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기의 성은 우(偶)씨이며, 오(吳)나라 전당(錢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빼어나고, 기민한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을 넘어섰다. 처음 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 법사에게 의지하여 따랐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혜의 법사는 그의 정신과 풍채를 아름답게 여겼다. 전송의 문제(文帝)에게 계(啓)를 올려 도첩(度牒)을 구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이에 문제가 그를 불러 보고 좌우에 물어 보고는 좋다고 여겼다. 곧 기원사에 명령하여 그를 위한 법회를 열어 출가하게 하였다. 황제의 가마가 친히 행차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혜기는 이미 뜻을 법문에 두었으므로, 수행에 힘쓰는 것이 정성되고 간절하였다. 새벽에서 밤까지 아울러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경전을 환히 해득하였다.
그 후 서역의 법사인 승가발마(僧伽跋摩)가 선(禪)과 율(律)을 널리 돕고자 송나라 경내에 찾아왔다. 이에 혜의 법사가 혜기에게 명령하여, 그의 입실제자가 되어 공양하고 섬기게 하였다.
나이 만 20세가 되자 채주(蔡州)로 건너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때 승가발마가 혜기에게 말하였다.
“너는 곧 강남 지방의 도의 왕[道王]이 될 것이다. 오래도록 서울에 머물 필요가 없다.”
이에 4ㆍ5년간을 강석을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법사들을 두루 방문하였다. 『소품경』ㆍ『법화경』ㆍ『사익경』ㆍ『유마경』ㆍ『금강반야경』ㆍ『승만경』 등에 빼어났다. 그 현묘한 진리를 생각하고 탐구하여, 그윽하게 엉킨 진리를 투철하게 비춰 보았다. 문장을 제시하고 문구를 비교함에, 그 아름다움이 옛날을 뛰어넘었다.
혜기의 스승인 혜의는 이미 덕이 있어, 사람들의 종사 자리에 있었다. 형주(荊州) 땅의 도의 왕[道王]이라서, 선비와 서민들이 귀의하였다. 이롭게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분분히 모여들었다. 그는 혜기의 아름다운 덕이 칭찬할 만하다 하여, 곧 손잡고 함께 생활하였다.
혜의 법사가 죽은 뒤에 이르러, 생활을 뒷받침하는 여러 물건들이 거의 백만 냥에 가까웠다. 혜기는 법으로 보아 마땅히 그 절반을 얻었지만, 모두 복을 위하여 희사하였다. 오직 더럽고 낡은 옷과 그릇만을 취하여,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전당(錢塘)의 현명사(顯明寺)에 머물다가, 얼마 후 회계(會稽)로 가서 산음(山陰)의 법화사(法華寺)에 머물렀다. 학문을 숭상하는 학도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와서 도를 물었다. 이에 삼오(三吳)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 그러니 학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영접하려고 초청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비로소 길을 떠나 절강(浙江)을 건너다가, 다시 병이 도져서 돌아왔다.
이어 회계(會稽) 구산(龜山)에 보림정사(寶林精舍)를 세웠다. 손수 벽돌을 포개고 자신이 공사를 지휘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나무를 걸쳐서 험한 지세를 타고 지으니, 산의 형상을 더욱 지극하게 하였다. 처음에 3층으로 세웠다. 그러나 장인의 솜씨가 조금 서툴러서 뒤에 하늘의 벼락을 맞아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곳에 다시 보수를 가하고 꾸며서, 마침내 그 곱고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혜기는 일찍이 꿈에 보현보살을 만나, 보현보살에게 스승[和上]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절이 준공된 뒤에 이르러, 보현보살상과 아울러 여섯 이빨 난 하얀 코끼리의 형상을 조성하였다. 곧 보림정사에서 21일간의 참회하는 재를 마련하였다. 선비와 서민이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이 모여들어, 헌납하고 봉양하는 것이 뒤를 이었다.
그 후 주옹(周顒)이 섬주(剡州)를 다스리자, 혜기를 초청하여 강설하였다. 주옹은 본래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불교 교리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혜기를 만나 찾고 파헤치자, 날로 새롭고 남다름이 있었다.
유헌(劉瓛)ㆍ장융(張融)도 나란히 스승의 예로 섬기고, 교리의 가르침을 숭상하였다. 사도(司徒)인 문선왕(文宣王)도 그의 도풍을 흠모하고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리하여 정중한 편지를 보내, 『법화경』의 근본 되는 가르침을 물었다.
이에 혜기는 곧 세 권의 『법화의소(法華義疏)』를 지었다. 『문훈의서(門訓義序)』 33과(科)를 짓는데 이르러서는, 간략하게 방편의 가르침을 펼쳐 서술하였다. 공(空)ㆍ유(有)라는 두 말을 회통하였다. 그리고 『유교경(遺敎徑)』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혜기의 덕이 이미 삼오(三吳) 지방을 덮고, 명성이 나라 안에 치달렸다. 그러자 곧 황제의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어 10성(城)을 맡았다. 이것이 곧 우리 동쪽 나라에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시초였다.
이에 그는 조용히 강의하고 이끌면서, 선정과 지혜를 가르쳐 힘쓰게 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에서도 그의 도풍을 따랐다. 오부대중이 귀의하고 복종하였다.
혜기는 성품이 매서우면서도 따뜻하고, 기개는 맑으면서도 온화하였다. 그런 까닭에 문인으로 참여한 사람 모두가 전전긍긍하지 않음이 없었다.
제(齊)의 건무(建武) 3년(496) 11월에 성방사(城傍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처음 혜기가 병으로 눕자, 제자의 꿈에 몇 사람의 범승(梵僧)이 섬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대승국(大乘國)에서 혜기 스승[和尙]을 받들어 맞이하기 위해서 왔다.”
그 후 며칠 만에 혜기가 죽었다. 법화산 남쪽에 묻었다. 특진관(特進官)인 여산(廬山)의 하윤(何胤)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보림사에서 지어, 그의 남긴 덕을 새겼다.
∙승행(僧行)ㆍ혜욱(慧旭)ㆍ도회(道恢)
혜기의 제자인 승행ㆍ혜욱ㆍ도회 등도 모두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다. 차례로 강론을 부양하여 각기 문도들을 거느리고, 스승의 법도가 남긴 앞 자취를 이어갔다.
∙혜영(慧永)
그 후 사문 혜량(慧諒)이 승정의 임무를 이어받아 관장하였다. 혜량이 죽은 후에는 사문 혜영이 이었다. 혜영은 고상한 풍모가 아름답고 청아하였다. 또한 덕스런 행실이 맑고 엄숙했다. 그리하여 많은 경전을 마음대로 요리하여, 당시 강설의 임무를 맡았다.
∙혜심(慧深)ㆍ법홍(法洪)
혜영의 뒤로는 사문 혜심이 승정이 되었다. 그 역시 혜기의 제자이다. 혜심은 동학인 법홍(法洪)과 더불어 모두 맑게 계율을 지킨다고 존중받았다. 혜심의 뒤로는 사문 담흥(曇興)이 승정이 되었다. 그도 침착하게 살피는 재간과 도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