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고대 엘람 왕국(現이란)의 수도 수사에서 2미터가 넘는 커다란 돌비석이 발굴되었다. 엘람 왕국의 유물인 줄 알았던 이 비석은 바빌로니아(現이라크)의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으로 유명한 함무라비법은 서기전 176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세운 법으로,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비석에 새겨져 바빌론의 한 신전에 세워졌다. 그는 법의 서문에서 이 법이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임을 밝혔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자라도 이를 알 수 있도록 비석 상단에 법을 하사받는 자신의 모습을 부조로 새겨넣었다.<자료1> 신과 왕, 그리고 법이라는 신성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비석은 바빌론의 대단한 성물이고 문화재였다.
그러나 6백 년 후인 서기전 1158년, 엘람 왕국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이 비석을 약탈해갔다. 엘람의 왕은 비문의 일부를 지우고 자신의 승전 사실을 새겨 넣었고, 전승 기념비로서 엘람의 신전에 전시하였다. 이번뿐만 아니라 당시 엘람 왕국은 바빌로니아를 수시로 침략하여 문화재를 조직적으로 약탈해 갔고, 엘람의 왕궁에는 약탈해 온 바빌로니아 문화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물품들은 금이나 은에 비해 물적, 경제적 가치는 없을지라도 상징적 가치가 있었다. 승전의 증거였으며, 자신들이 바빌로니아 문명의 소유자이며 계승자라는 증거였던 것이다. 반대로 바빌로니아가 약탈당한 것은 단순히 물적인 가치가 아닌 그들의 문명과 역사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나라가 정복되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신전과 신상, 도서관과 점토판(현재의 책) 등이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이쉬비에라(서기전 2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신 왕조의 초대왕)에 대한 찬가』라는 점토판에 그 목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가와 도시를 파괴하라는 엔릴(수메르에서 지상의 최고신)의 명령에 관해 살펴보자면 (…) 그 문화를 말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고대사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시 약탈과 파괴는 마치 인류의 한 관행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주체의 상당수가 ‘종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약탈하고 파괴한 것이 비단 물적인 가치에 한하는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종교가 벌인 약탈과 파괴 행위에 대해 알아본다.
서기 70년 9월 7일,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유대인들의 도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로마 제국이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야훼를 숭배하는 유대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무력 항쟁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또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했다. 현재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로마군이 제사상, 촛대, 나팔 등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용품을 약탈해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자료2> 유대인들은 반란 실패의 결과로 자신의 국가와 성전을 잃어버리고 중동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455년 6월 2일, 가톨릭 국가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에 점령당한다. 이때 반달족이 로마가 예루살렘에서 약탈했던 유물들을 약탈해 갔다고 한다. 그러나 반달 왕국은 534년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되었고 그 유물들은 현재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보관돼 있다. 이 지하 묘지는 가톨릭에서 초대 교황 베드로가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곳으로, 교황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려는 가톨릭 전통에 따라 역대 교황들이 온몸의 혈액과 가스를 제거하고 화학약품을 넣는 방부 처리가 되어 묻혀 있는 공동묘지이다.<자료3>
지난 4월 29일, 이스라엘의 랍비 제머 토브는 이스라엘의 주요 일간지 이스라엘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70년 이스라엘에서 약탈한 유물들이 바티칸 지하 묘지에 있다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으며, 랍비 보코브자가 겪은 실화를 얘기했다.<자료4>
“1929년 랍비 보코브자는 이탈리아 왕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는 왕의 요청에 “약탈당한 예루살렘 성전의 유물을 보고싶다.”고 한다. 그는 왕의 도움으로 바티칸의 깊숙한 지하 묘지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하에 내려간 그는 동반한 경비병이 베일을 벗기려 할 때 “충분히 봤다”며 멈추라고 요청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그 후 침묵하겠다는 맹세를 한 뒤, 한 달 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스라엘 당국이 나치에게서 약탈당한 유대인의 물품은 돌려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바티칸에는 요구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인터뷰는 유대교에서 생각하는 예루살렘 유물의 가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반하는 철학이나 이교를 탄압해 왔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을 부정하는 철학자나 유대인의 율법책을 불태웠으며, 1193년 이슬람은 힌두교 및 불교 지식의 보고였던 인도 날란다 사원의 도서관을 불태웠고, 12~13세기 몰디브와 인도 갠지스 평원 지역에서 수백 개의 불교 사원과 사당을 파괴하고, 불교 경전을 불태웠다.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이며 본격적으로 이교의 신전과 신상, 도서관과 서적을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391년,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면서부터다.
당대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자 지식의 보고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이때 방화당했다.<자료5> 《사라진 도서관》의 저자 루치아노 칸포라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중요 건물인 세라피스 신전도 이교라는 이유로 불살라졌고, 이때 약 20만 부의 귀중한 두루마리 책이 타버렸다.”고 했으며 “분서는 기독교화 과정의 일부”라고 단언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해 당시 성행했던 이교들의 사원과 서적, 또 그리스도교에 반하는 문서들을 파괴한 결과, “4세기 로마에서 책이 거의 사라졌다.”고 평가될 정도로 많은 책들이 소실되었다.
중세에는 원주민 대륙에 찾아가 그곳의 신상과 책들을 약탈하고 불살랐다. 스페인의 후안 데 수마라가 신부는 멕시코에 가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임무를 맡는다. 고대 멕시코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아즈텍과 마야의 눈부신 문화와 훌륭한 문학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특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으며, 왕궁에는 거대한 도서관을 두었다. 그러나 수마라가는 이 땅이 미신적인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했고, 1530년 그는 수거 가능한 마야의 모든 저술과 신상을 약탈하여 모조리 화형시켜 버린다. 프란치스코파 소속의 디에고 데 란다 주교도 신상 5000개와 함께 마야의 책들을 전부 유카탄 반도의 ‘마니’라는 도시로 가져다가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뒤 불태웠다.<자료6>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의학, 천문, 신앙,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자산일 수도 있었을 수세기에 걸친 원주민들의 지혜가 검은 연기 속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란다 주교는 자서전에 “그 책들은 거의 악마에 관한 미신과 날조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심지어 수마라가 신부는 가톨릭 당국의 노력으로 ‘멕시코에 인쇄술을 처음 도입하고, 최초로 공공도서관을 설립한 위인’으로 탈바꿈되었다. 이렇게 원주민들의 찬란했던 정신과 기록들은 사라지고, 그들에게 이교도였던 가톨릭 문화가 원주민들의 터전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들이 이교의 서적이나 종교물만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반그리스도교적이라 판단되는 모든 학문과 문학작품을 금지하여 세상에서 학문을 약탈해갔다. 그 방법은 출판 검열과 강제적인 금서(禁書)의 형태로 행해졌다.
1475년, 독일 쾰른 대학은 로마 가톨릭 교황에게서 인쇄소, 출판사, 심지어 독자까지 검열하는 허가를 얻었고, 주교들도 똑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1501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인테르 물티플리케스(Inter Multiplices)」라는 교서를 내려 교회의 승인이 없으면 독일에서 어떤 책도 인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1515년에는 라테란 공의회에서 그 권력을 그리스도교권 전역으로 확대하여, 교황청의 이단심문소와 종교재판소가 관장하게 되었다. 16세기에는 금지서적이 크게 늘어 아예「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을 작성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했다.<자료7,8> 가톨릭교회 전체의 첫 금서목록은 1559년 교황 바오로 4세가 반포했다. 그들이 반그리스도교 서적으로서 금지한 책들은 주로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철학, 과학에 관한 것이었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은 금서 목록이 생기기 이전부터 금지되어 왔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인정했고, 사제들은 일반 시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설교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직 사제만이 할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성경을 소유하는 것조차 죄가 되었다. 이렇듯 교회는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보게 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금지하며 경계했는데, 그것은 평신도가 스스로 그동안 숨겨져왔던 성경의 모순점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경전은 스스로 그들의 종교에 반하는 서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과 과학은 왜 반그리스도교 서적으로 지목되었을까?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의 기록은 신성불가침한 사실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학문은 비기독교적인 것이었고,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이후, 더 정확히는 2세기 초부터 비기독교적인 것은 총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비기독교적인 것은 거짓 신과 관련된 것이고, 마법이고, 잘못된 것이었다. 유클리드의 수학, 아르키메데스의 물리학, 에라토스테네스의 지리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 지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모두가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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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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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