다 계단의 꿈을 죽이고 있다 빌딩과 빌딩은 깎아내린 아슬한 절벽이다 어린 나비들이 떨어져 죽는다 그 절벽의 틈새로 굴 속 같은 길은 뚫려 거미줄처럼 얽혀 있으나, 나의 길은 없다 로터리를 몇 바퀴 돌아도 나의 길은 없다 어디로 가야 하나 붐비는 저녁 버스의 출구에서 하루의 문이 닫힌다 낯설은 강을 건너듯 어제와 오늘이 이어진다 하늘은 구름과 별의 무덤이다 도시는 언제나 잿빛 천막으로 덮여 있다 그것은 죽음의 포장이다//
금관 / 문덕수
아침나절에 소나기 개다// 갈릴리 호수를 걸어오는 예수의 맨발가락이 보이고/ 보리수 밑의 싯다르타의 알몸 가부좌 위로/ 툭 떨어지는 노란 망고 열매가 아프다// 북한산 양로봉 턱밑 푸른 능선을 오르는/ 한 여류시인의 등산모 차양에/ 오전의 다이아몬드 빛 부스러기들이 내려와 박히더니// 금관이다//
작품(1) / 문덕수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호,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벌/ 컥벌컥 마시다 한여름의 불볕을 안고 모하비 사막을/ 앗! 뜨거 앗! 뜨거 맨발로 메뚜기처럼 뛰다 알몸으로/ 갠지스강을 건너 녹야원 보리수 꽃숲 속에서 알거지/ 님을 만나다 이런 것 저런 것 보고 듣고 마시고 먹고/ 다 거두어 들여도 나는 항상 빈 자배기다,// 늙어 바스러진 등 곶감 한 접 지고/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 한 알씩 빼어 먹는 일밖에.//
새의 나라 / 문덕수
모란순(牡丹筍)이 새의 몸짓을 하고/ 시냇물이 새의 울음을 운다./ 모두가 새를 닮아간다./ 큰 별이 하나/ 꽃밭 같은 은하수를 밀고 가다가/ 새가 되어 날았다./ 행방불명이 된 누나와/ 빌딩과 수상(首相),/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의 빈 리어카./ 누구는 역전(驛前)의 육십 계단(六十 階段)을 오르다가/ 누구는 무교동 사잇길을 걷다가/ 공작이 학(鶴)이 비둘기 제비 멧새가/ 되었다는 얘기/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일 년쯤 늦게사 돌아온 석조(石棗)꽃./ 나무도 사람도 차(車)도/ 날아오르고 싶으면/ 모두 새가 되었다.//
나비의 수난 / 문덕수
비실비실 포도를 가로질러 가는/ 연두빛 어린 나비,/ 신이 찢어버린 한 점의 색종이다./ 느린 시내버스의 옆구리에 부딪힐 듯/ 날쌔게 몸을 빼는 택시의/ 그 소용돌이치는 기류 속에 휩쓸려/ 치솟을 듯이 몸부림을 치다가/ 간신히 빠져 나온다./ 이윽고 뒤쫓는 까만 세단의 앞유리에 걸려/ 그대로 절벽에 떨어지듯 멀리 밀려갔다간/ 놓여나 한숨을 돌린다./ 휘말려가고 끌려가고 부딪히는/ 연두빛 어린 나비,/ 신이 찢어보낸 한 점의 색종이다.//
풀잎 소곡 / 문덕수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그대 가슴 속 꽃밭의 후미진 구석에/ 가녀린 하나 풀잎으로 돋아나/ 그대 숨결 끝에 천 년인 듯 살랑거리고/ 글썽이는 눈물의 이슬에 젖어/ 그대 눈짓에 반짝이다가/ 어느 늦가을 자취 없이 시들어 죽으리./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지금은 전생의 숲속을 헤매는 한 점 바람/ 그대 품 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이라네.//
실바람같이 / 문덕수
매달릴/ 당신의 빈가지를 찾아// 헤매는/ 허공 속,// 오직 당신에게만 울릴/ 내 영혼의// 그 먼/ 흐느낌……//
꽃과 언어 /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생각하는 나무 / 문덕수
나무는 어딘지 먼 길을 가고 있다/ 가다가 가만히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 가지를 흔든다 무엇인가 골똘히 사유한다/ 보이지 않는 地脈에까지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을 전한다/ 안으로 지닌 생명의 그지없는 중량을 가득히 느껴본다/ 받들어 숨쉬는 하늘과 구름과… 산새의 무게를 均衡해본다/ 먼 불안의 방황에서 돌아오듯/ 이제 숨막히는 긴장을 푼다/ 한잎 두잎 목숨을 떨어뜨린다/ 가볍고 서운한 안으로 충만해오는 喜悅이 있다/ 가지를 휘감아 울리는 飛翔의 흐느낌이 있다/ 발가벗은 채,/ 나무는 귀를 기울여본다//
안개 / 문덕수
안개들이 道路 위로 기어 올라아서는 눕는다./ 안개들이 개천 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논다./ 안개들이 工場 굴뚝을 안고 오른다./ 안개들이 車를 계속 몰고 온다./ 안개들이 아침햇빛을 온통 먹어 버린다./ 안개들이 산 위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온다./ 사람이나 꽃이나 짐승이나 실은 모두 안개다.//
빗방울 / 문덕수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동그랗게 수면을 파면서 수만 개의 자잘한 물기둥으로 다시 솟는다 그 물기둥의 목이 石筍처럼 똑똑 잘리면서 눈깔사탕만한 투명한 구슬방울이 된다 어떤 건 포물선형으로 휘늘어진 풀잎을 뛰어넘고 어떤 건 줄기에 매달려 미끄러지고 그냥 수직으로 玉碎한다 빗줄기 틈새로 놀란 개구리, 곤충 한 마리 빗줄기 치는 잎사귀 밑에 거꾸로 붙어서 소나기를 피한다 빨간 딱정벌레가 풀잎 위로 기어가다가 휘어져 튕기는 바람에 굴러 떨어진다 개미 대여섯 마리 歸巢 도중에 신호체계가 무너졌는지 길을 잃고 방황한다 소나기 뒤에 연못에는 평화처럼 맑은 허무가 내려앉는다//
프로이트 선생에게 / 문덕수
아내에게 대구탕보다 천원이 더 싼/ 오징어 뽂음을 주문한다/ 마을의 쌈지공원/ 온몸 돌리기 파도타기 줄 당기기 하늘걷기...그때/ 벤취에 편안히 앉은 두 할머니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있으면 물고 가"/ 그 앞을 지나면서 나는 허리를 굽히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은 호랑이 띠야. 양띠인 나와 함께 치악산에 가서/ 나란이 바위에 앉았는데, 호랑이가 무서워 못 오는 거야. 임자는 무슨 띠야?"/ "제 아내는 용띠예요"/ "용은 호랑이 보다 두 살아래지"/ 그때 해일이 밀려와 휘어감고 흔드는 우리 집/ 기둥의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六·二五 1 / 문덕수
내게만 보이는 것일까.// 길바닥 여기저기/ 뽑힌 발톱이 흩어져 있고/ 잘린 목은/ 어디로 갔는지,// 한 웅큼 머리칼이/ 길바닥을 곱게 쓸고 있다./ 한 남자가/ 그때 내가 본 이 길바닥에서/ 지금도 맨발로 걷거나/ 알몸으로 뒹굴고 잇다/ 피를 흘리면서…//
六·二五 2 / 문덕수
그 차돌 같은 발바닥/ 억센 발목이/ 그립구나,/외짝 군화.// 포화 속/ 갯벌을 뛰고/ 가파른 언덕 기어오르며/ 탄환처럼 돌진하던/ 외짝 군화,/ 잡초 속에 누웠구나.// 바닥은 뚫리고/ 발등은 찢긴 채/ 휴전선 달빛 속에/ 그날을/ 홀로 증언하고 있구나,/ 외짝 군화.//
六·二五 3 / 문덕수
칼이 파르르 떨면서/ 일어선다./ 선 채로 꼿꼿이 뛴다.// 부러진 칼날/ 사금파리 같은 쇳조각이/ 떼지어 잉잉거리면서/ 날벌레처럼 날아다닌다.// 벽에 꽂히고/ 문틈에 끼이고/ 창문을 뚫어/ 그리고 가슴이고 눈이고 허벅지고/ 가리지 않는다// 녹슨 고철무더기들이/ 들썩들썩/ 모두 일어선다/ 수천의/ 칼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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