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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3일(오순절 후 스무 번째 주일)
창세기 43:1-14
내려놓음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동화 ‘파랑새’를 쓴 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라는 사람은 인생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일 매일 그 책의 한 페이지씩을 쓰고 있다.”
만일 우리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은 그 책의 한 페이지씩을 장식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인생 페이지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나요?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대표적인 사람 둘을 꼽으라면 아마 야곱과 요셉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둘 다 이방인의 땅에서 고생한 사람들이고, 둘 다 자수성가해서 훗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성공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저는 요즘 매일 창세기를 묵상하고 있는데, 제게는 요셉보다 그 아버지 야곱이 더 눈에 띱니다. 분명히 주인공은 요셉인데, 제 눈에는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야곱이 더 크게 보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야곱에게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성화(聖化)되어 가는 과정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성화를 이루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이 야곱의 삶에 그려져 있어요.
그래서 때로는 위로를 받고, 때로는 경계가 됩니다. 야곱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거지요. 그래서 더욱 은혜가 되고, 더욱 감동이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창세기 37장부터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가 모두 50장까지 되어 있으니까 무려 13장이나 되는 많은 분량이 요셉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셈이지요.
요셉에게는 열 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꾸었어요. 요셉이 그 형들과 함께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갑자기 형들의 곡식 단들이 일어나 요셉의 곡식 단에 절하는 겁니다.
이게 다가 아니에요. 요셉이 다시 한 번 꿈을 꾸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겁니다.
요셉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하자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꾸짖었어요. 요셉은 꿈 때문에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 겁니다. 더구나 아버지 야곱은 유독 요셉만을 편애했어요. 그가 요셉만을 위해 아주 값비싼 색동옷을 지어 입혔던 거지요.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가까스로 형들을 찾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매정한 형들은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냥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형들에 의해 노예 신세가 되어버린 요셉은 오랜 시간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고,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무려 13년간이나 요셉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쓴 맛을 경험해야 했던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세요?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비참한 생활 같아도 요셉에게는 그 기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훈련받는 최적의 기간이었던 거지요. 요셉은 일명 인생의 광야학교에서 혹독한 수험료를 지불했던 거예요.
드디어 요셉의 나이 30이 되던 어느 날,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꿈을 기가 막히게 해몽해서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파격인사라고 어디 이런 파격 인사가 있을 수 있겠어요? 아니, 말이 그렇지 하루아침에 죄수가 총리가 된다? 그것도 당시 세계 최강대국의 총리라고 하면, 이건 정말이지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마 요즘 같으면 인사청문회다 뭐다해서 국회에서 아마 요셉을 가만 두지 않았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요셉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를 기가 막히게 사용하신 거지요.
누구나 다 ‘안 된다’, ‘안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한 번 작정하시면 반드시 쓰임 받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돼서 예쁜 부인도 얻었고, 아들도 둘씩이나 낳았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애굽 왕 다음 가는 명예와 권세도 얻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요셉 이야기의 끝은 아니지요?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바로 어그러진 형들과의 관계를 푸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명예와 권세를 얻었어도 어릴 때 같이 나고 자란 형제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을 보지 못한 설움이 가슴 한쪽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해결되어야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 아닙니까?
애굽 땅에 7년 동안 큰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7년이 지나자 애굽 땅을 비롯한 온 땅 곳곳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무려 7년간이나 말이지요. 그래서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의 명령을 듣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던 형들이 설마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줄 꿈이나 꾸었겠어요?
창세기 42장 8절에 보면, “요셉은 그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요셉과 그 형들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사실 요셉이 깨어졌던 형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문제는 얼핏 보아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보이지만, 사실 성경 전체의 구속사(救贖史)적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한 사람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서만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니었지요. 요셉 한 사람을 통해 애굽과 온 땅의 사람들을 칠년 기근으로부터 구할 뿐만 아니라,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70명이 애굽에 거주하는 계기가 되었던 거지요.
애굽에 정착했던 70명이 430년이 지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이 200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큰 민족에 대한 약속이 요셉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과 그 형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형들과의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될 때에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때로는 우리도 친척들과, 형제들과, 이웃들과 소원(訴冤)해진 관계를 회복하길 원해요. 그런데 어떻게 회복해야 될지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가지 우리가 요셉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은 요셉이 결코 그것을 서두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요셉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섣불리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용서가 중요하고, 화해가 중요해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지요.
요셉은 먼저 형들을 시험합니다. 그는 형들이 1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얼마나 변했는지를 시험합니다. 그는 형들의 진심을 시험하고, 형제들 간의 우애를 시험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일부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창 42:9).”
지금 자신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요셉인지 모르고 있던 형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그러자 요셉이 재차 말합니다.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요셉이 강하게 밀어 붙이자 형들이 당황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 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창 42:13).”
사실 이러한 형들의 대답은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동생 요셉의 일을 축소은폐하려고 했던 겁니다. 마치 동생 요셉의 일이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무려 13년이나 지났지만 정작 형들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던 겁니다. 아무도 나서서 동생의 일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형들을 향해 요셉은 자신들의 진실을 증명할 기회를 줍니다. 요셉은 그들을 삼일 동안 옥에 가둔 후에, 막내 동생을 데려온다면 그들의 진실함을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대신 요셉은 볼모로 시므온을 잡아둡니다.
만일 막내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볼모로 잡힌 시므온과 함께 형제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또 요셉은 형들 몰래 형들의 쌀자루에 돈뭉치를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양식을 넉넉히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을 찾아가 애굽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소상히 고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총리에게 정탐꾼으로 몰려 삼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일, 가까스로 풀려나긴 했지만 시므온이 볼모로 잡힌 일을 아버지께 고했습니다.
또 그들은 만일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형제들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거라는 일, 그리고 쌀자루에 담긴 돈뭉치를 보며 경악했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아버지께 아뢰었습니다.
아들들에게 애굽의 여정 담을 모두 듣게 된 야곱은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위로하는 대신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
사실 저는 이러한 야곱의 책망이 조금 실망스럽게 느껴집니다. 아니, 그게 왜 아들들 책임이에요? 물론 요셉을 팔아버린 일은 분명 아들들 책임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지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잖아요?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보낸 사람은 야곱 자신입니다. 물론 원하지 않던 최악의 상황에 다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너희가 나를 해롭게 하는 놈들이다!”라고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말하는 건 좀 실망스럽지 않나요?
자녀들은 아버지의 격려와 칭찬을 먹고 자랍니다. 아버지에게 늘 꾸지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주눅이 들어 살잖아요?
더구나 야곱은 요셉을 잃은 이후로 줄 곳 자신의 편애를 강화시켰던 것 같아요. 과연 요셉의 자리를 누가 차지했을까요? 모르긴 해도 막내아들 베냐민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겁니다. 요셉 대신 베냐민만 바뀌었을 뿐이지, 그동안 아버지의 편애는 계속되었던 겁니다.
깨어진 가정의 자화상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아버지가 정서적으로 건강해야 자녀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됩니다. 아버지가 자리를 든든히 지키고 영적으로 건강해야 자녀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하나님을 찾아요.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가정이 살아야 사회가 살아납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은 그대로 자녀들에게 미치기 때문이지요.
그런 면에서 야곱의 모습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反面)교사가 됩니다. 끊임없이 비난하고, 끊임없이 편애하는 야곱의 모습을 적어도 우리 아버지들이 본받아 말아야 합니다.
르우벤과 나머지 아들들이 야곱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버지, 만약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시므온이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죽게 됩니다. 아버지, 제발 가정을 위해 결단해 주세요!”
그러나 야곱은 고집을 부립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베냐민만 포기하면 되는데 야곱은 그것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며 시간만 끕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 땅에 기근이 심해졌습니다. 그나마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마저 바닥이 났습니다. 시간을 끌수록 상황이 악화된 겁니다. 상황이 악화되니 이제 선택의 폭이 좁아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야곱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껴지십니까? 왜 구지 상황이 악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미리미리 결정하고, 미리미리 준비하면 안 되나요?
이왕 결단할 것 좀 빨리 결단해서 일을 진행시키면 모두가 편하지 않겠어요? 베냐민이 아까워서 그렇다고 시므온을 죽일 작정입니까? 아들이면 다 똑같은 아들이지 도대체 야곱이 언제까지 자식들을 그렇게 편애하겠어요.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보다 못한 유다가 무엇이라고 말하지요?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알프스 산맥에 가면 “날이 밝으면 집 지으리”라는 제일 긴 이름을 가진 새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밤새 알프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서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고 그래요. “날이 밝으면 집 지으리”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실제로 날이 밝으면 이 새는 지난밤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또 잠자고, 놀며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집 짓는 것을 까먹고 만다고 그래요. 그러면 어느 새 밤이 찾아와 밤새 매서운 추위와 싸우면서 또 다시 다짐한답니다. “날이 밝으면 집 지으리.”
여러분, 과연 그 새가 지금 집을 지었을까요, 못 지었을까요?
마치 야곱이 이와 비슷하고요,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분들이 계세요. 기도할 수 있을 때 미리 미리 기도를 쌓으세요.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탄할 때 기도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칠년간 풍년이 드니까 그 때 칠년간의 흉년을 미리 준비해서 위기를 넘기잖아요. 좋을 때, 평안할 때 선한 일에 열심을 내고, 기도를 쌓으면 그것이 어려울 때를 넘기는 큰 힘이 되는 겁니다.
그러려면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나의 베냐민을 버려야 해요. 나의 베냐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물론 나의 베냐민을 버리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난 수십 년간 애지중지 하던 베냐민이 쉽사리 버려지겠어요?
그 일에는 분명 용기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결단하는 일이예요. 끊임없이 결단하고, 포기하는 일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애지중지 붙들고 있는 나의 베냐민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없어요.
물론 때로는 주변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유다를 보세요!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9절).”
유다는 가족을 구하는 일에 스스로 담보가 되겠다고 결단합니다. 참으로 용기 있는 일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만 포기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데, 포기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할 때 주변에서 유다처럼 용기 있게 나서면 분명 자극이 되고 새롭게 결단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저는 교회도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유다처럼 작은 일에 결단하고 다른 사람의 결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한 분의 작은 결단이 다른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나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신앙생활은 결단하는 겁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내가 애지중지 여기던 나만의 베냐민을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내려놓아야 할 베냐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때로는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생업이 될 수도 있어요.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내려놓아야 할 자기만의 베냐민이 있다는 겁니다.
11절 이하에 보니까, 유다의 자극을 받은 야곱이 드디어 결단을 합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려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다시 가라. 무엇보다 네 아우 베냐민도 데리고 더나 다시 그 사람에게 가라.”
또 14절 하반 절에 보니까, 야곱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참 비장한 고백 아닙니까? 마치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갈 때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야곱도 이와 비슷한 결단을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야곱처럼 이런 결단을 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되살아나고, 오랜 세월 가족 간에 깨어졌던 신뢰관계가 회복되려면 다른 사람 말고 당사자인 여러분이 결단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르우벤이 결단하고, 유다가 결단하면 뭐합니까? 그 사람들은 다 주변 사람이 아닙니까? 야곱의 가정이 살아나려면 정작 당사자인 야곱이 결단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나려면 당사자인 여러분이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의지하고 아끼던 베냐민을 내려놓고 앞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겠노라고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결단하고 내려놓으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물론 좋은 일이 생기지요. 그 좋은 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요?
첫 번째로, 여러분이 결단할 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립니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 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다가 큰 재물을 이끌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6, 8, 11절)이라고 세 번씩이나 바꾸어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야곱이 아들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고,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은 야곱에게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리는 축복의 장소였던 겁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지나친 편애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걸림돌이 되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자기를 내려놓지 베냐민을 붙들고 있는 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으실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베냐민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드는 순간, 애굽은 더 이상 매장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어두신 가능성의 세계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두 번째로, 여러분이 결단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14절에서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를 버리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포기하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고 고백합니다. 나를 버려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도록 베냐민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영국의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에릭 리들(Eric Henry Liddel, 1902-1945)은 올림픽 이후 거의 매일 가족 기념행사와 축하파티에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릭은 한 축하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꼭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 직업은 육상 선수가 아닙니다. 제게는 달릴 수 있는 기회가 왔고, 저 또한 최선을 다해 달렸습니다. 하지만 제 삶의 목표는 중국 선교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것을 위해 기도해 왔고 이미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 위한 훈련 과정의 하나로 저는 육상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왔음을 느낍니다. 앞으로 중국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떠날 때가지 그에 대비한 훈련을 쌓으려고 합니다.”
중국 선교사인 부모님으로 인해 중국 톈진에서 태어난 에릭은 앞으로 톈진의 영동 기독교 학교에서 과학과 체육교사로 일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그의 결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일에는 뛰지 않겠다.’라며 파리 올림픽의 100미터 대회를 포기할 만큼 확고한 그의 신념을 이미 보았기에, 사람들은 최고의 육상선수라는 자리를 박차고 삶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에릭에게 또 한 번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상 금메달리스트였던 에릭 리들은 자신의 사명인 중국선교를 위해 돈과 명예라는 자신의 베냐민을 내려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내려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정작 여러분을 살리고, 새롭게 하는 길임을 알고 있습니까?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야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립니다. 포기하십시오. 그래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한다면, 여러분의 현재 페이지를 누가 써가도록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