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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5월 공세
1. 총 개 요(1.4후퇴부터 5월공세까지 요약)
중공군과 북한군의 신정공세(제3차공세)는 '50.12.31일 시작되어 유엔군이 후퇴하였고, 중공군이 '51. 1월 4일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서울은 전쟁 발발 6개월 만에 세번째 주인을 맞게 된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남한의 중북부 지역인 원주에서 공방전을 벌이다가 '51.1월 중반, 지상군 전선이 서쪽으로는 평택에서 동쪽에서는 삼척선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미 제8군은 '51.1.15일부터 시작된 위력수색작전에 이어, 1월 25일부터 2월 9일까지 반격작전인 "썬더볼트 작전"을 실시하여 수원-원주-삼척 선으로 진격했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새로운 공격 준비를 좌절시키기 위해 "라운드 업 작전"을 2월 5일 개시하였고, 미 제10군단이 중부지역의 횡성으로 진격한다. 유엔군은 2월 10일에는 인천항과 김포비행장을 점령하였으며 동해안의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양양을 점령한다.
그러나 중공군이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에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중동부 전선에 대한 집중 공격을 감행한다. 중공군은 횡성-홍천간의 삼마치고개와 지평리 일대에 9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여 2월 11일 일제히 공격을 개시, 소위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개시하여, 지평리 일대에서는 미 제2사단 제23연대 전투단(프랑스 대대 배속)의 전면 방어진지에 대한 공세에서는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횡성 북방의 국군 제8사단. 제3사단 . 제5사단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에 전투력이 50%이하로 무력화 되고 특히 제8사단은 1며의 연대장을 포함 무려 장교 300여 명, 병 7,000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포로)되는 대제앙을 맞이한다.
중공군 2월공세 후 유엔군 반격 작전인 제천-영월지역의 돌파구에 들어온 공산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킬러작전이 2월 21~3.4일간 실시된다. 이를 위해 '51.2.21일 10시에 미 제9군단은 횡성을 점령하기 위해 4개 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에 미 제9군단, 그 우측 미 제10군단과 더불어 킬러작전의 한 축이었던 국군 제3군단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수도사단이 동쪽에서, 제7사단이 서쪽에서 공격을 , 제9사단은 예비로 송계리에 집결한다.
킬러작전이 계시되자, 제3군단은 수도사단의 제26연대를 횡계리에, 제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는 한편,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 위해2월 25일 좌전방 제7사단을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케하였다.
[속사리 설한지 전투]
공격이 순조롭게 되자,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 1개 연대를 신속히 속사리로 투입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여 수도사단은 횡계리에 대기중인 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5일간 지속된 폭설로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되어 제설 작업 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1개 대대씩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영월 부근에서 철수한 북한군은 발왕산.속사리.월정사 부근에 종심진지를 편성하고 아군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부는 계방산-오대산-황병산을 연하는 산악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기도하였다.
군단에서는 거문리 일대에서 제7사단 제5연대와 교전 중인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3월 1일 중으로 속사리에 진출하도록 독촉한다. 그러나 제설작업이 지연되어 3월 2일 하진부리에 진출하여 접적이 개시되어 속사리 하진부리간의 중간 지점인 발왕리에서 야간방어로 전환한다.
그러나 22시경 제1기갑연대의 후방을 엄호하던 제26연대 제3대대와 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적이 3일 04시까지 유천리 일대에서 백병전을 치렀지만 다수의 피해를 입어 08시에 차항리로 철수한다. 이로써 제1기갑연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혹한 속에서 기갑연대는 여명을 기해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야음을 이용한 적이 연대를 포위하게 되었다. 이에 사단자은 철수명려을 내리고 제26연대로 하여금 유천리오 재진출하여 기갑연대와 연결하도록 한다.
결국 기갑연대는 방어와 적진 돌파를 반복하며 월정동. 광천리를 경유하여 4일 자정경 적의 추격에서 벗어나 대관령 서쪽 가사두에 집결했다. 기갑연대는 철수 작전간 300여 명의 적을 사살했다. 그러나 전사 59명. 부상 119염. 실종 802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와 81mm박격포 11문. 60mm박격포 18문. 3.5인치 로켓포 10문 등 다수의 장비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실종자 대부분은 다음날 복귀하였다.
결국 적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실시돤 킬러작전은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으로 악천후와 싸워나가는 힘겨운 진군이 되어 2.21~3.6일까지 14일간의 추격작전은 미 제9.10군단이 횡성-평창의 목표까지는 도달하는데 성공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목표선인 아리조나선 이남의 모든 적을 섬멸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상의 내용에서 속사리와 하진부리, 차항리, 황계치의 주 격전 부대는 중공군이 아닌 북한군이었고, 아군은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제26연대였으며 가문리 일대에서 전투한 제7사단이 일부 포함된다.
다시 진행되는 리퍼작전(절단작전으로 아이다호선 확보(춘천선)으로 서울을 신속하게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3월 7일 08시를 기해 실시된다. 그리고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춘천을 점령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3월 21일 리퍼작전을 확대하여 임진강 하구-문산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아스펜선으로 진출하고 (1단계작전) 2단계에서는 임진강에 연하여 설정된 벤톤선을 점령하는 "용기 작전"을 계획하고 3월 22일 08시에 10-16km전 방의 카이로선을 향해 진격한다.
여기서 후퇴하는 공산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문산 북방에 제187공정단을 투하하는 "토마호크 작전"을 23일 07시에 대구비행장에 이륙하여 실시되며 여러 시행착오(비행기 고장 등)를 극복하고 낙하하게 되며, 그루우던 특수임무 부대가 23일 오전 카이로선의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1번 축선으로 진출 공정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당시 공산군은 북한군 제19사단 제36연대였으나 이미 많은 병력이 임진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당시 미 제10군단은 리퍼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된다. 제10군단장은 좌측 횡성-풍암리간 소로와 우측 평창-방림리-속사리 도로를 따라 진격토록 하고,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배치하고 국군 제5사단을 양 도로 사이의 산악지역을 담당하게 한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간 주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 부대 정비를 하던 중에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운교리-안흥리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36연대를 지구리에, 제35연대를 월암동에 배치하여 3월 7일 벌교산-태기산-속사리를 목표로 3개 사단 병진을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제5사단은 횡성에서 사단을 공격했던 북한군 6사단으로서 이들은 북한군 제12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를 지원받아 태기산으로 연결되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은 14일 적의 최후 거점인 태기산을 점령하고 신대리-백운동 선으로 진출한 후 15일에는 북쪽의 운무산(980)-흥정산(1277)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게 된다.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 미 제2사, 우전방 미 제7사단도 13일 전후 공산군의 저항을 극복하고 알바니선으로 진출하고 17일에 최종 목표선인 아이다호 선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을 종료하였다.
한편 리퍼작전의 또다른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 목표선인 계방산-황병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 약 16km가 남아 있었다. 유재흥 군단장은 제7사단과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공격부대로 투입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제3사단을 군단예비로 하여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제9사단의 정선 일대를 인수하도록 했다.
국군 제7사단은 좌전방에 제3연대를 상대화-백적산(1141)-잠두산(1241)을 경유 속사리로, 우전방 제5연대를 대기에서 백석산(1364)-박지산(1391)-형제봉을 경유 하진부리로 각각 진격하게 했다. 3월 6일 08시에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하게 된다. 이때 우전방 지역에 북한군 제27사단이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 중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해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투입하여 해병연대는 발왕산과 봉산리 일대로 3월 6일까지 진출했다.
해병연대를 배속받은 제7사단은 3월 7일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백적산.백석산 일대의 적이 완강히 저항하여 8일에는 예비인 제8연대까지 투입하여 결국 제3연대가 7시간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백적산을 탈취하였다.
군단장은 하진부리를 조속히 점령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목적하에 군단 예비인 제3사단 제18연대를 전방에 투입했디. 북한군이 3월 10일 2개 연대로 대규모 역습을 해왔으나 백적산-거문리-형제봉 선으로 격퇴하고, 11일 속사리와 하진부리를감제할 수 있는 백적산이 확보되자 북한군의 공격지세는 현저히 둔화되고 12일에 최종목표인 속사리와 하진부리를 점령하고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된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의 우전방을 방어하던 제1해병연대는 3월 7일 봉산리의 제3대대가 국군 제7-5연대가 철수하여 적중에 고립되어 제3-18연대가 군단의 우전방으로투입될 때까지 공중투하 보급을 받아가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제18연대가 투입되면서 북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제1해병연대는 13일 09시를 기해 공격으로 전환하여 최종목표인 외차래지까지 진출하였고 15일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2연대에 인계한다. 그리고 16일에는 미 제9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제3군단은 3월 25일 후방지역의 패잔병 소탕작전을 제7사단에 전담시키고 제3사단으로 하여금 경강국도에서 카이로선인 현리-하서림 도로를목표로 공격을 게시하여 27일 카이로선상의 하서림을 확보하고 30일에는 제23연대가 조개동으로 진출한다.
한편 국군 제1군단은 리퍼작전이 개시되기전 미 제10군단에서 작전통제가 해제되어 3월 5일 강릉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제3군단으로부터작전지역 일부를 인수받고, 제9사단과 수도사단을 배속받았다. 이 당시에 이미 군단은 황병산-하평동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의 최종 목표인 아이다호에도달해 있었다.
이 당시에 군단 작전지역내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이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 2,000여 명으로 재편성하여 북상 중이었다. 이에 군단장은 제9사단을 투입하여 패잔병을 소탕하게 하면서 18일에는 수도사단으로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명하였다. 이때 국군 제1군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69여단으로 북으로 철수한 제10사단의 일부 병력을 증원받아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진전 되자 수도사단장은 대관령 너머의 유천리와 차항리 일대에 배치한 제26연대를 양양 남쪽의 인구리로 이동시키고, 사단 예비인 제1기갑연대를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이동시킨다. 사단은 27일 남대천을 도하해 양양으로 진출한 후 양양-인제, 양양-서림리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한계령에 이르는 설악산 입구의 387고지에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제1연대의 공격이 실패하였다. 제1연대는 다시 동해안의 함포사격 지원에 387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이에 북한군은 오색리를 경유하여 설악산으로 퇴각한다.
이상의 킬러작전과 리퍼작전에 이어 오이오밍선 확보를 위해 유엔군이 임진강 남안-화천저수지-동해안의 양양을 연하는 캔사스 선을 점령을 계획하고, 반면 공산군이 '51.4월 초 캔사스선 확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평강-김화 일대에 중공군이 병력과 보급품을 집결시켜 공격준비에 나서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다시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 저수지를 잇는 와이오밍선에 대한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공산군은 제3차 및 제4차 공세에서 전쟁 수행의 어려움과 작전 지속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중국 수뇌부는 1951년 3월 말경 "장기전을 준비하되, 최대한 단기전으로 군사작전을 실시한다'는 전쟁 수행 방침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무기 및 장비 수준의 현격한 격차가 작전수행에 있어 상당한 장애로 작용하여 단기간 내에 미군 병력을 대량 섬멸하여 한반도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상적으로 또는 기타 각종 준비에 있어 장기전에 대비하되 가능하면 전쟁기간을 최대한 단축하여 조기에 종결하려 하였다.
또한 이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세시 충분한 병력으로 전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분할함과 동시에 전술적으로는 대집단을 다시 수개의 소집단으로 분할하여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신속히 섬멸한다는 작전지도 방침을 구체화 하였다.
이러한 방침 하에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재반격을 단행하고 중공군 증원부대가 한반도로 이동을 시작하자, 중공군 지휘부는 대대적인 공세를 통해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함은 물론 전장상황을 전환시키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국군 과 유엔군이 동부 산악지대를 점령한 후 서해안 진남포로 상륙한 병력과 연합하여 안주-원산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중공군과 북한군간의 보급선이 단절되는 위기 상황이 초래될 것으로 분석하고 , 유엔군의 작전기도를 분쇄하고 신속하게 주도권을 회보하기 위해 제5차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중공군 3개 병단 11개 군과 북한군 4개 군단의 집결이 완료되면 동두천과 포천, 그리고 춘천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국군과 유엔군을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해 운동전으로 저지하는 한편, 시간을 획득하기로 하고 5차공세(4월공세, 5월공세)를 단행하게 된다.
[중공군 4월공세]
국군과 유엔군은 킬러작전과 리퍼작전으로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캔사스선(임진강 남안-화천저수지-양양) 점령을 계획하였다. 이후 계획대로 '51.4월 초에 캔사스선을 확보한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중부전선의 전략 전술적 요충지인 철원-평강-김화 일대에 적이 병력과 보급품을 집결시켜 공격준비에 나서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다시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잇는 와이오밍선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4월 20일 중서부전선에서 미 제1.9군단이 와이오밍선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중동부.동부 전선의 부대들에게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의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간의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 도로의 북족 10~22km에 위치한 알라바마선(양구-대암산-가전리-사천리-고성 남쪽)을 목표로 24일부터 공격작전을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과, 국군 제3군단의 제3. 제7사단이 공격준비를 하는동안 공교롭게도 공산군측 4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5군단이 양구-원통선에서 22일 선제공격을 개시함으로서 국군 제3사단과 국군 제5사단이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목표를 향해 진격하던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4월 22일 오후 공산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저지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예하 부대에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방어태세로 전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중공군의 '51.4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 작전 목적]
중공군 지휘부가 계획한 제5차 공세의 목적은 "유엔군 수개 사단을 섬멸해 유엔군의 작전기도를 분쇄하고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작전 계획은 "김화-가평간 산악을 이용해 돌파구를 열어 국군과 유엔군을 동.서로 양분한 후 제9병단과 제19병단으로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양익 포위하며, 이때 제3병단이 정면공격을 실시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각개 분할하여 섬멸하고 38도선 이북에서 국군과 유엔군 수개 사단을 섬멸한 후 적의 종심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이었다.
4월 공세에 주요 작전지역은 서부전선의 문산에서 춘천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주요 공격 목표는 미 제8군이 지휘하는 5개 사단과 2개 여단이었다.
[ 미 제1군단의 미 제3사, 미 제24사, 미 제25사, 그리고 국군 제1사, 영국군 제29여단, 터키여단]
[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
이들은 서부전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동부전선의 인제지역에 보조적인 작전을 전개한다는 기존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가. 북한군 제1군단 : 개성과 장단의 국군과 유엔을 섬멸한 후 주력은 임진강을 도하, 문산-고양-서울로 진격해 서울을 점령한 다음 방어 임무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이때 1개 사단은 연안-백천간 해안방어를 담당한다. 북한군 제6군단 주력은 사리원과 재령을 장악해 해안 상륙과 공수 강하를 기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타격하며 , 1개 사단을 해주와 옹진반도의 해안방어를 담당한다.
나. 중공군 제19병단은 신속히 임진강 서안의 국군 제1사단 방어선을 돌파한 1개 군이 고랑포리 부근에서 임진강을 신속 도하한 후 의정부를 우회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티로 및 증원을 차단하고, 주력은 고랑포리.마전리.무등리 지역에서 임진강을 도하하여 영국군 제29여단을 섬멸한 후 동두천-왕방산-포천방향으로 진격, 제3병단 및 제9병단과 협동으로 영평-포천의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을 섬멸한다.
다. 제40군은 가평 방향으로 전진해 국군 제6사단을 섬멸한 후 춘천-가평간 도로를 차단해 동부 및 서부전선간 국군 및 유엔군의 연결을 차단한다.
라. 제39군은 일부 병력이 화천이북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주력은 논미리-원천리- 방향으로 돌격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서쪽 증원을 견제, 병단의 좌측 안전을 보장한다.
마. 중공군 제3병단은 절대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해 연천의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섬멸한 후 초성리 -종현산으로진격하여 제19병단과 제9병단과 협동으로 미 제24사와 미 제25사를 섬멸한다.
바. 조공으로 동부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3군단과 제5군단은 일부 병력이 양구이북에서 중공군 제39군과 연합해 미 제2사단과 국군 제7사단을 적극 견제하고, 주력은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인 서호리와 인제를 공격해 국군 1~2개 연대를 섬멸한 후 평창-강릉 방면으로 진격한다. 아울러 북한군 제2군단은 회양 일대에 머물려 일부가 해안경계를 담당하여 통천-양양 일대에서 국군 과 유엔군의 상륙을 저지한다.
이에 반해 유엔군은 중공군의 3차 공세에 따른 1.4후퇴로 서울을 상실하였던 유엔군은 '51.3월 중순에 서울을 재수복하고 4월 초에는 주력부대들이 38도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캔사스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임진강-한탄강 선에, 중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석룡산-유촌리 선에,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소양강 북쪽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제3군단이 내륙 산악지역에, 제1군단이 동해안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당시에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은 수도권 지역으로 투입이 용이한 금곡 부근에, 미 제187공정연대는 대구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육본 직할부대인 제8사단은 대전,광주,전주 부근에서 , 제2사단은 춘양. 제천. 안동 부근에서 연대별로 공비 토벌 작전을 실시 하고 있었다.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중부전선의 캔사스선 방어종심을 깊게 하고 적의 공세준비를 차단할 목적으로 철원-김화를 통제할 수 있는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새로운 통제선인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이 선을 점령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에 배치된 적을 고착 견제하여 중부전선으로 증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인제-간성 도로를 점령하여 군수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3군단의 주보급로를 개선할 목적으로 화천저수지 동쪽에 배치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및 제1군단도 4월 24일부터 양구-가전리-송도진리를 연하는 알라바마선을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1단ㄱ뎨 작전으로 미 제1군단 에하 3개 사단(미 제3. 미제24. 미 제25)과 제9군단의 영연방 제27여단이 4월 11일 캔사스선 북쪽 약 20km에 위치한 금학산-광덕산-백운산을 연하는 유타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4월 20일 유타선을 점령하였다. 제1단계 작전이 성공하자 미 제1군단(미25.미24)과 제9군단(국6.미 제1해병)은 공격부대를 재편성한 후 21일부터 다시 항공 및 포병의 엄호하에 최종 목표인 와이오밍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측의 한층 강홛된 저항으로 전방 진출이 어려위지면서 공산군의 대공세가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명령하게 되었다.
중공군이 '51. 4월 22일 "4월 공세(5차 공세)"로 사창리의 국군 제6사단이 무력화 되고, 서부전선 임진강변 설마리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 황실대대인 글로스터 대대가 완전 무력화 된다. 한편 미제 1군단과 제9군단이 캔사스선에서 철의 삼각지로 공격을 개시할 무렵 중동부와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제3군단은 화천저수지-남전리-한계령을 연하는 캔사스선에 도달하여 전선을 정비하고 있었다.
먼저 중서부 전선의 서울 북방 전투로, 미 제1군단이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맞아 금굴산. 파평산. 설마리. 포천 등지에서 격전을 벌인 전투다. 미 제1군단은 좌전방의 국군 해병5독립대대(제1사단배속), 국군 제1사. 영 29여(미 제3사 배속). 미 제3사)이 김포반도 -군자산에 이르는 주방어선에 , 그리고 군단의 중앙과 우전방에는 터키여단(미25사 배속), 미 제25사, 미 제24사단을 배치하여 미 제9군단과 함께 와이오밍선으로의 공격을 담당하게 하였다.
글러나 4월 20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저항이 강려해지면서 공겨깅 둔화되자 급편방어로 전환하게 된다. 이때 터키여단은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미 제25사는 금학산-장흥리 일대의 분지에, 미 제24사는 신술리-문혜리에 각각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종공군의 공격이 개시됨에 따라 적에게 최대의 출혈을 강요하며 캔사스, 델타, 골든선으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영국군 제29여단이(벨기에 대대 배속) 설마리와 금굴산에서, 국군 제1사단이 파평산에서 혈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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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은 4월 19일 소양강을 도하하여 인제를 확보하게 된다. 이 무렵 전투지경선이 조정되어 인제 북족의 제36연대 지역을 제3군단 좌전방에 투입된 제7사단 제5연대에 인계하고, 양구 동쪽의 좌인접 미 제7사단 제32연대지역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4월 23일 중서부전선에 이어 중동부전선에서도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 제8군사령관은 24일로 알라바마선 공격을 취소하고 적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명령한다. 4월 24일 국군 제5사단은 인제를 피탈 당하게 된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25일 인제 탈환을 명령하여 제36연대 제2대대와 미 제7사단에서 배속된 전차 5대로 보전 협동작전을 개시하여 인제를 재탈환한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인접 부대인 국군 제3군단은 4월 22일 제3사단이 한계리-가리봉선에, 군단 예비로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 중인 제7사단이 알라바마선을 공격하기 위해 4월 22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작전 중인 국군 제5사단의 원통지역을 인수한다.
그러나 알라바마선 공격계획 취소로, 23일 국군 제7사단의 제3.5연대가 제5사단에, 제8연대가 제3사단에 배속된다.
북한군 제6사단이 4월 22일 공격을 개시하여, 제3-22연대와 제5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7-5연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으로 공격을 집중하여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는 한석산을 피탈당하고 10km를 후퇴하여 매봉일대로 물러나 다시 한석산을 탈환한다. 그러나 다시 매봉으로 물러났다.
여기서 국군 제9사단이 국군 제1군단의 예비로 강릉에서 재정비 중에 4월 25일부로 제3군단에 배속되고, 27일에는 이성가 준장의 후임으로 최석 준장이 사단장에 부임한다. 사단은 5월 2일 제7사단 제8연대지역을 인수하여 제3군단의 좌측방 사단으로 현리 북쪽 7km의 산악지대를 방어하던 중 7일 인제 북쪽의 미주리선을 공격하게 된다. 여기서 제3사단 제22연대가 고지쟁탈전을 했던 한석산(1119)과 매봉(1066)을 탈한하기 위해 제30연대 제3대대가 5월 7일 공격을 개시하여 3일간의 쟁탈전에서 최종 승리하면서 39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낸 반면 북한군 890여 명을 사살하여 전 대대원이 일계급 특진하게 된다. 10일에는 예비인 제1대대를 투입하여 한석산도 탈환하였다.
1951년 4~5월에 접어들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경주하고 있을 대 후방에서는 이 보다 앞서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의 진상 조사, 처리문제로 정국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 5월 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해임되고 그 후임에 이기붕 장관이 임명되어 군의 기강확립과 전력증강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4월 공세가 1주일만에 중단되자,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4. 30일을 기해 골든-노네임선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적정파악을 위해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통해 적정 파악을 하도록 위력수색을 강화하여 5월 9일에는 김포반도-봉일천-의정부-가평-춘천을 확보하는데 이어 동부전선의 인제와 속초까지 탈환함으로써 4월 공세 당시 상실한 지역의 절반을 회복하였다.
전세가 호전되자 메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반격작전을 계획하여, 5월 12일 기해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 그리고 제10군단이 문산-춘선 선을 점령한 후 북동쪽의 인제를 공격하면, 국군 제3군단과 제1군단이 정면 공격을 계속해 38도선 이북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5월 10일 이후 전 전선에 걸쳐 공산군의 활동이 현저히 강화되고 새로운 공세 징후들이 포착되자 반격계획을 즉히 취소하는 한편, 예하부대에 공산군의 공세에 대응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4월 공세에 실패한 공산군은 공세 실패에 다른 불리한 전황을 조기에 만회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학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5월 공세(제5차 2단계 공세)를 계획한다. 이러한 공산군 측의 조치는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중동부 산악지역에서 국군 사단들을 격멸하여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는 조.중 연합사령관 팽덕회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공산군은 중동부지역에 배치된 국군 6개 사단을 섬멸한다는 목표를 설정한 다음 주공을중서부에서 중동부로 전환하고, 중공군 3개 병단과 북한군 4개 군단 등 총 41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는 공세를 계획한다.
이때 공산군측의 세부적인 부대 운용은 중공군 제9병단과 제3병단 그리고 북한군 3개 군단을ㄹ 주력ㅂ대로 중동부 지역의 국군 저염에 집중 배치하여 운용하고, 중공군 제19병단을 서부전선에서 겭제부대로 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중동부지역에서 주력부대 운용은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제2군단 및 제5군단에 주공 임무를, 중공군 제3병단과 북한군 제3군단에 조공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대치 상황과 계획을 고려해 볼 때, 공산군측이 의도한 대로 중동부지역에 배칟된 국군 6개 사단이 붕괴될 경우 이 지역의 전선은 완전히 개방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유엔군 측이 중서부전선의 주요부대들이 고립되는 최악의 위기상황에 봉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결과는 작전의 성공을 이용해 유리한 조건에서의 휴전회담에 임하려는 공산군의 전략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4월 공세 공격중단은 일시적 어려움 때문이며 곧 서울점령을 위한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미 제8군의 중앙부를 보강하는 부대배치를 실시한다.
서울 외곾을 방어 중이던 미 제1군단은 문산 축선에 국군 제1사단, 의정부 축선에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5사단을 배치하고 영국군 제29여단을 예비로 하였다.
북한강 계곡 통로를 방어중인 미 제9군단은 덕소-예봉산-용문산-금학산을 연하는 선에 서에서 동으로 영 제28여단-미 제24사단-국군 제2사단-국군 제6사단-미 제7사단을차례로 배치하고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미 제10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에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2사단, 소양강 남쪽에 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을 배치하였다.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한석산-가리봉 선에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 국군 제1군단은 설악산-대포리 선에 수도사단과 제11사다을 배치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중동부 전선에서 국군을 격멸한 후에 미군을 섬멸한다는 전략에 따라 주공을 중동부로 전환하고, 중공군 3개 병단 중에 제19병단은 서부에서 유엔군을 견제하고, 제9병단과 제13병단을 중동부 전선으로 돌리고, 북한군 2, 3, 5군단을 투입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51. 5. 16일에 공세를 단행한 공산군은 현리에서 국군 제3군단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일부 부대가 하진부리가지 진출하였으나 그들이 계획했던 아군의 3중 포위에 실패하고 6월 초에는 공세 종말에 다다라 북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후 유엔군의 재반격을로 전선은 전전상태로 회복되고 , 양측은 휴전협상에 돌입한 상태에서 지리한 진지전만을 계속하게 되었다.
2. 피아의 상황과 전투 편성
가. 공산군측 상황과 전투 편성
중공군은 제5차 1단계인 4월 공세를 통해 38도선 돌파에 성공하고 서울에 근접하여 전장 주도권을 회복하였으나, 유엔군 섬멸이라는 최초의 계획은 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조 .중 연합군 사령관 팽덕회는 국군에 대한 집중 공격으로 미군을 고립, 분산시킨 후에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유리한 전기를 마련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동안의 5차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서 병력이 우세하더라도 화력과 장비가 열세하면 승리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목표보다는 "중. 동부 산악지역에서 국군 사단ㅇ들을 격멸한 후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는 목표로 선회하였다.
공산군은 이를 위해 중서부 전선에 대한 양공작전으로 유엔군이 동부로 이동하는 것을 견제하고 중동부 전선에 대한 차단 작전을 병행함으로써 미 제10군단의 동측 연결을 저지하는 방책을 채택하였다.
이들의 5월 공세 계획은 우선 현리지역의 국군 4개 사단(제3,5,7,9사단)을 양익 포위로 섬멸한다는 기본 방침에 따라 제9병단이 주공으로 좌익(양구-인제)에서 상남리-속사리, 한계-풍암리로 우회하고, 인민군 제2, 5군단이 우익(인제-한계령)으로 현리 동쪽과 속사리 방향으로 기동하여 다중 양익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서부의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이 자신들이 주공인양 위장하고 기만작전을 펼치며, 예비인 제3군단은 제2군단을 후속하여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 현리지역으로 증원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또 춘천 동쪽의 중공 제3병단은 주공의 일부로써 미 제10군단을 고착 견제하여 현리지역으로 증원을 차단하도록하고 이 계획에 의거 5월 초에 북한군 제1군단이 서울 서쪽에서, 중공군 제19병단으로 서울 동쪽에서 위장 도하 작전을 , 그리고 예비인 제39군을 춘천-홍천 축선에 공격을 가하여 공격방향을 기만하였다. 이를 위해 5월 9일부터 은밀히 동쪽으로 기동하여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중공군 5월 공세 작전계획 상황도
북 제2군단
사방거리 대성마을 해안 서화 진부령
제9병단 사령부
당거리 원당리
북 제3군단 북 제5군단
화천 제3병단 사령부 용대리
원통 설악산 국 제11사 수도사
중공 제20군 국 제3사
중공 제27군 국 제9사 한계령 양양
중공 제15군 중공 제12군 인제
춘천 국 제7사 신남리 서림리
중공 제60군 국 제5사 현리
자은리
미 제2사
철정리 광원리
창촌리
홍천 풍암리 계방산
미 제7사단 미 제1해병사
양덕원리 창동리 속사리 하진부리
(1) 중공군 제9병단(제20, 27, 12군)은 포병 제25, 26, 11, 28연대를 배속받아 주공을 담당한다.
제12군은 국군 제5사단을 섬멸하고 북 제2군단과 협격하여 퇴로를 차단한다
제27군은 침교-이현 지역의 요지를 점령한 후 국 제7사단을 , 일부는 국 제5사단을 섬멸한다
제20군은 북 제5군단과 협동으로 국 제9사와 제3사를 섬멸하고 일부는 국 제7사를 섬멸한다.
(2) 북한군 제5군단은 군량전, 귀둔리, 오작동에서 국군 제3사단 측면을 돌파한 후 일부 부대가 진동리-왕성곡으로 진격하여 중공군 제20군과 협격으로 현리의 국군을 섬멸한다.
(3) 북한군 제2군단은 마산리와 그 서쪽의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 전투지경선으로 돌파한 후 1개 사단이 속사리로 진출하여 중공군 제12군과 협격으로 하진부리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
(4) 북한군 제3군단은 제2군단을 후속하여 한계령-대암산-유리봉-서림리를 점령하여 현리의 국군이 동으로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고 동쪽의 부대가 서쪽으로 증원하는 것을 차단한다
(5) 조공인 중공군 제3병단은 포병 제29, 30연대 각 1개 대대와 대전차포병 제402연대를 배속받아 서부전선의 미군과 동부전선의 국군 부대를 분할하고, 동부 전선의 작전을 보장한다
제15군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2사단의 연결을 차단한다. 군 주력을 두 방향으로 나누어 한쪽은 평촌리-사오랑치를 연하는 대거리로, 한 쪽은 물노리-갈곡에서 삼년동을 향해 진격하여 미 제2사단을 분할한 후 섬멸한다.
제60군은 추곡리-대룡산 지역에서 미 제10군단을 견제하면서 미 제1해병사단의 공격을 유인하여 동쪽으로 증원을 차단한다.
제39군은 소양강 남쪽의 수구동-내평리-대동리를 연하는 일선 진지를 견고하게 방아하고 중공군 공격부대들의 진출을 보장한 후 제3병단의 예비대가 된다.
(6)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은 고양-가평 간에 위치한 수락산과 마석우리, 청평천 등에 각각 2~3개의 목표물을 선정하고 섬멸하며 서부전선의 미군을 견제하면서 동부전선의 승리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이때 제19병단 주력은 청평천 서북에서 한강을 도하 전과 확대를 준비한다.
제63군은 가평 서북방에서 국군 제6사단의 2~4개 대대를 섬멸하고 청평천-사기막에서 도강하여 영평리-원주 방면으로 전과 확대를 한다.
제64군은 포천 동북방 기산 일대에 집결해 마석우리 일대로 병력을 집중하여 미 제24사단 예하의 2~4개 대대를 격멸하고 도하하여 양평으로 진격한다.
제65군은 포천에 집결하여 1개 사단은 정면의 국군과 유엔군을 견제하고 주력은 내각리로 진출해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하며 양수리 일대에서 한강을 건너 주력은 수원으로, 다른 1개 사단은 인천으로 진격한다.
북한군 제1군단은 동진하여 중공군 제65군과 연결하고 국군 제1사단 1~3개 대대를 섬멸하고 서울을 진격하여 점령하고 경비를 담당한다.
나. 아군측 상황과 전투 편성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5월 이전 공산군의 배치상황을 근거로 공산군의 차기 공세는 서부 또는 중부 축선에 주력이 집중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동부 전선은 도로망이 협소하고 산악지형으로 보급문제가 크기 때문에 중공군은 수도 서울 공략에 가용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방어에 유리한 동부 전선은 국군을 배치하더라도 북한군을 충분히 방어 하리라 판단하여 미 제7사단과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5월 1일 부로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미 제9군단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국군 제7사단을, 국군 제7사단 자리에는 국군 제5사단을 배치하였다.
또한 미 제1해병사단의 작전통제권을 미 제10군단장에게 주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화천지역에서의 차량 통행이 급증하고 소양강 상에 교량을 가설하며 대규모 병력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여기에 생포된 포로들이 중공군 주력이 미 제10군단 정면을 공격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중공군 주력이 중동부 전선에 집중되고 잇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작전계획이나 전선을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만약에 중공군이 방어준비가 미흡한 중동부 지역에 집중된다고 사전에 알려지면 전선에서 대량 이탈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기존방침을 준수하고 대신 미 제1군단의 예비인 미 제3사단을 제8군 예비로 운용토록 하는 최소한의 조치만 하였다.
전투편성은 서부전선에는 미 제1군단이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5사단(필리핀 제103ㅐ3ㅐ, 터어키여단), 영 제29여단(벨지움 대대, 독립 군군 제5해병대대), 국군 제1사단이 골든선에, 미 제9군단은 미 제7사단, 미 제24사단, 영 제28여단,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이 노네임선 전방 가평-춘천선에,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대대),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5사단, 국군 제7사단으로 춘천 동쪽 대룡산-소양강 남쪽 남전리 선에 배치되었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내륙 산악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3군단은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으로 남전리-용대리 간을 방어하고 동해안 지역을 담당한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과 국군 제11사단으로 용대리-설악산을 방어하였다.
육군본부 예비병력은 공비 토벌작전 주인 제8사단과 태백산전투사령부가 있었고 미 제8군 예비는 미 제3사단과 캐나다 제25여단이 있었다.
3. 전투 경과
가. 중. 동부 전선의 전운
1951. 4. 22일부터 29일까지 지속된 중공군 4월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4. 30일을 기해 노네임선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적정 파악을 위해 위력수색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위려수색을 하면서 5월 9일 경에 김포반도-의정부-춘천-인제-속초를 연하는 선까지 탈환하였다. 이후 미 제8군은 본격적인 반격계획을 수립했으나 공산군의 공격징후가 포착되어 공산군의 공격에 대비하게 된다.
한편 동부전선의 국군 및 유엔군은 반격계획에 따라 5월 7일 인제-간성을 잇는 미조리선으로 진격했으며 이 기간에 공산군의 공세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에 따라 진격을 멈추고 방어작전으로 5월 13일 기하여 소양강과 설악산을 연하는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마련하고 방어작전으로 전환했다.
나. 중공군의 중부전선 집중 돌파
(1) 국군 제7사단 지역(음양리)
인제
군축령
소양강
군축교 제9-28연대
관대리
남전교 내린천
하수내리 음양리
제7-5연대 남전리 검우석
삼팔교
구만리
제7-8연대
부평리
도수암
상수내리
현리
신풍리 소치리
제5사 정자리 용포
갑둔리
어론리 *888 검부리 대암산
비득재
자은리 *1076 *우각산 가마봉 오마치
*873 상남리
광암리 *675
침교
도관리 외야리 고사리재
방내리
내촌강
'51.5. 16일 16:30분에 중공군의 공격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국군 제7사단은 다수의 병력과 시설이 피해를 입고 통신선이 절단되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했다. 2시간만인 20시경 방어선이 돌파되었지만 이 사실을 인접 부대나 제3군단에 알리지 못했다.
심지어 미 제10군단조차도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국군 제7사단은 소양강과 가리산 등 천연적인 잇점을 살려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지만 중공군이 돌파를 강행하자 그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진지를 이탈하였다.
중공군 제20군은 구만리 일대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2개 사단이 제8연대 지역으로 집중 돌파를 감행함으로서 쉽게 무너지고 24시경 부평리 일대를 장악했다.
중공군은 예하 제60사단에게 종심 기동하여 오마치 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 임무를 부여받은 제178연대 제2대대는 빠른 속도로 기동했고 그 첨병중대가 오마치 고개 일대에 도달했다. 그 예하 제58사단 제173연대가 남전리 일대로 소양강을 도하하여 5월 18일 -1:00시경 오마치 고개와 용포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미 제8군은 5월 17일 22시부로 동부지역 국군 사단들에게 와코선(778-한계-장평-1009)로 연결되는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를 명령했지만 이미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각자 도생의 철수를 거듭해야 했다.
구만리 일대의 국7-5연대는 5월 16일 16시 30분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 제27군 예하 제81사단과 제79사단이 23시경 구만리 창막동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국7-5연대는 지휘통제가 마비되어 소부대 단위로 철수를 하게 된다.
한편 국7-8연대는 중공군 제27군 제81사단과 제20군 제60사단이 신풍리는 물론 도수암까지 진격하여 제대로 축차방어 한번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특히 제81사단 첨병 연대인 제242연대가 방내리까지 진출하여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중공군이 18일 24시경에 갑둔리, 소치리, 김부리 일대까지 점령하여 국7-8연대는 현리로 퇴각하는 상황에서 중공군은 상남ㄴ리 일대에서 국 제7사단과 제3군단에 대한 포위 섬멸작전을 벌이게 된다.
국군 제7사단장은 5월 17일 사단 예비인 제3연대를 가마봉-대암산을 연하는선에 점령토록 하여 퇴각하는 부대를 엄호토록 하였으나 준비된 진지도 없었고 적이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등의 상황에서 가마봉, 대암산 등에서 일부만 점령하다 적의 압력에 굴복하여 상남리 지역으로 후퇴하게 된다. 철수과정에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1개 대대로 오마치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사단은 제3, 제5연대 일부로 저지진지를 형성하려 했으나 5월 18일 02시경 풍암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 시각, 미 제10군단의 상황은 우측의 제5사단과 제7사단이 돌파되어 요충지인 오마치 고개 일대가 중공군이 점령한 가운데 좌측의 미 제2사단마저 방어선의 일부가 돌파당해 돌파구가 확장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 제7사단은 풍암리 일대로 철수하여 18일 14시 50분경 방어선을 편성하였고 뒤이어 중공군이 율전리 일대로 진출하여 횡성과 속사리 양 방향으로 진출하려 공격을 하였으나 미 제3사단의 화력지원을 받아 적을 격퇴한다. 이후 사단은 제3, 5연대가 미 제2사단에 배속되고 유동 일대에서 제8연대를 중심으로 전투력 복원을 실시하여 끝까지 전선을 이탈하지 않고 중공군과 격전을 한다.
(2) 국군 제5사단의 상황(어론리)
제7-8연대
부평리
도수암
상수내리
국5-27연 현리
신풍리 소치리
*매봉 제5사 정자리 용포
국5-36연 갑둔리
어론리 *888 검부리 대암산
미 제2사
*714국5-36-2대대
*933 비득재
* 가리산 자은리 *1076 *우각산 가마봉 오마치
*873 상남리
*833 국5사 국7사
광암리 *675
침교
도관리 외야리 고사리재
방내리
한계 내촌강
*643 (미 제2-23연) *683(국5-36연)
외삼포리 *533 *4762 장평리 *559 국5-35연 *379
군업리 *587 *796(미 제2-9연대)
국군 제5사단은 5월 7일부로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이래 미주리선으로 진출하여 홍천-인제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단은 매봉-상수내리를 연하는 선에서 제35연대를 좌, 제27연대를 우에 배치하고 제36연대를 예비로 논리 북방 매봉-상수내리를 연하는 선에 진지를 점령했다. 사단의 좌측방에는 미 제2사단 제브라 특수임무부대가 있고 우측에는 국군 제7-8연대가 인접해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을 공격한 부대는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제12, 27군이었다. 제12군의 목표는 국군 제5사를 돌파하여 우회 종심기동으로 속사리를 차단하여 국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였다.
중공군은 5월 16일 17시 30분에 내평리 일대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우측 국7-8연대가 돌파되면서 국5-27연대도 포위를 고려하여 22:00시경 철수를 개시하였다. 자정이 지나 좌측 제35연대도 괘석리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이미 우각산 등 주요고지를 선점하여 광암리로 향해야 했다.
17일 낮 동안에 제36연대의 엄호하에 부대를 재정비하고 미 제2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노네임선후방 장남리에 제36연대, 광암리에 제27연대, 외야리에 제35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적이 야간에 기습공격하여 지휘통제가 마비되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내촌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결국 미제10군단의 전선 조정으로 미 제2-23연대가 국5-27연대 전방인 643고지군에, 미 제2-9연대가 국5-36, 35연대 후방에 재치되었다.
여기서 국 제5사단 장병들은 미 제9연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광암리에서 발굴된 군번 0167621은 어느 용사입니까?
비를 맞으며 우각산으로 오른다. 그동안 많은 탐사를 했지만 정상부근에서 소나기를 맞는 일은 없었다. 자연현상이지만 나는 예사롭지 않게 오늘을 맞이한다. 동행하고 있는 진욱이가 하산하자고 말한다. 나의 건강을 생각해서다.
"진욱아, 전쟁 당시가 봄가을만 있을까, 여름겨울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용사님들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생각해 보라"
"맞아요, 몸숨걸고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용사님의 유해를 찾아야 하므로 아프거나 다치면 안됩니다"
"그럼 아무리 비가 내려도 안다치고 몸살 안나면 되는 거지, 나 자신있다. 용사님이 보우하사... ."
"그래요, 누가 말리겠어요. 시작 했으니 목표한 전투지역을 탐사해야지요"
"좋아, 우리 군가를 하나 부르자, 진짜 사나이다"
우리가 우각산 일대, 제7사단 및 제5사단 주력이 내달려 후퇴해간 고지군에서, 2000년 유해발굴작전 시작 이 후에 처음으로 산악에서 군가를 불렀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 . 그리고 비는 한바탕 쏟아지고 멈췄다.
어론리 가마봉(924)-우각산(11080- 998- 상남리가마봉(1191)-문내고개-문안사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전부 개인호가 있다. 그만큼 이곳 일대가 전투지역임을 알려준다.
[살모사의 출현]
문안사로 내려와 일행을 만나 옷을 갈아 입었다. 대웅전 앞을 오르는데 살모사 새끼가 나타나 계단을 따라 오른다. 모두 호들갑이다. 하지만 나는 위해 행위를 못하도록 하고 관세음보살을 세번 복창하고선 갈 곳으로 가라 했다. 이때 절 스님인지 아닌지 한 분이 오셔서 이 장면을 알려주었더니 자루 하나를 들고와 집게로 넣어서 수풀 속으로 갔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나는 탐사를 다니며 유해가 있는 곳(양구 백석산.진천 봉화산. 청주 국사봉 등)에서는 탐사 중에 혐오스럽다는 뱁을 만나고 묵념으로 환생을 빌어주고 절대 손대지 않았다.
[군인이 숨져간 곳에서 소지품을 챙겼다]
그리고 광암리로 향하여 마을에서 중요한 제보자 한분을 만났다. 이 분으로 인해 이곳 괘석리와 광암리 일대에서의 중요한 발굴 작전이 실현되었다. 이 동네 어르신은 전쟁 때에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어 피난길에 들지 않았고 할아버지와 함께 계속하여 집에 있으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숨기도 하고 전쟁 3년을 보냈다. 그래서 어디에 전사한 유해가 있는지 많이 알고 계신다.
"이리 따라 오세요, 저기 산골에 국군 3구가 묻혀 있어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좀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 당시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산속에 가면 여기저기 사람이 죽어있는데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알 수도 없고(대부분 옷이나 전투화를 벗겨 갔다고 함) 그래서 옷을 입고 있으면 소지품을 챙기게 되지요. 신발도 파가 묻었거나 할 것없이 신고 다닐만 하면 벗겨서 가져 옵니다"
"이해가 됩니다. 한 번 같이 가 주시겠어요?"
"여입니다. 이 소나무 밑에 분명 3분이 있을 겁니다"
"아니 벌써 50년이 지나 60년이 되었는데 그렇게 정확하게 맞다고 하시니 대단하십니다"
"그 매년 사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한번씩은 찾아와 들꽃을 올려놓고 갔어요, 군에 갔다오는 3년을 빼고는... ."
"그럼 여기말고 또 없습니까?"
"있지요, 집 바로 옆에 밭둑에도 있고, 그 건너편에 산소가 있는데 그 산소 앞 부분에도 있고 여러군데 있어요"
나는 아저씨를 따라서 광암리와 괘석리 일대를 여러분 탐사를 했다. 그리고 제보하신 지역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토지소유주와 협조를 하고 일정의 보상금도 지급하면서 준비를 하고 발굴 작전에 들어가 드디어 최초 제보한 지역에서 3구의 유해를 발굴하는데 여기서 인식표가 나온다.
[이167621], 5사단 소속군번이다. 유족을 찾았다. 그 여동생 조카 되는 분을 모시고 현장 공개도 했다. 그러나 유전자 감식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신원을 밝힐 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 집안의 내력을 조사할 수도 없다. 경우에 따라 부모님중 한 분이 재혼했다거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어떤 피해는 없었느지 등을 물어볼 수 없다.
[남자의 그곳에 칡이 자랐다]
그리고 집옆의 밭둑에서도 유해블 발굴했다. 산골 한 곳에서도 3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그런데 해당 유해는 칡넝쿨속에 있었는데 발굴되는 한분의 그곳에 정확하게 칡이 자랐다. 너무도 어이없기도 했고, 눈물나게 처량도 했고, 죽도록 미안도 헸던 유해발굴이다. 나는 얼른 그 칡을 캐내 숲속에 넣고 인간답게 살라 축원을 해 주었다.
[누가 우리 아버지 묘 앞에 삽을 대나?]
제보지역 한곳이 묘소 앞부분인데 연고자를 찾으니 전직 경찰관이다. 죽어도 삽을 댈 수 없다고 하니 황당하다. 묘소도 아니고 묘소 약 5M 앞인데 땅소유권을 갖고 있으면서 안된다고 하니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실 내가 발굴책임을 지고 있던 시기에는 발굴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매년 노크를 하여 생각의 변화만을 기다리려야 했다. 그러다 어찌된 일인지 발굴해도 된다는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발굴을 하여 보니 유전자 감식에 일치되는 유족이 이미 유전자 감식을 해 놓아서 신원이 확인되고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나) 국군 제5, 7사단은 전투를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피리소리에 놀라 도망친 것일까?
이곳 홍천 두촌면 일대 자은리-어론리-남면 신남리-부평리-남전리-인제(남북리.상동)지역을 탐문하다 보면 제3.5.7.9사단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중공군 4월 공세와 5월 공세의 최대 전투현장의 한 곳인 이곳은 전쟁 전에는 인제 지역은 북한지역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서먹서먹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제5사단과 7사단은 실제 중공군 5월 공세시 이 일대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제3사단과 제9사단은 인제 현리-용포지역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이미 제7사단은 북한지역 군우리 개천 바호산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했고, 그들의 인해전술을 알고 있기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수 있다. 제5사단은 북한지역는 국군 제2사단에 배속시킨 1개 연대만 철원과 평강 사이에서 북한군 제2전선을 토벌하는임무를 수행했다.
이렇게 볼 때 국군 제7사단은 북진 작전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질겁하여 무질서한 철수가 이해가 될만하다. 그러나 제5사단은 그보다는 어떻게 보면 뭘 모르고 중공군의 공격에 덤벼들다 큰 피해를 입고선 지휘게토이 무너져 내리면서 무질서한 철수가 이루어졌다고 보면 어떨까?
(다) 과학화 전투훈련장에 남겨진 용사님의 병복을 빕니다.
지금 과학화 훈련장 부지는 바로 중공군 5월공세시 국군 제7사와 5사단이 철수해가던 지역으로 곳곳이 중공군에 포위되면서 많은 희생이 남겨진 곳이다. 하지만 그런 조사 한 번 없이 훈련장으로 변하여 안타까움이 남는다. 고지나 능선이나 제보네 의하면 계곡에도 국군이 죽어서 가매장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가매장한 분들은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사라지면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대부분 운명하셨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 국군 제3군단의 붕괴
(1) 국군 제9사단의 상황
국군 제9사단은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제28연대와 30연대를 전방, 제29연대를 예비로 방어편성 했다. 제3군단은 2개 사단으로 전방 방어선을 편성했다. 제9사단은 16일 20시경 좌측의 국군 제7-5연대의 측방 유입으로 상세한 전장 상황을 알게 되었다.
5월 16일, 제9사단 정면에는 적의 공격이 없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면서 전방 부대들이 돌파되어 고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제9사단장은 제3사단장에게 에비대를 보내 오마치를 선점토록 협조했다. 그러나 제3사단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오마치 일대에 부대를 배치하지 못했다. 5월 17일 01시경 중공군의 전후방 동시타격에 02시에 돌파되어, 군단에 철수를 건의 했으나 제3군단장은 미 제10군단장에게 전황을 물었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9사단장은 퇴로가 차단당하기 전에 야포와 차량을 먼저 철수키로 하고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미 오마치가 차단되어 다시 용포로 돌아왔다.
결국 사단은 17일 새벽 4시경 철수를 명하였고 용포 일대로 철수를 하게 된다. 이 때 전투지경선을 넘어온 제7사단의 일부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낮 12시경 서쪽 능선에서 중공군의 요란사격을 가해왔고 집결된 부대들은 포위됨에 놀라서 사방으로 분산하게 되어 13시 40분경에 현리에 도착했다. . 당시에 이미 적 1개연대가 오마치 넘어 암달동을 점령하고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가 귀둔리에서 현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시 현리는 국군 제3사단 및 제3군단 직할부대, 제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일부 병력이 혼재되어 있었다. 병력들이 모이자 대규모 공격으로 제7사단이 붕괴되고 오마치 고개가 피탈당한 상황을 모두 알게 되어 장병들의 불안과 동요가 확산되었다.
(2) 국군 제3사단의 상황
국군 제3사단은 제3군단의 우측 사단으로 덕적리, 한석산, 가리봉을 연하는 선에 진지를 편성했다. 제18연대를 가리산 1226고지에 일대에, 제22연대를 가리봉 1519고지 서쪽 능선 일대에 배치했다. 또 제23연대를 예비로 전방 연대의 후방에 대대별로 거점을 점령토록 하였다. 가리봉의 동쪽 능선부터는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이 배치되었다.
사단은 생포한 포로 등 여러 정황으로 적이 가리산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여기에 대비히고 있었다. 사단의 정면을 공격한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 32, 12사단으로 5월 15일부터 가리봉 방향으로 공격하여 17일 04시경 이 일대를 돌파했다.
제3사단은 제9사단으로부터 제7사단이 철수 중이며 오마치고개가 피탈당했다는 연략을 받고 군단이 포위 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 08시경 철수를 명령했다. 13시경 현리에 도달했으나 이미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3) 국군 제3군단의 퇴로 차단
서화리 간성
와촌 *안산
원통
소양강
한계령
국3-18연 *가리산 수도-1연
*1226 국3-22연
인제
*958 국9-30연 회전동 양양
*한석산
*점봉산
내린천 *매봉
*596 검우석
국9-28연
현리
도채동
*매봉산
*대암산 용포
검전리 오마치 *방태산
현리 일대에서 만난 제3사단장과 제9사단장은 각각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오마치 고개를공격하기로 했다. 이때 군단장은 5월 17일 14시경 현리에 도착하여 작전회의를 열고 공격명령을 하달한 후 15시 30분경 하진부리의 군단 전술지휘소로 복귀하였다.
제9사 제30연대와 제3사 제18연대가 공격명령에 가담하였으나 부대들이 오마치 공격을 하기도 전에 적의 기습에 무력화되어 방태산으로 퇴각하면서 비극이 서막이 시작되었다.
5월 18일 03시경부터 부대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방태골을 지나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 일대로 퇴각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국군 제3군단을 추격하여 광원리까지 따라 붙어와 부대들은 다시 창촌으로 퇴각하게된다. 주요 길목마다 이미 중공군 첨병 부대들이 지키고 있어 국군의 철수는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태로 소부대 또는 각자 도생의 방법으로 준령을 너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으로 무기도 버리고 군복도 벗어 던지고 민간복 차림으로 사단장도 걷고 걸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창촌에 이르고 있을때에 이곳도 중공군이 지키고 있었고 정예 연대라는국군 제3-18연대도 이곳에서 계방천을 도하하다가 기습을 받아 흩어져 다시 광원리에서 모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미 제8군사령관은 이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하지 말고 중공군의 공격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라 지시했다. 그리고 미 제3사단과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에 출동준비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중공군 첨병 부대들은 광원리, 하진부리까지 일부 부대가 들어와 국군 제3군단을 압박하였다. 군단은 결국 경사가 60도에 달하는 1,150고지의 을수재를 넘어야 했다. 장병들은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탄띠. 철모. 군복까지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하진부리로 향했다. 5월 19일 15시경 군단의 일부가 도달하여 재편성을 하고 있을 때 공산군이 재차 공격해와 결국 제3군단 주력은 여기서 다시 5월 20일 횡계리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부대가 하진부리에 도달할 때에 미 제8군사령관은 하진부리일대에서 더 이상 퇴각하지 말고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으나 군단은 5월 21일 퇴각을 하여 제3사단은 송계리로, 제9사단은 대화로, 군단사령부는 영월로 퇴각하여 흩어졌다.
결국 이 상황으로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다시 배속되게 된다. 당시에 양 사단의 병력 수준은 제3사단이 34.2% 수준의 3,621명, 제9사단이 40.0%수준의 4,5872명이었다.
(3-1) 유해 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용포에 남겨진 일병 김권순 유해의 만남
나는 인제-현리지역의 유해발굴 지역 \선정을 위한 탐사 및 탐문활동을 시행하는 과정에 용포에 이르렀다. 용포교에서 지나던 마을 사람으로부터 연세가 많으신 분을 소개받아 찾아간 집이 안신현이란 분이였다. 안 아저씨는 전쟁 당시에 8살로 아버지와 집에 있었다.
그러다 5월에 갑작스레 병력이 오마치로 우르르 몰려가더니 다시 우르르 되돌아 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는데 집에서 바라보니 용포교 자리 논바닥에 교복입은 학생들이 엄청 많이 앉아 있었다. 여가저기서 총쏘고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 포탄이 작열하는 소리가 요란해서 얼른 집에 숨어야 했다.
다시 하루가 가는데 조용해졌다. 그런데 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광으로 가니 군인이 엎드려 있다. 광바닥이 피바다였다. 얼마나 손톱으로 긁었느지 군인의 손톱이 다 빠졌다. 아버지가 칡순을 해와서 시신을 끌어서 집 뒤에 방공호가 있었는데(일제시대에 조선시대 현감(?)의 비가 서있던 자리를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비가 옆에 넘어져 있었다) 그 속에 넣었다. 다른 두 구의 시신도 넣었는데 광에서 있던 시신은 키가 제일 작고 부상으로 한쪽 다리가 절단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린 '2001년 10월 초에 제3군단 공병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아 직접 발굴을 시작하려 현장으로 갔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김춘자씨가 남편인 에비역 중사 출신의 남편 안시와 함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물으니 이분들은 서울에 살고 있는데 아버지지가 현리 용포일대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마침 휴가기간이라 한번 와 봤는데 마찬가지로 우연히 우릴 만난 것이다.
[꿈에 나타난 아버지가 세번째 묻힌 사람이다고 했다]
그래서 관련이야기를 들으니 참 운명이란 대단한 인연의 연속이었다. 먼저 정신현 아저씨는 어젯밤이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인데 꿈에 아버지가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며 찾고 있는 분이 세번째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묻혀있는 분이라고 했다 한다.
[작은 아버지되시는 분이 함께 군대를 갔었는데, 전사한 곳이 현리 어디인데 나중에 손자 군대에 면회 가보니 그곳이었다 한다]
유복녀 김춘자 아주머니는 여기를 찾게된 동기가 순천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뻘 되는 분이 당시에 본인 아버지와 같이 이곳으로 와서 본인은 살아서 나왔고 사촌은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여기가 현리 용포인지 모르고 있다가 손자가 군대를 갔는데 3군단 공병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면회를 와서 보니 아니 전쟁 때 싸웠던 곳이고 권순이가 전사한 용포교 일대가 그대로 였다. 그래서 기가막혀 면화갔다와서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준 것이다. 그러자
[직장을 버리고 장인을 찾아 나선 사위, 안서방]
이렇게 되자 통신 주특기로 중사를 달고 예비역이 된 아주머니 남편이 장인을 찾겠다고 용포교 일대를 수소문하던 중에 오늘 우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굴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분들도 보고 가겠다고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정씨 아저시 집 뒤의 큰 소나무 숲속에서 반공호를 파내려 갔다. 한 길을 파내려가도 보이질 않는다. 모두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되새겨보며 의아해 하는 눈치다.
[야, 삽 이리줘 봐~]
나는 직접 병력을 올라오게 하고 삽을 들고 내려섰다. 한 길이나 된다. 그래도 병사들보다 그 당시는 네가 삽질을 더 잘했다. 약관40대였으니 말이다. 몇 삽을 퍼 올리고 금속 탐지기를 가동시켜보니 탐지음이 들린다. 그래서 그 곳을 다시 한 삽 들어 올리려는데 뭐가 걸린 느낌이다. 바로 삽을 내려놓고 전문 발굴삽을 이용하여 흙을 걷어내려는데 발뒤꿈치 뼈가 분명했다. 이렇게 해서 충북대 박선주 교수팀이 투입되었다(육군이 고용한 전문 발굴팀)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3구의 유해와 마지막 세번째가 정아저씨가 말한대로 키가 가장 작고 한쪽 다리가 없었다. 꿈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장모님을 찾아 모녀의 상봉을 만들었으나 어머니 얼굴을 보지않는 김춘자씨!]
사위되는 분이 그간의 일들을 말하였다. 전쟁이 나고 군에 간 분이 전사했다는 통지서가 오면서 시집에서 한살된 아기를 놔두고 친정으로 가라하여 집으로 돌아간 후에 장모 되시는 분은 재혼을 했다. 수소문하여 찾으니 완도에 잘 살고 있었다. 지역유지인데 찾아가서 사실관계를 말하니 믿으려 하지 안했다.
그렇게 하길 몇번, 드디어 모녀 상봉을 위해 누가 보이지 않는 동행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어느날 동해항에서 상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춘자씨가 어머니가 아니라고 울며불며 손을 주지않고 처다보지도도 않했다. 겨우 손을 잡아 반 강제로 50년 만에 모녀의 기막힌 만남이 이루어 졌다. 하지만 어미니란 말을 하질 안했다. 본이니 난 자식을 두고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다시 어머니 되시는 분은 배르 타고 떠났다 한다.
[대전 현충원 안장식에 나타나지 않은 부인 그리고 어머니~!]
우린 대전 현충원에 안장식을 하는 날, 사위 되는 분을 통하여 장모님을 오시도록 했다.그래서 무녀간의 상봉을 성사시키려 했다. 하지만 기달려도 그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열하는 춘자씨의 모습에 그당시 여러 안장 행사가 있었는데 모두 고 김권순 참전용사님의 묻히는 장소로 다 모였다. 눈물 바다가 되었다. 얼굴도 못보았는데 전사자 몸으로 나타나시던지 이렇게 다시 흙으로 돌아가느냐며 그 통곡은 현충원을 울렸다.
안타까운 것은 그 후로 김춘자씨가 병으로 돌아가시더니 그 남편도 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운명은 기고하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야속하고 누구에게는 한없이 희망이다.
(나) 잠뱅이 걸치고 방태산을 넘는 제9사단장 최석 장군과 학도병
사단의오마치 고개 공격계획에 따라 제9사 30연대는 제3대대가 주요 지형인 736고지를 무혈 점령했다. 그러나 785고지를 점령해야 할 부대들이 내린천을 따라 남하 하다가 방태산으로 퇴각하면서 사단 전체가 방태산으로 퇴각하게 된 비극의 서막이었다고 기록한다.
한편 제3사단 18연대는 제9사 30연대가 중간 목표를 점령하면 이를 초월하여 오마치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ㅇ었다. 그러나 현리 일대의 병력이 기습을 받아 방태산으로 흩어지고, 제9사단도 방태산으로 퇴각하자 제3사단장 역시 5월 18일 03시 30분경 모든 장비를 파괴하고 방태산을 지나 창촌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에 제3군단은 무질서한 철수를 시작한다. 군단은 장병, 노무자, 위문공연단 등이 뒤섞여 공용화기와 장비를 파괴하거나 유기하고 방태산(1436)으로 퇴각한다. 방태산 남쪽의 광원리로 험준한 주억봉(1449)과 구룡덕봉(1388)을 넘었다.
나는 동네분들의 제보로 매화동 일대에서 육박전이 벌어졌다는 밭 언저리를 확인하여 발굴결과 우의와 수통을 달고 있는 탄티를 차고 전사한 국군용사(모든 유품이 아군 것임) 수 구를 발굴했다.
[학도병이 숨져서 그대로 가매장 했다는용소늪, 그리고 그 옆에서 발굴되는 "여농"이 새겨진 교복 단추와 용사님]
매화동에서 방태산(작은)으로 계곡길을 따라 가면 용소가 있다. 경사가 심하여 계곡 물이 적어 보여도 물살이 얼마나 센지 나는 이곳을 '01년 8월 말에 건너다 물속의 작은 구르는 돌에 치여 지금도 아른거린다. 이곳 일대가 옛날에는 화전민들이 살았다. 90이 넘어가는 할머니가 현리에 살아계셔 제보를 구했다. 할머니가 그곳에서 60년대까지는 살았던 장본인이다. 주변에 군인 시신이 너무러져 있고 용소 바로 윗부분에 조그만 공터같은 곳이 있는데 교복입고 몇이 죽어 있어서 당시 화전민들이 사을 이용하여 대충 묻었다는 것이다.
나는 '01년 10월 초에 박선주 교수팀을 모시고 현장으로 들어가 주변을 탐사한 결과 금속탐지기에 신호가 나는 곳을 선정하여 발굴을 개시했다. 드디어 발굴되는 50년 만의 굴레를 벗는 용사님, 머리 부분에 풀푸리가 얼켜서 이걸 걷어내는데만 2~3시간이 소요되는 정밀 발굴을 하여 몇 구의 유해와 "여농"이 새겨진 교복 단추 몇개, 탄창, M1탄, 수류탄 등 다수의 아군 유품도 발굴했다.
[미산리 내린천의 핏물]
지금 전사에는 미산리 내린천관련 내용이 미흡하다. 하지만 탐문 결과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 해 5월의 전투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미산리 내린천 일정구간이 핏물이었다 한다. 특히 미산리 수리봉(944)일대로 군인들이 올라가려 하고 이미 중공군이 요소에 매복을 하고 있어 전투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허무하게 죽어갔다. 군인은 총도 없고 맨몸이었다. 중공군도 요란스런 따발총인데 그것도 몇 명만 갖고 있었다.
그래도 맨몸으로 몰려드는 군인이 워낙 많다보니 그냥 갈겨댄다는 것이다. 이래서 가뭄이 이어지던 강바닥이 피바다가 되고 비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비가 내리는데 그것이 흘러 십리도 더 갔다는 이야기는 서럽게 만들었다. 시신도 누가 처리할 겨를도 없고 할려고도 안했고 그냥 강가에서 까맣게 부패되어 가다 물에 떠내려 가든지 여우나 들개들이 달려들던지 희생되었다.
[뭘 봐, 너 줄 것 없어~!]
당번이 구해온 잠뱅이를 입었다. 지금은 계급이나 위신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서 남아 다시 적을 무찔러야 한다. 방태산 계곡을 따라 위로 무조건 오른다. 비록 5월이지만 햇빛이 왜이리 강렬한지 비지땀이 흐른다. 병사의 나이나 사단장의 나이나 다를게 없다. 거기서 거기였다. 동네 친구도 형도 동생도 함께 군복을 입고 당시는 근무했다. 초창기 군의 실태다.
걷다보니 아무도 여에 없다. 다 떨어져 나갔다. 얼마를 걸었을까 너무 힘이 들어 주저앉았다. 옆을 보니 한 교복을 입은 학도병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이미 두끼를 굶었는지라 체면이고 뭐고 배가 꼬르륵 거린다. 그래도 오르면서 계곡 물을 간간이 마셨다.
[한참 물을 먹고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위에 국군이 엎드려 물을 먹다 죽어 있다]
5월이라 춥지는 안했다. 다만 산을 올라 도망가다 보니 배가 고팠다. 지금 주먹밥도 보급이 안된다. 그런데 한 교복을 입은 학생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체면이고 뭐고 너무 배가 고파서 옆에 다가서서 쳐다봤다. 한입이라도 먹으면 살 것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차마 사단장이라 말할 수도 없고 잠뱅이걸친 처지에 어떻게 한입 안되겠느냐고 물었다. 일생리대에 가장 큰 용기였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되었다. "너 줄것 없어... ."
계속 행군이다. 누가 앞장서고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정상으로 올라서야 한다. 땀이 먹은 것이 없으니 이제 일사병이나 열사병이 일어날 지경이다. 그러니 계곡물은 보이는대로 먹어야 한다. 계곡이라 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어쩌다 돌틈에 조금있는 상태인데 한번는 웅덩이처럼 되어 있는 곳에 물이 있어 정신없이 먹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순간 기막힌 현장이 보인다, 바로 국군이 베낭을 메고 엎드려 물을 먹다 죽어 있다. 보니 옆구리가 관통되어 엄청난 출혈이 있었던 모양이다. 목 마르다고 물을 많이 마시면 피가 물거져 저혈당으로 쇼크사가 발생하여 죽는다. 물도 함부로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니다.
(다) 통행금지구역
나는 광원리와 운두령, 율전리, 오대산일대를 정말 지겹도록 탐사했다. 중공군 5월 공세시 국군 제3군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격게 된다. 미 제8군사령관이 지금의 영동고속도로선을 지키도록 했으나 그 밑으로 철수해 가버려 미군이 운두령으로 들어와 중공군의 남진을 차단하게 된다.
이를 본 제8군사령관은 바로 북진작전에서도 국군 제2군단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속수무책으로 철수해버려 우측방이 노출되면서 협조된 철수작전을 못한 과오가 있는데 또 이런 사태가 발생하니 제3군단을 해체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나는 판단하기를 이정도라면 이 일대는 많은 전사자가 산악지역에 남아 있으리라 보고 1,000m고지군을 샅샅이 뒤진다는 각오로 일행들과 아니면 혼자서 탐사를 주기적으로 했다.
광원리 월둔골에서 월둔 고개롤 올라서면 방태산의 좌우능선을 중앙으로 관통하여 조경동으로 내려서게 되는데 한번은 기린면 방동리-자연휴양림-방태산(1449)으로 올라서 구룡덕봉-월둔고개로 내려서는 탐사를 하고, 한번은 홍천 내면 구룡령-갈전곡봉(1196)-가칠봉(1240)-월둔고개로 탐사를 했다. 이곳 일대는 능선상에 개인호가 수천개는 남아 있는데 모두가 6.25당시 호가 아니라 그 이후에 대간첩작전 중에 굴토된 것도 있고, 진지공사로 굴토된 것이 혼재되어 있다.
그런데 조경동이란 지명이 백골병단이 통과한 지역으로 우군기의 오폭으로 일부 피해가 발생한 곳이다. 따라서 그 곳을 가보려 월둔고개에서 무모하게 통행금지돤 산악 계곡로를 따라 짚차로 이동을 하다 수해로 길이 유실되어 갈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그만 갇히게 되어 버렸다. 용감하면 무식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였다.
[산속 계곡이라 무전이나 헨폰같은 것이 작동하지 않았다.]
지금 서울 여의동세서 매일신문 기자를 하고 있는 홍일병이 연신 악세레다를 밟아보지만 차는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내가 잘못이다. 옷을 걷어붙이고 바퀴밑을 파내고 큰돌을 받히고 가속패달을 밟아 일단 차를 수렁에서 빼내야 어떻게 뒤로 돌려 되돌아 나가기라도 할 수 있다.
가속패달을 밟은 순간 한번은 주먹만한 돌이 하느로 치솟아 내머리에 정통으로 떨어져 그만 피가 흐른다. 나는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손으로 쥐어 잡고 일어서 숨을 돌렸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 넘실대고 들어온다. 그때도 아마 중공군이 이렇게 밀려들어와 많은 희생이 발생했으리라 생각하며 용사님을 불러보았다. "용사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여기서 나가야 선배님들을 발굴하여 현충원에 봉헌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린 차를 꺼내고 다시 돌리어 오던 길로 돌아나와 광원리로 갔다.
(다) 전사에 기록하지 않고 있는 국군 제3군단의 현리진입과 미 제8군의 전략은? (유재흥 장군의 기막힌 역사)
유재흥 장군은 최초 제7사단으로 의정부지구 전투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패배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다음은 중공군 4월 공세시 이번엔 제6사단으로서 사단의 엄청난 인명손실에 책임을 피할 수없다. 그런 장군이 이번에는 제3군단으로서 이곳 현리에서 1개 군단이 무력화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장군은 그 후 국방부 장관이 되었고, 12.12사태시에 그 책임자로서 미군부대로 피신(?)했다가 최규하 대통령의 호출에 미군영에서 나와 전두환 합수부의 계엄사령관 정승화 체포 영장에 서명을 날인하는 영광(?)을 갔고 있는 장군이다.
전사기록은 왜 제3군단의 양개 사단이 대낮에 그것도 분명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되는 가운데 철수해 이동하는 행위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아무리 전술의 무지라 할지라도 이런 방책은 세우기 어렵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오마치고개가 확보된 것도 아니고 또한 현리에서 평창지역으로의 철수로는 사실 그 당시 주도로는 31번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했다. 지금도 418번 지방도로를 이용 동쪽으로 전진하여 남족으로 방동리 계곡으로 해서 방태산(6.25당시 주로 이용)-광원리로 빠져 나오던지, 아니면 방동약수에서 조경동- 월둔고개.가칠봉(1240)-광원리로 내려서는 것이 산악 기동로이다. 다른 기동로는 418번 도로를 이용하여기린면 진동리로 해서 조침령을 넘어 서림에서 56번 도로를 이용하여 구룡령으로 해서 기동하는 방법이 있다. 당시 이곳은 국군 제1군단이 확보하고 있어 원거리이지만 충분히 선택 가능한 철수로인데 굳이 양개 사단이 현리로 밀려들고 철수로의 애로지역은 확보하지 않은 체로 중공군으이 성동격서에 말려들어 혼비백산. 방태산으로 오르고 다시 창촌. 광원리에서 기습을 받고 군단 주력은 광원리 을수동에서 계곡을 따라 3일간 아무것 도 멱지 못한 채로 을수재를 넘어 용평 속사리로 내려가야 했던 비극이 초래되었다.
정말 제3군단이 자체적 판단에 의하여 아니면 지난 2월의 횡성의 대 재앙처럼 미 제8군의 전략적 판단에 의하여(당시는 공격간 이므로 제8사단이 전방으로 추진되어, 중공군이 좋은 먹이를 만나 대규모 부대를 이곳으로 투입하여 기타지역에서의 압력을 흡입했다는 설이 있음. 결국 측방과 후방에서의 포위를 자초하여 사단이 8,000여 명의 인명피해로 무력화되었던 사례) 혹시나 중서부나 서부전선에서 수도권에 영향력을 돌리기 위해 현리지역으로 2개 사단이 철수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라) 현리 가옥 빨래줄에 매달린 많은 두개골은 누구입니까? (너도 그랬으니 나도 그렇게 한다)
지금 제3군단 헬기장이 있는 인근 마을에서 지역주민 간담회를 실시하여 제보를 획득하는 노력을 했다. 다행이도 일부 주민이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었다.
[중공군이 왔을 때에 북한군이 따라와 있었다]
현리 사람들은 중공군의 악랄한 것을 기억하는 분은 별로 없었다. 다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며, 나이가 어려보였다. 여기에 총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몰려 다니는 인원 중에 몇 명만 가지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 피난가버려 동네에는 나이드신 분들이 대부분 이었다.
동네에 들어온 군인은 중공군이 아니라 북한군이었다.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완장을 찬 몇몇이 동네를 이잡듯이 뒤져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숨어있던 군인들을 잡아내서 목을 쳐서 내걸었다. 차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고 시키는대로 해야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국군이 다시 올라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부역자를 색출한다고 이번에는 국군이 난리다. 그리고 몇 명을 잡아서 목을 잘라 빨래줄에 매달았다. 북한군이 한 대로 그대로 했다. 결국 죽어간 사람은 동네 사람이고 일부 쌍방의 포로들이었다. 파리 목숨보다 못한 인간의 목숨이었다.
(마) 사실 학도병이 왔는데 총도 없이 논바닥에 앉아서 죽어갔다.
용포지역에 수많은 학도병이 차에 실려와 내렸다. 중공군이 오는지 북한군이 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무슨 군인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지 용포교 주변에 군인과 차량들로 꽉 메워졌다. 여기에 남쪽으로부터 트럭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실려왔다.
[이해할 수 없는 학도병 증원]
중공군 4월 공세이후에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이전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데 무슨이유로 군복을 입지않은 학생이 교복을 입은 체로 이곳에 증원되었을까?
이미 거창 신원리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져 그 책임자가 사형을 받게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군동원 업무가 시작되었는데 어이 학도병이 실려왔을까?
남아 있던 동네 분들이 모두 보았다고 증언했다. 총도 주어 지지않고 그저 실려와 용포교 주변 논에 주저앉아 쉬다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총 한발 쏘아보지 못하고 대부분 숨져갔다.
(바) 돼지막사 돼지 탈출사건~!
용포교에서 불과 얼마 안되는 곳에 시골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곳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다('01년도) 그런데 이곳이 6.25 당시는 논의 일부 였다. 중공군 5월 공세시 주변에서 엄청난 군인이 전사한 상황에서 군데 군데 시신을 땅을 파고 묻었다.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분들은 이곳을 떠났다. 떠난 이유는 아무래도 부역의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이 잊혀진 가운데 어느날 이곳에 돼지우리가 만들어졌다. 돼지를 여러마리 길르게 되었다. 그러네 어느날 난리가 났다. 우리안의 돼지가 우리를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슴높이가 넘는 우리를 어떻게 뛰어 올라 탈출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돼지들이 우리 안에서 코로 땅을 파다 사람 유해가 나오고 그걸 보고 놀라서 순간 뛰어 올랐다는 것이다. 착한 돼지들이 인간을 보니 얼마나 놀랐을까?
[멧돼지를 잘못 만나면 뼈도 안남는다]
그러나 산속의 멧돼지들은 배가 고파서 6.25전쟁 당시에 개인호나 교통호 등에 묻혀진 유해의 냄새를 맡아가며 남겨진 유해를 먹었다. 실제 우리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산정상 부분에 굴토된 개인호를 파낸 멧돼지의 실체를 확인하였다. 화천 북방 상서면 산양리 상마산동 일대는, 전후 마을 사람들이 경찰의 통제하에 고지 일대에서 유해를 50여구 수습하여 일정장소에 가매장했는데 어느날 멧돼지 몇마리가 나타나 그 지역을 휩쓸고 가더니 유해가 한마리도 남지 않았고 전투화 조각등 멧돼지가 씹지 못하는 것만 남았다고 했다.
결국 돼지를 모두 잡아 도살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을 넓게 발굴하여 유해를 수습하게 된다. 이곳 뿐만 아니라 논바닥(지금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도 증언을 받아 몇 십구의 유해를 수습하여 한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그곳을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다시 옮겨지고 이렇게 해서 결국 우리가 추적해 들어갔을 때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사) 차라리 포로가 되는 것이 편했다(내린천을 따라 가면 남인줄 알았더니 북한군이 서 있었다)
참전용사 한 분이 증언을 해왔다. 본인이 을수재를 넘었다고 한다. 이 분이 증언하여 우리는 유해도 1구를 발굴해 왔다. 용사님은 3사단 소속이었다. 현리에서부터 철수하다 보니 3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물을 먹는 것도 한 두번이다. 산을 올라야 하고 뛰어야 하고 중공군이지 북한군인지 추격하는 공산군을 피해야 한다.
"야 나 이제 못 걷겠다. 차라리 여기서 쉬다가 죽을 거다"
"무슨 소리야, 저 산만 넘으면 아군이 기다릴거야. 일어나라. 여기까지 와서 주저 앉으면 어쩌라는거냐"
"아냐, 난 이제 걸을 수 없다. 너라도 빨리 도망가라"
[적군에 남길 수는 없다. 계곡으로 밀었다... .]
그래서 전우를 남기고 떠날 수는 없기에 미안하다고 하며 계곡으로 밀어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유학산 지구전투시 제15연대 이경식 용산님이 부상당한 전우를 그대로 고추밭에 묻고 떠났다는 증언, 그리고 그 경북고 출신 부상자를 찾으려 유학산 일대를 뱅뱅 돌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길을 따라 갔더니 북한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른 용사님을 만났다. 이 분은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시 돌아오신 분이다. 포로가 된 상황은 산으로 올라가다가 힘에 겨워 주저앉아 있는데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공포감에 떨고 있는데 몇 명이 모여들었다. 어둠이 깔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른느데 한 군인이 물을 따라 가자고 한다. 물은 북에서 남으로 또는 동에서 서로 흐르니 물길을 따라가면 아군 진영을 만날 수 있을 거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어둠속에서 조심조심 물길을 따라 이동해갔다. 총도 없고 수류탄도 없고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얼마를 걸어 갔을 가 앞에 누군가 보인다. 몸을 숨기고 지켜 보았다.
"동무 나오라우?"
"동무 나오라우, 다 보고 있다. 도망치면 죽는다"
"셋을 새갓어, 하나 둘 ... ."
용사님들은 누구라 할 것없이 항복을 외쳤다. 살려 달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내린천은 남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4) 미 제2사단의 양쪽 견부 확보
국군 6개 사단이 미주리선으로 진격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은 대룡산, 가리산, 매봉을 연하는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좌로부터 제9연대, 제38연대, 제23연대를 배치했다. 미 제2사단은 중앙의 제38연대에 네덜란드 대대를, 우측의 제23연대에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 제3대대와 프랑스 대대를 각각 배속했다.
[인제-홍천 축선]
우측의 미 제23연대는 제2대대와 배속받은 공수 1개 중대, 미 제72전차대대 예하 1개 소대로 "제브라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우측방을 방어했다. 미 제23연대의 주력은 사단의 예비로써 와촌 일대에 집결시켰다. 국군 제5-36연대 제3대대와 아이반호(국군 1개 중대 규모로 편성된 지휘소 방호부대) 부대를 전초부대로 운용했다.
가리산 국5-36-3대대 미2사 = 국5사
미 2-23연
제브라
미2-38연 특수임무부대
미2-9연 네덜란드
프랑스
한계
미 해병1사 = 미 제2사 걸운리
대룡산 홍천
미 제2사단의 정면을 공격한 중공군은 제12군 예하 제31, 34, 35사단이었다. 이들은 5월 15일 밤에 소양강을 도하한 후 5월 16일 17시 30분에 사단의 우측과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으로 공격한 것은 이곳에 미 제2-23연대에 배속된 국5-36-3대대를 사전 정찰을 통해 확인하고 이곳이 국군 제5사단의 책임지역으로 오판했다.
중공군의 병력이 점점 증강되자 미 제2사단은 국군 제36-3대대를 철수시키고 와촌 일대에 집결해있던 미 제23연대를 사단의 우전방에 투입했다.
5월 16일 21시경, 중공군이 미 제23연대 3대대 정면을 중공군 제12군 제31사단이 돌파를 시도했다. 이들은국군 제5사단과 미 제23연대 전투지경선의 간격을 이용하여 24시 경에는 자은리 북쪽의 삼거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이때 미군의 상황과 지형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여 2시간 가량 지체하기도 하면서 5월 17일 아침 국군 제5사단을 돌파하고 인제-홍천 도로를 따라 계속 진격하여 5월 18일에는 국군 후방의 주요 목을 차단하고 하진부리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미 제2사단은 퇴로가 차단되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평천 일대로 투입하였고 이에 따라 미 제23연대가 한계 일대로 퇴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23연대는 탱크 2대와 100여 대의 차량을 버리고 도보로 퇴각하기도 해쑈고 5월 18일 17시부로 한계를 좌우로 연하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한편 미 제2사단의 좌익 미 제38연대의 가리산지역으로 중공군 제35사단 제103연대의 돌격부대가 치고 들어와 17일 03시경 피탈되고 계속하여 평천 계곡으로 치고 내려 오던 중에 프랑스 대대가 새벽부터 20시까지 이를 저지하였다.
[가리산 전투]
5월 16일 17시 30분 경 중공군 제35사단이 미 제2사단 제38연대의 전방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5월 17일 01시 30분경 제38연대 A중대가 방어하던 가리산이 피탈된다. 중공군이 게속하여 평천 계곡으로 내려왔고, 이 일대 배치되었던 프랑스 대대가 네덜란드대대와 함께 새벽부터 20시까지 이를 저지하였다.
중공군 제34사단은 중공군 제31사단이 자은리 북쪽 삼거리에서 미 제2-23연대를 공격할 때 국군 제5사단 쪽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했다가 5.17~18일 양일간에는 자은리 일대에서 미군을 몰아 내는 것을 목표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이 모두 가리산 일대에 집결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자 미 제제2-38연대장은 가라산에 군단 일제사격을 요청하여 중공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한 후 가리산 지역을 철수하였다.
[벙커고지 전투]
중12군 중34사 중31사
중15군 품걸리 물로리 삽다리
홍천고개
평촌리 미2사=국5사
늘목고개 38=23
자은리
가락고개 평내
박달재 9=38
778 부채뜰
사실고개
한계
미 1해병=미2사
구성포리
와촌
한편 우측의 벙커고지(778고지)일대는 미 제38-3대대가 점령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5월 17일 야간에 일시적 피탈 되었으나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에서 최종 미군이 승리하여 진지를 사수하였다.
5월 18일 아침 , 미 제8군은 778고지를 기점으로 한계-와코선이 연계된 수정된 노네임선을 설정하고 12시를 기해 병력배치를 완료하라 명령하였다. 이로써 좌로부터 미 제1해병사단-미 제2사- 국군 제5사- 국군 제7사단이 배치된 새로운 방어선이 완성되었다.
저녁부터 이 778고지로 중공군이 총공세를 가해왔다. 이 고지가 좌측 견부로써 돌파하지 않으면 우회기동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공산군측의 작전 기도가 실패하게 된다. 반대로 미군은 이곳을 사수함으로써 동측부대들의 철수를 엄호하고 좌측의 미 제1해병사단의 방어를 용이하게 하는 잇점이 있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고지가 너무 전방에 나가있어 계속적인 방어에는어려움이 있다고 보고 미 제2-38-3-K중대를 철수시키게 되는데 고수방어를 하고 있던 중대는 진내 사격을 요청하여 이 고지 위에 약 1만여 발의 포탄이 작렬하여 표고가 2m(?) 주저앉으며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철수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미 제1해병에서 진지를 인수하여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후에 해병도 철수하여 이 일대는 중공군이 점령하였으나 중공군의 총공세는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미군이 수정된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자 중공군은 20일 03시경부터 총공세를 가해왔고 미군은 19일에 176대, 20일에 21대의 폭격기를 투입하여 중공군은 막대한 인적 피해를 입으면서 21일 전투지속 능력 상실의 뚜렷한징후를 보였다.
이에 바로 미 제10군단은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에 공격 명령을 부여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4-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사오랑치 고개 일대의 발굴 유해는 민간인이지, 아니면 어느 국적인지?
홍천 가리산지구 전투는 중공군 5월 공세시 미 제2사단과 중공군이 짧은 2~3일간 전투를 실시했다. 이 보다 앞서 1.4후퇴시에는
국군 2.5.8사단이 춘천 우측방 내평리~부평리간에서 일시적 방어를 하고 제3사단이 후속하여 들어왔다가 후퇴해 나간다. 5월 공세이후에는 재진격간(유엔군 3차 반격작전) 국군 제1해병연대가 진출한다.
우리는 물걸리 일대에서 500고지군 일대에서 '01년도 이후에 무려 15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주요 격전지라 어디에도 명시된 곳이 아니다. 내평링에서 넘어오는 사오랑치 고개 주변이다.
[홍천을 넘나들던 고개?]
내평리 사람들 이야기는 그 옛날에는 내평리에서 소양강을 건너 사오랑치 고개를 넘어 홍천으로 들어가곤 했다 한다. 이렇게 보면 혹시나 피난가던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물론 나온 유품들이 군인들 것이 있지만 유품이 없던 유해도 있다면 어떻게 분석해야 할 지 어려운 문제라고 봐야 한다. 만약에 모두가 군인이라하면 사실 중공군이 이곳을 점령한 기간이 5월 공세로 보면 2~3주에 불과하다. 이 말은 그들이 죽은 중공군을 옮겨 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유엔군의 재반격시 거의 무방비로 포위가 되어 많은 피해를 여기서부터 파로호에 이르는 구간에 남기게 된다. 내가 발굴작전을 통제할 당시는그래서 이 일대를 발굴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나) 발굴하지 말라는 벙커고지 유해를 발굴한 발굴하는 의미는 무얼까?
(제천 세무대학에 와 있는 미국 교수의 헌신적인 유해발굴 노력)
벙커고지는 미 제38-3대대 K중대가 고수방어를 했던 장소다. 처음 기습에는 돌파된 적도 있지만 바로 역습으로 탈환하여 중공군 공격을 막아냈다. 당시 제3대대장 헤인스 중령은 좌로부터 I. K. L중대 순으로 배치하는데 가장 신뢰하는 브란웰 대위를 벙커고지에 배치했다. 대대장 헤인스는 전원이 엄체홍에 들어갈 수 있도록 2~3인용 엄체호를 구축하고 교통호로 연결하도록 했다.
[나는 너희들을 포격으로부터 지켜 줄 튼튼한 엄체호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병력들이 어차피 지연진지에 불과 하다고 판단하여 제대로 엄체호를 구축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대장은 부대원들에게 진지방어로 작전이 바뀌었다고 설명하며 능선을 쫒아 다니며 진지공사를 독려했다. 산기슭의 통나무를 베어 엄체호 목재로 쓰고 성토를 1m이상 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지 점령 1주일이 지난 5월 8일 경에는 800고지의 둥근 정상에 23개의 엄체호가 완성되어 장병들이 벙커고지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진지 전면에 경게철조망, 그 전방 150m에는 조명지뢰와 수류탄을 장치한 전술철조망을 쳤다. 그리고 이중 철조만 사이에는 대인지뢰 등을 매설했다.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이 현장에 서다]
이곳을 헬리곱터로 방문한 지휘관이 미 제10군단지역에서 가장 강한 진지라고 칭찬을 했다. 5월 12일 축성이 끝난 상황에 모래주먼니 23만개, 철조망 385롤, 철주 6천개, 지뢰 3,955개였다. 이 모든 것을 정상에 올린 것은 한국 노무대대(700명)이었다.
[사단장님, 한가지 걱정은 적이 우리진지를 공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5월 14일, 사단장이 헬리곱터에 대대장을 탑승시켜 전방어지역을 정찰시키고 약점을 찾으라고 한다. 이에 제3대대장 헤인스가 답하기를 너무진지가 완벽하여 중공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약점이 있었으니 좌측소대정면에 있는 절벽이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적이 못 오를 것으로 생각하여 단선 철조망에 지뢰는 매설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 되고 우측의 가리산이 피탈된다. 이에 연대는 돌파구 확장을 막기 위해서 대대의 좌측방 일부를 제9연대 일부가 담당하게 하여 하였다. 대대가 정찰대를 전방의 916고지에 보낸 결과 중공군이 다가서고 있었다. 이에 대대는 포병사격과 항공지원을 요청하여 소위 공격준비 파괴사격을 실시하여 적을 일부 무력화 시켰다.
드디어 5월 17일, 중대장 브란넬 대위는 전병력을 호 속으로 들여 보내고 만만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중공군은 이미 916고지에서 정찰대가 나오는 통로를 눈여겨 보고 있었고, 그 통로를 이용하여 은밀히 진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안개가 심하여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몇발의 조명지뢰가 터졌으나 곧 소화되고 잠잠해진 진지는 고요한듯 했다.
중공군이 이미 진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이다. 수류탄을 던지고 진내에서 격전이 벌어질 상황이다. 이렇게 되자 일부 병력이 엄체호를 이탈해 뒤로 물러 나면서 순식간에 고지 정상이 중공군이 점령했다.엄체호 안에서는 주위의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불안감과 초조감이 항상 감돌게 된다.
모두가 물러 나거나 진지를 이탈하는 상황에 정상의 무반동총반 2명이 건재하여 그 혼란속에서 사격을 하고 있었다. 이 무반동총과 중대본부간의 전화가 통하고 있어 이를 통하여 대대장은 포병의 사격을 유도하도록 했다. 중대장이 정상의 기관총 진지를 찾아 갔을 때는 도망친 소대원을 찾으려 소대장은 보이질 않았고 선임하사관이 대대에 상황을 보고 있어서 이 전화기를 이용하여 대대에 역습을 요청했다. 이 무렵에 제3소대장은 도망친 소대원을 다시 규합하여 L중대의 좌측편에 진지를 점령하는데 무개호 였다. 하지만 중공군이 이곳으로 공격하지 않했다. 무반동총반이 포병사격을 유도하여 중공군 증원부대의 진출이 저지되었던 것이다.
[중대장이 무지원하 역습으로 정상을 탈환하다]
적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역습을 감행하려는 중대장은 역습소대가 도착하고 포병의 지원사격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박한 순간이었었다. 이에 중대장이 두 소대장과 35명의 병사를 이끌고 선두에서 18일 01시경 남쪽경사로에서 돌격을 감행했다.그리고 정상의 중공군 기관총을 제압했다 . 중대의 손실은 전사 1명에 부상 8명이었다. 날이 밝은 아침에 중공군 시체를 진지내에서 28구, 정면의 철조망 근처에서 40~50구, 그리고 도방가지 못하고 진지내에 남아 있던 2명이었다.
[반유개호에 남아있던 3명의 미군 병사, 히프. 리키. 로우]
나는 이 지역의 탐사를 위해 영주 세무대학에 교수로 나와 있는 미국인과 함께 벙커고지 일대를 정밀 탐사했다. 지뢰도 2발이나 발굴했으니 위험한 탐사였다. 이 미국인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곳의 전사를 조명하기 위해 주변 주민들과 인터뷰도 하고 참전용사를 만나기도 하고 한국인 노무자를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진실을 규명하려 노력한 장본인이다. 서울 MBC에서 동행 취재를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위의3명의 미군병사는 중공군이 밀려들자 고개를 숙이고 반유개호에 그냥 남아 있었다. 겁이 나니 총을 쏠 엄두도 못내고 중공군과 동료들이 죽기 살기로 전쟁을 하는 곳에서 숨죽이기고 있으면서 군화발이 밟고 지나가도 아프다는 말도 못했다 한다. 어둠이 주는 효과로 천명으로 살아났다. 중대장이 정상을 탈환하면서 한순간은 중공군이 움크리고 있는 줄로 알고 사격을 하였으나 곧 미군병사임을 알고 구출하게 되었다. 그런 반유개호를 이 교수는 알고 있고 나를 안내하여 밟고 지나가게 했다.
5월 18일 주간부터 정상적인 역습이 시작되었다. 포병이 연신 사격을하고 박격포가 예상되는 적 진지에 불을 뿜어대 포신이 녹아내릴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패한 것이 아니라 철수를 명령받았기 때문에 진지를 포기한다]
대대장은 분명 중공군의 역습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금 엄체호를 보수하고 진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철조망을 보강했다. 5월 18일 야간에 중공군의 역습이 시작되고 대대장은 준비된 진내사격을 요청했다. 엄체호 안에는 K중대 인원이 출입구를 막고 포병의 진내사격을 기다렸다. 이윽고 진지 상에 시한신관이 작열하고 기어 올랐던 중공군이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중공군이 오르고 포병사격이 실시 되고 중공군은 무참하게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물러났다. 이때 우측방 제23연대 지역이 돌파되어 전선 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자 대대의 철수를 명하게 된다.
제 3대대장은 중공군의 전면 공격을 포병의 시한신관 사격으로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의기양양하고 자신에 찬 얼굴로
자랑스럽게 산을 내려왔다.
(라) 가리산-매봉구간의 개인호 형태, 어론리-인제간 도로상에서 불타는 차량들과 이것을 가져가려는 중공군의 숨바꼭질
나는 이 벙커고지를 여러차례 올라섰다. 800고지에서 916고지 방향으로 그리고 당시 제3대대가 점령한 지역을 탐사했다. 분명 개인호에 유해가 남겨져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발굴은 통제했다. 중공군이기에 말이다. 미군은 이곳 전투에서 공식적인 전사자는 1명이다.
지역주민들의 제보는 산에 올라 많은 것을 습득했다는 것과 전쟁 직후에는 잘못하여 지뢰가 터지고 불발탄이 터져 주민이 상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가리산-매봉 구간에 개인호가 엄청 크다고 하였다. 이것은 국군이 아닌 유엔군이 점령한 지역은 많은 지역이 사전 우리 노무자를 동원하여 준비된 호를 구축하다보니 서양인원은 덩치가 크고 기관총 호가 많기 떼문에 당연히 호가 크다 . 실제 가리산-매봉 구간의 개인호는 크게 분포하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전쟁 중에 중공군은 미군 차량이나 죽어간 유해를 보면 정신없이 여러 명이 달라붙어 달러나 시계 등 소지품을 가지려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미 제2사단이 수정된 노네임선으로 철수하면서 중공군에게 밀리면서 어론리-자은리 구간의 도로에 미군 차량들이 수십대 멈춰서 있고, 이걸 노획하여 가져가려는 미군 폭격기와의 숨비곡질이 시작된다. 미군은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해 버리려고 비행기들이 출격하여 포격을 하고, 중공군은 길 옆의 마을이나 개울같은 곳에 숨기려 한다는 것이다.
(5) 국군 제1군단의 우측견부 고수
1951. 5. 16일 17시 30분, 중공군 제12군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협조점이자 유엔군을 동서로 양단할 수 있는 요충지인 속사리를 포위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자 북한군 제5군단도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의 전방의 원통 일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간성
용대리 미시령
*827 속초
노동 저항령
원통 백담사 *882 마등령 설악동
제11-20연
*안산 *대승령 *972
원통 우화리 *1456
수도-기갑연 설악산
한계령 약수리
수도-1연
가리봉
수도사단 제1연대는 적의 공격에 일부 거점을 탈취당하기도 했으나 한계령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내설악에서 국군 제11사단은 외설악과 동해안을 연하는 선에서 북한군 제5군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국군 제1군단장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상황을 보고 받고 예하 부대들은 주저항선인 한계령-대청봉을 연하는 선에서 철수시켜 가라피-장승리-양양을 연하는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선정했다. 군단은 18일 12시 육군본부로 부터 와코선(미군의 수정된 노네임선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수령했다.
국군 제1군단장은 이에 대관령을 확보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 판단하고 예비인 제11사단 제20연대를 차량으로 횡계리로 이동시키고 수도사단 제1연대를 대관령으로 보냈다.
국군 제11-20연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는 한계령 일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며 5월 18일 유천리, 대관령을 연하는 선에 종심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1일 짙은 안개를 틈타 중공군이 침투했다. 양 연대는 축차적인 방어를 하며 21일 야간에 횡계리 대관령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5-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한계령에서 내 부대원이 다 죽었소~!" (윤흥정 장군의 눈물, 당시 수도사 기갑연대 대대장)
6.25전쟁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신 윤흥정 장군(전 국방차관)이 나를보자고 한다. 수도사단 출신인 고 이종록 선배님과 함께 기념사업회로 찾아갔다.
"이중령, 내 소원좀 들어주게, 내 부하들 유해를 찾아 주게나!"
"네? 제가 무슨 그런 역할을 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씀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대대장을 하던 때가 중공군 5월 공세인데 우리가 설악산에 머물고 있었어요"
"그럼 제1기갑연대가 내설악에 있을 때에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5월 공세인지 6월 공세인지 잘 몰라요. 우리는 그 당시에 북한군과 대치하며 사실 북진 중에 있었거든"
"그런데 한계령에서 어떻게 대대가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까?"
"아니 상부에서 철수하라며 한계령으로 내려서라는 거야. 그래서 한계령에서 가리산 방향의 능선을 타고 병력을 배치하는데 이미 적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지"
"그렇다면 전사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 조금 오류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북한군 제5군단의 일부부대가 침투하여 주요 목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되어야 맞겠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대낮에 한계령 남서쪽 능선에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있고 일부는 한계령 일대에 집결되어 있는데 여기저기서 북한군이 나타나 일대 혼란이 발생했고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어요. 대대가 무력화 되어 버렸어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곳 일대를 탐사하여 유해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한계령에서 가리산방향으로 탐사를 시작했다. 활엽수가 우거져 있고 능선상에는 조릿대가 무성하게 엉켜자라고 있는데 살펴보니 개인호가 다수 확인되었다. 그리고 발굴작전이 시작되었는데 한계령 바로 남서쪽 능선 일대에서는 유품은 발굴되는데 유해는 찾지 못했다. 가리산 일대는 그래도 많은 유해를 발굴한다.
다시 윤흥정 장군님을 찾아 그간의 실태를 말씀드리려 찾아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장군님이 영면에 들어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말 세월은 기다려 주지않는다는 말이 분명했다.
(나) 중공군이 왔다는 곳이 이곳 유천리-대관령 선상에는 없다.
지역주민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운두령선까지 온 것이 아닌지, 중공군과 혼성 4개 연대가 공격했다고 전사 기록
한국전쟁사 8권 5448페이지에 보면 "국군 제1군단장은 대관령을 확보하는 것이 승패를 죄우할 것이라 판단하고 군단 예비인 국군 제11사단 제20연를 차량에 탑승시켜 횡계리로 이동시키는 한편, 수도사단 제1연대를 대관령으로 보냈다.
국군 제1연대와 제20연대는 한계령 일대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5월 18일에는 유천리, 대관령을 여하는 선에 종심깊은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1일 10시경 짙은 안개를 틈타 중공군이 은밀히 침투하여 국군 제11-20연대 우측의 제3대대를 공격했다. 대대는 백병전이 포함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 부족으로 18시에 철수를 개시하여 22시 50분경 연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횡계리로 도착한다. 이에 제1대대는 격전은 없엇으나 고립될 것을 고려하여 싸리재로 철수했다.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 제2대대는 광정면을 담당하여 중공군의 히메 부친 전투를 하다가 1150고지 일대로 철수한다. 제1선에서 3선까지 축차적으로 철수하며 공산군의 진격을 저지하던 제1연대와 제20연대는 5월 21일 야간에 대관령 일대의 제4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중공군의 항미원조사(중국군의 한국 전쟁사) 2권 518~521페이지에 보면 5월 19~20일, 미 제3사단이 동진하여 풍암리, 하진부리에 도착하여 전역 돌파구를 봉쇄하였다고 쓰여 있다. 더이상 부대 식량이 떨어지고 현지에서도 보충할 여건이 못되며 이미 한국군은 궤멸되어 후방으로 물러난 상황에서 미군이 작전지역에 투입됨으로써 자국군의 피로도가 상승하고 전투력 복원이 어려우니 후방으로 철수하여 휴식과 정비를 한 후에 다시 기회를 봐야한다는 건의문이 일선 지휘관들이 팽덕회에게 팽은 다시 모택동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부 부대가 운두령 일대에서 포위되어 격멸되고 유엔군은 반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지역 일대에서 탐문 및 탐사활동을 하면서누구한테도 중공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물론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100% 맞다던가 전부일 수는 없다. 하지만 피난을 가지않고 마을에 남아 있던 분들은 연로한 분이거나 어린 나이인데 그래도 그 기억은 실제 목격담이기에 신뢰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다행히 북한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많았다.
(6) 유엔군의 반격여건 조성(돌파구 차단 작전)
미 제8군은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5월 16일부터 2일이 지나자 중공군의 주공이 미 제10군단 지역으로 집중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제8군사령관은 수정된 노네임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한 후 미 제8군 에비인 미 제3사단, 미 제9군단의 예비인 제187공정연대,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 주인 국군 제8사단을 미 제10군단 지역에 투입했다.
(가) 국군 제3군단의 철수 작전
군단은 5월 17일 야간에 현리에서 중공군의 추격을 받으며 험준한 방태산(1436)을 넘어 철수하는 동안 다수의 공용화기와 무전기를 버리고 고지 정상으로 국 제3-18연대의 엄호를 받으며 철수하였다.
이 당시에 현리-용포 도로 상에는 미 전폭기들이 군단이 파기하지 못하고 유기한 차량과 포차들을 끌고 북으로 북상하는 적들에게 소이탄과 기총소사로 파괴 도는 소각하였다.
당시 군단은 상부의 명에 따라 와코선(1009-창촌리-오대산을 연하는 선)을 점령하기 위해 일부는 방태산-구룡덕봉-광원리-창촌으로, 주력은 내린천을 따라 방태산-남전동-광원리-창촌을 목표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일부가 이곳에 먼저 도착하여 광원리에서 창촌에서 적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계방산(1577)과 오대산 사이에 있는 을수재를 넘어 하진부리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2일간의 굶주림과 피로로 다수의 병력이 체력 한계점에 도달해 철수를 포기하고 포로가 되었다. 결국 이 상황으로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다시 배속되게 된다. 당시에 양 사단의 병력 수준은 제3사단이 34.2% 수준의 3,621명, 제9사단이 40.0%수준의 4,5872명이었다.
군단이 재편성을 서두르고 있을 때에 북한군과 중공군으로 혼성 편성된 4개 연대규모의 적이 군단의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 하진부리-강릉 도로를 차단하려는 듯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때 제3사단은 유천리 북쪽에 3개 연대를 종으로 배치하고 제9사단도 제30연대와 제28연대를 속사리 부근에 배치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제3사단은 정선으로, 제9사단은 대화 쪽으로 다시 철수하여 속사리-하진부리선이 붕괴 되었다.
(나) 미 제3사단의 돌파구 차단
계방산 1577
운두령
흥정산 1277 *1325 *1324 회령봉 *보래령 *`1272 *1795
*953 미 제7연
속사리
창동리 *645 *924
미 제65연 *1003
장평 삼거리 *1095 *백적산1141
미 제65연 장평리 미 제7연
국군 제3군단의 현리 철수작전으로 유엔군의 중동부 전선은 벙커고지-풍암리-속사리-철갑령을 연하는 선에서 대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제8군사령관은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18일 자정에 예비로 서울에 대기 중인 미 제3사단 제7연대와 경안리에 집결 중인 제65연대를 긴급히 제10군단의 우전방으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19일 아침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미 제3사단의 정찰대가 속사리-하진부리 일대를 정찰한 결과 적정이 미흡하자 제15연대를 풍암리 북쪽에 추진 배치하여 국군 제7사단과 협조, 횡성-풍암리 축선에서 적을 저지하였다, 이날 미 제2사단 제23연대도 한계리에서 중공 제118사단의 공격을 , 프랑스 대대는 중공 제31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19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공격기세는 현격히 둔화되고 미 제3사단은 제7, 65연대가 백적산과 장평리에 진출하면서 적이 운두령에 집중 배치된 것을 확인하여, 21일 사단은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하여 순조롭게 진출하는 도중에 속사리-하진부리를 방어하고 있던 우측 국군 제3군단이 적의 기습에 돌파되면서 철수하는 바람에 일시적 위험에 봉착하기도 했다.
사단은 다시 22일 공격을 재개하여 우세한 화력으로 18:00시경 운두령을 탈환하여 중공군의 진출이 저지 되고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다) 대관령 확보 전투
오대산 1563 제26연대
*1560 *동대산 1343 *노인봉 1338
진고개 *황병산 1407 매봉 1173
을수재 월정사 제1-2대대 *1150
*1359 *1167 건봉 1157
제20-3대대 백일평
*967 *장군암 1140
제20-2대대 싸리재 대관령
국 제3사 제1-1대대
유천리 *투구봉 *941
909 칼산 횡계리 제1-3대대 *능경봉
국 제9사 제20-1대대 1123
하진부리 *988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의 5웕 공세를 맞아 설악산-속초선에서 분전하였으나 육군의 명으로 19일 제3군단과 전선을 조정하기 위해 오대산-두노봉-남애리를 연하는 와코선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군단은 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진출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를 군단 좌측방 후방의 유천리-횡계리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21일 제3군단의 속사리-하진부리선을 돌파한 중공군 일부가 대관령과 강릉을 목표로 경강국도로 진출하여 재20연대와 격돌하게 된다.
따라서 강릉의 비행장과 군수품 등의 집적장소로써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단은 대관령 확보가 필수라 결론짓고 수도사단은 대관령을 확보하고 제11사단은 정면의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강릉에서 정비중이던 수도사단 제1연대는 적정도 알지 못한 채 긴급히 대관령으로 이동했다. 22일 새벽에 벌어진 전투에서 제11-20연대(제1연대 2대대 증강)백일평-대기리 선에서 저항했으나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관령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곧바로 아군의 공격에 물러나면서 2개 대대규모의 증원을 받아 이번에는 능항봉으로 우회 공격을 하였으나 다시 격퇴되었다.
적은 다시 2개 대대규모로 횡계치를 공격했으나 아군의 협동작전과 동해안의 함포지원에 분산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아군은 23일부터 바로 재반격을 개시하게 된다.
(라)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백일평 일대는 험준한 준령지역으로 실제 전투 흔적이 적었다.(투구봉, 칼산에서 유해발굴)
제20-3대대 백일평
*967 *장군암 1140
제20-2대대 싸리재 대관령
국 제3사 제1-1대대
유천리 투구봉989 칼산 942 횡계리 제1-3대대 *능경봉
국 제9사 제20-1대대 1123
하진부리 *988
백일평 일대는 1,000m고지군이다. 사실 이곳에서 정상적인 공격대형으로 공격은 불가하다. 반대로 방어는 산골마다 은폐엄폐가 용이하기 때문에 공격부대를 물리치기 좋다
하지만 우리 전사에는 공산군 혼성 4개 연대가 이 일대를 공격하여 방어중이던 제3사단과 제9사단의 속사리-하진부리 선이 무너지고 제3군단이 철수하게 되어 미 제3사단이 돌파구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이 곳으로 투입되어, 운두령에서 중공군 5월공세의 최후를 선물하여 다시는 중공군이 이 땅에서 볼 수 없게 되는 현장이다. 반면에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제9사단 미 제3사단에 배속된다.
[땅벌집에 유해가 있다]
우리가 이 일대에서 탐문 및 탐사 간 찾아낸 것은 작은 도사리에서 지역주민의 제보로 몇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제보자 축사 바로 옆에 밭둑이 있는데 땅벌이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손을 댈 수 없어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사장님 혹시 유해가 국군인지 공산군이지 아세요?"
"그때 네 나이가 5살이고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지. 그리고 나중에 군에 갔다 오니까 아버지가 알려 주었는데 3구가 있다고 했다. 그때는 땅벌이 없었는데 한 5년 전부터 이곳에 땅벌이 살고 있다. 건드리지 않으니 그대로 산다"
"혹시 중공군이 들어 왔는지 모르세요?"
"중공군은 보지 못했고 북한군은 자주 보았다. 이 동네는 프락치도 없었던 걸로 안다. 워낙 그 당시는 산골이라 몇 가구 살았어요. 국군이나 경찰도 오곤 했는데 들어 와서는 바로 떠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유해를 증언 내용대로 발굴하고 땅벌은 제거하여 드렸다. 그리고 도사리 북쪽 900m능선을 탐사한 결과 600여 개의 개인호가 식별되어 유해 3구가 발견된다.
2) 칼산, 투구봉, 차항리에 유해가 많았다
이곳은 사실 전사가 명확하지가 않다. 물론 산악지형이란 특징도 배제할 수는 없다. 대관령을 동서의 축으로 하여 동쪽은 제1군단이 서쪽은 제3군단이 방어를 전담하고 했다.
중공군 2월 공세후 개시되는 킬러작전간 이곳 대관령 일대의 전사는 다음과 같다
[ 중공군 2월공세 후 유엔군 반격작전인 제천-영월지역의 돌파구에 들어온 공산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킬러작전이 2월 21~3.4일간 실시된다. 이를 위해 '51.2.21일 10시에 미 제9군단은 횡성을 점령하기 위해 4개 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에 미 제9군단, 그 우측 미 제10군단과 더불어 킬러작전의 한 축이었던 국군 제3군단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수도사단이 동쪽에서, 제7사단이 서쪽에서 공격을 , 제9사단은 에비로 송계리에 집결한다.
킬러작전이 계시되자, 제3군단은 수도사단의 제26연대를 횡계리에, 제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는 한편,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 위해2월 25일 좌전방 제7사단을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케하였다.
공격이 순조롭게 되자,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 1개 연대를 신속히 속사리로 투입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여 수도사단은 횡계리에 대기중인 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5일간 지속된 폭설로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되어 제설 작업 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1개 대대씩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영월 부근에서 철수한 북한군은 발왕산.속사리.월정사 부근에 종심진지를 편성하고 아군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부는 계방산-오대산-황병산을 연하는 산악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기도하였다.
군단에서는 거문리 일대에서 제7사단 제5연대와 교전 중인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3월 1일 중으로 속사리에 진출하도록 독촉한다. 그러나 제설작업이 지연되어 3월 2일 하진부리에 진출항여 접적이 개시되어 속사리 하진부리간의 중간 지점인 발왕리에서 야간방어로 전환한다.
그러나 22시경 제1기갑연대의 후방을 엄호하던 제26연대 제3대대와 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적이 3일 04시까지 유천리 일대에서 백병전을 치렀지만 다수의 피해를 입어 08시에 차항리로 찰수한다. 이로써 제1기갑연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혹한 속에서 기갑연대는 여명을 기해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야음을 이용한 적이 연대를 포위하게 되었다. 이에 사단자은 철수명려을 내리고 제26연대로 하여금 유천리오 재진출하여 기갑연대와 연결하도록 한다.
결국 기갑연대는 방어와 적진 돌파를 반복하며 월정동. 광천리를 경유하여 4일 자정경 적의 추격에서 벗어나 대관령 서쪽 가사두에 집결했다. 기갑연대는 철수 작ㄷ전간 300여 명의 적을 사살했다. 그러나 전사 59명. 부상 119염. 실종 802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와 81mm박격포 11문. 60mm박격포 18문. 3.5인치 로켓포 10문 등 다수의 장비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실종자 대부분은 다음날 복귀하였다.
결국 적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실시돤 킬러작전은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으로 악천후와 싸워나가는 힘겨운 진군이 되어 2.21~3.6일까지 14일간의 추격작전은 미 제9.10군단이 횡성-평창의 목표까지는 도달하는데 성공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목표선인 아리조나선 이남의 모든 적을 섬멸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상의 내용에서 속사리와 하진부리, 차항리, 황계치의 주 격전 부대는 중공군이 아닌 북한군이었고, 아군은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제26연대였으며 가문리 일대에서 전투한 제7사단이 일부 포함된다.
다시 진행되는 리퍼작전(절단작전으로 아이다호선 확보(춘천선)으로 서울을 신속하게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3월 7일 08시를 기해 실시된다. 그리고 3월 15일 서우을 탈환하고 춘천을 점령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3월 21일 리퍼작전을 확대하여 임진강 하구-문산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아스펜선으로 진출하고 (1단계작전) 2단계에서는 임진강에 연하여 설정된 벤톤선을 점령하는 "용기 작전"을 계획하고 3월 22일 08시에 10-16km전 방의 카이로선을 향해 진격한다.
여기서 후퇴하는 공산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문산 북방에 제187공정단을 투하하는 "토마호크 작전"을 23일 07시에 대구비행장에 이륙하여 실시되며 여러 시행착오(비행기 고장 등)를 극복학고 낙하하게 되며, 그루우던 특수임무 부대가 23일 오전 카이로선의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1번 축선으로 진출 공정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당시 공산군은 북한군 제19사단 제36연대였으나 이미 많은 병력이 임진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당시 미 제10군단은 리퍼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된다. 제10군단장은 좌측 횡성-풍암리간 소로와 우측 평창-방림리-속사리 도로를 따라 진격토록 하고,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배치하고 구군 제5사단을 양 도로 사이의 산악지역을 담당하게 한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간 주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 부대 정비를 하던 중에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운교리-안흥리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36연대를 지구리에, 제35연대를 월암동에 배치하여 3월 7일 벌교산-태기산-속사리를 목표로 3개 사단 병진을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제5사단은 횡성에서 사단을 공격했던 북한군 6사단으로서 이들은 북한군 제12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를 지원받아 태기산으로 연결되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은 14일 적의 최후 거점인 태기산을 점령하고 신대리-백운동 선으로 진출한 후 15일에는 북쪽의 운무산(980)-흥정산(1277)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게 된다.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 미 제2사, 우전방 미 제7사단도 13일 전후 공산군의 저항을 극복하고 알바니선으로 진출하고 17일에 최종 목표선인 아이다호 선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을 종료하였다.
한편 리퍼작전의 또다른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 목표선인 계방산-황병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 약 16km가 남아 있었다. 유재흥 군단장은 제7사단과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공격부대로 투입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제3사단을 군단예비로 하여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제9사단의 정선 일대를 인수하도록 했다.
국군 제7사단은 좌전방에 제3연대를 상대화-백적산(1141)-잠두산(1241)을 경유 속사리로, 우전방 제5연대를 대기에서 백석산(1364)-박지산(1391)-형제봉을 경유 하진부리로 각각 진격하게 했다. 3월 6일 08시에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하게 된다. 이때 우전방 지역에 북한군 제27사단이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 중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해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투입하여 해병연대는 발왕산과 봉산리 일대로 3월 6일까지 진출했다.
해병연대를 배속받은 제7사단은 3월 7일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백적산.백석산 일대의 적이 완강히 저항하여 8일에는 예비인 제8연대까지 투입하여 결국 제3연대가 7시간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백적산을 탈취하였다.
군단장은 하진부리를 조속히 점령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목적하에 군단 예비인 제3사단 제18연대를 전방에 투입했디. 북한군이 3월 10일 2개 연대로 대규모 역습을 해왔으나 백적산-거문리-형제봉 선으로 격퇴하고, 11일 속사리와 하진부리를감제할 수 있는 백적산이 확보되자 북한군의 공격지세는 현저히 둔화되고 12일에 최종목표인 속사리와 하진부리를 점령하고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된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의 우전방을 방어하던 제1해병연대는 3월 7일 봉산리의 제3대대가 국군 제7-5연대가 철수하여 적중에 고립되어 제3-18연대가 군단의 우전방으로투입될 때까지 공중투하 보급을 받아가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제18연대가 투입되면서 북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제1해병연대는 13일 09시를 기해 공격으로 전환하여 최종목표인 외차래지까지 진출하였고 15일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2연대에 인계한다. 그리고 16일에는 미 제9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제3군단은 3월 25일 후방지역의 패잔병 소탕작전을 제7사단에 전담시키고 제3사단으로 하여금 경강국도에서 카이로선인 현리-하서림 도로를목표로 공격을 게시하여 27일 카이로선상의 하서림을 확보하고 30일에는 제23연대가 조개동으로 진출한다.
한편 국군 제1군단은 리퍼작전이 개시되기전 미 제10군단에서 작전통제가 해제되어 3월 5일 강릉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제3군단으로부터작전지역 일부를 인수받고, 제9사단과 수도사단을 배속받았다. 이 당시에 이미 군단은 황병산-하평동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의 최종 목표인 아이다호에도달해 있었다.
이 당시에 군단 작전지역내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이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 2,000여 명으로 재편성하여 북상 중이었다. 이에 군단장은 제9사단을 투입하여 패잔병을 소탕하게 하면서 18일에는 수도사단으로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명하였다. 이때 국군 제1군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69여단으로 북으로 철수한 제10사단의 일부 병력을 증원받아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진전 되자 수도사단장은 대관령 너머의 유천리와 차항리 일대에 배치한 제26연대를 양양 남쪽의 인구리로 이동시키고, 사단 예비인 제1기갑연대를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이동시킨다. 사단으 27일 남대천을 도하해 양양으로 진출한 후 양양-인제, 양양-서림리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란계령에 이르는 설악산 입구의 387고지에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제1연대의 공격이 실패하였다. 제1연대는 다시 동해안의 함포사격 지원에 387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이에 북한군은 오색리를 경유하여 설악산으로 퇴각한다.
이상의 킬러작전과 리퍼작전간 중공군은 이곳 속사리-하진부리-횡계리지역에 중공군은 보이질 않는다. 따라서 중공군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고 운두령 일대에서 진출이 멈추고, 속사리-대관령 구간, 경강국도변은 북한군이 국군과 격전을 벌였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유해발굴은 주로 이목정리-유천리간 도로주변의 고지에서 이루어 지고, 차항리 일대는 낮은 구릉지역에서 유해가 발굴되었다. 속사리 지역의 고지군에서 1500여 개의 개인호를 식별하여 발굴한 결과 2구가 발굴되었다.
[뱀이 많이 나오는 칼산~]
칼산 지역은 차항리지역에서 탐문활동간 한 주민이 동행하여 탐사를 같이 했다. 주민의 이야기는 전쟁 중에 비행기뿐만 아니라 포탄사격이 있어서 바위군이 파편처럼 변하여 동네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어도 뱀이 많아서 가지를 못했다고 한다. 바로 산 입구에 본인 밭이 있어서 항상 가면은 주변에서 처음에는 전투화나 반합 등을 주어서 집으로 왔다고 한다.
칼산 바로 서쪽에 투구봉이 있다. 이곳은 뱀이 나오지 않아 사실 전후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많은 유품을 가져갔고, 특히 철모를 많이 주워왔다고 한다. 본인이 올라가 보니 온전한 전사자는 보이질 않았다. 모두가 사람이 조각조각 본해되어 흩어져 있었다 한다. 당시는 탄피를 주로 주워 오기 위해 나이 불문 서로 먼저 오르려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 칼산과 투구봉 일대에서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하지만 모두 노출된 부분 유해로 나와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또 이곳 유천리 호명리 745고지에서 개인호 100여 개를 발굴하여 6구의 유해를 발굴하고 유천리 장군 바위산은 개인호 200여 개를 발굴했으나 유해를 확인 못했다.
[봉평 무이리(707고지군), 면온리(887)]
무이리 708고지군은 전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탐사활동간 전투지역이라는 제보에 조사팀이 탐사를 실시한 결과 개인호가 300여 개 있었다. 제보자 강희봉씨가 말하길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도 들었고 본인이 직접 산에 소먹이용 꼴을 베러 올라갔을 때 유해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봉평면 면온리 887고지는 개인호가 400여 개 식별되어 유해 9구가 발굴된다.
[이목정리, 국군이 차로 유해를 실고 와서 묻었다, 그리고 송장골이 되었다]
제보지역으로 당시 어린나이에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박명동씨가 직접 목격한 사실에 근거하여 능선사에 분포된 예상 장소를 13개소 선정하여 발굴하게 된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어느날 국군이 전사한 군인을 차고 실고 와서 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미군이 찾아와 유해를 발굴하겠다고 하며 발굴을 하다 나오는 실태가 미군이 아니므로 다시 묻었으며 동네에서 지금까지 송장골이라 불러온다 한다. 우리는 이곳을 제보자를 동행하여 발굴결과 1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차항리, 인식표와 함께 3구 발굴]
지역주민 한일우씨가 10세였을 때에 이곳 횡계리 지역에 전투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 국군이 3명의 전사자를 묻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 후로 그 자리에 사료용 옥수수를 숙성시키기 위해 흙으로 덮었다고 한다.
이곳을 발굴결과 유해가 훼손되지 않고 발굴되어 3구 모두를 제보내용대로 발굴이 되었고 인식표가 2개 식별되는데 한 분은 K1136922로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 제11중대 소속이었다. 다른 한 분은 K1137835로 역시 제1연대 제3대대 제11중대였다.
(7) 용문산 승전보
공산군은 5월 16일 공격을 개시한 주공부대들이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돌파하자 중서부 지역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여 중동부 전선으로 유입을 차단하고 그들 주공 부대의 진출을 지원할 목적으로 17일 조공부대를 북한강 계곡으로 투입하여 중서부 전선에서도 혈전이 시작 되었다.
이 기도의 일환으로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63군의 3개 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 부근을 방어 중인 미 제9군단의 중앙사단인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해 왔다.
당시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 중공군 4월 공세로 물러난 후 전선 조정에 따라 노네임선의 용문산(1157) 일대를 점령하고 방어에 주력하였다.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임박하여 제6사단장은 주저항선이 북한강에서 12~17km 떨어져 있어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인 용문산 서쪽에 제19연대, 동쪽에 제7연대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사단 수색대를 홍천강 북쪽에서 일반 전초로 파견하였다.
북한강 중공군 187사단
중공군 187, 188사단
청평댐 청평호 미사리 마곡리 홍천강
울업산 장락산맥
송산리
신천리 *장락산
창촌
무명산 *나산
마치고개
*벽암산 *427 설곡리 국6-2연대 미7-17연대
국2-31연대 국6-2연대
당시 좌인접 국2-31연대는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7-17연대는 두능산에서 철수하여 제2연대만 청평호 남쪽의 요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18일 낮에 중공군은 중대규모로 도하공격을 시도하다 격퇴되었다. 어둠이 오자 울업산에 대대규모로, 우전방 장락산맥에 연대규모로 도하공격을 감행하였으나 5개 포병 대대의 화력지원으로 적의 공격을 격퇴하게된다.
그러자 적은 이 일대가 주저항선으로 오판한 듯 19일 새벽에 제187, 188사단을 투입하여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홍천강변의 감제고지인 559고지의 제1대대는 항공지원 속에서 진지를 사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적의 파상공격으로 축차적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여 나산의 지휘소로 철수한다.
중공군은 이번에는 우전방에 예비 1개 사단을 투입하여 울업산 일대를 공격하여 제2대대는 항공 폭격의 엄호속에 427고지로 철수하게 된다.
계속되는 적의 공격으로 탄약과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지원하에 진내로 진입하는 적과 백병전으로 맞서 결국 적을 격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일 밤에 미 제8군사령관은 중동부 전선에서의 적의 공격이 현저히 둔화된 점을 고려 즉시 재반격작전으로 돌입, 중서부 전선의 미 제1, 9군단에 문산-포천-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으로 공격을 명하였다.
공격명령을 수령한 사단장은 20일 05:00시에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공격으로 전환하여 북한강 남안으로 진출하자 중공군은 포위공격을 우려하여 서둘러 강 북쪽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제2연대와 연결하게 되었다.
결국 중공군은 이곳 장락산맥 일대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고 반면에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의 굴욕적인 패배의 불명예를 씻고 중부전선의 절단을 막아냄으로서 공세이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7-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참전용사 김달현(제3대대)의 전투현장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