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춘선생님께서 1999년 12월, 둔촌동에서 하남으로 넘어가는 사거리 어느 공장건물(연악사 악기공장)에서 일하고 계실때 소리마당 대표 최윤택이 찾아가게 된다. 최윤택이 금연국악원에서 대금선생을 있을 당시 연변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리광수가 원장현 선생을 찾아오며 대금을 배우고자 했을때 원장현 선생님은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최윤택 선생에게 배우도록 유도하였다 한다. 리광수가 약 6개월여 수학을 하다 그해 12월 연변으로 돌아가야하는 시기가 되어 연변예술학교 시절 교수였던 신용춘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가겠노라고 최윤택에게 알고있는 주소를 물어 보자 최윤택 선생은 함께 동 주소로 안내하였다고 한다. . 영하 십여도로 떨어지는 매서운 겨울이었다. 저녁 9시경.. 공장마당은 불이 없었고, 2층 한 구석 철문을 여니 희미한 공장에 신용춘선생님이 두터운 점퍼를 입고 손을 녹힐 수 있는 팬히터를 켜고 수 작업을 하고 계셨다. 당시 작업은 북한식 개량 저피리 작업중이었다. 정재국 선생, 강영근선생과 음정조율과 연주법을 조율 소통하고 있던때다. 그날 최윤택은 선생님의 단소가락을 처음 들었고. 처음 접해보는 가락과 요성도 우리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으며... 어쨌든 듣고 있는 도안 숨을 쉴수 없었고.. 넋이 나갔다고 한다..
이날 이후, 최윤택은 신용춘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고 단소와 퉁소레슨을 시작하였다.
몇 달 후 피리음악연구회? 의 창단공연에서, 신용춘선생님은 본인의 연구, 개입 활동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프로그램북을 최윤택에게 "이거 보시오!" 하면서 내 던지며 화를 내었다.
신용춘선생님의 유품이 된 퉁소. 2004년에 최윤택에게 물려주셨다.
2001년 정창관선생이 제작한 퉁소가락 보존용 음반 '신용춘의 국악세계' 의 수록곡을 녹음당시 연주했던 퉁소.
이후 신용춘선생님은 소리마당 대표 최윤택의 형(최순구)이 거주하는 홍천소리마당에 거주하며 최순구님에게는 단소연주기법을 전수해 주고 한 편으로는 대금.단소.퉁소의 제작 기법을 전수해 주었다.
이 당시, 한국북청사자놀이패에서 활동을 하다가 내부 문제로 쫒겨난 동성본이 신용춘선생님을 수소문 하여 찾아 오게된다. 퉁소가락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고 실제 명 연주자도 있다는 소문에 동성본은 연변으로 가 퉁소 명인 뵙기를 수소문했으나 '그 양반은 이미 한국에 들어가 있다'는 현지인들의 답변에 서둘러 한국에 들어와 신용춘선생님을 수소문한것이다. 당시에는 중앙대학교 총장 박범훈 선생, 이생강선생등이 이미 신용춘선생님의 존재를 알고 단소와 퉁소의 명 연주자로서 깎듯한 예우를 해 드리고 있었던 시기여서 그리 어렵지 않게 홍천소리마당에 계신 신용춘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퉁소를 전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동성본의 존재에 대해 신용춘선생님은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동성본은 신용춘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길 간절히 원하였던 마음이어서, 당시 신선생님의 밀입국자 신분을 본인이 힘써서 해결해 주겠노라고 장담조로 신성생님께 호언하니 신선생님도 혹!하며 동성본을 대단히 믿고 있었던 터이다.
퉁소를 제작할 대나무가 필요하다는 신선생님의 하소연에 최윤택은 전남 광주에 주소를 두고 나주 어느 학교의 교감으로 재직중인 정광윤선생에게 부탁하여 퉁소 재료가 될 대나무를 부탁하니 정광윤선생은 재료를 수십개를 채취하여 홍천으로 보내게 되고 신선생님은 이를 전폐음 Bb 퉁소를 제작하여 30여개의 대나무 퉁소를 동성본에게 무료로 전하게 된다. 오로지 하나의 마음-퉁소의 저변화를 위하여... 그러나 동성본은 이를 교재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전량 판매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도 '동성본이란 사람의 신분으로 선생님의 밀입국신분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되지 못하니 너무 믿지 말라'고 여러번 간하였어나 신선생님의 성품은 일단 한 번 믿은 사람은 바꿔생각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정창관 선생님은 2002년 12월 23일, 소리마당-다물국악관현악단 창단공연 리허설현장(우면당)에 오셔서 신용춘선생님의 가락을 음반으로 제작하고 싶다고 신용춘선생을 뵙기 원하셨고, 본인은 너무 좋은 제안이다!! 생각하고 즉시 우면당 현지리허설 장에서 신용춘선생님을 소개해 드렸다. 이후 음반작업에 대한 간섭을 일체 하지 않았으나 다만, 신선생님께 '연주비는 얼마를 받더라도 상관없으나 저작권은 절대 넘기지 말라'고 말씀드렸으나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신선생님은 주장하지 못하셨다.
김인숙 선생님을 처음 뵌것은 2002년 봄이다. 가야금병창 제자들로 이루어진 가야금병창단 '가얏소리' 대표다.가끔 교류가 있었으나 큰 이벤트는 없다가 2011년경에 강동예술인축제에 참여하면서 급속히 콜라보활동을 하게된다.
신선생님은 홍천에 얼마간 거주하다가 다시 서울로 나오게 된다. 아마도 동성본의 제의때문이 아닌가 생각든다. 또는 동성본을 만나 퉁소의 저변화가 될 시기를 예상하고 앞날을 기획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밀입국자의 신분이 정상으로 회복될것을 기대하였을것이다.
신용춘선생님은 이 당시 연변동포에게 거금 5천만원 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는 사기를 당하여 한국에 들어와 가야금공장등(동양국악기사?) 을 전전하며 받은 노임을 꼬박고박 모은 전 재산을 날리게 된다. 당시 연변에서 한국으로 불법으로 들어오게 해 주는 소개비가 일인당 500만원이었는데 "한국 가서 주겠으니 먼저 변통해 달라"는 연변 동포의 말을 믿고 지급하였다가 나중에 모두 나 몰라라 하는 사기를 당한것이다.
이후 신용춘 선생님은 귀국하여 음악사업을 벌리려 하였던 꿈이, 사기맞은 사건으로 물거품이 되자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애를 썻다. 그러던 중 신용춘선생은 희대의 사기꾼을 또 만나게 된다. 이대를 졸업하였다는 이 사기꾼(신용춘선생님은 이 자의 이름을김영자라고 하였다)은 신용춘선생에게 접근하여 "한국의 큰 어느 병원에서 하루 죽어가는 사람이 대략 30명 정도 된다. 죽은 사람의 몸을 닦는 비용이 30만원이다. 그중 10만원은 병원관계자에게, 또10만원은 포르말린등 재료비이고, 나머지 10만원은 시체 닦는 사람에게 주게 된다. 이 작업을 당신에게 주고자 하는데... 어때 해 볼 생각이 있느냐?"라고 접근하였다.
시체 한 구의 몸을 닦는 수고비가 10만원.. 하루에 30 구라... 그러면 하루에 3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계산에 신용춘선생은 속아 넘어가고 만것이다. 김영자는 우선 100만원을 요구하였다. 병원담당자에게 소개비 커미션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신용춘선생님은 당장 수중에 가진 돈이 없으니, 최윤택에게 100만원을 변통해 줄것을 부탁하였다 . 최윤택은 "선생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쉽게 돈을 많이 벌수 있는 일자리를 왜? 선생님에게 주겠습니까? 저 같으면 시골의 친척이라도 불러 그일을 시키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선생님에게 일을 주겠습니까?" 라고 사기를 의심해도 신용춘선생님은 극구 아니라며 이 일은 실제로 진행되는 일이라며 간곡하게 변통을 부탁하자 최윤택은 " 그러면 선생님, 반드시 돈 액수와 돈받은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재된 영수증을 꼭 받으셔야 합니다." 라고 몇번이고 되뇌어 강조하고 선생님의 답을 듣고서야 빌려주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최윤택은 신용춘선생님에게 "일은 시작하셨는지"를 여쭈어 보자... "지금 그 사전 준비를 하고 있다" 라고 얘기한다. 돈은 건네줫고 이제 일 시작하기전 같이 일할 사람을 뽑는 인력 모집광고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웬? 광고.. 신용춘선생님은 병원에 들어가기전 함께 일한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를 해야 한다는 사기꾼의 말에 속아서, 의정부 동두천등 경기도 여기저기 인력모집 광고 스티커를 부치고 다니오 있었던 것이다.
다시 몇 달이 지난 시점에 신선생님은 원주로 거처를 옮기고 동성본은 원주까지에도 쫒아와 레슨을 받고 가곤하였다. 원주로 가게된 이유가 궁굼한 최윤택이 원주로 찾아가 보니 산동네 어느 허름한 반지하에 연변동포 몇명과 함께 지내고 있는것을 확인하게된다. 거처를 옮기게 된 이유는 '곧 원주기독병원에 일자리가 날 예정이라 미리와서 스티커 작업등을 하고 있다' 라는 말씀에 최윤택은 많이 실망한다.
모든것이 사기의 연속일진데 신선생님은 꿋꿋하게 사기꾼을 믿고 있는것이다.
그런 중에도 매주 수요일 소리마당의 연습날에는 어김없이 참석하셔서 함께 연습하였다. 첫번째로 선생님의 곡을 편곡한 것이 농부가. 라질가. 아스랑가 연곡이었다. 2002년 우면당에서 관현악 초연을 하게된다. '초소의봄'은 한국내 가야금 악보밖에 없었는데 소문으로는 가야금김일륜교수가 연변에서 가야금보를 입수하여 한국에 가야금 독주곡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선생님께서 소리마당과 연습을 하게되며 초소의 봄이 가야금 독주곡이 아니라 단소독주곡이며 가야금은 반주악기임을 알게 된다. 한국내, 초소의 봄 최초 연주자는 단소에 신용춘. 25현 가야금에 최은경이다. 당시 초소의 봄을 연주하려면 10분정도 텀을 두고 순서를 정해야했다. 25현금의 조율을 모두 바꿔야 하는 이상한 악보때문이었다. "??연변에서는 바로 연주를 할 수 있는 초소의봄이 한국에서는 왜 조율을 새로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에 최윤택이 원 Score를 살펴보고 나서 문제점을 발견하고는 모든 악보를 Bb으로 시작하고 곧 Eb으로 연주하는 악보로 이조하여 사보하였고 그것이 현재까지 돌아다니고 있는 악보의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