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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0일(목).
인왕산 : 서울시 종로구.
▣산행코스 : 세검정삼거리-석파정별당-홍지문-기차바위-인왕산-범바위-해골바위-선바위-국사당-서대문형무소-독립문.
▣산행시작 : 세검정삼거리 12시 06분.
▣산행종료 : 독립문 15시 10분.
▣전체거리 : 약5.74km.
▣전체시간 : 03시간 03분.
▣운동시간 : 02시간 29분.
▣휴식시간 : 00시간 34분.
12 : 06 세검정삼거리.
12 : 08 석파정별당.
12 : 15 홍지문.
13 : 06 기차바위.
13 : 52 인왕산.
14 : 13 범바위.
14 : 31 해골바위.
14 : 36 선바위.
14 : 38 국사당.
14 : 56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5 : 10 독립문.
▲ 12시 06분 : 세검정삼거리..
백호트레킹의 오늘 일정은.. 북촌한옥마을~경복궁~인사동문화거리다..
얼마전에 둘러본 곳이기에 생략하고..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인왕산을 오랜만에 올라보고자 하여 일행과 둘이서
택시를 타고 세검정삼거리에 내려서.. 인왕산 들머리로 바로 갈려다가 가까운곳에 있는 석파정 별당을 찾아간다.
▲ 12시 08분 : 석파정별당(관람객들이 있는집).. 아래쪽 석파랑 한식당(옛이름은 문서루다).
석파정별당은.. 여기서 도보로 약10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더 알려진 "석파정"에 딸린 사랑채였다.
1958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손재형(孫在馨)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며... 일본에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인물이다.
석파랑은 소전의 집념이 지어낸 건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집을 짓기 위해 30년동안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 목재와 기와
등을 모았다. 운현궁.. 선희궁.. 칠궁.. 이완용의 별장 등의 자재들이다. 덕수궁 돌담이 철거될 때는 트럭 30대 분을 옮겨
오기도 했다. 그 자취들을 모아 1963년부터 6년에 걸쳐 건축했다.
▲ 아래쪽 석파랑 한식당(옛이름은 문서루다).
문서루(석파랑) 또한 예사 한옥이 아니다. 순정효황후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왔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호벽(胡壁)
을 재현했고 입구에는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붙여 품위를 더했다. 덕분에 옛 한옥의 기품이 그대로 살았다.
1981년에 손재형이 세상을 뜨고 석파랑은 1993년 새로운 주인을 만나 한정식집으로 문을 열었다. 내부는 음식점으로 쓰기
위해 최소한만 바꿨다. 주로 궁중요리와 전통 한정식을 낸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도 맛볼 수 있다. 원래 문서루와 석파정
별당 그리고 맞은편 한옥의 세 채로 이루어졌다. 현재는 음식점으로 쓰이는 석파랑(문서루)과 석파정 별당 두채만 석파랑
의 소유다... 맞은편 한옥은 소유주가 다르다.
▲ 부암동 부침바위.
종로구 부암동 134번지 길 가에 있던 높이 2m의 큰 바위로서, 이 바위에 돌을 붙이면 옥동자를 얻는다는 전설로 수많은
여인들이 정성껏 돌을 붙여놓고 절을 하였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부암동의 유래가 되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바위는 없어졌다.
▲ 인왕산 들머리로 가는 길 건너에 홍지문이 보인다..
▲ 홍지문.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원래 탕춘대성이 있는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상 중요한지역이었다.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은 숙종의 친필로 문루에 달았는데.. 1921년에 주저앉아 방치되었던 것을 1977년 7월에 서울
특별시 도성복원위원회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그리고 주변 성곽 280m를 포함하여 복원하였으며..
이때 홍지문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졌다.
▲ 12시 15분 : 인왕산 들머리.
▲ 탕춘대성.
홍지문들머리에서 약 1분가량 올라온곳에서 탕춘대성벽과 만난다..
▲ 탕춘대성은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이후 수도 방위를 위하여 1719년에 완성한 성곽으로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
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弘智門),
오간수문(五間水門), 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으로 약 100 여m가 되는 산봉우리에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가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 향로봉에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비봉능선.
▲ 오래전 산매화가 고울때 올랐던 족두리봉에서의 봄날을 되돌아 본다.
▲ 시원하게 달려가는 내부순환로 아래에 옥천암 보도각 지붕이 보인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인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으로...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오는 서울의 이름난 불교 존상이다.
▲ 다시 걷고싶어지는 비봉능선이다.
올가을이 가기전에 수유동 빨래골에서 칼바위능선을 경유하여 비봉에서 이북5도청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워본다..
▲ 시대의 산물.. 일개소대는 들어갈만한 벙커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 홍지문쪽 등산로는 상대적으로 등산객이 적어서 그런지 설치한지 꽤나 오래된 계단의 난간기둥이 5개중에 하나는
흔들거리고 잘못 짚어면 낙상일것 같아서 난간대를 잡지 않고 조심조심 올라간다.
▲ 청와대 개방으로 연계하여 한번 더 올랐던 북악산..
▲ 인왕산 산불..
2023년 4월 2일 11시 53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이어서 12시 1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북악산에서도 연쇄적으로 화재가 발생했었다.
▲ 불에탄 나무들 사이로 기차바위가 보인다. 기차바위는 일명 백련봉이라고도 불리운다.
▲ 산불의 흔적은 여기까지..
▲ 기차바위 입구..
▲ 13시 06분 : 기차바위.
▲ 기차바위에서...
인왕산은 서울의 중심에 솟아있으며 높지는 않지만 산세는 웅장하다.
북쪽자락에 있는 부암동은 무계동이라 불리던 곳으로 중국의 무릉도원에 버금갈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던 곳이다.
1968년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인왕산 옆 산길로 질러왔다. 그 사건 뒤로 인왕산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2월 24일부터오를 수 있게 됐다.
▲ 13시 09분 : 기차바위 정수리..
▲ 기차바위 내림길에 만난 해골바위..
▲ 13시 14분 : 기차바위 아래에서.. 백호트레킹에서 마련해주신 찰밥도시락으로 늦은 점찍기..
▲ 낙월봉 오름..
▲ 낙월봉에서 바라본 기차바위와 그 너머로 비봉능선..
▲ 13시 45분 : 낙월봉..
낙월봉은..현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고 고지도에만 표기되어 있다.
▲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의 일이다.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은 신씨왕비를 몰아내고 인왕산계곡으로 내쫓았다.
폐비의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정적이라는 이유로 그 딸 역시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뜻에서다. 당시 신씨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세살 어린 나이에 진성대군의 아내가 되어 7년 만에 폐비가 되었으니 그 여린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깊었겠는가.
▲ 중종과 폐비 신씨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중종을 왕위에 앉힌 자들은 자신들이 살해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경
왕후를 폐위시켰다. 왕후는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옛 거처로 쫓겨났다. 단경왕후는 궁을 나오면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두겠다는 약속을 중종에게 남겼고, 이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아침이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걷는 일을 51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중종 또한 부인을 잊지 못해
경회루에 올라 부인이 있는 인왕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전해지는 슬프고도 애잔한 전설은 단순히
큰 바위로만 보일 수 있는 치마바위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 인왕산 정상으로..
▲ 13시 52분 : 인왕산 정상 표지목.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 인왕산 삼각점이 있는 실질적인 정상 바위.
"인왕산을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로 매우 유명한 산이었다.
지리산이나 금강산이 훨씬 더 웅장해서 호랑이도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야산 격인 이 인왕산의 호랑이가 더 유명하다.
정조 대왕 때만 해도 호랑이가 서울에 흔했고, 이들 호랑이가 민가는 물론 궁궐까지 난장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인 듯...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 마리를 마지막으로 도성 내 호랑이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 인왕산(仁王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해발고도 338.2 m의 바위산이다.
한양도성의 산으로는 북악산(백악산)보다 3.8 m 낮은 2위이며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서 "우백호"를 담당하는
산이다. 이는 경복궁 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인왕산이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
▲ 인왕산(仁王山) 경계점.
▲ 내려다 본 치마바위..
▲ 남산타워..
▲ 하산은 독립문공원방향으로..
▲ 옥개석.
성곽의 최상단에 놓이며 유사시에 적병이 올라오면 떨어뜨려서 적군을 막는 역할도 하였다.
▲ 인왕산의 형제산격인 안산..
▲ 인왕산 범바위와 곡장 전경.. 곡장은 둥글게 구부러진 성곽을 일컽는 말로 곡성이라고도 한다.
▲ 범바위 가는길에 뒤돌아 본 인왕산..
▲ 14시 12분 : 인왕산 범바위.
▲ 범바위에서 바라본 곡장.. 지금은 군인들이 철수를 하여 시설물만 흉물스헙게 그냥 남아 있다.
▲ 인왕산 치마바위..
▲ 국사당과 선바위 가는길.. 성벽을 넘는다. 성벽을따라 바로 내려가면 사직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 모자바위..
▲ 얼굴바위.
▲ 당겨 본 얼굴바위.
▲ 국사당 가는길은 무속행위가 일반화 되어 있다..
▲ 해골바위(장군바위).
▲ 해골바위로 올라가 본다..
▲ 모자바위와 달팽이바위.
▲ 여기서보니 얼굴바위가 아니다.
▲ 이정표가 가르키는 선바위 쪽으로...
▲ 선 바위 뒤쪽.
▲ 선 바위.
선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
▲ 선 바위에 관한 전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무학대사는 도성 안에 포함하자고 하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자고 하였다.
이때 정도전이 말하기를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 하니 태조가 정도전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였다.. 라는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 라고 탄식 하였다고 한다.
▲ 14시 38분 : 국사당은...서울의 신을 모시는 신당이다.
인왕사와 인접해 있어서 불당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으나, 국사당의 분류는 불교가 아닌 민간신앙으로 등록되어 있다.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인왕산 국사당(仁王山國師堂)이다.
한국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굿을 하는 데 편하도록 민가와 좀 떨어진 곳에 짓는 굿당 중 하나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1973년 7월 16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왕산 국사당(仁王山 國師堂)은 원래 남산(南山)의 산신(山神)인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는 산신당(山神堂)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사(神士)를 지으면서 국사당을 인왕산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
본래 국사당은 서울 남산 꼭대기(지금은 팔각정이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면서
결국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얘기에는 이성계가 젊었을때 비가 내려 노모와 딸이 사는 한 허름한 집에 잠시 신세
를 졌다. 잠을 자는데 대들보 세개가 등에 얹히는(무학대사가 해몽해준 꿈) 그 꿈을 꾸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그 꿈을 듣고
왕이 될 것이라는 해몽을 해주었다. 그때 마침 옆에 자고 있던 딸이 그것을 듣고 깨 이 손님이 왕이 되냐고 떠들었다.
당황한 이성계에게 노파가 딸의 뺨을 때리라 시켰고 이성계는 엉겁결에 따귀를 쳤는데 딸은 죽고 말았다.
그리고 노모가 하는 말이 액땜했으니 오늘 일은 발설하지 말라며 내보냈다. 훗날 이성계가 그 집을 찾아보니 흔적도 없고,
노모와 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게 지금의 국사당이라고 한다.
▲ 국사당 주차장을 지나서..
▲ 인왕사 일주문..
인왕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1393년에 무학대사가 세운 사찰이며.. 봉은사에서 갈라져 나온 말사로 규정하고 있다.
절의 체계도 복잡한데 지주가 4명이며 해마다 번갈아가면서 맡고 있다. 1910년대 이래로 여러 암자가 통합되지 않고..
제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는것으로 보고 있다.
▲ 독립문역 쪽으로..
▲ 계단을 내려가서 골목길을 빠져 나가서 대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 지하철 독립문역이 보이는 지점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간다.
▲ 뉴스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붉은 담장이다.
▲ 1908년 조선통감부가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 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이다. 건물은 본래 아연판을 붙인 판자로
두른 허술한 형태였다. 건립비용은 약 5만원이었고, 규모는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 감방 및 부속건물 480평이었다.
원래 수용인원은 500여 명이었는데, 이후 증. 개축을 반복하여 1938년의 수용인원은 2,763명이었다.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 아직도 찾고있는 끝나지 않은 아픈 역사의 발굴현장이다.
▲ 3.1독립선언기념탑.
▲ 독립문(사적 제32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높이 14.28m, 너비 11.48m. 모화관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 발의로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45×30㎝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 인왕산 산행을 마치고.. 경복궁주차장으로..
▲ 광화문쪽으로..
▲ 서울의 랜드마크중의 하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면서 가장 많이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광화문으로 들어가서..
▲ 홍례문(사적 제117호)과 북악산..
▲ 홍례문은..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1912년 철거되었다가, 문민 정부에서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공사를 시작
하여 2001년 10월 26일에 완공했다.
▲ 용성문과 인왕산..
▲ 협생문을 나서면.. 바로 경복궁주차장이다.
▲ 15시 52분 : 경복궁주차장.
▲ 18시 01분 : 천안시 목천IC에서 멀지 않은 무지개식당.
▲ 된장찌개정식.. 제육볶음..
음식은 본인 입맛에 맞으면 딱이다.. 내입에 완전맞춤이다.
백호 회장님.. 총무님 끝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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