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50. [역경의 열매] 박동찬 (1-16) 아버지가 실천한 순명, 목회의 가치로 삼다
아버지가 목숨 바쳐 지켰던 ‘순명’ 목회자로서 지고의 가치로 이어가
지난 4일 경기도 고양 일산광림교회에서 만난 박동찬 목사. 박 목사는 “내 삶에 깃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국민일보 독자들이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실감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양=신석현 포토그래퍼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던 토요일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서울 잠원동에서 신길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라디오에서 난데없이 이런 뉴스가 흘러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향년 62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이끌고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온 국민과 더불어 애도하는 바입니다.”
당시 내 아버지는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이었다. 대통령의 서거 뉴스를 듣고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아버지 걱정부터 했다. ‘우리 아버지 엄청 바쁘시겠다. 당분간 일찍 퇴근하시긴 힘들겠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 사건에 연루됐음을 알게 된 것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김재규의 최측근이던 아버지는 10·26에 가담한 ‘역적’으로 몰린 상태였다. 그러니 집안 꼴이 어떻게 됐겠는가. 나는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충격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우리 가족의 일상은 크레바스처럼 갈라졌고 온갖 절망과 슬픔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10·26이 있었던 1979년부터 지금까지 이 사건이 남긴 질문들은 내 삶을 옥죄었다. 왜 아버지는 대통령을 살해한 어마어마한 일에 가담했을까,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신 걸까….
꼬리를 무는 질문들 사이를 서성이면서 46년을 보냈다. 긴 세월 동안 곱씹고 되씹은 질문들을 통해 내가 내놓게 된 답은 ‘순명’이다. 순명은 누군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順命)는 의미로도,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殉名)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 옛날, 아버지가 벌인 일은 하늘처럼 모시던 직속상관을 위해 아버지가 실천한 순명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목회자인 내가 지고의 가치로 삼은 것도 순명이 됐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주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것, 크리스천이 지녀야 할 태도로는 그 이상의 것이 없을 테니까.
아울러 46년 전 그날 이후 내게 펼쳐진 삶을 복기하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내가 겪은 모든 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마주한 방황의 시간은 나의 신앙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광림교회라는 신앙의 보금자리를 찾아가게 해줬다. 이 교회 창립자인 고(故) 김선도 감독님을 모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되짚어볼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말씀이 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하나님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이 말씀에서 나는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위로를 받곤 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약력>△1962년 서울 출생 △아주대 전산학과(현 소프트웨어학과) △감리교신학대 신학석사, 미국 웨슬리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목회학 박사(DMin) △광림교회 기획목사 역임 △경기북부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월드비전 이사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대표 △일산광림교회 담임목사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 아버지가 실천한 순명, 목회의 가치로 삼다
* [역경의 열매] 박동찬 (2) 긍휼의 은사 심어준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된 대물림 신앙
* [역경의 열매] 박동찬 (3) 여의도순복음교회 출석… 난생처음 '하늘의 세계' 엿봐
* [역경의 열매] 박동찬 (4) 10·26 사건 연루된 아버지… 하루아침에 집안 풍비박산
* [역경의 열매] 박동찬 (5) 아버지 나이 된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 '목회에 전력'
* [역경의 열매] 박동찬 (6) 대학 시절 시국 상황으로 고민할 때 광림교회로 발길
* [역경의 열매] 박동찬 (7) 없어졌던 대학부 다시 일으켜… 감신대학원 입학 도전
* [역경의 열매] 박동찬 (8) 스승·친구·아내를 선물한 광림교회서 첫 목회
* [역경의 열매] 박동찬 (9) 김 감독 신임 속 미국 유학… 귀국 후 본격적 목회의 길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0) 미국서 돌아와 광림교회 기획실 수석 중책 맡아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1) 김선도 감독은 하나님이 내게 선물해주신 '영의 아버지'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2) 청년부 섬기며 '100교회 건축 운동'… 일산광림교회 부임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3) 부임 5년 만에 대형교회로 성장 후 목회의 방향 전환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4) 청년들에게 주는 '참사랑'에 날 아버지처럼 따르기도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5) "김선도 감독 목회 철학 잇자" 북한 선교 진력
* [역경의 열매] 박동찬 (16·끝)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 끝엔 항상 가없는 주님 사랑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역경의 열매] 박동찬 (2) 긍휼의 은사 심어준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된 대물림 신앙
하나님 말씀을 삶 통해 실천하는
외할머니로부터 신앙의 유산 받아
초등학교 진학 앞두고 서울로 이사
교회를 놀이터 삼아 암송에 몰두
박동찬(오른쪽) 목사가 유치원생일 때 어머니와 서울의 한 고궁에서 찍은 기념사진.
내 유년기의 놀이터는 바다였다. 아버지가 해병대 장교였기에 우리 가족은 자주 이사를 해야 했는데 백령도에서 살다가, 연평도로 옮겼다가, 나중엔 경북 포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중 초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포항은 내 유년기의 추억이 가장 많이 깃든 곳이다. 그즈음 바다에서 보낸 많은 날이 기억난다. 대나무에 낚싯줄을 묶어 바다에 드리운 채 한참을 기다리던 일, 대나무 작살을 만들어 물안경을 끼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일…. 물론 낚싯대나 작살로 고기를 잡으려는 나의 시도는 번번이 헛물만 켰다. 대여섯 살 어린아이에게 손쉽게 잡힐 물고기는 없을 테니까.
초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서울로 상경했고 상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생 시절 나의 특기는 태권도였다. 시합에 나갈 정도로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야구나 축구도 즐겨 했다.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에도 소질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엉뚱한 구석도 많았다.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개미가 어떻게 땅굴을 파고 집을 짓는지 궁금해 3시간 넘게 땡볕에 앉아 땅을 판 적이 있는데 ‘몰입의 즐거움’을 그때부터 알았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시절 내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항상 도와주려고 했다. 외할머니의 그런 성격을 알기에 어머니는 귀한 물건이나 음식이 있으면 부엌 찬장에 몰래 숨겨놓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줘버릴 게 뻔했으니까.
당시 누군가 내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보육원 원장이라고 답하곤 했는데, 이 역시 외할머니의 영향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는 연민의 씨앗을 어린 나의 마음에 심어주신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외할머니의 신앙은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다시 내게로 대물림됐다. 미취학 시절에 바다가 내 놀이터였다면 서울 생활이 시작한 뒤 그런 공간이 돼준 곳은 교회였다. 장로교회인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성대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겨울이면 차디찬 마룻바닥에 나이 순서대로 방석을 깔고 앉아 찬양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곤 했다. 너무 추워 발이 꽁꽁 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추위를 잊으려고 더 열심히 말씀을 읽고 요절을 외우곤 했었다. 얼마나 암송에 몰두했으면 5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 그 시절 암기한 말씀들이 떠오르곤 한다. 교회에서 열리는 암송 대회에서 상을 받을 때도 많았다.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부상(副賞)으로 연필이나 노트를 줬다. 덕분에 초등학생 시절 내내 학용품이 부족할 때가 없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이 흘러갔다. 인자한 아버지와 알뜰한 어머니 아래에서 누나 여동생 남동생과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하기 한량없는 유년기였다. 하지만 남들처럼 사는 평범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나는 훗날 깨닫게 된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 엄청난 비극이 우리 가족에게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역경의 열매] 박동찬 (3) 여의도순복음교회 출석… 난생처음 ‘하늘의 세계’ 엿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존재와
주님과 대화할 수 있음을 느껴
수련회 예배 시간 방언 터지는
성령 체험하며 신앙도 깊어져
박동찬(오른쪽 두 번째) 목사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제1회 전국 국민학교 태권도 개인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친구들과 찍은 기념사진.
청소년기에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릴 땐 활발하게 놀다가도 누군가 발표를 시키거나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쭈뼛거리며 열없는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 성격이었던 내가 어른이 돼 많은 사람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된 것은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중학생 시절, 내 삶에 진하게 새겨진 무늬를 하나만 꼽자면 바로 신앙일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장로교회였던 성대교회를 떠나 우리 가족이 새롭게 정착한 곳은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훗날 감리교회 목회자가 됐으니 장로교, 순복음, 감리교를 두루 경험하게 된 셈인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 같다).
처음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갔을 땐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분위기가 그곳에 있었다. 곁눈으로나마 난생처음 ‘영(靈)의 세계’를 엿본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장로교회에 다닐 땐 나이가 어렸던 탓에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기보단 친구나 선생님과 어울리는 ‘교회 생활’을 즐기는 일에만 몰두했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면서 나는 비로소 ‘하늘의 세계’가 있음을 느끼게 됐다.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이런 사실들은 나의 신앙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즈음 맞닥뜨린 성령 체험의 순간도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수련회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개회 예배 시간이었는데 그곳에 모인 친구들이 어찌나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데 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리다 어느 순간 방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물었는데도 방언이 쏟아졌다. 너무 무서워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미친 사람이 돼버린 건 아닐까.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더니 어머니는 예상과 달리 웃음 띤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찬아, 걱정하지 마. 그게 다 성령의 은사야.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내가 겪은 모든 것도 하나님이 나를 목회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준비해놓은 과정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초등학생 시절엔 내가 성경 암송에 몰두하게끔 하셨고, 중학생이 돼서는 말씀과 기도에 빠져 살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나의 신앙은 고등학교(서울 장훈고)에 진학한 뒤에도 커져만 갔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 교회 출석을 한 번도 안 빼먹은 건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불현듯 교회에 가기 싫어져 예배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한강으로 돌렸고, 정처 없이 한강 둔치를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방황은 3주간 이어졌다. ‘교회 땡땡이’ 4주 차가 다가오니 교회에 가지 않는 게 얼마쯤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 사람들이 이렇게 교회와 멀어지게 되는구나.’
그러면서 동시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회개의 마음을 한가득 담아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주일만큼은 꼭 지키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4) 10·26 사건 연루된 아버지… 하루아침에 집안 풍비박산
스승이던 김재규 중정부장 부름으로
중정서 함께 일하며 관계 더욱 돈독
사건 후 가정예배로 마음 다잡았지만
아버지 사형 집행으로 큰 충격 받아
박동찬(왼쪽) 목사의 어린시절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 해병대 제복을 입은 이가 박 목사의 아버지인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다.
이제 그 사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동안 어디에서도 한 적 없는, 내게 평생의 숙제를 떠안긴 1979년 10월 26일, 이른바 ‘10·26’으로 불리는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아버지는 중앙정보부(중정) 부산지부에서 정보과장으로 일하다가 이후 중정부장이던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그 조직의 의전과장이 됐다. 모든 것이 기밀로 다뤄지는 음지의 기관인 만큼 집안의 장남인 나도 아버지가 중정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고등학생이 돼서는 아버지의 일터이자 훗날 10·26의 무대가 되는 ‘궁정동 안가’를 구경한 적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곳의 모든 공간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내게 허락된 것은 아버지의 집무실 정도였다. 정원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은 김재규와 아버지가 사제지간이었다는 거였다. 김재규가 대구 대륜고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던 시절, 아버지는 그의 제자였다. 짐작건대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이 중정에서 함께 일하게 되면서 관계가 더 끈끈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사제 간의 정에 군대보다 엄격한 중정의 상명하복 문화가 더해지면서 두 사람은 아마도 막역한 사이가 됐을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 시절 대통령은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시민들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나와 대성통곡했다. 많은 이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나라가 무너진 것처럼 울음을 쏟아냈다. 그러니 김재규의 오른팔이던 아버지, 나아가 우리 가족을 향한 민심이 얼마나 사나웠을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사건이 터지고 이튿날 아버지가 이 사건에 연루됐음을 알았을 땐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가택 수색으로 집은 쑥대밭이 됐다. 우리 가족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내가 얼마 전에 갔던 곳(궁정동 안가)에서 그 일이 벌어졌던 말인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형사들이 집에 들이닥치면 당시 대학생이던 누나는 어머니 곁에서 당차게 싸우곤 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매일 밤 가정예배를 드렸다. 기도로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고 서로를 북돋웠다.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우리가 다니던 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경험한 ‘뜨거운 기도’의 힘 덕분에 우리 가족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간절했던 우리의 가정예배는 이듬해 봄에 끝나게 됐다. 80년 5월 24일, 숙모가 나를 데리고 향한 곳은 화곡동에 있던 국군통합병원 영안실이었다. 아버지의 사형이 집행된 것이었다. 김재규 등에 대한 구명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여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것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이렇게 떠나버리셨구나.’
나는 슬픔으로 허물어졌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5) 아버지 나이 된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 ‘목회에 전력’
아버지에 대한 사형 집행 이뤄진 뒤
고3이었지만 공부 전념할 수 없었고
우리 가족은 생계부터 걱정할 형편
어머니의 노력으로 절망의 시간 지나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0·26 이후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모습.연합뉴스
아버지는 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편에 서서 10·26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가담했을까. 짐작건대 아버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김재규가 잘못된 일을 저지를 상관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비를 가리기에 앞서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게 우선이라고, 때론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맹목적인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뜬금없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믿음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앙의 핵심도 결국엔 순종일 테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철이 든 뒤 내린 결론일 뿐이다. 46년 전 아버지가 내린 결단은 오랫동안 내 인생의 난제였다. 10·26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45세였는데, 훗날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됐을 때쯤엔 이런 생각도 하게 됐다.
‘아버지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간 사람도 있다.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있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이제부터 내 삶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자.’
그러면서 목회에 더 전력을 다하게 됐다. 나는 지금도 다짐하곤 한다. 돌을 던지는 사람보다는 맞는 사람의 편에 서자고.
아무튼 46년 전 그날 이후, 우리 가족에게는 평균대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일상이 펼쳐졌다. 10·26 이듬해인 1980년 5월 아버지에 대한 사형 집행이 이뤄진 뒤엔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슬픔의 밑바닥까지 확인한 기분이었다. 고3 수험생이었지만 공부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당시 학급 인원이 63명이었는데 48등까지 떨어질 정도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나마 그 시절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안쓰럽게 여긴 몇몇 친구들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중정의 요직(의전과장)을 맡았으니 과거엔 명절이면 집안 곳곳에 한가득 선물이 쌓이곤 했다. 그러나 ‘역적의 집안’으로 내몰리니 그 누구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그때부터 사람을 믿지 않게 됐으며, 사람은 그저 믿음이 아닌 ‘사랑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사람들은 과거 우리 가족이 근사한 저택에 살면서 얼마쯤 부귀영화를 누렸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청빈한 군인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집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던 20평대 아파트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떠난 뒤 우리 가족은 생계부터 걱정해야 했다. 창졸간에 아이 넷을 둔 과부가 돼버린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돈을 벌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그동안 알뜰하게 모은 예금을 헐어 쓰면서 절망의 터널을 통과했다.
그동안 이런 얘기를 어디에서도 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사연이 회자되길 원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부탁하는 잡지사나 신문사도 수두룩했지만 당신은 한 번도 그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때 겪은 충격을, 지금도 계속되는 슬픔을 되새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사연이 알려지면 목회자인 내가 정치적 시비에 휘말릴까 우려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걱정이다. 혹시 어머니께서 이 글을 읽으시는 건 아닐지.
***[역경의 열매] 박동찬 (6) 대학 시절 시국 상황으로 고민할 때 광림교회로 발길
대학 진학 후 공부에 흥미 못 느끼고
성경만 읽다 광주민주화운동 알게 돼
시대에 침묵하는 교회 보며 번민 중
처음 간 광림교회서 애국가 듣고 눈물
서울 강남구에 있는 광림교회 전경. 이 교회는 박동찬 목사에게 신앙의 보금자리가 돼주었다. 국민일보DB
아버지에 대한 사형 집행이 이뤄진 1980년 5월 이후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고3 수험생이었지만 공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의미를 띠지 않던 암흑의 시간이었다.
다행히 그해 여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반에서 48등까지 떨어졌던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학력고사를 봤을 때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은 성균관대나 경희대 같은 학교들이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택한 곳은 경기도 수원에 있던 아주대였다. 당시만 해도 아주대는 서울의 이름난 학교들에 비해 운동권의 위세가 약했다. 그런 학교에 간다면 데모에 휘말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대는 ‘김재규의 오른팔’이던 아버지를 둔 수험생이 고려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렇게 81년 아주대 전산학과(현 소프트웨어학과)에 입학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컴퓨터가 세상의 조종간을 잡는 정보화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여겼기에 이 학과는 전도유망한 곳처럼 여겨졌다. 문제는 대학에 진학한 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 생활은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공부는 등한시하면서 주야장천 성경만 읽었다. 매일 성경책만 들여다보는 내게 몇몇 친구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동찬아, 내가 요즘 고민이 많은데 이걸 성경적으로 봤을 땐 어떤 해법이 있을까?”
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비명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엔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83년쯤이 되자 3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캠퍼스엔 정권의 끔찍한 만행이 담긴 사진들이 돌아다녔다. 기독교 신앙은 사회 참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건가 생각하면서 유명 교회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교회들은 모두 입을 닫고 있었다. 시대를 이야기하는 곳은 없고 침묵만 고집하는 것 같았다. 그런 방황의 끝에서 광림교회를 만나게 됐다.
40년 저편의 일이지만 광림교회를 처음 찾은 날짜도 기억하고 있다. 83년 8월 14일. 예배 시간 내내 이 교회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는데, 예배가 끝날 때쯤 성도들이 한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눈가가 알싸해지고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알고 보니 그날의 애국가 제창은 광복절을 앞두고 광림교회가 준비한 일회성 이벤트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김선도 감독님의 설교엔 묘한 힘이 있었다. 사회 참여와 구제를 강조하는 감리교회의 신앙을 처음 경험했기에 감동이 더 컸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도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유년기에 다닌 장로교회(서울 성대교회)는 믿음의 기초를 세워주었고, 10대 시절 출석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영적인 고향’이 돼줬으며, 감리교회인 광림교회는 하늘의 기쁨이 이 땅에 전해져야 복음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공간이라고. 실제로 나는 광림교회를 다니면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7) 없어졌던 대학부 다시 일으켜… 감신대학원 입학 도전
광림교회 매력에 흠뻑 빠져 살던 무렵
교육 담당 목사 권유로 대학부 만들어
대학 졸업하고 삼성 입사하려 했으나
기도와 고민 끝 신학 공부하기로 결심
박동찬 목사의 아주대 재학 시절 모습.
‘광림 대학부 자폭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때는 서슬 퍼런 독재 정권 탓에 세상만사가 신산하기만 하던 1982년. 서울 광림교회 청년들은 교회에 오면 성경 공부보다는 ‘시대’를 걱정하는 일에 몰두했다. 찬송가는 제쳐두고 ‘아침이슬’이나 ‘상록수’를 불렀고, 예배가 끝나면 포장마차로 몰려가 술잔을 부딪치곤 했다. 교회 어르신들은 당연히 대학부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청년들은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모이는 대학부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해산하자.”
내가 광림교회에 출석한 것은 그렇게 이 교회 대학부가 해산한 지 1년이 흐른 83년 여름부터였다. 광림교회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살던 중이었는데, 이 교회 교육 담당 목사였던 조중기 목사님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박동찬 청년, 알다시피 우리 교회엔 대학부가 없는데 자네가 중심이 돼서 대학부를 살려보면 어떨까.”
그렇게 조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부를 다시 세우는 일에 뛰어들었다. 내 청춘이 광림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물론 이즈음 내 청춘의 방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85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삼성 입사 시험에 응시했다.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면접을 앞둔 시점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직장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이 같은 고민은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숙제가 풀리지 않았기에 생겨난 것이었다. 인간의 앞날이라는 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고난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 이런 명제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내 삶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를 파도처럼 덮친 것이 신학을 향한 열정이었다. 신학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목표로 삼은 곳은 감리교신학대학원. 하지만 그해 8월 이 학교에 진학하려고 보니 준비해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가장 큰 난관은 독일어 시험이었다. 독일어를 공부한 적이 없었던 만큼 그것은 무모한 도전, 그 자체였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일단 시험은 보겠다고, 객관식일 테니 잘 찍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낙방하면 신학의 꿈은 접겠다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험일이 됐다.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지선다형 문제를 예상했는데 시험지에 적힌 것은 독일어 문장을 해석하라는 주관식 문항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성경만 끼고 살던 내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가고 백지를 제출할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하며 단념하려던 순간, 갑자기 시험지에 희미하게 적힌 숫자 ‘23’이 눈에 띄었다. ‘23이 뭐지? 혹시 성경 말씀인가? 내가 아는 23절 말씀 중에 인상적인 게 뭐가 있었지?’
그때 떠오른 구절이 로마서 6장 23절이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막연한 확신은 희망의 동아줄이 됐고 나는 일필휘지로 로마서 말씀을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내겐 기적이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8) 스승·친구·아내를 선물한 광림교회서 첫 목회
흔들린 신앙 붙잡아준 스승 김선도 감독
젊은 날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 정운이
대학부에서 첫눈에 반한 아내 만난 곳
김 감독 제안으로 광림교회 전도사 시작
박동찬(왼쪽) 목사가 감리교신학대학원 재학 시절 서울 서대문구 신대원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감리교신학대학원 입학을 통해 나는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을 풀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는 달랐다. 1980년대 ‘감신’의 신학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토착화 신학을 비롯해 독특한 개념을 내세운 학문들이 뒤엉켜 있었다. 심지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신학이라는 말까지 나돌곤 했다. 이런 환경에서 나의 신학은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잔해에서 다시 의미를 찾는 일이 반복됐다. 그렇게 신앙이 흔들릴 때, 북극성처럼 내가 나아갈 길을 알려준 것은 광림교회를 섬기는 김선도 감독님의 말씀이었다. 감독님의 말씀 덕분에 내 신앙은 단단해질 수 있었다.
신대원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목회를 꿈꾸진 않았다. 신학,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1년쯤 흘렀을 때 친구들과 길을 걷는데 누군가 “전도사님”이라고 불렀다. 친구 3명은 돌아봤지만 나는 아니었다. ‘전도사’라는 신분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역할이었으니까. 한데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전도사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날 이후 나는 전도사로 섬길 교회를 알아봤고, 결국엔 목회 여정의 첫발을 내디딜 곳까지 정하게 됐다. 광림교회를 떠나기 위해 장로님 권사님 등에게 작별인사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선도 감독님의 차남인 정운이로부터 연락이 왔다(명지대 교수를 지낸 김정운은 나의 젊은 날을 함께한 가장 절친한 친구다). 정운이는 대뜸 나를 향해 온갖 험한 말을 쏟아냈다.
“야, 우리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거냐?”
그런 말을 들은 뒤 김선도 감독님을 찾아갔더니 감독님은 “신대원 갔으니 이제 광림에서 전도사 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카리스마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교회 전도사 자리를 이미 알아봤다는 말은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네”라고 답한 뒤 돌아섰다. 그렇게 광림에서의 전도사 생활이 시작됐다. 86년 11월의 일이다.
광림교회는 내게 인생의 스승(김선도 감독님)과 베스트 프렌드(김정운 교수)를 선물해준 공간이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84년 대학부에서 만난 아내는 내가 첫눈에 반한 여성이었다. 그즈음 교회 앞엔 대학부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목화’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아내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던 순간 나는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하지만 만남과 동시에 연애가 시작된 건 아니었다. 88년 군에 입대해 이듬해 6월 휴가를 나왔을 때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꿈에 계속 오빠가 나오는데 죽을 만큼 힘들어하더군요. 꼭 만나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만남이 시작됐고 우리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가 결국엔 부부가 됐다.
아내는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운 사람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것이라고, 그게 내가 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역경의 열매] 박동찬 (9) 김 감독 신임 속 미국 유학… 귀국 후 본격적 목회의 길
영문 편지 한 통으로 김 감독에게 신뢰
아들처럼 목회 가르치며 유학 보내줘
미룰 수 없던 군 복무 해결하고 미국행
유학 도중 미국에서 아내와 결혼식 올려
박동찬(왼쪽) 목사가 1995년 6월 미국 워싱턴DC 르네상스호텔에서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아내, 아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광림교회에서 1986년 늦가을부터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내가 맡은 것은 김선도 감독님의 비서 역할이었다. 처음 받은 지시는 영문 편지 작성. 감독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뒤 영문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일을 마친 뒤 문서를 보여드리니 감독님은 아주 흡족해 하셨다. “이거, 박 전도사가 한 거야? 앞으로 외국에 편지 보낼 일 생기면 박 전도사한테 맡기도록 할게.”
그렇게 합격점을 받았다. 이후에도 감독님은 나를 비서처럼, 때론 아들처럼 곁에 두고 목회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엔 미국 유학을 보내주겠노라고 했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웨슬리신학대학원에서 감독님을 ‘자랑스러운 동문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광림교회 청년 1명에게 유학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를 첫 유학생으로 선정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병역의 의무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정치범 아버지’를 둔, 뒤숭숭한 가정사를 지닌 나는 입대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감독님은 군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군대에 갔다 온 뒤 곧바로 유학을 가라고 권하셨다. 결국 나는 88년 11월에 입대했고 당시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 있었던 국방대학원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27개월간 군 복무를 마친 뒤 광림교회 기획실에서 일하다가 91년 8월 유학길에 올랐다. 웨슬리신학대학원에서 전액 장학금을 약속했지만 광림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림의 청년을 보내는 것이니 광림교회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광림교회는 유학 기간(3년 11개월) 내내 내가 감당해야 할 학비와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보내줬다. 유학 도중이던 91년 12월엔 미국에서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엔 첫째가 태어났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목회의 새로운 관점을 익힌 귀중한 시간이었다.
미국의 신학은 실용주의에 젖줄을 댄 참신한 학문이었다. 보고서에 한국의 신대원에서 익힌 관념론적인 이야기들을 적어놓으면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지곤 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소 왓?(So What?)”이었다. 생각이 정돈되지 않은 채 번지르르한 설명을 늘어놓으면 곧바로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는 식의 타박이 돌아오곤 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쓴 거냐는 추궁도 이어졌다(그때의 깨달음 덕분에 지금도 나는 뭔가를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는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설교학 수업도 한국과는 달랐다. 설교하는 모습과 동료들의 반응을 캠코더로 촬영해 설교자의 자세나 목소리 등을 일일이 지적하며 개선하는 식의 수업이 이어졌다.
감리교의 파워를 실감한 시기도 이때였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삶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목회자 한 사람이 일으킬 수 있는 변화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실감하곤 했다.
그렇게 유학 기간이 흘러갔다. 95년 6월 미국 연합감리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그해 7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목회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10) 미국서 돌아와 광림교회 기획실 수석 중책 맡아
기획실은 기도회나 행사 등 광림교회의
온갖 프로젝트를 관장하는 컨트롤타워
맡은 일 투명하게 잘 해내자 신뢰 쌓여
박동찬 목사가 지난 4일 경기도 고양 일산광림교회 담임목사실에서 김선도 감독의 유품인 가방을 소개하고 있다. 박 목사는 “광림교회 교역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김 감독에게 선물했던 가방”이라며 “감독님이 소천하신 뒤 사모님이 내게 주신 귀중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고양=신석현 포토그래퍼
미국 유학을 마치고 광림교회로 복귀한 것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5년 8월이었다. 내가 새로 맡은 보직은 기획목사. 김선도 감독님은 교역자들을 불러 모은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박 목사가 기획실의 ‘수석’입니다. 박 목사의 지시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만 33세였다. 기획실에는 나보다 10년 넘게 이 일을 한 선배 목회자도 있었다.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없이 나를 낮추는 것밖에 없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선배님들이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기획실은 광림교회가 벌이는 온갖 프로젝트를 관장하는 컨트롤 타워였다. 기도회를 비롯해 각종 행사를 열 때면 누구를 초대할 것이며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할지 결정해야 했다. 각 교구의 성장 목표를 정하는 일도 해야 했다.
김선도 감독님은 리더십은 곧 신뢰에서 온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실제로 그랬다. 기획실의 수장으로서 맡은 바를 제대로 해내는 일이 쌓이자 나에 대한 신뢰가 생겨났고 이것은 리더십으로 이어졌다. 무슨 일이든 투명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내가 뒷배로 삼은 이가 김선도 감독님이라는 사실도 나의 지시에 무게가 실린 요인이었을 것이다.
30대 초반 광림교회라는 대형교회의 기획 업무를 도맡으면서 쌓은 노하우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런 것이다. 대학에서 전산학(컴퓨터)을 공부하던 시기엔 플로우차트(flowchart)를 그릴 때가 많았다. 프로그래밍을 위해 각종 변수에 대한 흐름도를 만드는 게 플로우차트 작성인데, 나는 이를 기획에도 적용하곤 했다. 다양한 돌발 변수에 대한 대책을 세세하게 세워놓는 식으로 일을 기획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고가 생겨도 무사히 일을 끝낼 수가 있었고, 이는 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곤 했다.
60대가 된 지금도 나는 자주 교계 행사를 관장하거나, 이들 행사의 업무를 도와주곤 한다. 내가 생각하는 ‘성공한 기획’은 간단하다. 옛날엔 사고만 나지 않아도 성공한 것이라고 여겼고, 그다음엔 헌금액 같은 목표 달성이 성패의 잣대라고 판단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행사 참여자가 모두 행복을 느꼈느냐가 ‘성공한 기획’의 키워드다. 행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가 이구동성으로 “다음에 이거 또 합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공한 기획이다. 모든 행사의 중심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게 핵심인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광림교회 기획목사로 나의 30대가 흘러갔다. 이때는 김선도 감독님의 아우라를 제대로 실감한 시기이기도 했다. 감독님이 세운 광림교회는 ‘창의적인 교회’이면서 ‘치유하는 교회’였다. 광림교회를 섬기면서 말씀을 통한 치유, 그것이 갖는 힘을 체감할 때가 많았다. 감독님은 ‘설교=상담’이라는 독특한 관점을 가진 영적 거인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11) 김선도 감독은 하나님이 내게 선물해주신 ‘영의 아버지’
군의관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하나님의 뜻 체험 후 목회자의 길로
설교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일로 여기고
교역자들에겐 목회에 대한 고민 요구
감독님은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롤모델
2022년 11월 25일, 92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김선도 감독. 국민일보DB
1995년 8월 광림교회 기획목사로 부임한 뒤부터 지근거리에서 바라본 김선도 감독님의 삶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누구보다 성실했고 박식했으며 모든 일에 철두철미했다. 항상 책을 읽으셨고, 늘 메모지를 갖고 다니면서 메모를 하셨다. 오죽했으면 예전에 이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는 한 성도가 아버지에게 했다는 얘기다.
“아버지, 제가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목사님을 봤는데 김선도 목사님 같은 분은 처음이에요. 비행시간 내내 꼿꼿하게 앉아 책만 보시더라고요.”
실제로 광림교회 성도들 사이에선 한때 그런 말이 오간 적이 있었다. 감독님이 해외에 나갔다 오면 설교의 수준이 높아진다고, 아마도 긴 비행시간 내내 성도들에게 전할 말씀을 고민한 결과인 것 같다고.
알려졌다시피 감독님은 군의관으로 6·25에 참전했다가 하나님의 뜻을 체험한 뒤 목회자가 된 인물이다. 감독님은 의사 출신답게 설교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건 심방이었다. 그는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을 일일이 확인한 뒤 주일이면 그들의 고충을 아우르는 말씀을 전하곤 했다. 즉 감독님에게 설교는 대규모 성도를 상대로 하는 ‘집단 상담’ 과도 같았다. 하지만 세상의 잘못을 꼬집는 비판적인 설교는 지양하셨는데, 언젠가 감독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나도 한때는 비판적인 설교를 많이 했어. 그런데 계속 그렇게 하니 성도들도 세상 모든 일에 비판적이 돼 버리더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목회자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살리는 거야.”
감독님이 교역자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제발 멍하게 있지 말라’는 것이었다. 목회를 어떻게 할지, 이 시대에 필요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인지 고민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곤 했다.
예전에 노트에 김선도 감독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을 정리해본 적이 있다. 투명성, 책임감, 노력…. 하나씩 적어 내려가니 그 수가 20개가 넘었다. 하지만 내 깜냥엔 언감생심 따라가기 힘든 게 많았고, 결국 몇 개만 추려 ‘체크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이 가진 영성과 능력의 반의반이라도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하나님이 내게 선물해주신 ‘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감독님의 말씀 덕분에 나는 끝날 것 같지 않던 절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으며, 억만금을 주고도 배울 수 없는 목회의 온갖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나는 이미 이런 다짐을 하기도 했다.
‘저분은 내 인생의 은인이다. 앞으로 나는 저분의 입에서 나온 모든 얘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섬기는 일산광림교회의 담임목사실에는 감독님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여러 점 있는데, 그중 증명사진 분위기를 띤 대형 사진은 내 책상 바로 옆 벽면에 걸려 있다. 이 사진 덕분에 나는 감독님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감독님은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롤모델이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12) 청년부 섬기며 ‘100교회 건축 운동’… 일산광림교회 부임
기획목사로 일하며 직장인처럼 느껴
청년부 목사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
참신한 기획으로 청년들 결집 계기돼
개척하고 싶은 꿈 커져 사표 낸 적도…
광림교회 청년들이 2001년 북한 땅이 보이는 중국의 한 옥수수밭에 세운 교회에서 종을 치고 있는 모습.
광림교회 기획목사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가 많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었다. 목회자가 아닌 직장인처럼 사는 기분일 때가 많았고, 그래서 내 안의 영성이 메말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았다. 결국 나는 김선도 감독님을 찾아가 이런 부탁을 드려야 했다.
“감독님, 기획목사를 하면서 청년부도 섬기고 싶습니다. 청년부 목사로도 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때가 2000년 1월이었다. 감독님의 허락을 받아 청년부를 이끌 수 있게 됐고, 그때부터 다시 내 영성은 윤기를 띠기 시작했다.
청년부 담당 목사로 일하면서 나는 희한한 프로젝트를 벌이곤 했다. 가령 2000년엔 일산에서 임진각까지 30㎞ 넘는 거리를 청년 120명과 1박 2일간 도보로 행진했는데, 이 일은 광림교회 청년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엔 청년들의 힘으로 교회 100곳을 세우는 ‘100 교회 건축 운동’을 시작했다. 경제적 여력이 없는 청년들이 벌이기엔 무모한 프로젝트처럼 보였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회의감을 느낄 수도 있을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1년에 교회 1개를 지어도 100년이 걸리는 엄청난 일입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차원이 다를 겁니다. ‘믿음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우리 함께 지켜봅시다.”
4개월쯤 흘러 헌금이 400만원쯤 모였을 때, 중국의 한 선교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북한 땅이 보이는 접경지대에 옥수수밭을 샀는데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거였다.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물으니 우리가 가진 돈, 딱 400만원이었다. 며칠 뒤 청년부 모임에서 나는 청년들에게 대뜸 옥수수밭 사진부터 보여줬다.
“얘들아, 저기 보이는 강이 어딘지 알겠니? 바로 압록강이야. 저곳에 우리가 교회를 세울 거야. 종탑도 만들 거야. 교회에서 종이 울리면 그 종소리는 북한 땅으로 울려 퍼질 거야.”
청년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기도의 ‘깊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에 가담하는 청년은 이후에 800명까지 늘었고, 교회 건축에 필요한 재정은 첫해에만 5000만원 넘게 모였다.
광림교회 청년들의 이 같은 사역은 다른 교회들에도 알음알음 알려졌다. 적지 않은 교회가 광림교회 청년부의 영향을 받아 해외 교회 건축에 뛰어들게 됐다. 그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광림교회 청년들과 함께한 그 시절, 나는 이렇듯 평생 잊을 수 없을 행복한 추억을 수없이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의 목회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고 싶다는 꿈도 커져만 갔다. 김선도 감독님에게 이런 뜻을 전하며 사표를 낸 적도 많았다(그때마다 사표는 번번이 반려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고, 2005년이 돼서야 나는 새로운 명령을 받는다. 광림교회의 지교회인 일산광림교회를 맡으라는 지시였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새로운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13) 부임 5년 만에 대형교회로 성장 후 목회의 방향 전환
성도 3000명 출석 교회로 급성장 후
1만명 넘는 대형교회를 꿈꾸었지만
한 성도 장례식서 ‘영혼의 무게’ 실감
그날부터 양보다 질적 성장에 초점
경기도 고양 일산동구에 있는 일산광림교회 전경. 1995년 광림교회 지교회로 시작한 이 교회는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국민일보DB
광림교회에서 일하면서 당연히 이 교회를 떠나는 날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날이 온다면 나는 아마도 교회를 개척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선도 감독님의 판단은 달랐다. 나는 개척교회 목회자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감독님은 내게 교회를 개척하기보다는 지교회였던 일산광림교회로 가서 그 교회의 ‘담당목사’로 일하라고 했다. 당시엔 납득하기 힘들었다. 교회를 개척할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지교회를 맡긴다고? 하지만 감독님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05년 7월 31일부터 일산광림교회를 섬기게 됐다. 당시 교회 성도는 약 480명. 처음엔 ‘1년만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광림교회에서 배운 게 있으니 망하진 않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실제로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 예상치를 크게 웃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거였다. 부임 이듬해인 2006년 10월 광림교회에서 독립한 일산광림교회는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빵이 되는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규모가 커졌다. 2007년 부활주일엔 출석 성도가 1000명을 넘어섰고, 그다음 해엔 2000명이 넘었다. 결국 부임 5년 만에 3000명 넘는 성도가 섬기는 대형교회가 됐다. 2000년대 들어 한국교회에 흔치 않던 급격한 성장이었다. 자연스럽게 욕심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면 1만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될 수도 있겠다. 교구마다 몇 명씩 할당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한 성도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됐다. 그 성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멘”이라고 말씀하신 뒤 숨을 거뒀다고 했고, 나는 “아버님은 구원받으신 겁니다”라고 위로한 뒤 빈소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섬뜩한 메시지를 주셨다.
“네가 어떻게 그 성도의 아버지가 구원받았는지 아느냐.”
그런 음성이 들리면서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목회자의 말이 갖는 무게감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실감한 순간이었다. 교회 성도 3000명이 갖는 ‘영혼의 무게’가 나의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바로 그날 내 목회의 방향도 달라졌다. 교회 성장은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성도들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 그런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생각은 실천으로 이어져 각 교구가 전년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계량적으로 따져 묻는 일도 그만뒀다. 혹시라도 교역자 중 누군가가 그런 보고를 하려고 하면 말리곤 했다.
아무튼 그렇게 일산광림교회는 목회자인 내가 나의 목회 철학을 성도들과 함께 완성해나가는 공간이 됐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일들에 힘을 쏟았다. 다음세대 운동, 북한 사역, 이웃 구제….
김선도 감독님은 일산광림교회의 성장을 누구보다 기뻐하신 분이었다. 당신께서는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일산광림교회를 내게 맡긴 것이 당신 생애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14) 청년들에게 주는 ‘참사랑’에 날 아버지처럼 따르기도
목회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과 재미를
느낀 분야는 다음 세대를 살리는 운동
20년 넘게 기도회 등 많은 행사 열면서
청년들에게 뜨거운 교회의 힘 보여줘
박동찬 목사가 2016년 7월 경기도 고양 일산광림교회에서 열린 ‘업라이징 연합기도운동’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다음세대를 살리는 운동은 내가 목회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과 재미를 느낀 분야였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이 이슈에만 매달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청년들과 함께라면 한국교회를, 나아가 이 세계까지도 바꿔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곤 했다. 기성세대에서는 볼 수 없는 순종과 헌신의 마음을 청년에게서 발견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청년들과 함께한 많은 날이 내 인생의 추억이 됐는데, 그중 하나는 2004년 5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어게인 1907 청년 기도 운동’이었다. 1박2일간 열린 기도회에서 이튿날 새벽 연단에 오른 이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었다.
나는 그곳에 모인 청년들에게 놀라운 이벤트를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고민 끝에 떠올린 것이 우간다 대통령이 하나님께 우간다를 봉헌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비슷한 이벤트를 상상하면서 봉헌서를 썼고, 시장실에서는 내용이 다소 과격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명박 시장은 봉헌서 내용을 그대로 읽어내려갔다.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몇 달 뒤 서울시장의 ‘서울 봉헌’은 메가톤급 이슈가 됐다. 지상파 방송 3사에 관련 뉴스가 보도됐고 불교계에서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명박 시장에겐 미안했지만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홍보 효과’는 예상하지 않았으니까.
일산광림교회를 섬기게 된 뒤에도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다음세대로 향할 때가 많았다. 2016년엔 37개국 청년 1000여명이 일산광림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업라이징 연합기도운동’을 열었고(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지구촌 교회의 청년 리더들과 함께하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지난 10월엔 대규모 청년 연합집회인 ‘2025 G2A 콘퍼런스’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나는 20년 넘게 청년들과 어울리는 많은 행사를 열면서 한국교회의 청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교회 담장 밖에서도 교회가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것을, 교회가 하는 일도 새롭고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이런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청년들을 돕고, 또 그들과 함께하는 일이 반복되니 언젠가부터 청년 사역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청년 사역자 중엔 나를 다음세대 운동의 대부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런 청년들을 만날 때면 감사한 마음뿐이다.
일산광림교회 청년들도 나를 아버지처럼 따르곤 한다. 나도 그들이 내 자식 같으니 교회 청년들의 창업에 내 사비를 보탠 적도 있다. 내가 그들에게 주는 사랑이 ‘진짜’라는 것을 교회 청년들도 이제 아는 것 같아 흐뭇해질 때가 많다.
올가을 G2A 콘퍼런스에 강사로 섰을 때 나는 청년들에게 고(故) 김준곤 목사님의 기도문을 읽어줬다. 내가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갈음할 수 있는 내용으로 기도문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주여,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해 주십시오.”
***[역경의 열매] 박동찬 (15) “김선도 감독 목회 철학 잇자” 북한 선교 진력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대표로 최선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이사장 맡기도
“하루 한 개 이상 선행” 성도들에 강조
박동찬 목사가 지난해 4월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에서 열린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한국교회 복음통일 기도의 날’ 행사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일산광림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김선도 감독님의 목회 철학을 계승하는 것이며, 둘째는 북한 선교의 전초 기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평북 선천이 고향인 감독님은 평생 북한 복음화의 꿈을 놓지 않으셨고 나 역시 감독님의 이런 마음을 알기에 북한 선교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 학교인 하늘꿈학교 이사장이 된 것도, 통일 기도 운동 단체인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대표를 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나는 북·중 접경 지역의 조선족 교회를 방문해 격려와 위로의 뜻을 전하곤 했고, 통일 관련 단체들과의 연합 운동이나 탈북민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북한 선교의 중요성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라는 것. 남한의 교회는 북쪽의 교회들에 빚을 지고 있다. 알려졌다시피 20세기 초반 북쪽에서 시작한 대부흥의 열기 덕분에 남쪽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과 분단을 겪으면서 북한은 순교의 땅이 돼버렸다. 북녘땅의 많은 이가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북한을 향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북한 선교 외에도 나는 일산광림교회 성도들과 틈틈이 이웃 사랑을 실천해 왔다. 가령 매년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교회엔 ‘크리스마스 선물 트리’가 세워진다. 하늘꿈학교 아이들을 비롯해 열악한 상황에 놓인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갖고 싶은 선물을 쪽지에 적어 트리에 매달아 놓으면, 성도들이 이를 확인해 선물을 준비하는 식으로 행사가 진행된다. 이 밖에도 일산광림교회를 섬기면서 미혼모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일들을 이어왔다.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20년간 꾸준히 나눔을 실천한 덕분에 연말이면 감사패를 주겠다는 연락을 받을 때도 많다.
물론 다음세대 운동이나 북한 선교, 구제 활동도 중요하지만 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일산광림교회 성도들과 일상을 함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교회엔 독특한 문화가 하나 있는데, 매달 첫째 주일 예배 시간에 모두 일어나 ‘일산광림교회 규칙’을 함께 읽는 것이다. 내가 일산광림교회에 부임한 뒤 만든 것으로, 일곱 개 항목은 가운데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규칙이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선행을 실천합니다.’
실제로 이들 규칙은 내가 삶의 두 날개로 삼는 것들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유지하려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선을 실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의미 있는 뭔가를 남기고 가려면 선행을 실천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나는 매일 선을 실천하는 것을 ‘숙제’라고 명명하면서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묻곤 한다. “오늘 숙제하셨나요?” 한국교회 많은 성도가 이런 노력을 함께한다면 교회를 바꾸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경의 열매] 박동찬 (16·끝)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 끝엔 항상 가없는 주님 사랑
세월 흐르면서 목회에 대한 관점 변화
40대 땐 성도들 강하게 몰아붙였지만
이후 행복한 삶 살도록 돕는 일에 몰두
10·26이후 원수라 여긴 이들도 용서
박동찬(오른쪽) 목사가 2012년 경기도 고양 일산광림교회를 찾은 김선도 감독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이 코너를 통해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몇 가지 상상을 해보곤 했다. 만약 아버지가 10·26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1983년 8월 14일 광림교회를 찾지 않았다면, 김선도 감독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유학을 떠나지 않았다면…. 질문은 이렇듯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이런 생각의 끝에서 내가 결국 내놓는 답은 단 하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었고 그 끝에는 항상 가없는 주님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많은 이가 그렇듯 나 역시 숱한 역경을 통해 신앙의 성장을 경험했다. 10대나 20대 때 내가 생각한 신앙은 간절한 소원을 이뤄주는 다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김선도 감독님을 만나고 목회자가 되면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영적으로 철이 든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이런 깨달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목회에 대한 관점도 나이가 들수록 서서히 달라졌다. 40대 땐 성도들을 강하게 몰아붙이곤 했다.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면서 치열하게 싸울 것을 주문했고, 그렇지 못한 이를 볼 때면 한심하게 여기곤 했다.
‘왜 저 사람은 저 정도밖에 신앙생활을 못하는 걸까.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렸다는 걸 모르는 건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얼마쯤 잘못됐음을 깨닫게 됐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도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게 나의 역할이자 교회의 존재 이유였다. ‘업적’에만 관심을 두면서 성도를 ‘일꾼’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철저히 성도들의 행복만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남선교회나 여선교회 성도들한테도 말하곤 한다. 일을 벌였다가 너무 힘들면 포기해도 된다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항상 절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을 당부한다. 실수한 사람을 정죄하기보다는 그 사람 곁에서 함께 돌을 맞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산광림교회 성도들이 지켜야 할 불문율은 딱 하나다. 다른 성도를 험담하지 않는 것. 그것만이 우리 교회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유일한 원칙이다.
아무튼 이런 철학을 갖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음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낀다. 10·26 이후 아버지가 떠난 뒤엔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 사람도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그들도 용서하게 됐다. 이런 마음이 든다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은퇴하기 전까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들을 벌이고 싶다. 그리고 일산광림교회를 떠난 뒤엔 어딘가에 작은 기도처를 만들어 수도사처럼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날이 오면 나를 찾아온 성도들과 고구마를 구워 먹으면서 안부를 주고받을 것이다. 물론 이런 노년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껏 그랬듯 내 삶을 이끄는 것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