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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62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 축일/연중 제3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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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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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zelSzLTf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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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사목자들과 교우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어떻게 영성생활을 하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역시 살아 생전 감염병과 맞서 싸우신 경험이 있습니다. 돈보스코가 39세 되던 1854년 7월초, 제노바에서 콜레라가 발생해서 300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 전해졌습니다.
7월 말경에는 토리노에도 첫 감염자가 발생했습니다. 왕과 왕족들은 일찌감치 특수 제작된 감염 예방 마차를 타고, 도시 외곽의 안전한 성으로 떠났습니다. 귀족들과 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 확진자는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아주 가까운 보르고 도라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주민들이 정착한 판자촌이었는데,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영양결핍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8월 한 달만에 800명이 전염되었고, 500명이 사망했습니다. 토리노 시장은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고 환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할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했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라 다들 망설였습니다.
돈보스코는 8월 5일 오라토리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만일 여러분이 하느님 은총 안에 있고, 아무런 대죄도 범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콜레라에 걸리지 않을 것임을 제가 보장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콜레라 환자들을 운송하고 간호하기 위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시장님의 호소를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런 일을 하기에 아직 어리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형들 가운데 저와 함께 환자 간호나 이송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아이들 가운데 14명이 지원했습니다. 며칠 뒤 나이가 어린 아이들 30명도 합류했습니다. 아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첫번째 그룹의 큰 아이들은 병원이나 환자들의 집에서 하루 종일 간병했습니다. 두번째 그룹은 혹시라도 새로운 환자가 발생했는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확인했습니다. 세번째 막내 그룹은 오라토리오에 남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돈보스코는 감염 방지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철저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그만 식초병을 하나씩 나눠주고, 환자들과 접촉한 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팬데믹 시대 돈보스코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감염병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국가나 지방 정부의 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두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조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을 자원봉사자로 모집하는 과정에서 감염되지 않도록 잘 교육 시켰고, 철저한 방역조치를 취했습니다.
돈보스코를 밀착수행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에 남긴 레뮈엔 신부의 증언입니다.
“감염자들에게는 홑이불, 담요, 옷가지 등이 자주 부족했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돈보스코의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알렸다. 그녀는 오라토리오의 옷장을 활짝 열어 뭐든 다 내주었다. 즉시 오라토리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한 아이가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와서 환자 한 명이 홑이불도 없이 침대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고 하면서, 그를 덮어줄 적당한 것이 없겠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맘마 마르가리타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제대포를 벗겨 소년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환자에게 갖다 주렴. 아마 주님께서도 눈감아 주시겠지?”
돈보스코는 전염병을 하느님의 진노나 징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부나 지도층 인사들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이 순간 전염병에 감염되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에 질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지금과 같은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셨다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물론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기에 그에 충실했겠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인류가 겪는 고통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 악령들린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듯이 감염병의 퇴치와 종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18~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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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2)우리 모두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을>
누군가가 한 단체나 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인선’입니다.
새로운 리더가 구상하는 바에 따라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대대적 물갈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대체로 요직에는 어떤 사람들을 뽑습니까? 그간 리더 편에 서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 능력이나 경력이 출중해서 잘 보좌해줄 사람, 필요한 분야에 통달한 전문가, 결국 학력이나 가문, 배경을 고려해서 최종적인 낙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인선은 세상의 방식과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뽑기 전에 홀로 산으로 들어가셔서 밤새워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인선에 엄청난 정성과 공을 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딱’ 열어봤더니, 세상 사람들의 인선 기준과는 너무나 달라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제자단에 뽑힌 사람들의 면면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니 학력이나 능력, 가문은 거의 고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 안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을???’하고 의문을 품을 정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인선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세상적인 잣대와는 철저하게도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똑똑함’, ‘있어 보임’, ‘대단함’ ‘출중한 능력’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다른 무엇에 앞서 무상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 바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어떤 사람이 받는 걸까요?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일까요?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에로 초대된 것만 해도 과분한데 우리는 한 번 더 그리스도인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 위에 각자의 처지에 따른 부르심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농부로, 회사원으로, 가정주부로, 기술자로, 교사로, 사제로, 성직자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에 따르면 여러 다른 종류의 과일 나무들이 각각 다른 열매를 맺는 것처럼 교회 내 각 구성원들은 각자 주어진 신분과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신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교가 관상수도회 수도자처럼 하루 온 종일 경당 안에서 기도에만 전념한다면 그가 맡고 있는 양떼들은 누가 돌보겠습니까?
가정을 가진 주부가 카푸친회 수도자처럼 금전을 소홀히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는 신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에게 적합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신심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심생활이 군인들의 내무반이나 근로자들의 작업장, 제왕들의 왕궁, 결혼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정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의 교설입니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사라 레베카 같은 인물들 보십시오. 거친 세상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거룩한 신심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성녀 안나, 마르타, 모니카 같은 성녀들을 보십시오. 그녀들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하였고. 성 고르넬리오, 세바스티아노는 군인이자 대단한 신심가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처지나 환경 속에서 살아가든지 부르심에 합당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을 실천해야 하며, 거룩함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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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배우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eYlXfKz_V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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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혈당원 시몬과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시몬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혹은 나병에 걸렸다가 치유되어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다 타대오는 예수님의 사촌으로 알페오의 야고보와 형제지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여러 다른 환경에서 살던 이들의 스승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신중하게 뽑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는 당신을 팔아먹을 가리옷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머물 열정이 있는 사람들 기준으로 당신 제자를 뽑으셨던 것 같습니다.
교토 대학 영장류연구소의 학자들은 어린 침팬지가 어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어미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미에게 몇 개의 색에 각각 반응하는 일본어 글자를 알아보도록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빨간색은 ‘ㄱ’, 노란색은 ‘ㄴ’ 식으로 연상하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색을 보여주었을 때 그 색에 상응하는 글자의 스위치를 누르면 그 보상으로 동전이 나오도록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어미 침팬지는 그 동전으로 자동판매기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미 침팬지가 새끼 침팬지를 안고 있었습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 침팬지가 하는 행동을 보고 혼자 색과 글을 스스로 터득하여 어미가 없을 때 그 기계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글자를 맞추고는 동전을 받아 어미가 한 것처럼 자판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었습니다. 어미가 자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끼는 그저 어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서 배운 것입니다. [참조: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 ‘제7장: 생각이 있는 부모 노릇’, 브루스 립튼]
누군가와 함께 머문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어지고 배우고 싶어지면 그 배우고 싶어지는 대상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들을 뽑는 기준은 자신과 오래 머물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기준으로 제자들을 뽑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리옷 유다는 조금 다른 의도로 머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영화를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들어와서도 예수님과 같은 스승 앞에서는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유다는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머물려는 의지가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배우지 못합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를 사랑하였기에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용하고 싶어집니다. 가리옷 유다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닮을 수 없었습니다.
경제, 정치, 스포츠, 연예 등 어떤 분야에서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반드시 그가 사랑했던 스승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나지는 못해도 적어도 동경하며 닮으려고 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승이 없으면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자녀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비방하는 그 존경받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닮고 싶은 스승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현재 은퇴하고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 앤 멀린다’ 자선 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워런 버핏도 수십조 원을 그 단체에 기부하였습니다. 빌 게이츠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설립한 이 재단은 아프리카의 물 부족과 질병을 없애기 위해 인분을 처리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시공해주고 있습니다. 식수로 마시는 강에 인분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그것으로 마시는 물까지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세계 제1의 부자가 미래 삶의 환경을 위해 변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이런 루머도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가 인구수를 줄이려고 일부러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사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누가 빌 게이츠를 닮으려고 할까요?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이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재벌들의 모델이자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싫어하는 부자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그런 분들을 비방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루머로 그들을 본받으려 하는 이들에게 스승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예는 간디나 마더 데레사에게도 적용됩니다. 간디는 어린아이를 성추행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의해 폄하되고 있고, 마더 데레사도 아이들을 학대하고 팔아넘겼다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도 미신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객관적인 행위들은 분명 우리가 모두 본받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루머들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그들을 본받으려는 이들에게는 치명타입니다. 증명되지도 않은 내용을 퍼뜨리며 인간이 그렇게 닮아야 할 세상의 스승들을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미래를 위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그런 스승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폄하되는 가장 대표적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엔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기는 이들보다 어리석은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누구도 닮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가리옷 유다와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찾고 스승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닮고 싶은 어떤 스승도 가지지 않는 것은 조금도 나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사랑한 스승이 곧 미래의 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사랑할 스승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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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도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성서에서는 유다를 가리옷 사람 유다와 구별하고 있다.
복음: 루카 6,12-19: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즉 제자의 신분은 그분의 도구나 심부름꾼이나 종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또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여기서 제자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우고, 자신도 스승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께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들이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즉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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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몇 년 전에 나온 공익 광고 내용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태극기를 다는 국경일 하루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국가 대표 축구 경기를 보는 90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순국선열을 위하여 묵념하는 1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독도에 관한 뉴스를 접하는 그 순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나라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 광고 내용을 하느님 나라의 백성에게 맞추어 바꾼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그 짧은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가를 부르며 감동을 받는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비신자인 배우자가 오늘도 성당 가냐고 구박을 할 때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힘든 일이 생겨서 주님께 기도를 해야 하는 경우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외국에 가면 누구나 다 애국심이 생기고, 국가 대표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도 성당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순간 교회의 대표, 하느님 나라의 국가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사도란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열두 명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녕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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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중간 전달자>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루카 6,17-18)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는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마이크도 앰프도 확성기도 없었던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셨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을까?” 그 시절에는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맨 뒤에 있는 사람들도 맨 앞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도들’이 바로 그 ‘중간 전달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고,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겼을 것입니다.)
‘중간 전달자’의 임무는, 자기가 들은 ‘말씀’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일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른 말을 덧붙여도 안 되고, 들은 ‘말씀’에서 글자 한 자도 빼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그 해석을 덧붙여도 안 되고, 표현을 바꿔도 안 됩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알아들었든지 못 알아들었든지 간에, 들은 그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좋은 예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아마도 대부분의 ‘중간 전달자’는 자기가 듣기에도 ‘너무 거북한’ 말씀이었을 텐데, 그래도 자기가 들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생각이나 해석을 덧붙여서 전달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1-52)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말다툼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척 하는 사람들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말다툼일 수도 있고, ‘중간 전달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덧붙이거나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 벌어진 말다툼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설교 현장에서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 주는 ‘중간 전달자’ 역할을 했겠지만, 나중에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을 대리하는 ‘중간 전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삶’ 자체가 ‘중간 전달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1-2)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힘과 권한’을 주신 일은, 그들에게 그것을 아주 넘겨주신 일이 아니라, ‘위임’해 주신 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힘과 권한을 사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힘과 권한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에 그것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거짓 사도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다른 예수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듯이 예수님도 성령도 한 분이고, 복음도 하나뿐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인 길입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길이 있다고 선전하는 자는 백 퍼센트 이단이고, 사탄의 하수인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사탄과 사탄의 하수인인 거짓 사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는 말은, 사탄과 거짓 사도들은 하느님의 엄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자들이 처벌을 받을 때 함께 휩쓸려서 처벌받지 않으려면 거짓 복음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마태 5,13-16) (이 말은 각자 한 사람의 사도가 되어야 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산상 설교에는 자신이 받은 빛을 감추지 말고 사람들 앞을 비추는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만 강조되어 있는데(마태 5,15), 우리는 ‘빛’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어디서 이상한 심리학 이론을 가지고 와서 복음을(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신앙생활을 변질시키는 자들도 있고, 성경은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다른 종교의 책만 읽고서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 특히 더 위험합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 안에서 살면서 ‘말씀’대로 충실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 복음을 물리치는 힘은 ‘말씀의 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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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0년 1월에 시작한 코로나19는 어느덧 2020년 10월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원인이 있습니다. 다른 질병은 증상이 나타나면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 때문에 확진자를 알면 전파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무증상인 사람에게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에 전파시키는 사람도 모르고, 감염되는 사람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19의 확진자 80%는 가벼운 증상으로 넘어가거나 아예 증상이 없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로나19의 전파를 막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대영제국이었던 영국의 총리도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호를 받는 미국의 대통령도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잘 지키지 못하는 방법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입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잘해도 대부분의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마스크 착용이 의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총리는 집단면역이 생기면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10개월의 결과는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가 효과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악의 유혹도 코로나19와 비슷합니다. 평소에 신앙심이 있던 사람도, 사제와 수도자도 악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악의 유혹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는 기침, 발열, 호흡곤란과 같이 증상이 나타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은 우리 눈에는 좋아 보이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도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악의 유혹은 그만큼 달콤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담배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금연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도박이 본인은 물론 가정에도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에서 손을 떼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악의 유혹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능력과 재능을 가리지 않습니다. 직책과 직분을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유다는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도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표징과 말씀을 보고 들었던 제자들도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악의 유혹은 집요하고, 악의 유혹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님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방법은 이외로 간단하였습니다.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였습니다.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도 이외로 간단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쉽게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피와 땀이 흐르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겸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 싶은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늘 새로운 백신과 치료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악의 유혹을 이겨내는 백신은 기도와 겸손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와 시몬 사도는 기도와 겸손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가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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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이지 않는 끈>
루카 6,12-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끈>
한 사람이
그분께 손을 대어
온전하게 되었어요
그 사람의 뒷사람이
그 사람에게 손을 대어
온전하게 되었어요
그 뒷사람의 뒷사람이
또 그렇게 하여
온전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그분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온전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그분께서 모두를
온전하게 하셨어요
그렇게
모든 사람이 서로를
온전하게 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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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시몬과 유다라는 이름은 신약 성경에서 워낙 자주 나오는 탓에 우리에게 혼동을 줍니다. 일단 베드로 성인의 본래 이름 역시 시몬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키레네 사람의 이름도 시몬입니다. 한편 이들과 다른 인물인 오늘 축일을 맞이한 시몬은 '열혈당원'이란 별명이 붙은 제자입니다.
열혈당원이란 로마 제국과 그 동조자들에 맞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력으로 대항한 사람을 이르는데, 흔히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가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유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으므로 이렇게 불리웠던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중 예수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열혈당원 출신이었으니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투사처럼 복음을 선포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유다 타대오라는 인물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그의 행적은 사실 성경에 잘 나타나있지 않으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그가 던진 질문만은 확실히 남아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는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 안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했던 시몬과 타대오의 동일한 의향이 드러납니다. 당시 배경 안에서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보낸 아들이니만큼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몬 역시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기대하고 제자단에 들어왔을 것을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타대오의 질문 안에서, 스승이 마침내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예루살렘의 빛나는 왕이 되어 군림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떠날 때가 됐다고 하니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즉 이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심으로써 그 후에 함께 해 주리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후 실제로 이 둘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먼저 시몬은 성령강림 후, 열혈당원 출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열정적으로 복음 선포에 일생을 바칩니다. 그는 현재의 터키인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했고 페르시아에서 체포되어 톱질로 육신이 두 동강나는 형벌을 받고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다 타대오는 성령 강림 이후 레반트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설교하였고, 이후 시몬과 함께 페르시아에서 활동하던 중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열혈당원 출신의 시몬과 열렬한 성격의 논쟁가라 불리던 유다 타대오는 그들의 출신과 성격에 걸맞게 열정어린 죽음을 맞이한 셈입니다.
이들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열정이 앞섰던 그들의 성격은 분명 제자단 안에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제자단 중에는 이들과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했던 세리 출신의 마태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일제 시대의 앞잡이와 독립 운동가가 한 제자 공동체에 들어가 있었던 셈입니다.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성경은 전하지 않지만 상식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최소한 제자단 입단 초기에는 서로를 꼴보기 싫어하며 다투었을 것이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불러 세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전달하심으로써 그들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더 나은 지식인들 혹은, 여러모로 성격이 온화하고 천사 같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롭고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알고 이를 돌보심으로써 빛나는 제자단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알아서 예수님이 잘 사용하시나 보다’ 혹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하느님의 안배가 더욱 중요구나’ 라고 생각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건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안배에 앞서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 답은 앞서 말씀드린 유다 타대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응답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좋은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그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열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서로의 모난 부분에 부딪혀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써 제자단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앞선,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말을 잘 지키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주 간단한 질문으로 강론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당신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로,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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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 달라진 사람들>
사람은 자기가 처한 위치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나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지지요.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면 결혼 전과 결혼 후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별 변화가 없다면 함께 살수가 없지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혼이었을 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시고 월급은 송두리째 유흥비로 탕진해 버리는 남자가 있다면 가정이 유지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달라져야 하지요. 미혼일 때처럼 밤늦게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또 집안 청소는 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주변이야 어찌 되던 본인의 용모 꾸미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가정을 이루고 살수가 없지요.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함께 어울려 살수가 있고 그것이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신앙 생활도 이와 똑같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과 받은 이후가 달라지지 않으면 여러 가지가 힘들어 지지요.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된 사람은 모시기 이전과 그 삶의 방식과 태도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고 있는 시몬과 유다 사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부름을 받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달라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지요.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던 방식 그대로 돈을 섬기는 삶을 살다가 자신은 물론이요 주변이 다 불행해지고 말았습니다. 변화되어야 할 사람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스카리옷과 구별되어, 타대오(용감한 자)라고 불립니다. 유다 사도는 절망적이고 불가능한 일을 당한 이들의 수호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다 사도는 유다 서간의 저자로서 유다 지방에서 선교하고 교회를 다스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지에서 선교를 하고 페르시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혁명 당원이었던 그는 늘 전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당시 혁명 당원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직접 싸움에 나섰으며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정권에 과격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혁명 당원 시몬을 부르신 예수님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분으로 원수마저도 사랑으로 감싸시며 그저 하늘 나라를 설파하시고 가르치시고 실천하셨을 따름인 분이셨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고 설파하고 가르쳤지요. 만약 시몬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서도 무력으로 세상을 살겠다고 그 전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고집하였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시몬 사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도 페르시아 지방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세리였던 마태오가 있습니다. 마태오가 살아온 삶의 명분은 오직 재물의 축적에 있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서는 나라도 동족도 팔아치우는 매국노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세리 마태오였지요.
그 마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키가 작아서 동네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마태오는 재빨리 나무에서 내려와 떨리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집에 모십니다. 그리고 고백하지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루카19,8)
세리 자캐오가 예수님의 제자 마태오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마태오가 예수님과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고 그 방식 그대로 살았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두말 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묵상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기 이전과 세례를 받은 이후의 내 모습에 과연 변화가 있는가? 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내가 별 차이점이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아무 일 없이 그냥 차이가 없다는 정도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삶이 불행하다는 데 심각한 고민이 따르지요.
그는 신자로서 마음에 짐이 생기고 하느님 앞에서 양심의 가책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없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지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처럼 달라지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직 돈만을 생각한다면 엉뚱한 길을 가게 되지요. 그런 사람은 본인만 불행해질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그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바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당연히 자녀 교육에 신경을 쓰고 열심히 해야 하지요.
그러나 출세만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고, 내 아이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의 부모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하면 불행해집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세상 사람들처럼 쉽게 흔들리고 좌절하며 점을 치러가거나 부적을 사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미신 행위도 하는,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 신자들에게 잘 지켜지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이 있습니다. 자녀의 결혼 문제가 그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느님께 열심한 사람들이 막상 자녀를 결혼시킬 때가 되면 세상의 호화로운 장소를 찾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다른 곳의 성당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물질과 편의만을 따르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지요.
물론 세례를 받았다고 일시에 그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고 장담을 했지만 죽음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베드로는 회개를 하고 수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씩 하느님께로 나아갔지요.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배반하고 목숨을 지켰을 때 행복했을까요? 목숨은 지켰으나 마음은 참으로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온 몸을 바쳐서 예수님의 사도로서 활동을 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나라의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지요.
이렇게 베드로는 세상을 놓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신자와 비신자는 달라야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매일매일 성장해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기 전의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변화되었을 때 조화로운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듯이 신자인 우리는 신자가 되기 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요, 그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세상의 모든 집착과 욕심을 버릴 때 내 앞에 나타납니다. 움켜쥔 손으로는 만날 수 없는 길입니다.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에 우리는 주님께로 가는 길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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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길섭 베드로 신부님]
몇 년 전, 교포사목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나라였지만, 자연 경관이라든지 삶의 환경이 너무나도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며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었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첫 주일미사를 지내던 날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공동체 신자 전체를 만나는 날이었죠. 제의를 입고 입장해서 성전 안에 모여 있는 신자들을 본 순간 저는 ‘우와’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도 13시간은 족히 날아가야 하는 곳에 한국 신자들이 성전을 가득 메우며, 주님을 찬미하고자 모여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인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현지 성당을 빌려 미사 시간만 할당 받아 주일미사를 겨우 한 대 봉헌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는데도 약250여 명의 본당 가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국사람 대단하다’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 곳에서나 함께 모여 주님을 찬미할 줄 아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의 관한 인식 정도를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1독서의 의미가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결코 하느님의 공동체는 단 몇 명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의, 모든 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우리 본당이라는, 우리 민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들이 모이고 어우러져 그분께서 원하시는 세상 공동체를 일구어 나아가야 함을 깨닫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 있던 모퉁이의 머릿돌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집의 한 부분임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사 이후, 그곳 현지인들과 봉헌하는 미사에서는 함께 하나 되는 세상 공동체에 관한 인식을 더욱 더 깊이 할 수 있었고, 예수님 때문에 연결되고 이어지는 이 모든 관계성에 대해서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마음을 비우고 반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제대로 주님을 머릿돌로 모신 공동체가 되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빙자한 이기의 집단, 집단 이기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공동체임을 자처하면서도 내면은 그렇지 못한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쉽게 목격하며 생활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시몬과 타데오 사도 축일을 지내는 축복을 허락하시며, 말씀을 통해서 당신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셨던 일을 기쁜 소식으로 알려 주십니다. 다만 열둘을 뽑으셨지만, 그 안에 배반자 가리옷 사람 유다까지 포함해서 온 세상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뽑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뽑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그 다음에 뽑으셨습니다.
혹시 우리 집안일에만 집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 본당 일에만 집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일에만 집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머릿돌로 모신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그 무엇을 머릿돌로 삼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팔아가며 생활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밤을 새워 기도하시며 열두제자를 뽑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아주 작은 공동체가 되었든지, 커다란 공동체가 되었든지, 모두가 하나되는 세상 공동체를 위하여 머릿돌이 되어 주셨던 예수님의 이 사랑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온 세상을 위한, ‘자신의 작은 공동체’에 함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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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시간표를 듣게 되었을 때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또 오랜 시간을 기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묵상할 때 분심도 참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어려움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서품을 받기 전, 한 달 피정을 받았습니다. 한 달 피정에 들어가기 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자신은 매일 6시간 이상 묵상을 했다는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1시간 묵상도 힘든데 어떻게 6시간 이상을 한 달 내내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한 달 피정 들어간 첫날과 둘째 날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기도와 묵상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6시간도 짧았습니다. 온종일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성녀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더 많이 기도할수록 기도는 그만큼 쉬워집니다. 기도가 쉬워지면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기도가 쉬워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기도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기도가 어렵다고만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가 어떻게 쉬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주님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교회의 사도적 전통의 토대가 될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이름 지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주님께서 먼저 하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왜 이런 사람을 뽑았을까?’ 싶은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들은 왜 제외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런 선택을 위해 산에 가시어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룰 수 있었고, 하느님 뜻에 맞게 당신의 일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잘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데 더 집중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기도는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어렵고 힘들기만 한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먼저 많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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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도>
서울 신학교를 다닐 때, 한 선배님으로부터 자기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위로 세 명의 신부님과 한 분의 수녀님이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아들 신부의 서품식이나 딸 수녀의 서원식에 한 번도 가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참석을 하지 않으셨을까 싶었습니다. 신부, 수녀 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일까 싶었는데, 그 이유가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멀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집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의 서품식에는 참석하셨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 어머니의 신심은 정말로 대단하셨습니다.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는 삶으로 4명의 사제와 1명의 수녀를 만드셨고, 손주 중에서도 한 명의 사제가 나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어머니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하신 말씀은 “100여 년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보니 사랑밖에 없는데 그동안 많이 베풀지 못해서 가슴 아프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장례미사 때 오신 분들을 웃게 하라고 막내 신부에게 당부하셔서, 감사 인사 중에 선글라스를 꺼내 쓰는 바람에 엄숙한 미사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 우리가 모두 생각해 볼 대목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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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중심의 한 가족 공동체>
-기도가 답이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사도중 끝부분에 나오는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열두사도들중 존재감이 약해 보이는 느낌도 들지만 복음 선포에 제 몫을 다하다가 페르시아 지역에서 순교한 두 사도입니다. 참 다양한 열두 사도의 면면을 통해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의 전형을 보는 듯 합니다. 복음 서두 말씀의 느낌이 강렬합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아주 예전부터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변모하셨고, 우리는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 성전 미사중 하느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의 선물이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깨닫습니다. 특히 열두 사도를 부르시는 중대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중에서도 기도의 중요성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어제 받은 편지 내용입니다.
“안녕하신지요? 교통 사고 나셨다는 말 듣고 걱정했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특히 건강 유지 잘 하셔야 됩니다. 많은 이들이 신부님 기도로써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저뿐입니까? 우리 수도자들의 기도로 사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날마다의 미사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원이 주렁주렁 많이 달려있는지요! 새삼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서의 우리 수도자의 신원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산에서 밤샘 기도후 즉시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시어 사도로 부르십니다. 그러니 열두 사도들은 말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자 예수님의 기도의 열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열두 사도들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모습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열두 사도를 부르신 주님은 사방에서 평지에 모여든 무수한 이들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평지설교가 펼쳐 지기 직전의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의 본질적 두 요소가 잘 드러납니다. 말씀도 듣고 질병도 치유되어야 온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열두 사도의 부르심에 이어지는 평지에서의 장면은 얼마나 역동적이며 신바람 나는 분위기 인지요!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은 낫게 되었고 예수님께 손을 댓던 이들은 그분에게서 나온 힘으로 모두 나았다 하니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주님 중심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우리 역시 말씀도 듣고 영육의 아픔이나 질병도 치유되길 바라며 미사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형성에 끊임없이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하루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주며 우리 삶의 ‘마지막 보루’처럼 생각되는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비단 수도 공동체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의 주님 중심의 공동체의 일치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기도입니다.
열두 사도의 부르심을 통해 우리 성소의 은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부르셨듯이 우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선행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부르심이 아니라 매일 우리를 새롭게 부르시는 주님이시며 늘 새롭게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와 ‘사도’에 정의에 대해 잠시 나눕니다. 제자는 라틴어 동사 ‘디스체레discere’로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자 평생학인은 그대로 우리의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분도 성인은 이런 수도공동체를 일컬어 ‘주님의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이런 제자들중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띄고 파견받은 자들이 사도입니다. 그러니 사도는 모두 주님의 제자이지만 모든 제자가 사도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이며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께 배울 때는 제자이지만 미사가 끝나면서 삶의 현장에 파견될 때는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이고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라 칭할 수 있는 우리의 공통적 신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소개되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치된 공동체의 모습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형성에 공동체의 기도는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우리의 신원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말마디가 참 고맙고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하느님의 한 가족의 교회공동체 모습 또한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신약의 성전은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된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로 이뤄진 공동체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어디든 교회 공동체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에 현존하십니다.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성부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성장, 성숙하는 삼위일체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우리 수도 공동체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참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신의 한 수’와도 같은 형제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공동체의 일치와 성장을 위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공동전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중심의 일치와 성장의 공동체를 이뤄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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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내리사랑>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열둘을 따로 뽑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혁명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반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26,31)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파견을 받은 당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반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을 전제로 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15,6)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이지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혁명당원 시몬은 늘 전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와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새 삶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아직 사랑이 여물지 못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 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한 후 평지로 내려 오셨습니다. ‘평지’라는 공간은 예수님의 ‘소명’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과의 만남, 군중과 함께 지내심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면 소명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함께 어울리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대방과의 다름을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도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움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립3,21). “그리스도교는 올라감도 내려감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김정원신부).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이웃과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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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 다가가는 이유를 물으십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예수님께서 바쁜 공생활 중에 시간을 내어 아버지 앞에 나아가십니다. 하느님 현존의 장소, 고요와 침묵의 장소인 산으로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그 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당신을 온전히 내어드린 선물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제자들을 뽑으시는 큰일를 앞두고 계셨지요. 아버지 안에 머물러 아버지 마음을 찬찬히 헤아리셨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당신의 뜻으로 받아안는 시간이 되었을 거고요. "밤새"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인 채로 완전한 사랑의 시간을 보내셨을 겁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루카 6,18)
예수님 곁에 모여든 군중은 나름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고, 또 치유도 원하지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예수님의 출현은 희망입니다.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루카 6,19)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닿고자 손을 뻗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힘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걸 믿고 또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닿음으로써 영혼과 육신, 정신과 마음의 병이 달아난다니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드는 게지요. 군중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사실 접촉은 두 존재 사이의 매우 내밀하고 정감 있는 관계 맺음입니다. 이 터치에서 육신의 체온은 물론 마음의 지향까지 전달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전인적인 행위가 외적 의도만으로 욕망될 때 상대를 도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마치 자판기처럼 왜곡할 수도 있지요.
예수님께 힘껏 손을 뻗는 군중의 모습은 기도하는 영혼의 형상화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혼의 손을, 영혼의 촉수를 길게 뻗어 하느님께 가닿고자 하지요. 눈먼이처럼 더듬거리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그분을 만지고자 애를 씁니다. 이 기도의 이유는 단 하나 오직 "사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관계맺음이며 사랑입니다. 기도 내용이 청원일 때도 있고 하소연일 때도 있고 찬미와 찬양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사랑 때문에 주님 앞에 머무르기도 하지요. 기도가 치유나 성공, 이윤 등의 목적에서 차츰 정화되어, 밤새 산에서 아버지 앞에 머무르신 예수님의 기도처럼 그저 "사랑"이 되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의 정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바랄 것도 없이 구원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 형성된 사도와 예언자들과 우리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와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건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거룩한 성전으로, "하느님의 거처"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사도, 예언자, 우리 모두는 한 생명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이 여정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그래서 미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불완전하고 약하지요. 그런데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목적 지향의 자기중심성에서 서서히 벗어나 오직 "사랑"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깨닫고 체득하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분도 그걸 바라시고,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무엇도 바라지 않고 주님 앞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오직 숨은 이유, 바로 "사랑" 때문이지요. 주님은 간절히 이 또한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 온 존재와 힘을 다해 손을 뻗는 우리의 이유가 "오직 사랑"이 될 때까지 지치지 맙시다. 기도가 사랑 때문에 이어질 때, 우리도 사도들처럼 아버지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게 됩니다. 각자 삶의 필요를 잠시 내려놓고 그저 사랑만 지니고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심장 깊숙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할 때까지...
성 시몬과 타대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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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내재적 보상(뒤풀이)은 자기 위로요. -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람들은 일을 하고 난 뒤 반드시 뒤풀이를 합니다. 일을 하는 동안 쌓인 여러 가지 감정들을 푸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런 뒤풀이를 보고 일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만, 피로를 풀고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뒤풀이는 심리 치료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뒤풀이는 내가 스스로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내재적 보상이라고 합니다. 내재적 보상이란 일을 열심히 한 나에게 내가 상을 주는 것입니다.
♣청소를 하고 난 후 조용히 커피 한 잔을 한다든가, 일을 마치고 바람을 쐰다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오래 전 유명한 광고 문구 중에 이런 말이 있었지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처럼 무언가를 힘들게 해낸 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쌓인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풀어 주는 것을 보상, 자기 위로라고 합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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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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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뽑혔느냐보다 누가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습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가진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렇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열혈 당원 시몬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었습니다. 곧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뽑으셨기에 거룩한 사도들이 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그렇습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처럼,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나 봅니다. 이처럼, ‘교회의 기초’인 사도는 교회를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어 파견하시고,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겸손한 이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우리도 겸손한 자 되어,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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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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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6,13)
오늘은 열두 사도 중에서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인 유다(타대오)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은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함께 해 봅니다.
첫째,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것도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기 전에 산으로 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시고 나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라고 응답했으며, 그렇게 해서 남남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한 형제자매요,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셋째, '제자들이 사도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파견된 자'라는 뜻인데, 열두 사도나 열세 번째 사도들인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도록 파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지금 여기에서 사도로써 우리가 해야 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너를 살리는 일'입니다.
시몬과 유다 사도 축일을 맞이하여, 사도로 불림을 받은 우리의 신원을 다시금 확인하고, 각자의 성소 못자리에서 자기 신원에 맞는 삶을 기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하느님의 한 시민, 한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열두 사도는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6,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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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ib3qX8ezb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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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 13)
막연한 시간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간입니다.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부르심을 통해
부르심의 잔을 마시는
사도가 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있기에
제자들이 있고
사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가장 큰 열망을
희망안에서
만나게됩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이 사건을 통해
부르심의 근원이
뽑으시는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불완전한 이들을
부르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는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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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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